홍염 _ 최서해
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 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빼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마한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빼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혀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눈보라는 북국의 특색이라. 빼허의 겨울에도 그러한 특색이 있다. 이것이 빼허의 생령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보라가 친다.
북극의 얼음 세계나 거쳐 오는 듯한 차디찬 바람이 우─하고 몰려오는 때면 산봉우리와 엉성한 가지 끝에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휘날려서 이 좁은 산골은 뿌연 눈안개 속에 들게 된다. 어떤 때는 강골 바람으로 빙판에 덮였던 눈이 산봉우리로 불리게 된다. 이렇게 교대적으로 산봉우리의 눈이 들로 내리고 빙판의 눈이 산봉우리로 올리달려서 서로 엇바뀌는 때면 그런대로 관계치 않으나, 하늬[北風]와 강바람이 한꺼번에 불어서 강으로부터 올리닫는 눈과 봉우리로부터 내리닫는 눈이 서로 부딪치고 어우러지게 되면 눈보라와 바람 소리에 빼허의 좁은 골짜기는 터질 듯한 동요를 받는다.
등진 산과 앞으로 낀 강 사이에 게딱지처럼 끼어 있는 것이 이 빼허의 촌락이다.통틀어서 다섯 호밖에 되지 않는 집이나마 밭을 따라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모두 커다란 나무를 찍어다가 우물 정(井)자로 틀을 짜 지은 집인데 여기 사람들은 이것을 ‘귀틀집’이라 한다. 지붕은 대개 조짚이요, 혹은 나무껍질로도 이었다. 그 꼴은 마치 우리 내지(간도서는 조선을 내지라 한다.)의 거름집[堆肥舍]과 같다. 심하게 말하는 이는 도야지굴과 같다고 한다.
이것이 남부여대로 서간도 산골을 찾아들어서 사는 조선 사람의 집들이다. 빼허의 집들은 그러한 좋은 표본이다.
험악한 강산, 세찬 바람과 뿌연 눈보라 속에 게딱지처럼 붙어서 위태위태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모든 집에도 언제든지 공도(公道)가──위대한 공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꼭 한때는 따뜻한 봄볕이 지나리라. 그러나 이렇게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우짖으면 그 어설궂은 집 속에 의지 없이 들어박힌 넋들은 자기네로도 알 수 없는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생략 부분 줄거리| 이렇게 몹시 춥고 두려운 날 아침에 문 서방은 집을 나섰다. 눈보라 때문에 눈도 뜰 수 없거니와 지척을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강가로 내려가려다가 발을 돌려서 언덕길로 올라섰다. 빙판에서 걷기가 거북해서였다. 하 다니던 길이라서 짐작으로 걸을 뿐, 눈에 묻히어서 길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길에 올라서니 바람은 더 심하였다. 우와 하고 가슴을 치어서 뒤로 휘딱 자빠질 것은 고사하고 눈발에 아츠럽게 낯을 치어서 눈도 뜰 수 없고 숨도 바로 쉴 수 없었다. 뻣뻣하여 가는 사지에 억지로 힘을 주어 가면서 이를 악물고 두 마루턱이나 넘어서 ‘달리소’ 강가에 이르니 가슴에서는 잔나비가 뛰노는 것 같고 등골에는 땀이 흘렀다. 그는 서리가 뿌연 수염을 씻으면서 빙판을 건너간다. 빙판에는 개가죽 모자 개가죽 바지에 커단 ‘울레(신)’를 신은 중국 파리(썰매)꾼들이 기다란 채쭉을 휘휘 두르면서,
“뚜─어, 뚜─어, 딱딱.”
하고 말을 몰아 간다.
“꺼울리 날취(저 조선 거지 어디 가나)?”
중국 파리꾼들은 문 서방을 보면서 욕을 하였으나 문 서방은 허둥허둥 빙판을 건너서 높다란 바위 모롱이를 지나 언덕에 올라섰다.
여기가 문 서방이 목적하고 온 달리소라는 땅이다. 이 땅 주인은 ‘인(殷)’가라는 중국 사람인데 그 인가는 문 서방의 사위이다. 저편 밭 가운데 굵은 나무로 울타리를 한 것이 인가의 집이다. 그 밖으로 오륙 호나 되는 게딱지 같은 귀틀집은 지팡살이(소작인)하는 조선 사람들의 집이다. 문 서방은 바위 모롱이를 돌아 언덕에 오르니 산이 서북을 가리어서 바람이 좀 잠즉하여 좀 푸근한 느낌을 받았으나, 점점 인가──사위의 집 용마루가 보이고 울타리가 보이고 그 좌우에 같은 조선 사람의 집이 보이니 스스로 다리가 움츠러지면서 걸음이 떠지었다.
“엑, 더러운 되놈! 되놈에게 딸 팔아먹은 놈!”
그것은 자기 스스로 한 일은 아니지만 어디선지 이런 소리가 귀청을 징징 치는 것 같은 동시에 개기름이 번지르하여 핏발이 올올한 눈을 흉악하게 굴리는 인가
──사위의 꼴이 언뜻 눈앞에 떠올라서 그는 발끝을 돌릴까 말까 하고 주저거렸다. 그러다가도,
“여보, 용례(딸의 이름)가 왔소? 용례 좀 데려다 주구려!”
하고 죽어 가는 아내의 애원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다시 앞을 향하였다.
“이게 문 서방이! 또 딸 집을 찾아가옵느마?”
머리를 수굿하고 걷던 문 서방은 불의의 모욕이나 받는 듯이 어깨를 툭 떨어뜨리면서 머리를 들었다. 그것은 길 옆에서 도야지 우리를 손질하던 지팡살이꾼의 한 사람이었다.
“네! 아아니…….”
문 서방은 대답도 아니요 변명도 아닌 이러한 말을 하고는 얼른얼른 인가의 집으로 향하였다. 온 동리가 모두 나서서 자기의 뒤를 비웃는 듯해서 곁눈질도 못 하였다.
여기는 서북이 가리어서 빼허처럼 바람이 심하지 않았다. 흐릿하나마 볕도 엷게 흘렀다.
|생략 부분 줄거리| 빚 독촉을 하러 인가가 나타난 것은 가을볕이 쨍쨍하던 어느 날이었다. 문 서방과 아내는 인가에게 애걸복걸 빌었으나 인가는 비명을 지르는 용례를 끌고 가 버렸다. 이리하여 용례는 영영 인가의 손에 들어갔다. 용례가 울며 부모를 부른다는 소식에 문 서방은 가슴을 치고 그 아내는 피를 토하였다. 이리하여 문 서방의 아내는 늦은 여름부터 아주 병석에 드러누웠다. 그는 매일 용례만 보여 달라고 졸랐지만, 문 서방이 세 번이나 찾아갔어도 인가는 용례를 보여 주지 않았다. 이번까지 가면 네 번째다.
문 서방은 울긋불긋한 채필로 ‘관운장’과 ‘장비’를 무섭게 그려 붙인 집 대문 앞에 섰다. 문 밖에서 뼈다귀를 핥던 얼룩개 한 마리가 웡웡 짖으면서 달려들더니 이구석 저구석에서 개 무리가 우아 하고 덤벼들었다. 어떤 놈은 으르렁 으르고, 어떤 놈은 뒷다리 사이에 바싹 끼면서 금방 물 듯이 송곳 같은 이빨을 악물었고, 어떤 놈은 대어들었다가는 뒷걸음을 치고 뒷걸음을 쳤다가는 대어들면서 산천이 무너지게 짖고, 어떤 놈은 소리도 없이 코만 실룩실룩하면서 달려들었다. 그 여러 놈들이 문 서방을 가운데 넣고 죽 돌아서서 각각 제 재주대로 날뛴다. 그러지 않아도 지금 개 때문에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던 문 서방은 이 사면초가를 어떻게 막으면 좋을지 몰랐다. 이러는 판에 한 마리가 휙 들어와서 문 서방의 바짓가랑이를 물었다.
“으악…… 꺼우디(개를)!”
문 서방이 소리를 치면서 돌멩이를 찾느라고 엎드리는 것을 보더니 개들은 일시에 뒤로 물러났으나 다시 덤벼들었다.
“창우니 타마나가비(상소리다)!”
안에서 개가죽 모자를 쓰고 뛰어나오는 일꾼은 기다란 호밋자루를 두르면서 개를 쫓았다. 개들은 몰려가면서도 몹시 짖었다.
문 서방은 조짚 수수깡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마당을 지나서 왼편 일꾼들 있는 방문으로 들어갔다. 누릿하고 뀌쥐한 더운 기운이 후끈 낯을 스칠 때 얼었던 두 눈은 뿌연 더운 안개에 스르르 흐려서 어디가 어딘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윈따야 랠라마(문 영감 오셨소)?”
캉(구들)에서 지껄이던 중국인 중에서 누군지 첫인사를 붙였다.
“에헤 랠라 장구재 유(있소)?”
문 서방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얼었던 몸은 차츰 녹고 흐리었던 눈앞도 점점 밝아졌다.
“쌍캉바(구들로 올라오시오)!”
구들 위에서 나는 틱틱한 소리는 인가였다. 그는 일꾼들과 무슨 의논을 하던 판인가? 지껄이던 일꾼들은 고요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호기심에 번득이는 눈을 인가와 문 서방에게 보내었다.
어느 천년에 지은 집인지? 거미줄이 얼키설키 서린 천장과 벽은 아궁이 속같이 꺼먼데 벽에 붙여 놓은 삼국풍진도(三國風塵圖)며 춘야도리원도(春夜桃李園圖)는 이리저리 찢기고 그을었다. 그을음과 담배 연기에 싸여서 눈만 반짝반짝하는 무리들은 아귀도(餓鬼道)를 생각게 한다. 문 서방은 무시무시한 기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옌바(담배 잡수시오)!”
인가는 웬일인지 서투른 대로 곧잘 하던 조선말은 하지 않고 알아도 못 듣는 중국말을 쓰면서 담뱃대를 문 서방 앞에 내밀었다.
“여보 장구재! 우리 로포가 딸(용례)을 못 봐서 죽겠으니 좀 보여 주, 응…….”
문 서방은 담뱃대를 받으면서 또 전처럼 애걸하였다. 인가는 이마를 찡그리면서 볼을 불렸다.
“저게(아내) 마지막 죽어 가는데 철천지한이나 풀어야 하지 않겠소, 응! 한 번만 보여 주! 어서 그러우! 내가 용례를 만나면 꼬일까 봐…… 그럴 리 있소! 이렇게 된 밧자에…… 한 번만…… 낯이나…… 저 죽어 가는 제 에미 낯이나 한 번 보게 해 주! 네? 제발…….”
“안 되우! 보내지 모하겠소. 우리 지비 문 바께 로포(아내) 나갔소. 재미 어부소.”
배짱을 부리는 인가의 모양은 마치 전당포 주인과 같은 점이 있었다. 문 서방의 가슴은 죄었다. 아쉽고 안타깝고 슬픔이 어우러지더니 분한 생각이 났다. 부뚜막에 놓은 낫을 들어서 인가의 배를 왁 긁어놓고 싶었으나 아직도 행여나 하는 바람과 삶에 대한 애착심이 그 분을 제어하였다.
“그러지 말고 제발 보여 주오! 그러면 내 아내를 데리고 올까? 아니 바람을 쏘여서는…… 엑 죽어두 원이나 끄고 죽게 내가 데리고 올게 낯만 슬쩍 보여 주오…… 네…… 흑…… 끅…… 제발…….”
이십 년 가까이 손끝에서 자기 힘으로 기른 자기 딸을 억지로 빼앗긴 것도 원통하거든 그나마 자유로 볼 수 없이 되는 것을 생각하니…… 더구나 그 우악한 인가에게 가슴과 배를 사정없이 눌리는 연연한 딸의 버둥거리는 그림자가 눈앞에 언뜻하여 가슴이 꽉 막히고 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주먹이 쥐어졌다. 그러나 뒤따라 병석의 아내가 떠오를 때 그의 주먹은 풀리고 머리는 숙었다.
“낼리 또 왔소 이얘기하오! 오늘리디 울리디 일이디 푸푸디! 많이 있소!”
인가는 문 서방을 어서 가라는 듯이 자기 먼저 캉에서 내려섰다.
“제발 이러지 말구! 으흑 흑…… 제제…… 제발 단 한 번만이라두 낯만…… 으흑흑 응!”
문 서방은 인가를 따라서 밖으로 나오면서 울었다. 등 뒤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이 때의 문 서방에게는 아무러한 자극도 주지 못하였다.
“자, 이게 적지만!”
마당에 한참이나 서서 무엇을 생각하던 인가는 백 조(百吊)짜리 관체(官帖:돈) 석 장을 문 서방의 손에 쥐였다. 문 서방은 받지 않으려고 했다. 더러운 놈의 더러운 돈을 받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 부쳐먹는 밭도 인가의 밭이다. 잠깐 사이 분과 설움에 어리어서 튀기던 돈은──돈 힘은 굶고 헐벗은 문 서방을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못 이기는 것처럼 삼백 조를 받아 넣고 힘없이 나오다가,
‘저 속에는 용례가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바른편에 놓인 조그마한 집을 바라볼 때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도로 돌아섰다. 마치 거기서는 용례가 울면서 자기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가는 문 서방을 문 밖에 내보내고 문을 닫아 잠갔다.
|생략 부분 줄거리| 문 밖에 나선 문 서방은 천지가 아득하여 발길이 돌아가지 않았다. 생사를 다투는 아내를 생각하면 아니 가진 못할 일이고, 이 울타리 속에는 용례가 있거니 생각하면 눈길이 다시 울타리로 갔다. 돌아와 보니 문 서방집 부뚜막에는 아내가 누덕 이불에 싸여 누웠고 문 앞과 윗목에는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아내는 고함을 치고 눈물 없는 울음을 울면서 용례를 찾았다.
“여보! 여보소! 아이구 정신 좀…….”
떨려 나오는 문 서방의 소리는 절반이나 울음으로 변하였다.
거불거불하는 등불 속에 검붉은 피를 한 말이나 토하고 쓰러진 그는 낯이 파랗게 되어서 숨결이 없었다.
“허! 잡싱(雜神)이 붙었는가?”
“으흠 응! 으흠 흥! 각황제방 심미기, 두우열로 구슬벽…….”
여러 사람들과 같이 문 서방의 아내를 부뚜막에 고요히 뉘어 놓은 한 관청은 귀신을 쫓는 경문이라고, 발음도 바로 못 하는 이십팔 수를 줄줄줄 읽었다.
“으응응…… 흑흑…… 여 여보!”
문 서방의 목메인 울음을 받는 그 아내는 한 관청의 서투른 경문 소리를 듣는지 마는지? 손발은 점점 식어 가고 낯은 파랗게 질렸는데, 무엇을 보려고 애쓰던 눈만은 멀거니 뜨고 그저 무엇인지 노리고 있다. 경문을 읽던 한 관청은,
“엑, 인제는 늙어 가는 사람이 울기는? 우지 마오! 살아날껴!”
하고, 문 서방을 나무라면서 문 서방의 아내 앞에 다가앉더니, 주머니에서 은동침(어느 때에 얻어 둔 것인지?)을 내어서 문 서방 아내의 인중(人中)을 꾹 찔렀다. 그러나 점점 식어 가는 그는 이마도 찡그리지 않았다. 다시 콧구멍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숨결은 없었다.
바람은 우우 쏴─하고 문에 눈을 들이치었다. 여러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두려운 빛을 띤 눈으로 창을 바라보았다.
“으응 에이구! 여보! 끝끝내 용례를 못 보고 죽었구려…… 잉잉…… 흑.”
문 서방은 울기 시작하였다. 그 울음소리는 고요한 방 안 불빛 속에 바람 소리와 함께 처량하게 흘렀다.
“에구 못된 놈(인가)두 있는 게!”
“에구 참 불쌍하게두!”
“흥 우리두 다 그 신세지!”
무시무시한 기분에 싸여서 낯빛이 푸르러 가는 여러 사람들은 각각 한마디씩 뇌었다. 그 소리는 모두 갈데없는 신세를 호소하는 듯하게 구슬프고 힘없었다.
문 서방의 아내가 죽던 그 이튿날 밤이었다. 그 날 밤에도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 바람은 강바람이어서 서북에 둘린 산 때문에 좀한 바람은 움쩍도 못 하던 달리소(문 서방의 사위 인가의 땅)까지 범하였다. 서북으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 건너 높은 절벽을 대하여 강골밖에 터진 데 없는 달리소는 강바람이 들어차면 빠질 데는 없고 바람과 바람이 부딪쳐서 흔히 회오리바람이 일게 된다. 이 날 밤에도 그 모양으로, 달리소에는 회오리바람이 일어서 낟가리가 날리고 지붕이 날리고 산천이 울려서 혼돈이 배판할 때 빙세계나 트는 듯한 판이라 사람은커녕 개와 도야지도 굴 속에서 꿈쩍 못 하였다.
밤이 썩 깊어서였다.
차디찬 별들이 총총한 하늘 아래, 우렁찬 바람에 휘날리는 눈발을 무릅쓰고 달리소 앞 강 빙판을 건너서 달리소 언덕으로 올라가는 그림자가 있다. 모진 바람이 스치는 때마다 혹은 엎드리고 혹은 우뚝 서기도 하면서 바삐바삐 가던 그 그림자는 게딱지 같은 지팡살이집 근처에서부터 무엇을 꺼리는지 좌우를 슬몃슬몃 보면서 자취를 숨기고 걸음을 느리게 하여 저편으로 돌아가 인가의 집 높은 울타리 뒤로 돌아간다.
“으르릉 웡웡.”
하자 어느 구석에선지 개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뒤이어 나와서 짖으면서 그 그림자를 쫓아간다. 그 개소리는 처량한 바람 소리 속에 싸여 흘러서 건너편 산을 즈르릉즈르릉 울렸다.
“꽝! 꽝꽝!”
인가의 집에서는 개짖음에 홍우재(마적)나 몰아오는가 믿었던지 헛총질을 너댓 방이나 하였다. 그 소리도 산천을 울렸다. 그 바람에 슬근슬근 가던 그림자는 휙 돌아서서 손에 들었던 보자기를 개 앞에 던졌다. 보자기는 터지면서 둥글둥글한 것이 우르르 쏟아졌다. 짖으면서 달려오던 개들은 짖음을 그치고 거기 모여들어서 서로 물고 뜯고 빼앗아 먹는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자는 인가의 울타리 뒤에 산같이 쌓아 놓은 보릿짚더미에 가서 성냥을 쭉 긋더니 뒷산으로 올리닫는다.
처음에는 바람 속에서 판득판득하던 불이 삽시간에 그 산 같은 보릿짚더미에 붙었다.
“훠쓰(불이야)!”
하고 고함과 같이 사람의 소리는 요란하였다. 모진 바람에 하늘하늘 일어서는 불길은 어느새 보릿짚더미를 살라 버리고 울타리를 살라 버리고 울타리 안에 있는 집에 옮았다.
“푸우 우루루루루 쏴아…….”
동풍이 몹시 이는 때면 불기둥은 서편으로, 서풍이 몹시 부는 때면 불기둥은 동으로 쓸려서 모진 소리를 치고 검은 연기를 뿜다가도 동서풍이 어울치면 축융[火神]의 붉은 혓발은 하늘하늘 염염이 타올라서 차디찬 별──억만 년 변함이 없을 듯하던 별까지 녹아 내릴 것같이 검은 연기는 하늘을 덮고 붉은빛은 깜깜하던 골짜기에 차 흘러서 어둠을 기회로 모여들었던 온갖 요귀를 몰아내는 것 같다. 불을 질러 놓고 뒷숲속에 앉아서 내려다보던 그 그림자──딸과 아내를 잃은 문 서방은,
“하하하.”
시원스럽게 웃고 가슴을 만지면서 한 손으로 꽁무니에 찼던 도끼를 만져 보았다.
일 동리 사람들과 인가의 집 일꾼들은 불붙는 데 모여들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떠들고 덤비면서 달려가고 달려올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울타리는 물론 울타리 속에 엉큼히 서 있던 큰 집 두 채도 반이나 타서 쓰러졌다.
이런 불 속으로부터 여러 사람이 오고 가는 밭 가운데로 튀어나가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하나는 커다란 장정이요, 하나는 작은 여자이다. 뒷산 숲에서 이것을 본 문 서방은 그 두 그림자를 향하고 내리뛰었다. 그는 천방지방 내리뛰었다. 독살이 잔뜩 올라서 불빛에 번쩍이는 그의 눈에는 이 두 그림자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으윽 끅.”
문 서방이 여러 사람을 헤치고 두 그림자 앞에 가 섰을 때, 앞에 섰던 장정의 그림자는 땅에 거꾸러졌다. 그 때는 벌써 문 서방의 손에 쥐었던 도끼가 장정 인가의 머리에 박혔다. 도끼를 놓은 문 서방의 품에는 어린 여자의 그림자가 안겼다. 용례가…….
그 바람에 모여 섰던 사람들은 혹은 허둥지둥 뛰어버리고 혹은 뒤로 자빠져서 부르르 떨었다. 용례도 거꾸러지는 것을 안았다.
“용례야! 놀라지 마라! 나다! 아버지다! 용례야!”
문 서방은 딸을 품에 안으니 이 때까지 악만 찼던 가슴이 스르르 풀리면서 독살이 올랐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슬픈 중에도 그의 마음은 기쁘고 시원하였다. 하늘과 땅을 주어도 그 기쁨을 바꿀 것 같지 않았다.
그 기쁨! 그 기쁨은 딸을 안은 기쁨만이 아니었다. 작다고 믿었던 자기의 힘이 철통 같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자기의 요구를 채울 때 사람은 무한한 기쁨과 충동을 받는다.
불길은──그 붉은 불길은 의연히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하늘하늘 올랐다.
최서해(崔曙海, 1901~1932)
본명은 학송(鶴松). 함북 성진 출생. 1924년 <동아일보>에 「토혈」을, <조선 문단>에 「고국」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0년대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로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창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탈출기」, 「기아와 살육」 등이 있다.
작품 투시도
작품 해설
간도 이주 소작민의 궁핍한 삶의 형상화
「홍염」은 1920년대 간도를 배경으로 조선인 소작민의 궁핍한 삶과 저항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중국인 지주에게 착취를 당하고 딸까지 빼앗기는 문 서방의 모습은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 등지로 떠난 한민족의 극한적인 상황을 드러낸다.
‘홍염’의 상징적 의미
인가의 횡포에 딸과 아내를 잃은 문 서방의 분노는, 인가의 집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홍염’의 붉은색은 문 서방의 저항과 투쟁을 더욱 자극적이고 원시적으로 만들어 전달 효과를 높이고 있다. 즉, ‘불’은 인가로 대표되는 지배 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대한 민중(문 서방)의 저항 의지를 상징한다.
우발적 살인과 방화로 이어지는 결말
극도의 궁핍과 이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성은 최서해의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다.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문 서방이 인가를 죽이고 불을 지르는 장면은 ‘우발적인 살인과 방화’라고 하는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핵심 정리
갈래단편 소설, 신경향파 소설
배경시간 - 1920년대 어느 겨울
공간 - 간도의 조선인 이주지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주제일제 강점기 조선 이주민들의 궁핍한 삶과 저항
작품 내용
가난한 소작농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간도로 건너간 1920년대 조선인 이주민을 대표함. 원래는 순박한 성격이었지만 딸을 빼앗기고 아내마저 잃은 뒤 저항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함.
소작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만주인 지주. 문 서방이 빚을 지고 갚지 못하자, 그의 딸 용례를 데려감.
애지중지하던 딸을 빼앗기고 병을 얻어서 끝내 목숨까지 잃음.
문 서방의 외동딸. 문 서방이 인가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자 인가에게 붙잡혀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