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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을사모하는자
저자와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청교도를 만나다』(조엘 비키, pp. 196-199에서 발췌)
아이작 암브로스는 1604년에 랭커셔의 오름스커크의 교구 목사인 리처드 암브로스의 아들로 태어나 1621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브라세노스 칼리지에 입학했고, 1624년에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1627년에 더비셔의 캐슬턴의 교구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1629년부터 1631년까지는 요크셔의 클래펌에서 목회했다. 1640년대와 1650년대 초는 랭커셔의 장로교주의를 잘 이끌어 갔다. 그 이유로 두 번에 걸쳐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결국 1654년 목회직을 사임했는데 이는 아마도 상당 부분 건강의 악화에 기인한 듯하다. 1664년 1월 23일 돌연 뇌졸중으로 소천했다.
암브로스는 청교도이자 장로교주의자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따뜻한 경험적 측면을 드러내는 기독교 문학의 작가였다. 그의 작품 『예수를 바라보라』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오랫동안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은 1650년대 초반에 심한 질병을 겪은 이후, 주님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비롯되었다. (원제:예수를 바라보는 것. 1658). 이 책은 생각과 행동에서 예수님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삶을 강조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표방한 고전이다.
암브로스에 대해 이런 평이 전해진다. “암브로스는 삶에 있어 거룩했고 죽을 때에도 행복했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모든 선한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 머리말-독자에게
가장 주되고 중요한 영적 의무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1653년 봄, 나는 중한 병에 걸렸다. 그런데 주님이 건강을 회복시키기 시작했을 때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내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관한 깊은 묵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내 영혼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내 안에 깃들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 속에서 내 영혼은 기쁨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내 안에서 다른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성경 속에서 그에 관한 본문들을 찾아 읽으며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 본문들은 복음에 대한 합당한 의무로써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강렬히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찾고 몇몇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마침내 건강이 회복되었고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1.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더 특별히 설교를 해야 하는 주제였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고 즉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골1:27-28). 목회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할 더 많은 의무가 있다. 십스는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 가운데 특별한 일은 그리스도를 펼쳐 보여 주는 것이다. 벽걸이 융단처럼 내걸고 그리스도의 숨겨진 신비를 하나하나 풀어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십스는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적어도 그 길을 향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율법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가게 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치대로 삶을 살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무언가가 우리의 주제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설교의 가장 아름다운 주제라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그것이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영광, 아름다움, 탁월함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향기롭고 깊은 신비가 아닌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수많은 책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 신비스러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을 다 합해도 단지 교리문답의 한쪽 면에 나와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도, 그분에 대한 어떤 것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 이 복의 신비를 계속해서 더 많이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가 예수님을 고찰하고 읽으며 이해하는 일에 삶을 바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예수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알고 갈망하며 소망하고 믿으며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내가 이 바라보는 행위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며, 특별히 계속해서 바라보는 행위를 하는 동안 어떻게 내 영혼이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런 기쁨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자여, 당신이 아침과 저녁 기도를 드리듯이 이 의무를 계속 실천하라. 지속적인 것이든 자주 하는 것이든 같은 주제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우리는 쉽게 부주의해지거나 냉담해지거나 형식적인 타성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 주제에 대해 빨리 싫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제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오”(골3:11).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생각하며 갈망하고 소망하며 믿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간구하고 따르기 위해’ 당신의 구속을 계획하고 약속하며 성취하신 것에 대해 그분의 탄생과 삶, 죽으심, 부활, 승천, 중보, 재림 속에서 그분을 묵상한다면 당신은 결코 지치거나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것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당신이 매일의 일과로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지치거나 지루해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오! 그 대상에는 바라보아야 할 것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와서 이 의무를 시도해 보라. 그리고 끊임없이 그 의무 가운데 거하라. 적어도 일 년에 한 차례는 그렇게 시도해 보라. 그래서 평생 매년 한 번씩은 그 일을 시도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그 일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라.
1장 서론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논의를 하든 글을 쓰든 가장 탁월한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저서들을 읽은 뒤 그의 수려하고 뛰어난 문장력에 높은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저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 저서들은 향기롭지 못하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 안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자신이 갖춰야 할 유일한 지식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일깨워 주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을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엡3:18)으로 삼았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 속에는 세상의 다른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탁월함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을 주고 더 온전한 생명력과 활기가 넘치며 영혼을 더 황홀하게 하고 만족시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진리의 태양이며 중심이다. 우리는 영혼 구원에 필요한 요소로써, 믿음의 대상으로써 다른 어떤 것도 설교할 수가 없다.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고는 다른 어떤 식으로도 충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 행복의 전부요, 인간에게 빛을 주는 태양이다. 오직 그분만이 인간을 치유하는 의사이고 인간을 보호해 주는 불 담이다. 오직 그분만이 인간을 위로하는 친구이며 인간을 부요케 하는 참된 진주다. 오직 그분만이 인간을 지켜 살게 하는 방주이며 인간을 가장 무거운 압박 아래서도 견딜 수 있게 하는 바위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사32:2). 오직 그리스도만이 땅과 하늘 사이를 이어 주는 사다리요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 주는 중재자이며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신비다(벧전1:12). 여기에 진정으로 복받은 주제가 있다. 그것을 살펴보고 알게 되었을 때 누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니 와서 의의 태양을 바라보자.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떤 해도 받지 않는다. 오직 유익만을 얻을 뿐이다. 자연계의 태양은 오래 바라보면 눈이 부시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 눈은 더 선명해지고 우리 얼굴은 더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잠15:30). 우리가 그토록 찬양받으실 분을 바라본다면 우리 마음은 얼마나 더 큰 기쁨으로 가득 차겠는가! 그리스도가 온 세상보다 더 탁월하시듯, 그분의 모습은 다른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초월한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요체요, 복음주의 의무의 정수요, 본질이다.
본문에는 행위와 대상이 나온다. 원래 여기에 나오는 행위는 단호하고 강조하는 표현으로 되어 있다. ‘아포론테스 에이스’, 이 표현은 우리 눈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두 개의 용어가 나온다. ‘아포’와 ‘에이스’가 그것으로 전자는 다른 모든 대상에게서 눈을 떼는 것을 뜻한다. 후자는 한 대상에게, 오직 그 대상에게만 시선을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표현은 시선을 떼는 것과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 어떤 대상에 대해 그렇게 하라는 말인가? 바로 예수에 대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그분의 사역과 역할을 나타낸다면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의 자비와 관대함을 나타낸다. 왜 그리스도가 아닌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는지 히브리서 기자에게 묻지는 않겠다. 그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그분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예수가 다른 모든 이름 가운데 가장 순전하게 복음적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나는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다른 이름들과 모순되고 대립하는 것으로써 예수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주 그리스도, 주님, 중재자, 하나님의 아들,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라는 이름이 ‘구주’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점에서 그 이름이 그분에게 주어졌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나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특별히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진정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복음, 복음의 특권, 우리가 받은 복음의 의무다.
2장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시선을 돌림
1. 다른 모든 것에서 확고하고 분명하게 시선을 떼야 할 의무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생각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분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어떤 것에도 시선을 주어서도, 곁눈질을 해서도 안 된다. 주님은 롯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셨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창19:17). 롯은 소돔을 바라보지 않는 한 소돔의 음란함을 거부하고 혐오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롯은 소돔을 결코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사17:7-8). 이것은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징계하신 뒤 그들이 보여야 할 태도였다.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고후4:18)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오, 한 영혼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때, 영원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면류관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가엾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토록 비참한 피조물들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그리스도가 어떤 위대한 일을 계획하셨는지를 알게 될 때, 그때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영혼의 갈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영혼이 그런 일시적인 것들을 어떻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시선을 떼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1. 선한 것: 히브리서 기자는 앞 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에 관해 말한다. 그들은 분명히 믿음의 본으로써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자리에 예수님을 세운다. 기자는 증인들에게서 우리 시선을 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돌리라고 말한다. 그것도 매일 끊임없이! 만일 진정으로 한 가지만을 바라보기로 결정했다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 성도들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줄수는 있지만, 그들도 역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일 뿐이다. 예수님만이 인도자 중의 인도자시다.
2. 악한 것: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는 모든 것에서 시선을 떼야 한다.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시선을 떼야 한다. 그것이 죄로 물든 자아든, 자연적 자아든, 종교적 자아든 관계가 없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시선을 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사도 요한은 그것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 즉, 쾌락, 이익, 명예다.
(1) 우리는 죄로 물든 세상 쾌락에 대해 눈을 돌려야 한다. 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들은……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9절). 우리는 쾌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다. 욥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욥21:12-15).
그런 모습의 생생한 예를 어거스틴의 회심에서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원했다. 그러나 동시에 쾌락도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 그의 내면에서 얼마나 깊은 갈등과 싸움이 벌어졌는가! 마침내 치열한 싸움이 끝나고 나자 겉잡을 수 없는 눈물이 소나기처럼 두 눈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쓰러진 채 울부짖었다. 그 순간 어거스틴은 한 음성을 들었다. “집어 들어라. 그리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 소리에 어거스틴은 즉시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을 펼쳤다.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다음의 말씀이 써 있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3-14). 그 말씀을 읽었을 때 어거스틴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즉시 빛이 내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모든 의심의 어둠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거스틴의 눈은 쾌락에서 돌이켰고 그 후로는 영원히 오직 예수님께만 고정되었다.
(2) 우리는 죄로 물든 세상의 이익에 대해 눈을 돌려야 한다. 죄로 물든 이익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이 우리 안에서 지배하는 만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잦아들게 되어 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탐심은 영적 간음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피조물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백한 영적 우상숭배다. 영적 우상숭배 안에도 다음과 같이 단계가 있다.
• 이 세상을 생각하는 것: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적인 시선, 헝클어지고 흩어지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세상이 성도들의 생각과 상상 속에서 근사하고 멋지게 보이는 것.
• 세상에 마음을 쏟는 것: 이것은 영적 간음에서 더 높은 단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결하고 충실해야 할 우리 마음을 세상에 두는 것이 간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는 것: 이것은 탐심과 간음의 가장 높은 단계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창녀의 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상을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 남편보다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창녀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이 영광스럽게 보이는 한, 그리스도는 결코 그 사람에게 소중한 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달콤한 맛을 음미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점점 쓴맛을 내기 시작한다.
(3) 우리는 세상의 죄로 물든 명예에 대해 시선을 돌려야 한다. 어떤 사람이 무수히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내뿜는 입김에 이리저리 날리며 하늘을 떠도는 깃털을 좇아 달린다고 해보자. 과연 그가 그 깃털을 붙잡을 수 있을까? 설사 그가 붙잡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깃털에 불과하다. 바로 이생의 자랑, 영예, 헛된 영광이 그것과 같다. 세상의 영예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가까이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따라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니”(히11:24, 26).
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우리의 시선이 돌아가는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려야 하는가
1.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그런 것들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은 위와 아래를 바라볼 수 없다. 우리는 한 가지 생각 속에서 하늘과 땅을 동시에 품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 특별히 그리스도와 재물의 관계 같이 대조적인 요소를 가지고 서로 충돌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2. 그리스도와 비교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바라볼 가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3. 우리가 다른 것에 시선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 결혼의 법칙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2:19). 이 일을 위해 영혼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결합해야 한다. 결혼한 아내가 남편에게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남편되신 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45:10).
4. 그리스도가 질투하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질투는 영혼 안에 있는 열정이다. 질투의 감정은 사랑하는 대상의 마음이 다른 것을 조금이라도 향하고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출20:5). 그분은 우리가 다른 것에 조금이라도 눈길을 보내는 것도, 그것들을 갈망하는 것도 견디지 못하신다.
5. 모든 다른 것이 결코 우리의 눈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을 보아도 족함이 없고”(전1:8).
2.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라는 간곡한 권고
1. 하나님이 계수하실 때 모든 악한 것은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2. 그 모든 것이 단지 사소하고 하찮은 티끌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임을 생각하라. 믿는 자들이여! 이 세상 모든 것 뒤에 어떤 것들이 따라오는지를 생각해 보라. 꽃은 아름답지만 곧 시들어 버린다. 유리잔은 밝고 영롱한 빛을 내지만 쉽게 깨져 버린다.
3. 그리스도와 세상의 것들과의 차이점을 생각하라. 다른 모든 것은 헛되지만 그리스도는 실재하는 분이고 견고하며 실체이고 영광스런 존재시다.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사라져 버리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히 존재하시는 실체다. 다른 모든 것은 눈을 찌르는 가시고 심령을 상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기쁨과 위로로 충만하며 황홀케 할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분이다.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4.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하늘과 하늘의 것들에서 눈을 돌리신 것을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당신은 그분을 위해 이 땅과 이 땅의 것들에서,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서 얼마나 더 눈을 돌려야 하겠는가! 그리스도는 영광을 버리셨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기쁨을, 천국의 즐거움을 당신을 위해 버리셨다.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오,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주신 그분께 당신을 드리라. 그리고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끊으라!
5. 이성을 지닌 인간의 영혼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들에게 힘을 쏟기에는 너무나 높은 가치를 지녔다는 것을 생각하라. 인간의 영혼, 마음, 사고 능력은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있기에는 너무나 고매하다. 영혼에는 영원하신 하나님과도 사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영혼이 그토록 높은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 주님이 인간의 가슴 속에 그토록 고매한 영을 심어 주셨다면, 인간이 그 능력을 낮고 비천한 이 땅의 것들에게 주는 것은 오, 얼마나 악한 일인가!
6.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생각하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 우리의 마음을 이런 것들에서 끊으라. 며칠 후에는 당신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수백 가지 질병이 언제라도 당신을 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지금 당신은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의 어깨 위에 실린 채 가야 한다. 그리고는 흙 속에 누워 어둠 속에서 서서히 부패해 갈 것이다. 당신은 이미 그곳에 가까이 가 있다.
7.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이 제출해야 할 계산서를 생각하라. 오, 당신이 이 세상에서 눈을 돌려야 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 계산서를 생각하라. 당신이 지금 죽어야 한다면, 모든 육체가 가는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리고 그 후에 당신의 삶을 계수해야 한다면, 당신이 한때 이곳에서 누렸던 만족과 즐거움을 기억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 당신이 이 땅의 것들을 응시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는 계산서를 제출한다면 그것은 분명 슬픈 계산서가 될 것이다.
3. 다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려는 자들을 위한 지침
1. 매일 점점 더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연구하라. 전도서를 깊이 묵상하며 읽으라. 사람들이 세상의 것들을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볼 수만 있다면 오, 그것들이 얼마나 헛되게 보일까!
2. 그리스도를 생각한다면 어떤 악한 것과도 관계를 맺지 말라. 세상과 어떤 관계도 맺지 말라. 가능한 한 관계를 끊으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이 세상 것들에는 접착성이 있다. 당신의 마음이 세상의 것들 속에서 헤매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마음이 오히려 세상 것들에 달라붙게 될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이 친숙해지라. 그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라. 그분과 더 친밀하게 연합하라. 그리스도와 천국의 맛을 더 많이 맛보라. 그러면 이 땅은 점점 더 그 맛을 잃고 오히려 추하게 보일 것이다.
4. 자신을 이 땅 위의 순례자요, 나그네로 여긴 성도들의 본을 세워 놓으라.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이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히11:3, 37-38).
5. 묵상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 그곳에서 한동안 머무르라. 하늘에 가 있는 마음은 이 땅의 것들에 관심을 둘 수가 없다. 하늘과 하늘의 것들을 바라보는 영혼은 더 이상 낮은 세상의 보잘것없는 것들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쏟을 시간이 없다. 오! 그리스도인이 영원한 세계를 한순간이라도 보고 다시 이 세상을 본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것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6. 당신의 마음과 눈을 돌이키게 해 달라고 강력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119:37)라고 다윗은 기도한다. 다시 기도한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3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