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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 109는 비록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이 루프트바페의 패배로 끝났지만 Bf 109가 영국의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비해 떨어지는 성능의 전투기라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실제 화력이나 스피드에 있어서 우월하였으나 연료 적재의
한계로 인해서 제한된 시간에 교전을 해야하다보니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가 영국 공군에게 참패를 하였지만 Bf 109E가 주익에 보조 연료 탱크를 장착할 수만 있었어도 어쩌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지난 번 글에서 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패배를 한 후에 아무리 변명을 한다고 해도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이고........
(Bf 109F-4에 적용된 착탈식 보조 연료 탱크 - 109E에 진작 적용되었다면 영국 본토는 나치 독일의
군화에 짓밟혔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Bf 109E는 메서슈미트 Bf 109 시리즈의 1세대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되곤 합니다. 메서슈미트 박사가 개발 초기에 겪었던 한계를 많이 개선하고 극복한 기종이란 의미였고 객관적인 성능(화력과 스피드)의 비교에서도 스핏파이어나 허리케인보다 우월하다는 평가를 해도 틀린 얘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물론 Bf 109가 그랬듯이 스핏파이어 역시 세월이 지날 수록 보다 강력한 화력과 스피드로 개선된 후기 모델들이 등장하게 됩니다만....) 실제 루프트바페의 명성을 전유럽에 떨치게 된 제1 공로기종은 바로 Bf 109E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Bf 109F가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에 사격을 가하는 실제 동영상)
자! 오늘은 Bf 109E형에 이어서 2차대전 중에 등장한 Bf 109 전체 모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르로 평가받은 Bf 109F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Bf 109F가 개발된 싯점이 영국 본토 항공전의 끝자락(1940년말)이어서 패색이 짙었던 당시 상황을 전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유럽 대륙에서 루프트바페의 영광이 색 바랜 것은 절대 아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쨌든 영국은 본토로 나치 독일이 발을 들여놓는 것을 막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감히 유럽 대륙에 진격을 할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고 유럽 대륙은 여전히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1941년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독소 전쟁은 2차대전을 통털어 가장 끔찍한 살육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이전쟁에서 바야흐로 Bf 109F형의 활약이 시작됩니다. 루프트바페의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기간에 등장한 Bf 109F는 나치 독일 공군의 영광의 역사 그자체였던 것입니다.
개발에 얽힌 깨알같은 비화들
항공 역사가들은 Bf 109F가 외형이나 성능에서 그 이전 기종인 Bf 109E까지의 소위 "1세대"와는 전혀 다른 기종으로 평가할 만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제2세대 Bf 109의 등장이라고 일컫는 109F는 전선에서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에게 프레드릭, 프란쯔 또는 프리쯔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Bf 109E형의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 주익에 장착된 2정의 기관포는 그 압도적인 화력으로 조종사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109F형이 1정의 기관포를 동축에 장착하고 주익에 기관포를 제거하자 아돌프 갈란트(2차대전 최고의 에이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선 조종사들은 강력하게 반발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그 출발점은 DB 601E-1이라는 새로운 고성능 엔진의 적용입니다. 1940년초부터 메서슈미트 박사는 다이믈러 벤즈社가 개발한 신형 엔진이 가진 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 기존의 Bf 109E의 개조 작업을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서는 기수의 형태가 전혀 새롭게 디자인되어야 했습니다. 109E에서 필요했던 기수 하면에 공기 흡입구가 뒤로 이동했고 프로펠러 스피너가 둥근 반구형태로 약간 커졌으며 프로펠러의 직경은 도리어 6인치 작게 설계되었습니다. 주익 하면에 공기 흡입구도 좀 더 얇아졌으며 수평 꼬리날개를 지지하던 지지대가 제거되어 훨씬 세련된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모두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면서 혁신적인 성능을 얻기 위한 설계 변경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이런 변화를 거쳐 제작된 Bf 109F형의 최초 시제기가 시험 비행을 한 것은 1940년 7월 10일이었습니다.(공교롭게도 109F의 이전 버전인 109E형이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을 시작하여 영국 본토 공격을 향해 이륙한 역사적인 날이 바로 이날이었습니다.)
이날 시험비행을 해본 결과 Bf 109F의 시제기는 그날 영국 본토에서 영국 공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109E에 비해서 괄목할 향상된 성능을 보여주었습니다. 109F형에 대한 루프트바페 지휘부의 주문은 "영국에 스핏파이어를 훨씬 능가하는 전투기를 만들어라"였습니다. 메서슈미트 박사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즉시 109F 생산을 위한 본격적인 개발을 위해서 보다 큰 규모의 설계 변경을 결정하게 되는데 109E까지 오면서 기술적으로나 실제 공중전의 결과를 통해 축적된 지식으로 전면적인 재설계를 연구팀에 지시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주익의 설계입니다. 주익의 폭이 그 이전 버전에 비해서 조금 넓어졌고 끝단이 둥글게 바뀌었습니다. 플랩과 보조익의 설계도 크게 바뀌었고 특히 그동안 사용해오던 삽입형 플랩이 단순형 플랩으로 변경되었고 보조익도 삽입형에서 프라이제 형태로 변경되었습니다. 게다가 109E형까지는 이륙 후에도 뒷바퀴가 동체 외부에 노출되어있는데 109F부터는 이륙시 뒷바퀴도 동체 내부로 접혀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뀝니다.
(Bf 109E의 외형)
(Bf 109F의 외형, 위에 109E형과 비교해보면 기수와 주익 끝의 모양이 바뀌고, 주익에 기관포 2정이
제거 되었고, 꼬리 수평 날개 지지대가 제거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별 관심없이 보면 109E나 109F나 그게 그것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알고나서 눈여겨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혁신적인 신형 엔진 DB-601E 엔진의 적용은 엔진 자체의 불안정한 결함으로 인해서 초기에 보류되었고 109F-1(동축 20mm 기관포 장착)과 109F-2(동축 15mm 신형 기관포 장착 - 구경은 작아졌으나 화력은 더 강화됨.)에는 109E가 사용하던 DB-601N을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메서슈미트 박사의 숙원을 이루다!
메서슈미트 박사의 숙원이라 함은 바로 동축 기관포의 적용입니다. 그동안 끊임없이 적용을 시도했지만 동축 기관포는 오작동과 기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진동의 발생으로 번번히 적용이 실패했었습니다. 하지만 109F형에 와서 고질적인 문제를 드디어 해결하고 MG FF 20mm 기관포를 기체 동축에 탑재하게 됩니다. 게다가 애초에 장착되어있던 기수 상부에 2정의 MG 17 기관총까지 합해서 109F의 기본 무장이 확정됩니다. 대신 109E형에 장착되었던 주익에 기관포 2정은 비행 성능 향상을 위해서 제거되었습니다. 주익 기관포를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전선에서 주익에 기관포를 부착하는 시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익을 얇게 만들었는데 비행 성능의 향상을 위한 의도였지만 109E형에 장착된 2정의 주익 기관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적 전투기들과 비교하여 월등하였던 화력의 우세에 대만족을 해오던 전선에 조종사들은 109F부터 아예 주익에 기관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크게 반발하게 됩니다. 아무리 동축에 1정에 기관포를 장착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실전에서 주익에 2정의 기관포가 불과 2~3초 정도만 적기를 명중시켜도 곧바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던 위력을 잊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Bf 109F에 장착된 동촉 기관포와 엔진 상부에 기관총 2정)
루프트바페 최상급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통산 102대 격추) 역시 109F의 기관포 무장 변경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심지어 일부 지휘관들은 109F의 수령을 거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메서슈미트 박사는 직접 최고의 비행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체 동축에 집중된 기관포 탑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화력보다 기체 자체의 뛰어난 비행 성능는 공중전에서 적기를 격추하기 위해 더욱 필요한 조건임을 주장하면서 일선 지휘관들과 조종사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돌프 갈란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루프트바페의 최고 에이스의 자리를 다투던 또 한명의 전설적인 에이스 베르너 뮐더즈(115대 격추)가 이런 메서슈미트 박사의 손을 들어주고 "실전에서 무조건 강력한 화력보다는 조금 화력이 약화되더라도 보다 뛰어난 비행 성능을 갖추고 정교한 사격술을 추구하는 것이 적기의 격추에 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게다가 주익에 장착된 기관포보다는 기체 동축에 장착된 기관포가 조종사의 시각과 일직선 상에서 일치되는 탄환 발사선을 갖게 됨으로써 보다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다고 말하였습니다.
(베르터 묄데스 - 스페인 내전과 2차대전 통털어 115대 격추 기록을 세운
그는 1위 에이스 에리히 하트만(352대 격추)의 기록에는 못미치지만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조종술 교범 정립에 큰 공헌을 한 에이스였습니다.)
뮐더즈의 응원 탓이기도 하였고 비행 성능 향상이 우선이라는 메서슈미트 박사의 설득이 일선 조종사들에게 "마지 못해" 수용되어서 109F는 1941년 1월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최초로 전선에 배치된 109F형은 뜻밖에 문제를 일으키며 안전성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최초 배치된 109F-0 3대가 원인 모를 사고로 추락하였고 최초의 양산형 109F-1 1대는 비행 도중에 꼬리 부분이 절단되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결국 이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당분간 109E형의 생산을 계속하여 전선에 공급하게 됩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던 연구팀은 그 원인이 바로 109F형부터 꼬리 수평 날개에 지지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로 설계를 확정지었고 실제 비행 중에 미세한 진동이 꼬리 부분 전체에서 발생하다보니 이부분의 볼트와 리벳이 느슨해지고 뒷부분 전체에 충격이 누적되면서 결국 꼬리 부분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꼬리 수평 날개 쪽에 안정성을 강화하는 설계 변경이 다시 한번 이루어진 후에야 이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조종사들의 불만을 신형 기관포로 해소해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109F형의 동축 기관포 1정을 설치하면서 주익에 기관포 2정을 떼어버린 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불만이었지만 "마지 못해" 109F의 사용을 수락하는 분위기였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마지 못한" 분위기였고 109E의 강력한 2정의 기관포를 아쉬워하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메서슈미트 박사 역시 이런 그들의 불만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탓에 109F의 무장 강화를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 결과 기존에 MG FF 20mm 기관포를 새로운 MG 151 15mm 기관포로 교체하는 방안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글을 읽는 이들은 20mm 구경 기관포를 장착해도 불만이었는데 15mm로 작아진 구경의 기관포를 장착하는 것이 무슨 개선책이냐고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구경이 도리어 작어진 이 새로운 기관포는 기관총과 같이 벨트식으로 급탄되는 새로운 방식으로 같은 시간에 포탄 발사 숫자가 훨씬 더 많아졌고 포탄 속도도 더 빨라졌습니다. 특히 일단 발사된 후에 포탄 속도가 빠르다는 의미는 적기를 따라 붙었을 때 발사된 포탄이 거의 직선을 그리면서 적기에 피탄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만큼 조종사가 예측한 피탄 지점으로 직선을 그리면서 날아간다는 것은 정확하고 정교한 사격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신형 15mm 기관포를 장착한 Bf 109F-2형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Bf 109F-2/trop이라는 열대/사막 기후에 맞도록 개조된 버전이 공급됩니다. 여기서 109F의 초기 엔진 결함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불세출의 격추왕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22세의 미남 청년 장교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 대위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이 됩니다.
(Bf 109F의 북아프리카 전선 배치 버전 - Bf 109F-2/trop, 위에 기체는 특히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한
루프트바페의 전설적인 격추왕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가 마지막으로 조종했던 109F-2/trop입니다.)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 대위, (총 158대 격추 기록)
1942년 9월 30일 이집트 상공에서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적기에 격추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Bf 109F-2/trop을 지급받은
직후 수투카 폭격기 편대 호위 임무 중에 엔진 이상으로
추락사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2세였습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엄청난 격추 기록으로 인해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그를 일컬어 "아프리카의 별"이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
애초에 메서슈미트 박사가 109F의 개발을 결정한 이유는 신형 엔진 DB 601E의 적용을 위하였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설명하였지만 109F-1과 -2가 생산되도록 601E 엔진의 적용을 못하다가 드디어 이 신형 엔진을 적용하면서 109F-3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시작되자 Bf 109는 당시에 명실상부 최고의 성능을 가진 전투기로써 거듭 나게 됩니다. 고도 22,000 피트에서 최고 속도 시속 630km에 이르고 작전 가능 고도는 37,000 피트까지 높아졌고 순항 속도로 비행하는 경우 712km의 항속 거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당시에 라이벌 스핏파이어 마크 6에 전혀 뒤지지 않는 우수한 성능이었습니다. 하지만 109F-3는 과도기적인 버전으로 소량 생산 후에 드디어 2세대 Bf 109 시리즈에서 최강의 전투기라고 평가받는 Bf 109F-4형의 생산이 시작되게 됩니다.
드디어 등장합니다! 최고의 Bf 109! F-4형!
(하세가와 메서슈미트 Bf 109F-4/B 키트 박스 아트. 이런 키트를 대하면 "아! Bf 109 시리즈에서
혁신적인 다이믈러 벤즈의 신형 엔진을 "마침내" 장착하고 동축 기관포도 20mm 신형 기관포로
무장하여 최고의 성능과 화력을 완성한 기종이구나 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후세에 전문가들은 역대 Bf 109 시리즈에서 Bf 109F-4야말로 최고의 전투기라고 자신있게 말하곤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9F-4형부터 폭이 넓은 신형 프로펠러로 교체하여 신형 DB 601E 엔진의 출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슈퍼 차져용 공기 흡입구의 모양이 바뀌어 외형으로 그 이전 버전과도 구별되었습니다.
-기관포에 다시 한번 변화를 줍니다. 애초에 기존에 20mm 기관포(109F-1)에서 15mm 기관포(109F-2)로 바꾸었지만 화력은 강화되었다고 해도 구경이 작아진 것이 좀 아쉬운 점이었는데 이번에는 구경은 다시 20mm로 복귀하면서 15mm 기관포가 가졌던 급탄 방식과 발사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신형 20 mm MG 151 기관포를 개발하여 장착하게 됩니다. 당연히 구경이 20mm가 되었으니 15mm보다 강한 파괴력을 가질 뿐 아니라 탄도학적으로 15mm 기관포가 가졌던 거의 직선에 가까운 탄도를 유지함으로써 사격 정확도에 있어서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총 200발의 포탄을 기관총처럼 벨트식으로 급탄하면서 발사하는 20mm 기관포의 위력은 연합군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조종사의 눈으로 가늠하는 조준에 따라 발사하는 사격 조건에서 직선 탄도의 기관포는 보다 정확한 사격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줬습니다.
(베트남 전에 투입된 F4 팬텀이나 미그-21에 이르러서야 "공대공"
미사일로 원거리 공격 위주의 공중전이 가능해졌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꽁무니로 따라붙어서 맹렬하게 기총소사나 기관포 사격으로 적기를 파괴하는
방식의 공중전이 전부였으므로 기관포의 화력은 매우 중요한 경쟁력 요소입니다.
사진은 F4 팬텁 전투기의 공대공 미사일 발사 순간)
븍아프리카 전역에서 활약한 109F-4/trop과 함께 전폭기 용도의 109F-4/B형이 운용되었는데 전투기 용도보다 더 많은 화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익 설계를 109F 고유 형태가 아니라 109E형처럼 필요에 따라서 전선에서 추가로 2정의 20mm 기관포를 주익에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500kg 폭탄을 탑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본래 109F-4가 자랑하는 우수한 비행 성능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1942년 9월에 사고를 당했지만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 대위는 109F-4/trop을 조종하여 놀라운 전공을 세웠습니다. 아마 그가 사고로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 연합군과 추축군 통털어 최고의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의 352대 격추 기록을 위협할 수 있는 라이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외에도 109F형의 개량형으로 20mm 동축 기관포를 제거한 후에 외부 연료 탱크를 부착한 장거리 정찰기형 Bf 109-5형과 F-6형의 개량형이 있으며, 심지어 Bf 109F-1 동체 두대를 나란히 연결하여 미국 라이트닝 P-56 전투기처럼 개조한 Bf 109Z형도 시도되었습니다만 단 1대의 시제기를 제작한 후에 계획은 취소되었습니다.
(Bf 109Z는 장거리 전폭기 용도인 Me 609 개발을 위한 시제기였습니다.)
Bf 109F의 전투 기록
이제 개발 비화의 이야기는 그만 하고 실제 전투에 참전했던 Bf 109F의 무용담을 소개하겠습니다. 1940년 7월에 시작한 영국 본토 항공전에 주로 참여했던 전투기는 Bf 109E였습니다. 이 최대 규모의 공중전은 10월에 이르러서 압도적인 영국 공군의 우세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비록 루프트바페의 위용이 한풀 꺾인 다음 해초까지 간헐적인 공중전은 영국 본토 상공에서 계속되었습니다. 바로 이때가 Bf 109F의 최초 전투 투입이었습니다.
이미 전투에서는 승리를 굳힌 것으로 자신하였던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 마크 1과 마크 2의 조종사들은 비록 화력과 비행 능력에서는 Bf 109E가 훨씬 우세했지만 이미 얘기했듯이 연료 부족에 따른 항속 거리가 극히 짧았고 그런 약점을 파악한 영국 공군의 재치있는 전략으로 루프트바페에 치명타를 주었다고 자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영국 본토 상공에 등장한 109F는 109E를 수개월 동안 경험하고 교전을 했던 영국 공군의 베테랑 조종사들조차도 엄청난 공포와 인상적인 성능에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 너무 늦게 등장한 109F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전황을 되돌린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1941년 초에 영국 공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 후에 Bf 109F는 독소 전쟁의 동부전선과 롬멜 아프리카 군단의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됩니다.
이미 Bf 109E가 이곳 두 지역 전선에 투입되었지만 109F가 공급 가능해지는 싯점에서 신속히 F형으로 교체 되었습니다.
(20mm 기간포가 200발의 포탄을 발사하던 동축 기관포구)
동부전선에서 루프트바페의 우수한 조종사들은 이미 소련 공군의 대부분의 조종사들에 비해서 훨씬 뛰어난 기량이었습니다. 사실 소련의 스탈린부터가 히틀러의 기습작전(성채 작전)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고 그런 탓에 지상군은 물론이고 공군력조차 충분한 훈련이나 실전 경험이 부족한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소련 전투기들은 109E형과 비교해도 성능에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109E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의 109F가 공급된 1941년 중반에 소련 상공에서의 양국의 공중전은 루프트바페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왔습니다.
우리는 2차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과 추축군 양쪽을 통털어서 최고의 에이스들 격추 기록 순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순위를 보면 너무나 압도적으로 상위 순위에 랭크된 에이스들은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의 모습만 보입니다. 아무리 독일 조종사들이 기량이 뛰어나더라도 어떻게 일방적으로 이런 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을까? 혹시 독일 공군측에 의도적인 기록의 날조를 통한 전쟁 영웅 만들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의심이 생길 정도입니디.
(2차대전 최고의 격추왕 에리히 하르트만(좌,1922년~1993년) 통산 352대 격추 기록은 전무후무한 대기록
입니다. 참고로 2차대전 격추 기록을 순위를 먹이면 상위 109명까지 독일 조종사 뿐이고 100대 이상을
격추시킨 기록을 가진 조종사들 중에 독일을 제외한 다른 어느 나라의 조종사들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같은 추축국 조종사였던 히로요시 니시자와(좌)는 자신의 제로 전투기(우)를 몰고 태평양 전쟁 중에 87대의
격추 기록을 세워서 일본 조종사로써 최고의 에이스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격추 기록을
가진 112명의 독일 조종사들과 1명의 핀란드 조종사가 있는 것을 보면 독일 조종사들의 격추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 조종사들이 다른 나라의 조종사들에 비해서 압도적인 격추 기록을 수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 몇가지 이유들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첫째,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우수한 조종사들을 확보했습니다.
(루프트바페의 뛰어난 조종사들은 1930년대에 사진과 같이 나치가 조직한 소년 글라이더 클럽
들에서 일찌감치 조종사 수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클럽들이 훗날 2차대전 최고의 에이스들을
양성하는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전쟁 전부터 독일에서 나치에 의해서 목적을 갖고 조직되었던 많은 아마추어 비행기 클럽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청소년들 중에서 훌륭한 조종사들을 꿈꾸고 실제로 루프트바페에 자원하는 우수한 인력들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훨씬 많은 우수한 조종사들의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히틀러가 각별한 관심으로 공을 들인 최고 엘리트 집단의 루프트바페는 강인한 정신력과 자부심으로 무장된 정예 조종사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전세계 최고 수준의 공군으로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둘째, 전투기의 성능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I-16 소련 전투기 - 독소전쟁 초기 1941년 Bf 109F를 상대한 소련 공군의 주력 전투기입니다.
10,000 피트 상공에서 최고 속도가 525km/h입니다. Bf 109F가 위에서 말했듯이 22,000피트
고도에서 630km/h 속도인 것을 봐도 상대가 안되는 성능입니다.)
전쟁 초기에 Bf 109 초기 버전조차도 이미 소련의 어떠한 전투기와도 상대가 되지 않을 큰 격차를 보이는 상황이었고 똑같은 Bf 109 시리즈에서도 한층 더 업그레드된 109F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공중전이라기 보다는 공중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가까왔습니다.
세째, 나치가 전쟁 영웅을 양산하기 위해서 기록을 날조했을 것이다? 대답은 "NO"입니다.
(루프트바페와 공중전 끝에 추락한 소련 공군 I-16 전투기의 파괴된 모습)
도리아 독일 공군은 격추 기록의 공정성을 위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탓에 실제로 에리히 하르트만과 같은 톱 클라스의 격추왕들은 공식적인 기록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격추 기록이 엄격한 독일 공군의 인정 기준에 미달하여 사실상 적기를 격추시키고도 인정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네째, 같은 추축국인 이탈리아나 일본의 경우뿐만 아니라 연합국 어느 나라의 조종사와 비교해도 독일 조종사들의 참전 기간은 압도적으로 길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가장 먼저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 기간 내내 활발한 공군 전투 임무가 계속되었던 독일 조종사들의 경우 어쩌면 유일하게 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격추되어 전사하거나 아니면 도저히 조종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고 불구자가 되는 길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전쟁에서 적기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그만큼 적기를 격추할 기회도 많았고 그런 탓에 그만큼 많은 적기들을 격추하는 기록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다섯번째, 독일 조종사들이 상대하는 대부분의 적 조종사들의 실력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특히 소련 공군의 경우 전투기의 성능의 열세와 함께 워낙 훈련이 부족하고 기량이 떨어지는 탓에 대부분이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들의 뛰어난 격추 기록을 위한 희생물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독소 전쟁 직전에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소련 공군의 유능한 조종사들과 지휘관들이 총살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쫓겨가버린 후였기 때문에 소련 공군내에 유능한 조종사의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의 경우 Bf 109와 어깨를 견줄만한 성능의 우수한 전투기였고 영국 조종사들의 실력 역시 소련 조종사들에 비하면 훨씬 뛰어났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영국 공군과의 공중전은 광활한 동부 전선에서 엄청난 숫자의 소련 공군과의 대규모 공중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였습니다. 그런 탓에 동부 전선에서 독일 공군 에이스들의 노다지와 같은 격추 기록 수립은 어쩌면 다른 나라 조종사들에 비해서 불공평하다고 할 정도의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전쟁 후기에 등장한 소련의 신형 전투기 야크-1, 하지만 Bf 109와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독소전쟁에서 초반에 고전을 하는 소련을 지원하기 위해서 영국과 미국이 공급해준 허리케인, P-39, P-40 전투기들조차 소련의 당시 전투기들보다 조금 나을지 몰라도 Bf 109의 우수한 성능에 비교하면 열세였고 훈련이 부족한 조종사들이 이런 전투기들 몰고 나가서 참패를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련에 공급된 미국제 P-40 전투기)
(소련에 공급된 미국제 P-39 코브라 전투기, 성능에 있어서 Bf 109와 비교하기 많이 부족한 전투기였습니다.)
한편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1941년 말부터 1942년 중반까지 루프트바페는 영국 공군에 압도적인 우세로 롬멜 군단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 공군은 허리케인과 미국에서 지원받은 P-40 플라잉 타이거 전투기가 주력이었는데 Bf 109F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실제로 참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사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유일하게 Bf 109에 상대가 되었던 신형 전투기 스핏파이어를 제대로 공급 못한채 그보다 못한 성능의 허리케인이 공급되었습니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아프리카의 별" 한스 요하임 마르세이유 대위의 158대 격추 신화도 Bf 104F-4/trop형을 가지고 주로 달성한 기록입니다.
그 전해인 1940년말에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41년~1942년 Bf 109F형이 등장하여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최강의 전투기의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시 유일하게 상대가 되었던 영국의 스핏파이어 마크 5도 엄밀하게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대등한 성능을 보였지만 일부에서는 Bf 109F가 좀 더 우세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최강의 전투기였습니다. (특히 기관포의 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Bf 109F의 최강의 위력이었습니다.)
1942년 중반부터 시작한 전세의 역전
(1942년 11월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이 롬멜 군단을 격파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과 이태리 추축군은
추락을 시작하게 됩니다.)
(1942년 8월부터 시작한 스탈린 그라드 전투는 이듬해 2월에 소련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그동안 독일의
우세가 지속되었던 독소전쟁은 소련의 반격으로 역전되게 됩니다.)
Bf 109E형과 F형을 합쳐서 1941년 한해동안 총 2,628대가 생산되었습니다. 하지만 1942년 여름이 지나면서 동부전선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아무리 우수한 Bf 109F 전투기의 위력은 여전했지만 우수한 전투기만으로는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전선에서 역전을 만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Bf 109F는 후속 모델 109G로 자신의 자리를 내주면서 점차 전선에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여기서 Bf 109F까지는 공중전 전용의 공격형 전투기였다면 Bf 109G부터는 요격기에 가까운 수비형 전투기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루프트바페의 유럽 상공에서 보여주었던 위용이 급격히 퇴색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추락하여 불타고 있는 Bf 109F)
첫댓글 이번에는 2차대전 독일최고의 전투기 Bf-109를 집중적으로 쓰셨네요.
재미있는글 잘 보았습니다. ^^
아니 벌써? 다 읽으셨어요???? 엄청.길게 썼다고 생각했는데....항상.관심과.응원 감사합니다.
오늘도 역쉬 입니다. 짝! 짝! 짝! 김작가님 때문에 BF-109사제기 했습니다. 언제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내용을 알고나니 매우 깊이가 있는 제작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Bf 109는 전쟁.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미국과 영국 전투기들에게 성능적으로.열세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2차대전.통털어.가장.오랜.기간.전성기를 누린 성공작임에.틀림없습니다.
아. 제가 만든 G형은 살짝 한물 간 시점의 비행기군요. P-40도 만든 적 있는데 bf109에 쨉이 안 되었고... 흠. 결국은 bf109f를 만들어야 하나... 하하하. 무진장 재밌게 읽었어요 @일본 코베의 한 레스토랑
어이쿠! 드디어 이차대전 이야기 게시판에.글로발라이제이션이네요! 일본에 출장 가셨나보네요?
예. 미국에서 돌아와서 이틀 쉬고 바로 건너 왔습니다. 어제 저녁은 혼자 저녁으로 고베 비프 먹으면서 이것 읽었습니다. 하하. 오늘 들어가요. 뭔가 재밌는 구경을 좀 하고 가면 좋으련만...
@미친도사(정권희) 고베 비프라.... 전 고베가 소고기가 유명한지 몰랐는데....부럽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