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근 40년이나 차이가 져요. 그게 뭘 뜻하는지 젊은 양반이 알기나 할까요?"
최화정은 자신을 방문한 강형사에게 한탄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강형사는 그 말에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서른. 강형사보다 어린 나이인 것이다.
"저승꽃이 피고 죽음의 비린내가, 벌써 오장의 어느 부분
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살을 부빈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 알기나 하냔 말이에요."
"그거야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강형사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내 알리바이 증명이나 빨랑 하라는 거지요? 하하하."
최화정은 강형사를 쳐다보며 깔깔 웃었다.
"그래요. 그 얘기를 하려는 거예요. 성질 급하게 굴지 말아요."
그녀는 푹신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난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 자국이 금새 봉긋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거실 한 쪽에 마련된 바아로 몸을 옮겼다.
"뭐 한잔 하실래요?"
그녀는 위스키를 집으며 강형사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공무 중에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이건 꽤 비싼 술들인데."
최화정은 아쉽다는 눈치로 손에 들고 있는 술병을 바라보 았다.
"이건 스코틀랜드산이에요. 스카치 위스키란 말이에요."
최화정은 중얼거리며 얼음 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이걸 가지고 바위 위에 붓는다고(on the rocks) 하니 과장이 참 심하죠?"
강형사는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그저 빙그레 웃었다.
"난 칵데일을 싫어해요. 불분명하거든요. 뭐든지 화끈한게 좋지요."
그녀는 잔을 들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인은 굉장히 인색하대요. 유대인, 일본인과
더불어 3대 장사꾼으로 불린다나요? 스카치 테이프 아세요?
그 테이프도 스코틀랜드인처럼 조금씩 찔금찔금 잘라 쓴다고 스카치라는 관형사가 붙었다나요."
"부인,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제가."
강형사는 다시 최화정의 말을 가로막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군요."
최화정이 새침하게 말했다. 그녀 정도의 위치에서는 말이
그렇게 거푸 중단된 경험이라고는 거의 가져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요. 궁금한 게 대체 뭐예요?"
"이미 말씀드린 것이지만, 사건이 나던 날 최여사께서는
수영읕 하고 볼링을 가셨다고 증언했습니다."
강형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그래요."
얼굴이 약간 붉어진 그녀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렸다.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가 되면서 갈라진 치마 사이로 뽀얀 허벅지가
보일듯 말듯 한 뇌쇄적인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수영장에 계셨던 것은 확인이 되었지만 볼링장에서는 한 게임밖에 치지 않으셨던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강형사는 고혹적인 그녀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낮시간이라 볼링장이 붐비지 않았고, 또 설령 붐볐다 하더라도 최여사 같은
브이아이피(VIP)의 등장을 종업원들이 놓칠리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셨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 말은 그 시간에 내가 며느리를 죽이러 집에 왔을 것이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거야 최여사님의 생각이지요."
"난 어떤 점에서는 그 애를 동정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속박에서 구해 준다는 의미로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단 그런 성인군자가 아닌 게 죄송하군요."
"날 때부터 도덕을 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강형사는 끝까지 이죽거리며 말을 잇고 있었다.
최화정이라는 여인이 풍기는 모든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 많은 여편네의 사치와 방탕에 젖어 있는 전형적인 모델로 생각되었다.
"난 이날까지도 도덕을 논한 적이 없어요."
최화정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잔을 비웠다.
"난 그저 도박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해요. 그리고 내 패는 썩 괜찮아요.
나와 있는 판돈을 모두 긁을 수는 도저히 없어도."
최화정은 빈 술잔을 바라보다가 아쉽다는 듯이 얼음을 오도독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조용한 집안에 얼음 부서지는 소리만이 요란히 들렸다.
"자자, 본론을 말해 주시지요."
강형사는 위압적인 목소리로 최화정을 채근했다.
"볼링 한 게임."
최화정은 중얼거리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링을 쳐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사치를 즐길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아 죄송하군요."
"어머, 사치라니요?"
최화정은 까르르 웃었다.
"고스톱은 치시나요?"
"물론이지요. 억대로 해본 적은 없습니다마는."
"점 백으로는 치시겠지요. 그러면 다만 몇만원이 깨지겠지요?
볼링은 그보다 훨씬 돈이 적게 든답니다."
"하여간 그 점은 됐습니다."
"좋아요, 좋아."
최화정은 단념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형사님이 알고 싶은 문제는 벌써 답을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강형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처음에 묻지 않았나요?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여
놓은 영감과 살을 부비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느냐고요."
그녀는 히스데리컬하게 웃었다.
"한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요. 강형사님이 돈 많은 68세의 할머니와 산다면요?"
"전 최여사와 말장난을 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 물론 나도 형사 나리와 말장난을 하고 있올 만큼 한가롭지는 않아요."
최화정은 과장된 제스처를 쓰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난 일방적으
로 데스데모나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저도 스스로를 이달고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형사의 답변에 그녀는 놀람의 표정을 지으며 홍소를 터뜨렸다.
"대단하시네요, 부라보!"
데스데모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델로'에 나오는 혹인 장군 오델로의 아내이다.
오델로는 부하인 이달고의 모함으로 정숙한 아내인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고 끝내는
목 졸라 죽이고 만다.
최화정은 이 이야기에 빗대어 자신의 이야기가 고회장에게 와전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비준것이고,
강형사는 고자질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니 척척 손발이 맞았다고 할것이다.
"강형사님 이제 보니 문학적인 센스가 대단하네요?"
"아무렴, 영문과를 나오신 최여사님만 하겠습니까?"
강형사는 슬그머니 꼬리를 뺐다.
"옛일이지요. 대학을 나오면 여자들이란 다시 원시 시대
로 돌아간다고 우리 교수님은 늘상 얘기하셨는데, 나도 예
외가 아니에요. 남은 것이라고는 내가 그곳을 나왔다는 싸
구려 자존심과 추억을 먹고 사는 동창회 모임뿐이지요."
최화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시절은 좋았어요. 낭만이 있었지요."
"지금도 대학생들은 낭만이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럴지도 몰라요. 지나간 사람들은 지나간 잣대밖에 갖지 못했으니까요."
최화정은 양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풍만한 가슴의
윤곽이 살짝 드러나 강형사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대학을 나온 지 벌써 8년이나 되었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는군요.
아직 결혼도 안 한 친구들도 많은데."
"괜찮은 분이 있으면 소개나 해 주시지요."
강형사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글쎄요?"
최화정은 빙긋 웃었다. 그 의미가 짐작되자 강형사도 쓴 읏음을 머금었다.
언감생심 재벌집 여편네와 어울리는 여자를 형사 나부랑이가 소개시켜 달라고 했으니.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요?"
최화정은 어투를 돌변하여 강형사에게 직공을 가했다.
"예, 옛?"
"그날 말이에요, 그날."
최화정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형사가 칼바람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 거에요. 아마 상대방이 누군지도 알고 있겠지요?"
"상대방?"
"호호. 정말 모르는 척하실래요?"
최화정은 가지러지게 웃으며 바아 쪽으로 다시 몸을 옮겼다.
"그 남자는 제법 성실한 편이었어요."
최화정은 다시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화끈한 편이었구요."
강형사는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대학생치고는 정말 경험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호호
."
최화정은 바아에 몸을 기댄 채 술을 홀짝거렸다. 강형사는욕지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호호호, 생각보다는 순진하네요?"
강형사의 어투에 묻어 있는 노기를 느끼고 최화정은 술잔을 내려 놓았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오만했다.
"디스코텍에서 만났지요. 블루스 한번 추고 귓바퀴에 바
람 한번 불어넣었더니 얼이 빠진 듯이 쫓아오던데요? 호호
호, 강형사님, 성인군자 같은 얼굴을 하지 마세요. 왜 난
그런 기회가 없었을까 통탄하고 계시는 것 아니에요?"
강형사는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것을 다시 밀
어넣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수사가 먼저였다.
"그럼 가신 곳 은 어디지요?"
"강남의 파라다이스 호텔인데,
숙박부 따위는 쓰지 않았으니까 정말 내가 그곳에 있었는지는 재주껏 확인해 보세요."
"그 남자의 연락처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요. 두번째 만남이었는데, 그걸로 끝인 만남이었지요.
그런 관계는 오래 끌어야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 학생도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을 거에요. 하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을 거예요.
청산 대학교 불문학과 학생이라고 했으니까요. 뒤져 보세요."
"예, 물론 뒤져 보겠습니다"
강형사는 노기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봐요, 강형사님, 날 이상한 여자로 보지 말아요. 이미말했잖아요. 저승길에 오른 노인."
"그런 결혼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나요?"
"그런 얘길 할 줄 알았어요. 그래요. 잘못된 결합이지요.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최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니요?"
강형사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이야기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그래도 그
때는 회장님이 60밖에 안 됐던 때지요. 신라의 김유신이
김춘추의 딸 지소와 결혼할 때의 나이도 예순하나나 됐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금시초문입니다."
"아마 그 여자의 심정도 나하고 별다를 게 없었을 거예요.
청춘을 바쳐 가며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여자니까요."
최화정은 한탄조로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최화정의 집안 역시 작지만 알찬 사업을 해 나가고 있었기에 그녀는 어린 시절
유복스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굴지의 대기업인 명왕성 그룹의 총수 고회장과 죽마고우의 사이라
사업에는 그다지 걸리는 바도 없이 날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
업의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히기 무섭게 아버지는 무리한 사세 확장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1인 경영 방식으로 전문적인 경영 브레인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인 결정으로
투자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최화정이 대학 2학년 때였다.
자금 유통이 막히자 아버지는 또다른 무리한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평소 고회장의 이름을 팔아 안면을 익혀 놓은 은행으로 가서 불법적인 대출을 요구했고,
그 대출은 성공했지만 곧 사정반에 걸리게 되어 쇠고랑을 차고 말았던 것이다.
부자 망하면 3년은 간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인 듯, 재산은 모두 채권자와 근로자들의 밀린
월급으로 충당되고 졸지에 단칸방 신세로 밀려나고 말았다.
"난 지금도 어렵다라고 말하는 경영자들의 이야기를 왜 노동자들이 믿지 않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렵다면 어려운거지요."
최화정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실제로 어렵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요. 안된 이야기지만
최여사의 아버님도 그런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재산을 싹 정리해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셨을걸요."
강형사가 이죽거렸다.
"그랬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래도 공장은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노동자들은 임금을 잃고. 모두 손해 보는판에 낀 게 잘못이지, 뭐 어쩌겠어요?"
"그것이 경영자한테는 다 같은 손핼지 몰라도 노동자 입장에서는 당장 끼니를 걱겅하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당장 끼니를 걱정했어야 했어요. 아버지는 수감 되어 있었고,
그 변호사비만 해도 엄청난 부담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나도 수를 내기로 했던 거예요."
"무슨 수를?"
"고지식한 우리 엄마는 영 생각을 할 수 없는 방법이었지요. 난 고회장을 찾아갔어요."
고회장은 친구의 딸이라고 의외로 쉽게 최화정을 만나 주었다.
아버지는 늘상 자신이 고회장과 고향 친구라고 자랑했지만,
한번도 고회장이 놀러온 적이 없었기에 집안 식구들조차 그 사실을 긴가민가하던 참이라
그와의 만남은 최화정에게 어느 정도는 충격적이었다.
첫 대면에 최화정이 느낀 것은 그가 상당히 젊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친구이므로 당연히 60줄에 들어선 노인을 연상
했는데, 고회장은 50대도 채 안 돼 보이는 멀쑥한 신사였다.
"그 친구 곤란한 이야기는 내 듣고 있었지. 그 문제로 온 건가?"
고회장은 최화정과 인사가 끝나자마자 대뜸 본론을 들고 나왔다.
"염치 없는 대답이지만 그렇게 되었어요."
최화정도 이 마당에 뺄 것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허허, 염치 없는 대답이라? 그럼 염치 있는 대답은 어떤
것이지?"
"최소한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인사를 드렸어야 오늘 염치있는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허허허, 그래 그건 맞는 이야기야."
고회장은 껄껄 웃었다.
"그래 최양에게 내가 뭘 할 수 있지?"
"취직을 시켜 주세요."
"응?"
고회장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나 좀 달라는 정도의 요구가 나올 줄 예상했던 모양이다.
"취직?"
"집에 노는 입 하나라도 줄여야겠기예요."
"음, 어디 대학을 다닌다고 한 것 같은데?"
"지금 영문과 2학년이에요. 정식으로 하자면 아무데도 들어갈 곳이 없어서요."
"영문과라? 그럼 영어는 좀 하나?"
"이제 2학년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요?"
최화정은 고개를 약간 숙이며 고회장의 모습을 살짝 살폈다.
고회장은 빙그레 읏었다.
"젊은 시절에는 배워야 하지. 배우는 것에는 때가 있어.
때를 놓치면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지.
학비와 용돈을 내가 대줄 테니 학업을 계속 하도록 하라구."
"하지만 그건."
"됐어. 난 사업가야. 학점은 B 이상을 유지해야 하고 졸
업을 하고는 무조건 우리 그룹에 들어오는 거야. 그때 월급에서 계산을 새로 할 테니까."
"그래도 그건"
최화정은 끝까지 그 제안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회장은 인터폰을 눌렀다.
"미스 배, 손님 돌아가시는데 차 준비시켜."
"아니, 아니"
최화정은 당황한 채로 일어나 인사를 하고 황급히 나왔다.
"확실히 회장님은 나보다 고수였어요."
최화정이 킥킥 웃었다.
"하긴 비교가 안 되는 얘기죠.
갓 스물짜리가 노희할 대로 노회한 대기업가와 맞먹으려 든다면 말이에요."
"그래, 돈은 꼬박꼬박 왔나요?"
"물론이지요. 그리고 난 아주 열심히 공부했지요.
회장님은 B학점 이상이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난 그 이후로 늘 올 A의 성적을 유지했어요. 그래야만 할 것 같았지요.
덕분에 대학 후반기의 그 숱한 시간들의 대부분은 도서관 안에서 녹아 버렸어요.
난 축제 때에도 도서관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소란스런 소리들
이 도서관 안에까지 밀려들면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지요.
복에 겨운 연놈들을 속으로 욕하면서요."
"그래도 옛날 대학엔 낭만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최화정은 시무룩하제 말했다.
"날 좋아하던 남자가 있었어요. 바싹 마른 데다가 얼굴도
핼쓱한 애였죠. 철학과 학생이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도서관 안에서만 지내는 아이였지요.
자연히 얼굴을 하도 여러번 부딪치게 되어 이름은 몰랐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저럼 여겨졌어요."
최화정은 말을 해 나가며 정점 활기를 띠어 갔다.
"하루는 종로에서 둘이 부딪쳤어요. 책방 안에서였는데
서로 필요한 책을 사러 나온 길이었지요. 그런 데서 아는
얼굴을 만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지요."
"안녕하세요?"
최화정의 느닷없는 인사에 그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도 곧 따라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책을 좀 보러 나왔어요. 책방에 뭐하러 오겠어요?"
"아, 참, 그렇겠네요."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럼 사실 책은 골랐나요,"
"아뇨. 절판이래요."
"저런, 나도 지금 찾는 책이 절판이라고 하던데."
그는 책의 절판이 기쁘기라도 한 일처럼 말했다.
"그럼 우리 둘 다 굳은 돈이 있네요?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해요."
최화정이 먼저 제의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린 이름도 서로 모르네요."
계단을 내려오며 최화정이 말했다.
"그렇군요.난 김성식이라고 합니다. 철학과 3학년이에요. 복학생이지요."
"아하, 그래서 늘 도서관에만 있는 거군요. 방위 나오셨지요?"
최화정이 깔깔거리며 물었다.
"예."
김성식이 다시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친구 분들은 현역으로 군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외로
운 대학 생활, 쯧쯧. 성식이형, 난 최화정이라고 해요. 영문과 3학년이에요."
"도서관에만 있어서 목석 같은 학구판 줄 알았더니 의외로 화통하신 측면이 있군요."
김성식은 정말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둘의 사이는 그 일을 계기로 급속도로 가까와졌다.
"말씀 도중에 죄송하지만."
강형사가 최화정의 말을 막았다.
"고회장님과 가까와진 것은 언제지요?"
"역시 관심이란 그쪽뿐이시군요. 낭만이라는 건 그래
요, 좋아요. 난 성적표가 나오면 그걸 가지고 회장님에게
직접 찾아갔지요. 그저 우송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난
그럴 수는 없었어요. 찾아가면 회장님은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자기 딸들보다도 더 날 좋아했지요."
"왜 그러셨지요?"
"별 이유는 아니었어요. 사업이 바쁠 때 자식들은 이미
다 커버렸기 때문에 아버지한데 곰상맞은 딸들이 아니었던
게지요. 난 선천적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 소질이 있어요. 귀여움을 받는 스타일이죠."
"좋으시갰습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상대에게만이지요."
최화정은 강형사에게 반박하듯 답했다.
"그래서 한두번 만나다가 가까와져서 결혼에 골인했다는 이야깁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말씀이 애매합니다."
"집안을 다시 한번 일으켜 보려고 내가 회장님을 유혹했어요. 왜 이렇게 말하니까 분명하나요?"
최화정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럼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어느 남자요? 아, 성식이?"
최화정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보다는 현실이지요. 그 남자, 한번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무슨 회산가 영업부에 있다더군요. 철학은 배워서 무엇에 쓴다는 건지, 원."
최화정은 혀를 한번 찼다.
"잘 봐줄 테니까 명왕성으로 오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번 엔조이하고는 헤어졌지요."
"예? 엔조이요?"
"예. 왜, 그 말뜻을 모르세요? 남녀가 서로 즐겼다 이거예요."
강형사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원, 형사님도.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최화정이 다시 까르르 웃었다.
"아버님은 그 뒤에 어떻게 되셨지요?"
"회장님이 힘을 좀 쓰셔서 보석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곱게 자라신 분이 그 안에서 겪은 고초가 커서 병석에 누우셨다가
돌아가신 지 3년 되었어요."
"잘 돌아가신 셈이군요."
강형사가 비꼬는 투로 말했다.
"무슨 뜻이죠?"
최화정의 눈꼬리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아, 별 뜻 아닙니다."
강형사도 순간 실언을 느끼며 황급히 정정했다.
"그날 행적에 대해서만 듣고 싶습니다."
"그 얘긴 이미 했잖아요? 나는 희주를 죽일 시어머니가 아니에요. 밉긴 했지만."
"아참, 그러셨지요. 그럼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강형사는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도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고자질을 하시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
"수사상의 비밀은 꼭 지켜 드립니다."
"그런 말은 기자들한테나 하시지요."
그녀의 말투가 여전히 냉랭했다.
"우리 가족들의 온갖 사사로운 이야기들이 잡지며 주간지
마다 훈장처럼 번쩍이고 있으니까요."
최화정은 그 말을 끝으로 집을 나서는 강형사의 뒷모습조차 쳐다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