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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의 문학적 출발은 비해외문학파에서 찾을 수 있다. 비해외문학파란 1930년대 외국문학 전공자들 중에서 해외문학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비해외문학파란 유파가 한국 문단에 실제로는 없었기 때문에 그 명칭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대의 문단 특성을 잘 집약하고 있으므로 통용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에 해외문학파가 등장한 것은 프로문학과 민족문학 양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프로문학이 유물론적 이데올로기의 경도로 인해 작품의 공식화를 가져와 문학을 단순화시켰다면, 민족문학 역시 심정적 이데올로기의 경도로 인해 작품의 추상화를 가져와 문학을 현실과 유리된 대상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양자를 극복하는 제3문학의 등장이 문단 내에서 요망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때에 동경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신지식인들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 해당하는 해외문학을 소개하기 시작해 기대를 크게 받았다. 그동안 김안서 개인의 차원에서 해외문학이 소개되고 있었지만 해외문학파의 등장으로 인해 보다 집단적이고 전문적으로 해외문학이 소개되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큰 발전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외문학파의 문단에 대한 기여는 기대한 만큼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해외문학파 구성원들의 역량이 부족해 일역(日譯)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로문학 쪽에서 그 점을 비판했을 때 해외문학파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해외문학파는 그 비판의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었는데, 당연히 외국문학에 대해 전문적인 실력을 쌓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었지만 역량이 부족한 것을 메우기가 쉽지 않았고, 또한 문단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도 적었다. 따라서 해외문학파는 역량을 키우는 길을 포기하고 시, 소설, 평론, 수필 같은 창작이나 연극운동의 길을 택했는데, 프로문학과 대결하기 위해 순수문학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하윤, 김진섭, 손우성, 정인섭, 이헌구, 함대훈, 유치진, 김상용 등의 문학은 정치적 무관심 및 문학의 형식주의를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흑구는 최재서, 김환태, 이양하, 김기림, 이원조, 정래동, 김광주 등 일군의 비해외문학파와 함께 문단에 등장했다. 이들은 해외문학파의 수준을 비판하고 외국문학의 경향을 한국문학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한국의 문단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그 대표적인 주자가 김기림이었다. 김기림은 시와 비평의 장르에서(물론 소설과 희곡, 수필, 시론 등에서도 뛰어났다) 1930년대의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주동해나갔다. 그가 "「모더니즘」은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털·로맨티시즘」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였다."라고 주장한 것은, 영미 모더니즘 문학이론을 도입하여 낡은 인습과 전통에 휩싸인 채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문학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한흑구 역시 해외문학파 문인들의 문단 세력 정도와 그 한계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전공 분야인 외국문학을 소개하는 일과 새로운 창작의 길을 택해야 되었는데, 한흑구는 해외문학파와는 다른 창작의 길을 택했다. 해외문학파의 순수문학과는 달리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담아내는 창작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가 1909년 평양에서 본명 세광(世光)으로 출생,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시카고 노스 파크대학(North Park College)과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Temple University)에서 수학한 뒤 1934년 귀국해 문예지 『백광』등을 주재하고 문단활동을 한 데에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이 시기에 한흑구가 발표한 작품으로는 「현대 여성풍경」이나 「농촌 여인은 고달프다」 등을 들 수 있는데, 해외문학파가 지향한 순수문학과는 달랐다. 「현대 여성풍경」은 적극적인 여성성을 지향하고 있고, 「농촌 여인은 고달프다」는 일제 강점기에 처한 조선 여인들의 상황을 여실하게 담고 있다. 프로문학의 경우처럼 목적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민족문학이나 해외문학파의 문학처럼 순수문학도 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양자를 지양한 것이었다.
필경 중국이나 일본 여성들같이 조선 여성들이 모다 양장을 하게 될 형편이라면 우리는 그 시대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양장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위에 말한 두 가지 조건에 합리한 범위 내에서 하여야 될 줄 안다.
또한 남성과 동등의 권리를 주창하는 의미에서 여자들의 양장이 더욱 의미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을 만한 이지(理智)와 사회적 활동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현대 여성풍경」 부분
1930년대는 '단발미인' 혹은 '모단걸(毛斷傑)'이라는 용어가 불려질 만큼 신여성들 사이에는 단발이 유행했고, 웨이브를 주는 퍼머가 새롭게 등장했다. 단발은 기존의 보수적인 관습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으로 그 모습은 단순하고 투박했지만 신여성들의 주체적 의지가 선명하게 들어 있는 것이었다.
또한 1934년 조선직업부인회 주최로 오늘날의 패션쇼에 해당하는 여의감상회가 개최될 정도로 신여성들은 의상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졌다. 가정에서 입는 옷뿐만 아니라 나들이할 때 입는 옷, 연회 때 입는 옷, 수영복, 운동복, 개량한복 등 관심 대상이 다양했다. 동시대에는 또한 화장법이 유행해 일제가 화장품 산업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조선여성들은 계절별 화장법이나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의 화장법, 연지나 크림 사용하는 법, 결혼할 때의 화장법 등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화장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처럼 1930년대의 신여성들은 여필종부(女必從夫)나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운명적으로 수행하던 기존의 여성관을 극복하고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펼쳤는데, 한흑구가 위의 작품에서 "남성과 동등의 권리를 주창하는 의미에서 여자들의 양장이 더욱 의미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회적 지위를 빼앗을 만한 이지(理智)와 사회적 활동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라고 한 주장한 것 역시 신여성들의 의식과 같은 것이다. 여전히 남성 중심의 유교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동시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한흑구의 여성관 및 시대관은 진보적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발표한 한흑구의 「농촌 여인은 고달프다」는 동시대의 농촌 상황을 여실하게 담고 있다.
농촌의 부녀들이여!
조선 농촌의 부녀들이여!
그대들은 순수러운 양이며 억세인 소이며 대지의 아들들을 키워주는 순수무후한 어머니이라. 그대들의 고달픈 생활을 그리기에는 끝없는 하늘 위에 별 떼들을 그리기보다도 힘들다.
「농촌 여인은 고달프다」 부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해 조선의 막대한 농토를 빼앗아갔고, 1920년에는 '산미증산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의 쌀을 더욱 약탈해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쌀의 양은 1910년대의 8배 이상이나 되어 조선인들의 식량난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주로 보리에 조를 섞은 잡곡밥이나 죽을 먹었고, 소나무의 속껍질을 벗겨서 방아에 찧은 송기떡이나 술찌끼나 밀기울 등으로 연명하는 사람도 많았다.
한흑구는 위의 작품에서 그러한 상황을 잘 담고 있다. 가난하고 힘든 조선 여인들의 삶을 방관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관심으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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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의 수필은 1945년 해방 후부터 보다 활발하게 펼쳐진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닭 울음」이다. 이 작품에서 "닭 울음"은 "때를 알리는 닭의 울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항상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느낌을 혹은 일러주고, 또 혹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러운 음향이며, 또한 미묘한 새의 울음이라고 생각"하여 해방을 상징하고 있다.
뜻밖에도 이날 오후가 되어서, 평양에서 친구가 땀을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왜왕(倭王)의 항복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오! 하느님!』
나는 감격하였다. 울었다.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나왔다.
40년 동안 나의 몸 속에 서리었던 붉은 피가, 심장으로 한꺼번에 용솟음쳐 모여드는 것을 감각하였다.
아내와 애들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고, 마을의 애들도, 늙은이들도 다 그러하였다.
이날부터 나와, 그리고 모든 대한 사람은 흥분과 감격 속에서 날마다 지내 왔던 것이며, 새로운 희망 속에서 날이 샐 때마다 닭의 울음을 듣곤 하였다. (중략)
군중은 열렬한 박수를 퍼부어 보냈다.
군중 속에 서 있던 70이 넘은 한 노인은,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우리 한국 병정들을 보오. 참 씩씩도 하오!』
그는 가까스로 이렇게 한마디 말을 마치자, 누런 손수건을 꺼내어서 움쑥 들어간 그의 두 눈의 눈물을 씻었다.
나도 『네, 네……』 하고 대답을 하였을 뿐, 나의 두 눈자위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었다.
「닭 울음」 부분
조선인들에게 있어 해방은 분단과 6·25전쟁이 곧바로 이어져 진정한 민족국가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못되었지만, 민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충분히 안겨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동시대의 혼란한 모습들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열망의 몸부림으로 긍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해방 후에 표출된 좌절, 갈등, 반성 등은 물론이고 환희와 열정 또한 온전한 민족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열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작품에서 보인 한흑구의 감격은 무리가 아니다. 진정 "나는 감격하였다. 울었다.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주권을 잃은 민족의 설움이 어떤 것인지는 체험한 자가 잘 알 수 있을 텐데, 일제 36년 간 겪었던 조선인들의 무수한 고통이 그것이다. 주권을 빼앗긴 민족의 고통은 2004년 현재 미군이 이라크를 침략한 뒤 포로들에게 폭행, 성적 학대, 이슬람교에서 금지하는 돼지고기와 술 먹이기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데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발표한 「나무」에서 "밤에는 잎마다 맑은 이슬을 머금고, 흘러가는 달빛과 별 밝은 밤을 이야기하고, 떨어지는 별똥들을 헤아리면서 한두 마디 역사의 기록을 암송하는 시인과 같은 나무."라고 묘사한 것 역시 동시대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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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는 물론이고 한흑구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비극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발표한 한흑구의 수필들에는 그 상황이 여실하게 담겨 있다. "열세 살, 열한 살, 일곱 살짜리 아들 삼형제를 앞세우고, 아내와 나는 네 살 난 딸애를 번갈아 업으며 한 주일을 꼬박 걸어가야만 했다. 『힘이다! 약자는 짓밟히고 쫓겨가야만 하나!』"(「문단교우록」), "국민학교에 다니는 세 아들애들을 앞세우고, 네 살 난 딸애를 아내와 함께 번갈아 업고 일주일을 걸어간 곳이 부산이었다. 8·15 경축일이 지난 이튿날, 우리 여섯 식구는 동래 온천교 다리 밑에서 늦여름의 이슬을 피해서 하룻밤을 누워서 새웠다. 다리 밑에는 13도의 피난민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중략) 『힘이다! 힘!』실무역행을 못다한 우리 민족, 도산선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어서 새날이 밝기만 기다렸다."(「문단교우록」)와 같은 상황이 그 여실한 면이다. 따라서 1955년에 발표한 「눈」에서 "눈"을 "이불"로 비유한 것 또한 그 상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눈은 따스한, 하얀 솜 같은 이불이다.
4월의 아늑한 대기와 흐뭇한 바람과 따스한 태양을 꿈꾸면서 쫑긋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꽃 움들을 눈은 흰 이불로써 고요히 덮어 준다.
8월의 태양을 꿈꾸면서, 하늘 높이서 떨고 섰는 포플러의 움들과 수양버들의 움들도, 눈은 다같이 흰 이불로써 따뜻하게 덮어 준다. (중략)
눈은 또한 먼 뜰 앞, 언덕 위에 깔린 누런 잔디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들과 벌레의 알들도, 다같이 흰 이불로써 고이 덮어 준다.
냉이와 달래의 속잎들도, 민들레와 할미꽃의 가는 뿌리들도, 눈은 다같이 따스한 이불로써 가리어 준다. (중략)
산에, 벌에, 나무 위에, 또한 지붕 위에, 흰 눈은 이제 온 누리를 덮었다.
참으로 커다란 이불이다.
「눈」 부분
이처럼 "눈"은 추운 겨울에 내리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봄날과 여름날에 만개할 것을 꿈꾸고 있는 포플러며 수양버들이며 냉이며 달래며 민들레며 할미꽃이며 누런 잔디 속에서 꿈틀대는 벌레들 등을 따스하게 덮어주는 "이불"이다. "눈"은 일 대 일의 비유관계인 "이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체들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눈"을 "이불"이라고 인식한 것은 춥고 어둡고 불안한 자신의 삶을 따스하게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즉 6·25전쟁을 전후한 궁핍하고 황폐한 삶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강한 것이다. 추운 환경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따스한 삶의 터전을 지향하는 것, 현재의 삶의 조건이 힘들다고 할지라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참아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한흑구가 전쟁을 겪으며 가졌던 생에 대한 태도였다. 1955년에 발표한 「보리」는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 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중략)
지금, 어둡고 찬 눈 밑에서도, 너,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薰風)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오월의 맑은 하늘 아래서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었다. (중략)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보리」 부분
위의 작품의 "보리"는 한흑구가 피난 중에 마음속으로 외쳤던 "힘"의 비유이고 상징체이다. 차가운 땅속에서 꿋꿋하게 자라날 정도로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보리"가 추위 속에서도 푸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새봄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 자체의 생명력을 노래하는 것을 넘어 또한 "농부"를 노래하고 있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농부"는 "보리"가 추위에 얼지 않도록 호미와 고무래로 흙덩이를 낱낱이 부숴가며 정성껏 묻지만, 너무 깊게 묻으면 움이 나오기가 힘들므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잘 새겨 적당하게 묻는다. 곧 "보리"의 삶과 "농부"의 삶은 일치한다. 그리하여 "너,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한흑구의 인식은 "나는 새벽이 오기 전이 제일 어둡다고 말한 선철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어둡고 답답한 밤이 어서 다해지기를 기다리는 밤도 적지 않다."(「새벽」)라는 것으로, 또한 "이북에 있는 나의 집"(「밤을 달리는 열차」)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려는 의지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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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흑구는 1958년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1974년 정년퇴임했다. 그리고 1979년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동안 수필집 『동해산문』(일지사, 1971)과 『인생산문』(일지사, 1974), 수필선집 『보리』(범우사, 1975) 등을 상재했다. 이 시기의 수필 중에는 본명 세광(世光)에서 필명 흑구(黑鷗)를 쓰게 된 사연을 밝힌 「나의 필명의 유래」(1974), 청마와 미당과 지훈과 교분을 나누었던 일들을 회고한 「문단 교우록」(1971), 포항의 바다를 집중적으로 그린 「동해산문」(1969), 수필의 형식과 유형을 논한 「수필론」(1969), 수필의 형식과 정신을 논한 「수필의 형식과 정신」(1971) 등이 그의 삶과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흑구는 이 시기에 작품을 많이 썼다고는 볼 수 없지만 꾸준히 쓴 셈이다. 그리고 "어떠한 산문작품이라 할지라도 시정신이 내포되어 있지 않으면 문학이 될 수 없을 것이다."(「싸라기 말」), "내용이 없이도 형식만은 존재할 수 있으나, 형식이 없는 내용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수필의 형식과 정신」), "수필도 말로써, 글로써 표현되는 것인 만큼 하나의 예술적인 문학작품이 되어야 할 것이다."(「수필론」)라고 말했듯이 작품다운 작품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참되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가치를 지향했다.
하루라도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비가 옵니다」 부분
그냥 속임수 하나도 없이, 서늘한 그늘만 드리우는 사명 하나만을 갖고서도 저렇게 오래 살 수가 있다. 「노목을 우러러보며」부분
제비는 곱고, 착하고, 신사와 같이 믿음성이 있어서 사람을 믿고, 친하여 사는지도 모른다. 「제비」 부분
온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가을의 된서리 속에서 과피가 터질 때까지 정열을 간직하고, 또한 터져 나온 그 기개의 참되고, 아름다운 결정이여. 「석류」 부분
그들은 나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속삭여주고 말해준다. 조금도 거짓이나 부정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그 참된 뜻만 말해준다. 「5월의 중앙선」 부분
작가에게 있어서 진실의 문제는 영원히 고민하면서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正義)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利他性)이다.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과 같이 도덕성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도덕적 승인을 얻어낼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게 될지라도 종국적으로는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관점은 개인보다는 집단적 인간의 행동을 중요시하고 있으므로 주로 종교적 도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개인의 도덕과는 대립하게 된다. 따라서 작가의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한흑구가 살아가던 시대는 개인의 도덕이 참으로 존재하기 힘든 시대였다. 일제 강점기, 혼란한 해방기, 6·25전쟁, 군부독재 등으로 이어진 시대는 한 개인이 견고한 자신의 도덕 위에 삶을 세울 수 없는 불확실한 때였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기를 자랑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연극처럼 보였고 깨끗한 정보를 구할 수 없었으며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주어진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의 도덕이 개인의 도덕을 쉽게 억눌렀다.
한흑구가 살아가던 시대의 사회 도덕은 '반공'이 정점이었다. 그리하여 그 '반공'은 왕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옥죄듯 개인의 도덕을 압박했다. 사회의 도덕이 요구하는 규범에 개인의 도덕이 착하게 순응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개인의 도덕은 자기를 헐값에 팔아넘기는 일인지 알면서도 자신의 울타리를 뛰쳐나갈 수 없었다. 더욱이 경제개발 정책으로 인한 물질주의의 본격화로 인해 전통이 파괴되고 가훈이 비판받는 현실의 도래에서 사회의 도덕은 거부할 수 없는 진리로 보였다. 따라서 혁명·진보·민주·평등·정의 등의 가치는 추상적으로 여겨졌고, 대신 절약·정직·인내·성실 등의 가치가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되었다.
한흑구는 '자신을 속이지 말자'라는 다짐을 작품의 지배소(支配素)처럼 곳곳에서 했지만 동시대에 횡행했던 사회의 도덕에 대항하지는 못했다. "인내하자"라는 면도 마찬가지이다. 작가 정신이란 개인의 도덕을 갖춰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설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시 같은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작가는 메마른 대지에서도 잎을 피우고 향기를 내는 나무의 생명력을 노래하기 이전에 그 아픔을 먼저 고민해야 되는 것이다.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 출생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저서 및 편저 {한국 민중시 문학사} {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 {지식인 시의 대상애} {한국대표노동시집} {페미니즘과 에로티즘 문학} {한국 현대 대표시선}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집} {한국근현대여성의 일상문화}(9권)등.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