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무슨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무려 36년 만이다.
지난 36년 동안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는데,
바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관련된 것이었다.
고교시절 이야기를 쓴 김에 이어서 쓴다.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국민의례를 하면
국기에 대한 '경례'에 '맹세'가 늘 따라다녔다.
그것은 뺄 수가 없는 의례로 보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더니 조회시간에는
맹세를 했으나 문학의 밤 같은 데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도 2~3초간
아무 말 없다가 그냥 "바로"
했다.
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 않느냐고
직접 물어본 바는 없으나,
아마도 국기에 대한 맹세가 유신독재와
관련되어 있으리라 여겨 은연중에
거부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똑부러지게 대답해줄
사람도 없었을 것 같다.
기껏해야 고등학생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문학의 밤은 10월초에 있는
축제 때 했는데
고3은 직접 참가를 하지 않아도
참관은 했었다.
그리고 고3 중에 한 명이 사회를 봐줘야 했다.
다른 놈들이 아무도 안 한다고,
못한다고 빼는 바람에
순전히 밀려서 내가 팔자에도 없는
사회를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문학의 밤이
이상하게 인기가 있어서
행사장은 꽉 찼다.
그 앞에서 사회를 보려고 하니
많이 떨렸다. 국민의례를 하겠다고
모두 일으켜세우고
"국기에 대하여 경례" 했다.
잠시 후에 그냥 "바로"
하면 되는데,
어릴적부터의 입버릇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까지
했는데 뒤에서 어떤 놈들이 "아휴, 씨발"
하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이 벌개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까지
했는데도 "아이, 저, 씨발"로 욕의 강도와
소리는 더 커졌다.
'야, 임마, 내가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터진 거야. 좀 봐줘' 하는 심정이었다.
친구라는 놈들이 내 입장을 조금만
헤아려줬으면 참아줄 만했을
텐데, 자기 선명성을 드러내려고
그랬는지 욕을 멈추지 않았다.
국기에 대한 맹세 하다 말고,
내 입에서
"야이, 씨발아, 그럼 네가 사회보든가"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하고
간신히 끝내기는 했다.
땀이 흐르고,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얼떨결에 맹세를 하고는 나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 초장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시작했으니
진행은 엉망이었다.
한 달 이상을 준비한 후배들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 사진은 1980년, 그러니까 우리가 2학년 때 문학의 밤을 끝내고 찍은 것. '국기에 대한 맹세' 트라우마는 이듬해 고3 때 생긴 것이다. 왼쪽 양복 입은 분이 지도교사 전신재 선생님, 머리가 길고 사복을 입은 이들은 졸업한 문예반 선배들이다.
그날 이후, 나는 국민의례를 해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았다. 그때의 그 당혹스러움으로
인한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가 들릴 때마다,
아니 혼자 생각만 해도
어떤 놈이 뒤에서 "씨발" 거리던 게 떠올라
오금이 저렸다.
그래서 광복절 기념식 같은 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 유튜브를 보다가 어떻게
올해 광복절 기념식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날이 오면> 노래를 들으려고 그랬다.
기념식 공연에서 옛 애국가를 애국지사가
부른다고 해서
처음으로 돌아가 보았더니,
글쎄,
국민의례를 하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것이다.
위의 동영상 2분20초에 나온다.
파시즘의 잔재 운운하는 논란이 있어서,
그 사이에 사라진 줄 알았더니
내용만 조금 바뀌어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얼른 찾아봤더니 맹세를 계속 해왔던 거다.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말이다.
그러니까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내가 했다고 해서 그렇게 욕먹을
이유도 없거니와 트라우마까지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토록 오래 묵은 트라우마가
이렇게 쉽게 풀리니
조금 허탈하다.
그때 제일 큰 소리로 "씨발" 거렸던
놈은 요즘도 만나는 친한 녀석이다.
서울 가서 만나면
이 이야기 꼭 해주겠다.
뭐라 말하나 보자.
*비염, 아토피, 분노조절 장애 · ADHD 등으로 고생하시는
분들,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분들은 보세요.
나홀로잡지 <위클리성우제>가 추천, 소개하는
캐나다산 건강보조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