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우리말로 알아듣기 쉽게 설교해주세요.~
태초에는 지상의 구음이 하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높게 쌓는 것을 보시고 각 종족과 씨족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도록 구음을 흩트리셨다. 그제야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는 우상 만들기를 그쳤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제각각이게 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현재 지상에는 7,000여개의 언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언어로 기도하든 그 모두를 다 알아들으시고 합당하게 응답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각 교회에서 성도를 상대로 설교하시는 분들은 우리 말로 성경에 쓰여있는대로 말씀을 전해도 은혜를 받을터인데 굳이 영어로 바꾸어 설명하느라 애쓰는 것을 본다. 우리 말글이 익숙한 우리나라의 성도들에게 말이다.
심지어는 '영어성경에 과거분사완료형으로 쓰여있느니, 미래진행형으로 표현했느니' 하며 마치 영문법 학자처럼 우리말 문장을 애써 영문법으로 해석해주려는 설교자들이 많다. '영어성경 킹 제임스 버전'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왜 그렇게 영어성경의 표현에 매달리는 것일까. 진짜로 영미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영미식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참석교인들 가운데 다국적 이민자들이 많아서 그들에게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겠다는 배려에서일까. 참 안타깝고 아쉬운 현상이다. 세계의 여러 언어 중 가장 아름답고 쉽다고 평가되고 있는 우리말글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운 대목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영어가 아니고 우리말 성경의 번역원본인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로 설명함이 옳을 것이다.
창세기12장3절에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는 하나님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도 하고 복 대신 저주를 내리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복'은 하시지 않는다. '축복'은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복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 복을 빌어달라는 축복을 요구하는 것은 보통의 망발이 아니다. 성경 66권의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대목은 없다. 유명 신학대학교의 총장이라는 분도 새벽방송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매일 되풀이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참 한심하고 불경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필자의 이같은 지적에 대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영어성경에도 복과 축복을 같은 단어 bless를 사용하고 있다며 항의했다. 이때 필자는 우리말 성경의 원전인 히브리어 성경은 복을 '아쉬례', 축복은 '바라크'라고 구분해서 표기하고 있으며 헬라어 성경에서도 복은 '마카리오스', 축복은 '율로게오'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한글 구약성경을 최초로 번역하여 편집한 사람은 게일 호머 헐버트(Gale Homer Bezaleel, 한국 이름: 기호열, 1862-1941)라는 선교사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 로스 선교사가 신약성경 번역을 완료한 후, 구약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인 번역자들과 협력하여 구약성경 번역 작업을 진행하여 1910년에 한글 구약성경 번역을 완성했다.
그는 성경의 첫마디 '태초에'라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בְּרֵאשִׁית (B'reishit)'다. 영어성경은 'In the beginning'이라고 번역했다. 당시까지의 우리 말로는 '최초에'가 가장 근접한 표현이었다.그런데 게일 선교사는 머리를 저었다. 그냥 최초가 아니고 '최초의 최초'인 단어가 없느냐고 동역자 조선인에게 채근했다. '태고'라는 단어가 있다 했으나 그것도 아니라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단어가 '태초'다.
이렇듯 세심하고 정성을 다해 만든 성경인만큼 '일점 일획도 변개할 수 없는 것'인데 '복'과 '축복'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해 '하나님의 축복' 운운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 땅의 10만 설교자들이여~. 제발 '하나님의 은혜인 복'만큼이라도 하나님께서 노하시지 않도록 올바르게 구사해주었으면 한다.
<다음은 '올바른 우리 말로 설교해 주세요'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