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시대를 살아가기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대로를 기억에 떠올리면,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단군 할아버지를 뿌리로 하는 배달의 민족이고 타민족과는 다른 우수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일종의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주변 강대국의 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의지적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민족 사상에 기독교적 가치가 접목되고 특히 유대민족의 선민사상과 중첩되면서 차별적 민족주의와 배타적 신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그 반증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기록한 신약 성서는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문화(Judaism)와 헬라문화(Hellenism) 사이의 반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된다는 점은 참으로 놀라운 역발상이었지요.
아직도 우리 사회 특히 한국 교회 안에 깊이 뿌리내려진 신앙적 배타성과 인격적 차별성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동반될 수 있을까요?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종족에 우열이 없으며, 문화에도 높고 낮음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낮은 출산율을 안타까워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이 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더불어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포용력을 키워야 하리라 봅니다. 이것은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든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2:14
마을 논
우리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를 의, 식, 주라고 합니다. 학창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의 가정대학에는 의생활과와 식생활과와 주생활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경쟁률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우리가 즐겨 쓰는 그 순서가 그대로 학과 선호도와도 일치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의 순서는 옷이나 집보다는 먹거리가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조상들은 먹거리를 위해 논과 밭을 일구기 시작했으며 어느 새 밥을 주식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쌀이 필요하고 쌀을 위해서는 벼가 필요하고 벼를 위해서는 논이 필요하며 그 논을 갈기 위해서는 소가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농경생활을 중심으로 한반도에는 농경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지요`. 유목민족이 목축업을 기반으로 목축문화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입니다. 나 어렸을 때 우리의 인사는 “밥 먹었니?”와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라 그런 인사법이 생겨나기도 했겠으나 ‘밥’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부자의 기준도 돈이 아니라 몇 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또한 가족을 함께 밥 먹는 ‘식구食口’라고 하고 여기에서 ‘밥상 공동체’라는 말이 나왔으며 ‘밥이 하늘’이라는 명언도 가능했습니다.
점차 식생활이 서구화 되면서 밥이 빵과 고기로 대체되고, 자연스레 경작되는 논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해도 아직까지 농촌에서는 논의 벼가 잘 자라 낫을 기다리는 때가 되면 농부의 신바람이 절로 풍년가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농사꾼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마음에도 그러한 정서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들판의 논을 뒤덮은 누렇게 익은 벼이삭을 보면 무언가 솟아오르는 기쁨과 즐거움 또 뿌듯함과 감사가 생겨나나 봅니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로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복을 받는다.”
시편 128;2-3
홀로-외로움-고독
가을로 접어드는 9월의 어느 한적한 오후, 하천의 둑길을 걷고 있는데 하얀 새 한 마리가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백로白露 절기를 지난 백로白鷺 의 자태가 더욱 고상해 보입니다. 제법 오랜 시간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어 처음에는 당연히 먹이를 찾고 있겠지 생각했으나 이미 물고기 몇 마리는 잡아먹은 것 같습니다. 점심 한 끼 잘 먹고 난 다음의 한적한 오후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는 듯, 나도 모르게 ‘홀로 나는 새’ 라는 노랫말이 읊조려집니다.
홀로는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고독을 낳습니다. 물론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도 있기는 해도 역시 고독은 어느 집단이건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왔슴을 뜻합니다. 나 혼자서 홀로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홀로는 일단 외견을 말하고 외로움이 감정의 상태라면 고독은 이성의 차원이 아닌가 합니다. 외로움의 감정이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 될 수 있다면 이성적 고독은 철학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순서를 바꾸면 외로움이나 고독은 홀로의 상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억울해 하거나 두려워 할 까닭이 없는 것은 그로 인해 나만이 홀로 느끼는 외로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외로움을 담고 빚을 필요가 있습니다. 도자기를 빚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고독의 물감을 입혀나가는 겁니다. 고독의 채색화! 이렇게 작품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께서는 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요한복음 7;53-8;1
난꽃 피우기
이러저런 경조사 때 선물로 받은 ‘난초’가 아직까지 여러 개 남아 있습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으나 다른 화분에 비해 난은 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처음 받을 때의 그런 꽃을 다시 보기는커녕 잎을 살리는 일도 쉽지가 않았지요. 지금도 집 뒷켠에는 빈 화분들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닥의 이파리로 버티고 있는 화분이지만 살려 볼까 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물주는 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중 어느 한 화분의 난초 잎사귀가 제법 풍성하게 뻗쳐오르더니 그와 함께 꽃대도 하나 둘씩 올라왔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난꽃이 만개한 것입니다. 나는 그저 물만 열심히 주었을 뿐인데요. 열어놓은 창가의 바람에 실려 그윽한 난향蘭香 이 코끝에 와 닿습니다. 서양란과 동양란의 차이는 그대로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의 차이를 잘 드러내는 좋은 본보기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양과 음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화려하거나 진하거나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은은한 향과 은근한 멋을 조금은 수줍은 듯이 드러내는 어쩌면 드러낸다기보다는 드러난다는 말이 어울릴 그러한 아름다움이 동양란으로 대표되는 동양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몇 년 만에 ‘난꽃 피우기’에 성공했습니다. 꽃내음을 맡으며 ‘꽃을 핀다’는 말을 음미합니다. 꽃을 사람의 삶에 비유하여, 꽃을 활짝 피웠다 아니면 꽃망울도 채 피우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말하지요. 이른바 성공적 삶으로 자신의 꽃을 잘 피우고 간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로 하여금 그 자신의 꽃을 잘 피우도록 물을 열심히 준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 보다 제자의 성공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그런 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 대표되는 직업이 교육자일 것입니다. 이 땅의 선생님들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