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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장희빈張禧嬪)
대빈묘(大嬪墓)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서오릉西五陵) / 서오릉관리소 02-359-0090
희빈 장씨
1659년(효종10년) 9월 19일~1701년(숙종27년) 10월 108일
조선19대왕 숙종의 빈(嬪)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 옥산부원군 장형(玉山府院君 張炯), 생모 파산부부인 윤씨(坡山府夫人 尹氏)의 딸로,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궁궐로의 입궁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어릴때 부터 궁궐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대왕대비전(자의대비)의 궁녀로 숙종이 문안을 드리러 찾았다가 장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자 자의대비가 숙종에게 하사하였다 합니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윤(昀, 조선20대왕 경종)'과 '성수(盛壽, 태어난해에 요절)'를 낳은 여인으로,
조선 역사상 궁녀출신으로 왕비까지 올랐던 유일의 여인입니다.
우선 글을 쓰기전에 역사는 '실록'에 의존 할 수 밨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록이란것이 임금을 중심으로 쓰이는 것으로, 당시기에 집권한 당파에 의해 이야기의 방향이 좌지우지 됩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장희빈이 희대의 악녀, 요부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숙종의 시대는 조선 역사상 당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대로 정권의 당파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또한 내일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장희빈이 죽음을 맞이할때는 정권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실 조선왕릉에 대한 포스팅을 하면서 장희빈에 대한 부분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사진자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종의 생모로, 숙종의 죽끓는 변덕에 희생된 여인중 한사람으로, 부족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니다.
'희빈장씨(禧嬪張氏)'
우리는 보통 '장희빈(張禧嬪)'이라 부릅니다.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예(禮)의 나라이지요. 윗분들에게 매일같이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예는 임금은 물론, 동궁도 가져야 할 기본입니다. 숙종에게는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있었습니다. 동궁 시절, 자의대비전에 문안을 드리러 갔다가 그 곳에서 궁녀 장옥정을 발견하였고, 장씨의 뛰어난 미색에 반한 숙종은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자의대비는 장씨를 숙종에 하사하게 된것입니다.
이후 숙종이 즉위하였고, 숙종6년(1680년)원비 인경왕후가 승하하면서 숙종은 장씨의 처소를 자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장씨를 곱게 보지 않고 있었지요. 장옥정이 숙종의 지나친 총애를 받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경신환국(庚申換局)'과 관련된 일입니다.
당시 명성왕후의 백부인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남인이었던 영의정 허적이 숙종의 허락없이 왕이 사용하는 악(幄, 휘장이 있는 천막)을 사사로이 사용한 것으로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데, 서인이었던 김주석이 이 참에 남인을 몰아내고자 허견의 옥사(또는, 삼복의 변三福之 變)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삼복(三福, 인평대군의 세아들 복창군福昌君, 복평군福平君, 복선군福善君)과 허적의 아들 허견이 결탁하여 복선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역모를 꾀함을 고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허적을 비롯한 허견과 삼복들은 처형당하였고, 대부분의 남인들이 대거 실각, 사사당하게 되면서 남인들은 거의 축출을 당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었지요. 바로 이과정에서 희빈장씨의 아버지의 사촌형인 장현(張炫, 1613~?)이 삼복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김석주의 주장으로 유배에 보내져 멸문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부분을 명성왕후가 염려하고 있던 것이지요. 김석주는 명성왕후의 백부였고, 장현은 희빈장씨 아버지의 사촌형입니다. 결국 장옥정이 숙종에게 총애를 받게 된다면 훗날 자신에게 보복을 행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명성왕후는 장옥정을 비천한 역관 출신이며 장옥정의 어머니인 윤씨는 남편이 있음에도 자의대비의 사촌동생인 조사석과 간음하여 장옥정을 낳았다면서 장옥정을 강제출궁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었고, 장옥정의 강제출궁의 실제는 장옥정이 남인이었던 이유이고, 숙종의 총애로 자신에게 보복을 할것에 대한 견제입니다.
이로서 남인일파가 실각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것입니다
1680년, 결국 장옥정은 강제출궁됩니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지극히 정치적인 자의극으로 가례를 서두르게 됩니다. 숙종7년(1681년) 1월 계비 간택령을 내리고, 3월에 들어 명성왕후의 친정가문과는 원수지간인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딸, 14살의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간택이 됩니다. 이는 명성왕후와 송시열, 민유중간의 정치적인 결합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지요.
그럴것이 숙종의 마음에는 오로지 장옥정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민씨는 명성왕후의 정략에 의한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흘러 숙종9년(1683년), 숙종이 원인모를 병에 걸리자 명성왕후는 무당의 말을 고지 듣고 곡기를 끓고, 홑치마만을 두른채로 냉수욕을 하는 물벌을 섭니다. 결국, 독감에 걸리게 되었으나 숙종의 병중이라 치료를 하지 않다가 12월 5일, 42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모후의 3년상을 마친 숙종11년(1685년),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 들입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 어미의 마음은 모른체 하고 미색의 장옥정을 기다린것이지요.
이로서 인현왕후와 장옥정은 어쩔수 없이 대립구도에 서게 됩니다. 지위로는 인현왕후가 높을 수 있으나, 임금의 사랑은 장옥정이 독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오릉에 자리한 희빈장씨묘
처음에는 광주 오포면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1969년 도로공사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이장 된것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서오릉에는 숙종과 1계비인경왕후가 잠든 쌍릉과 2게비 인원왕후가 잠든 '명릉(明陵)'과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가 잠든 '익릉(翼陵)'이 함께 있는 곳이지요.
한시대를 살아간 여인들의 한숨이 서로 엉키는 공간이 되버렸습니다.
자, 장옥정의 궁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한 장옥정은 안하무인격이었지요. 임금과 사랑놀음에 때와 장소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종이 장옥정을 희롱하려 하자 장옥정은 내전으로 뛰어들어 '저를 살려달라'는 앙탈을 부리게 됩니다. 내전은 인형왕후의 거처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같던 장옥정이 자신의 앞에서 임금을 두고 앙탈을 부리는 모습을 보게 된것이지요. 이에 인현왕후는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고자 회초리를 들고 매질을 하기에 이릅니다.
숙종의 장옥정에 대한 총애가 날로 깊어지자 인현왕후는 숙종12년(1686년), 서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증손녀 '영빈김씨(寧嬪金氏)'를 후궁으로 입궐시킵니다. 그러자 숙종은 영빈김씨를 숙의에서 소의로 다시 종1품 귀인으로 봉하게 합니다. 이것은 장옥정을 보호하기 위한 숙종의 계략이었지요.
당시 인현왕후나 대신들은 장옥정을 출궁시키기를 바랬습니다. '옛 부터 국가의 환란은 후궁을 총애함에서 나왔으며, 후궁의 화근은 대개 장씨와 같은 인물들이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숙종은 이러한 모든 상소를 거절하고 오히려 12월에 들어 장옥정을 종4품 '숙원(淑원)'에 봉하여 정식적인 후궁으로 만듦으로 더 이상의 출궁요구를 없애게 합니다. 그리고는 대놓고 숙원의 처소를 들락거렸던 것이지요.
숙종14년(1688년), 자의대비가 승하하고, 숙의장씨는 정2품 '소의(昭儀)'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소의장씨는 왕자 '윤(昀, 조선20대왕 경종)'을 낳았습니다. 숙종은 크게 기뻐했겠지요.
그러나 왕실의 분위기는 싸늘했습니다. 또한 숙종의 장남의 탄생에 대한 축하도 자의대비의 상중임을 핑계로 열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숙종은 노여워 하기 시작합니다.
이듬해인 숙종15년(1689년), 숙종은 왕자에게 원자의 명호를 주기로 합니다. 대신들은 반발하였지요.
그러나 숙종은 장옥정의 아이를 왕자를 정할것을 명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자는 벼슬을 놓고 물러가라며 호통을 치기에 이릅니다. 그중 이조판서 남용익(吏曹判書 南龍翼, 1628~1692)이 이르기를 "중전의 춘추가 20세로 한창이고, 왕자가 태어난 지 불과 3개월이므로 서둘러 원자를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표하며 거듭 신중을 기하기를 원하자, 숙종은 그를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그로부터 5일 후,
왕자에게 명호를 내려 종묘사직에 고하고, 원자의 생모인 소의 장씨를 정1품 '희빈(禧嬪)'으로 책봉합니다.
이에 대하여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이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후궁의 아이를 원자로 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두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대노하며 그의 관작을 모두 삭탈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해 6월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중에 사약을 내려 사사시킵니다.
이 후, 숙종은 서인 위주의 정권을 대대적으로 교체 시켜버립니다. 삼사(三事, 삼정승), 승정원, 사간원등의 서인들을 파직하고, 경신환국으로 실각한 남인들을 대거 등용시킵니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합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희빈장씨의 부친 장형(張炯, 1623~1669)을 영의정에, 조부 장수(張壽)는 좌의정, 증조부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함으로 예가 없던 한가문이 삼사를 맡게 됩니다. 또한 그녀의 외조부 윤성립(尹成立, )을 종4품 첨정에서 정2품 정경으로 추증하였고, 시장의 면포상인이었던 외삼촌 윤정석(尹廷錫)을 사포별제(司圃別提)의 직위를 내리도록 합니다. 이로서 희빈장씨가 비천한 역관출신이라는 손가락질에 벗어나게 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4월 23일, 인현왕후의 생일입니다.
그러나 숙종은 대왕대비의 상중임을 들어 하례의식을 생략하라 하였으나, 대신들은 국모의 권한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중전에 하례를 올리게 됩니다. 이에 숙종은 인현왕후와 크게 다투게 되자 숙종은 대신들앞에서 중전을 두고 '교사스럽고 간사한 부인'이라며 '민씨를 국모로 여기는 자는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말라.'며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안국동의 사가로 폐출시키고, 궁에 남은 민시의 물건을 모두 태워버리는 가 하면, 가례를 올릴때 입었던 장복 역시도 태우도록 합니다.
14세에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10년동안 왕후의 자리에 있었으나, 남편 숙종은 장옥정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숙종에게 버림받은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숙종의 단순한 환국정치의 일환이었지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참 모진 술수입니다.
인형왕후 폐출 뒤, 숙종은 계비 간택을 하지 않습니다.
숙종16년(1690년), 대왕대비의 복상이 끝나자, 원자의 생모인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봉한것이지요. 이로서 후궁 소생의 원자가 정통성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바로, 궁녀출신으로 후궁의 자리에 오르고 끝내 왕후의 자리에 까지 오른 '조선 역사 최초의 사건'이 됩니다.
왕비가 된 중전 장씨,
한낮 역관의 딸에서 조선의 국모가 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중앙무대를 밟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숙종의 총애가 있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당시 종6품 포도대장이었던 오빠 장희재(張希載, ? ~1701)의 신분을 수직상승시켜 종2품 포도대장까지 맡게 됩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뛰어난 미모뿐인 준비되지 않은 국모와 갑자기 얻은 높은 벼슬로 무서울 것없는 세상이 된 그들에게 엄청난 재물을 축적하게 해 줍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남인들을 절차와 상관없이 등용하면서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한 권력남용은 남인들의 세상이 되면서 국가의 기강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숙종은 남인들의 득세와 중전의 기고만장함에 서서히 마음을 닫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숙종19년(1693년),
숙종의 승은을 입은 무수리 '최씨(훗날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임신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숙종은 직접 후궁첩지를 내려 최씨를 숙원(淑媛)에 봉하게 됩니다. 그러나 10월에 숙원이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두달만에 요절하였고, 다시 임신을 한 숙원은 이듬해 9월 아들을 낳으니 '연잉군(延礽君, 조선21대왕 영조)'입니다. 이 일은 숙종이 이미 중전에게서 마음이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훗날 중전장씨와 숙원최씨의 대립으로 불거지게 되는 것이지요.
숙종20년(1694년), 서인들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꾀하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이에 남인 영수 민암(閔黯, 1636~1694)이 이를 기회로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국청을 설치하였고, 숙종은 이를 허락합니다. 그리하여 김춘택, 한중혁등을 잡아들여 가혹한 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숙종은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단행합니다.
이유를 들기를 서인의 역모를 조사하라 하였는데,
의금부가 방자하여 마음대로 옥사를 늘렸으며, '죄를 지었던 자가 지금은 국문을 하고 있으며, 국문을 하던 자가 지금은 처형되고 있다.'면서 '고하며 대질심문을 청하고, 대질이 끝나면 처형하기를 청하니 결국 이름댄 자들은 모두 죽일것이다.', '이는 임금을 우롱하며 신하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 통탄스럽다.'며, 국문에 참여했던 대신들을 모두 삭탈관직하여 유배를 보내고, 민암과 의금부 당상관을 유배보내 사사시키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대신들이 숙청 되었지요. 더불어 밖의 승정원들도 모두 이 일을 알면서도 모른체 하거나 흉계를 꾸미는 것이라며 대궐밖의 대신들까지 모조리 파직시켜 버립니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변덕을 가진 임금'입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고, 그에 반해 서인들은 다시 등용이 됩니다. 송시열과 김수항등도 다시 복작되었지요.
그러면서 숙종은 인현왕후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합니다.
장옥정은 왕자를 낳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자 권세를 휘두르는 모습에 정을 떨어진것이에 반해, 인현왕후는 늘 조용한 성품으로 숙종의 뒤에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에 대한 잘못을 일컫는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의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숙빈최씨가 읽어 줌으로서 인현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다고도 합니다.
결국, 그해 4월 숙종은 민씨를 다시 궁으로 불러 들였고, 왕비 복위령이 내려집니다. "한 나라에 둘의 왕비가 있을 수 없다."면서 장씨는 중전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처소 역시도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겨집니다.
이 와중에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남구만의 중재로 일단락 되었으며, 장씨의 오빠 장희재 역시 노론의 공격으로 처형 당할 위기였으나, 세자에게 미칠 영향이 크다하여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민씨가 복위 된 후, 왕세자는 비록 서자이나 임금의 적통자로 인현왕후에게 입적 됩니다.
그렇게 희빈장씨와 인현왕후의 대립은 끝내 인현왕후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강등된 희빈은 후궁의 작위를 가졌으나, 왕세자의 생모로서 후궁의 위치도 아닌 애매모호한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유명조선국옥산부대부장씨지묘
장희빈은 곱게 물러나지 않았지요.
비록 숙종의 견제에 의한 강등이었으나, 인현왕후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던 숙종 년(1701년) 인현왕후는 복위 8년만에 승하하게 됩니다. 오랜지병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희빈장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려고 합니다.
이는 숙빈최씨에게 치명타가 됩니다.
그럴것이 숙빈최씨는 첫 아들을 잃고 이듬해에 차자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희빈은 중전의 자리에 있을때 숙빈최씨를 모질게 대했습니다. 이는 숙종의 두번째 왕세자를 낳은 어미로서 희빈에게는 위협적인 요인이 될것이라는 판단에서 입니다. 역관 출신의 자신이 중전의 자리에 올랐는데, 무수리 출신의 최씨인들 중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지요.
숙종 역시도 희빈을 왕비에 복위시키는데 탐탁지 않습니다.
이미 내쳐진 그녀의 처소를 이후에는 찾은 적도 없었지요. 그만큼 희빈의 기고만장함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년(1701년) 9월, 숙빈최씨가 숙종에게 장희빈의 '무고(巫蠱, 무술이나 방술로 남을 저주하는 것)'를 알리게 됩니다.
희빈장씨가 처소 서쪽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라는 것이지요. 즉, 인현왕후는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희빈의 저주로 죽은것이라고 숙종에게 고합니다. 평소 병석에 누워서도 자신의 병치레에 대해 인현왕후는 "반드시 빌미가 있다."라고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숙종은 태자방(太子房,=국무당國巫堂) 가족들에게 증언을 받고, 장씨의 오빠 장희재, 그의 첩 안숙정, 그리고 취선당과 동궁전의 궁녀, 궁인들, 태자방의 뒤를 이었던 무녀까지 압송하여 고문을 통한 범죄일체를 자백받게 됩니다. 이로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자진하라'고 명하였고, 제주도로 유배간 장희재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동시에 '빈어(嬪御, 임금의 첩, 후궁)에서 후비(后妃, 임금의 계비,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장씨로 하여금 스스로 자진하게 하라" 그러나, 희빈을 명을 거부합니다.
"이몸으로 낳은 세자를 가까이 보게 해 주소서."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전 마지막 부탁입니다. 숙종은 세자를 희빈 가까이 부른 순간, 장씨는 세자의 아랫도리를 잡아 고환을 뜯어내고는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너희들이 무사할 줄 아느냐!"며 악을 쓰며,사약 대접을 내 던집니다. 결국 세자는 놀라 기절하였고 불구가 되었지요. 장씨의 저항이 심하자 이에 숙종은 영숙궁으로 가서는 장시를 끌어내라 명하였고, 희빈에게 강제로 사약을 먹이라 합니다. 숙종의 앞에서도 장씨는 발악을 합니다. 궁녀들이 달라붙어 팔과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안으며 사약을 먹이려 했으나 이번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거부하자 이번에는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3그릇의 사약을 먹고 나서야 죽음에 이릅니다.
--여기까지는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와 당시 노론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수문록(隨聞錄)'의 기록입니다.
"장씨로 하여금 스스로 자진하게 하라" 그러나 희빈은 명을 거부합니다.
자신에게는 세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모를 저주한 대역죄인이었지요. 그래도 희빈은 희망을 놓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인들과 무당등은 고문을 통하여 '희빈이 지시한 일이다."라며 자백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숙종은 일주일 후, 다시 "스스로 자결하라" 는 명을 내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자를 앞세워 조정에 도움을 청하니, "희빈의 죄가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세자의 어미이니 관대한 처벌을 해야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소를 올린 대신을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10월 8일, 승정원 통해 공식적으로 희빈에게 자결의 명을 내렸습니다. 이미 희빈에게는 아무도 없게 된 것입니다. 냉혹하리만치 결단을 보이는 임금 숙종이었기에 더 이상 구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10월10일, 희빈장씨가 향년 43세로 자결하였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됩니다.
--'숙종실록(肅宗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으로 위의 내용과는 많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후, 경종이 즉위하여 생모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합니다.
자신은 생모를 왕후로 추존하고 싶었으나, 숙종 당시 후궁은 왕비가 될수 없다는 어명이 있었기에 바로 조치할 수는 없었지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역사는 '실록'에 의한 후세의 판단입니다.
숙종의 여인들이었던 희빈장씨, 인현왕후, 숙빈최씨는 모두 숙종의 사랑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던 여인들입니다.
장희빈과의 적대관계의 기록과 성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인현왕후와 희빈장씨에 대한 판가름이 다릅니다. 거기에 숙빈최씨와 장희빈의 보이지 않는 암투역시도 장희빈을 표독스러운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암튼, 결론은 숙종이란 임금이 참 별난 성격에 유유부단하며, 변덕이 죽 끓는듯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더하여 자신의 왕권에만 집착하여 주위에 대신들의 목숨들까지 손에 쥐고 흔들었지요. 물론, 그 덕에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소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이 아니고 그 성격에 일반 양반네였다면?...
대빈묘
INFO..
옥산부대빈묘玉山府大嬪墓 / 제향일 매년 양력 11월 9일
연혁 1969년 대빈안장, 대빈릉조성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舊, 용두동 475-95) / 서오릉관리소 02-359-0090
관람시간 하절기 06:00~18:30, 동절기 06:30~17:30
관람요금 대인 1,000원, 소인 500원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주차요금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