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룡(姜德龍) ?~1627(인조 5)
조선의 무장. 자는 汝中(여중), 18세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鄭起龍(정기룡)·朱夢龍(주몽룡)등과 함께 모두 才勇(재용)이 뛰어나 三龍(삼룡)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26) 왜병이 蔚山(울산)으로 후퇴하고 명나라 군사가 尙州(상주)·대구 사이에 주둔했을 때 粮料差官(양료차관)이 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을 원활히 했고, 호남 체찰사 李元翼(이원익)의 휘하에서 體府 牙門將(체부아문장)·本部 營將(본부영장)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병마사 정기룡을 따라 성주 화원현과 고령 안림역에서 別將(별장) 禹善(우선)과 함께 三嘉(삼가)에서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折衝將軍(절충장군)에 올랐다.
강덕룡(姜德龍) (은렬공파 24 세)
1560~1627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武臣). 자(字)는 여중(汝中). 호(號)는 매촌(梅村).
18세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정기룡(鄭起龍), 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모두 재용(才勇)이 뛰어나 삼룡(三龍)이라 불럿다. 1583년 (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선조 26) 왜병(倭兵)이 울산(蔚山)으로 후퇴하고, 명(明)나라 군사가 상주(尙州)와 대구(大邱)사이에 주둔했을 때 양료차관(糧料差官)이 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을 원활이 했고, 호남 체찰사(湖南 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麾下)에서 체부아문장(體府衙門將)과 본부영장(本部營將)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따라 성주(星州) 화원현(星州 花園縣)과 고령(高靈) 안림역(高靈 安林驛)에서 별장(別將) 우선(禹善)과 함께 삼가(三嘉)에서 왜적(倭賊)을 격파(擊破)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다시 진주영장(晉州營將)을 거쳐 장기현감 때 선정(善政)을 하였고, 경상도 우병영중군(右兵營中軍)을 제수(除授) 받았다.
진주(晋州) 촉석루 아래에 공(公)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는데 비문(碑文)은 참판(參判) 박명부 가 지었으며, 절충정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700년 (숙종 26) 효자(孝子)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1856년(철종 7)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문헌] 영남인물지, 진양지, 임진전란사. 龍蛇日記,
* 묘(墓) : 경남(慶南)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연월산
* 시향(時享) : 음(陰) 10월 15일
* 부(父) : 심(深)
* 자(子) : 석윤(錫胤), 득윤(得胤), 유윤(有胤), 광윤(光胤), 흥윤(興胤)
강덕룡(姜德龍): 자(字)는 여중(汝中)이요, 호(號)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올라 임진란(任辰亂) 때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막(幕)에 달려가서 왜(倭)로 더불어 연전(連戰)하여 열두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공성일(金公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령(咸昌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오년(甲午)에 간을 만났다가 상(喪)이 끝나니 이공원익(李公元翼)이 불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으로 더불어 적(賊)을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파하고 장기현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옮아갔더니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와서 봉양하매 효성의 감동으로 고기가 들어오는 이변(異變)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하죽헌 성(河竹軒 惺)이 서문(序文)을 만들었고 선조조(宣祖朝)에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하였으며 숙종조(肅宗朝)에서 효행으로써 복호(復戶)를 명령하였으며 철종조(哲宗朝)에서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였다.
홈페이지:http://www.jinjukang.org
강덕룡 1560-1627 여중 매촌 진양 창의 영남삼룡 매촌실기 진양세고
姜德龍 1560-1627 汝中 梅村 晋陽 倡義 嶺南三龍 梅村實記 晋陽世稿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