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384-322: 62살),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 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pp. 260-329. (P. 1059).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인식론자, 정치가, 도덕론자.
들뢰즈가 기원전587년 기원후 70년을 이야기 한 것은 논리학의 체계와 다른 언어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 논리학은 진위를 구별하는 의미론으로 향한다면, 언어가 얼굴을 드러내는 기호계(기호론)가 있다는 것이다. 그 기점을 이스라엘의 신전의 파괴에서 찾았다. (50NLI)
제19장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260-278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 Στάγειρος)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3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50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철학자나 또는 중요한 인물에 대하여 연구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 철학자 이전 사람과 관련시켜 그를 연구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요, 또 하나의 방법은 그 후계들과 관련시켜 연구하는 것이다. .. 전자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점이 크게 드러나게 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그의 단점이 크게 드러난다. (260) [러셀의 관점은 계보사에 가깝다. 문제는 그 학자의 당대의 학문 상태와 사회 상황,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의 관계들을 먼저 보고, 이전의 전승과 이후의 후계구도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러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에게 준 영향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26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이전의 철학자들과 다르다. 그는 처음으로 교수다운 글을 썼다. 즉 그의 논설은 조직적이고, 서술도 제목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작업적인 교사이며, 결코 영감을 받은 예언자는 아니었다. 그의 저술은 비판적이고, 치밀하고, 단조로워, 바쿠스적인 정열을 찾아볼 수 없다. 플라톤의 오르페우스적인 요소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해졌으나, 상식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263) [논리학(오르가논)을 도구로 삼아 서술한 그의 글은 체계적이며, 다양한 학문(과학)들에도 사변적으로 체계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기에 16세기 천문학과 물리학의 등장 이래로 과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학문들 전반이 붕괴되는 과정이라고들 한다. (50NLD)]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설명하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제일 좋은 출발점은 이데아론에 대한 비란과 그 대신에 제기한 보편개념에 대한 학설일 것이다. ... 가장 강력한 주장은 “제3인간”(the third man)에 관한 것이다. 만일 한 인간이 이데아의 인간을 모방해야만 인간이 된다면, 그 인간과 그 모방한 이데아의 인간에게 다 공통된 이데아의 인간이 또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는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다. 그렇다면 그 이상적인 인간이 이상적인 동물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렇게 되면 동물의 수 만큼 이상적인 동물의 수도 많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263) [하위 개념과 상위개념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 필요하고 그러고 나서 또 이것들을 포함하는 더 포괄적 개념이 필요하고, 계속하여 무한 소급으로 간다는 것을 비판한 것은 스토아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플라톤의 상식화(常識化)라고 할 수 있다. (264) [플라톤의 존재론에서 이데아의 질적 동일성(고유성) 또는 특이성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 체계처럼 일반명사화와 고유명사화 했다고 할 수 있다. (50NLD)]
“우리가 보편개념이라고 말할 때, 많은 주어에 대하여 술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개별개념이라고 할 때, 그러한 술어가 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264)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처럼 사람은 술어(보편개념, 일반명사)이며 소크라테스는 개별개념(고유명사)이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에서 개념상으로 동물은 보편개념이며, 문장상으로 동물들 중에서 사람은 개별개념이다. / “신은 사랑(선, 미)이다”에서 사랑은, 마치 ‘태초에 사랑이 있다’처럼, 술어가 아니다. ‘신은 사랑이다’는데 자연도 사랑이다고 하면 신의 개념이 문제거리가 되며, 이 신은 개별성이다. 그럼에도 심포지움에서 소크라테스의 사랑, 고백록에서 루소의 사랑, 파우스트에서 괴테의 사랑 등에서 사랑은 술어의 역할을 한다.]
여기까지 논해 온 문제의 중심은 ... 즉 보편개념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특수한 사물들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 (265) [중세 보편논쟁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방식(in re)이다.]
우리가 ‘존은 지혜롭고, 제임스는 어리석다, 그리고 존은 제임스보다 키가크다’고 말할 경우에 ‘존’과 ‘제임스’는 고유명사이며, ‘지혜로운’ 또는 ‘어리석은’은 형용사이고, ‘보다 큰’은 관계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형이상학자들은 이와 같은 구문론(構文論)상의 차이를 가지고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해 왔다. 이 경우에 존과 제임스는 실체(實體)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은 보편개념이다. (266) [개념론에서 소크라테스는 개별개념 또는 개별이데아인데, 왜 형이상학(제일철학)에서 소크라테스가 실체일까? 그러면 소라는 종을 실체개념에 속하는데 왜 인간이란 종은 실체가 아닐까? (50NLD)]
스콜라주의 추종자들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술어가 있는데, 그것은 ‘본질(本質)’이며, ‘보편개념’과 같은 말은 아니다. / 당신의 본질은 ‘당신이 그 본성에 있어서 그것인 바’이다. .. 즉 그 사람의 본질이란 그 사람이 되기 위해 있어야 할 특질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하나의 개체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種, species)도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 (267) [개체에 앞선 종도 본질을 소유한다는 것은 플라톤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즉 사물에 앞서 본질이있다(ante rem).]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문제점은 ‘형상(form)’[ēidos, morphē /lat. forma]과 ‘질료(matter)’[hyle /lat. materia]를 구별하는 것이다. (267)
먼저 대리석 조각부터 생각해보자. .. 대리석은 질료요 조각가가 보여 준 조각상의 모습은 형상이다. .. 또한 고유한 바다의 물은 질료요 고요함은 형상이다. (267-268)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분명히 어떤 ‘형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중에 그가 어떤 의미에서 영혼을 육체의 형상이라고 말하였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문제 삼고자 하지만 지금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있어서 영혼은 유체를 하나의 개별적 인간이 되도록 하고, 또 목적의 통일성을 부여하며, 우리가 ‘유기체’라는 말과 관련시키고 있는 성품을 육체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려고 한다. 눈의 목적은 보는데 있지만, 눈이 육체에서 떠나 있으면 볼 수 없으며 실제로 보는 것은 영혼이다. (268)
사물의 형상은 그 본질이며, 일차적인 실체라고 우리는 들어왔다. 보편개념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지만, 형상은 실체적인 것이다. .. 모든 것이 질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사물들은 질료를 갖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사물들 중에서도 공간에 움직일 수 있는 것만이 질료를 갖는다. 사물들은 형상을 얻게 됨으로써, 그 현실성이 증가된다. 형상을 갖지 않는 질료는 단지 가능태에 지나지 않는다. (269)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실체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감성적이며 멸하는 것이고, 둘째로 감성적이기는 하지만 멸하지 않는 것, 셋째로 감성적도 아니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 그것이다. 첫째 부류에 식물과 동물이, 둘째 부류에 천체들이 포함된다(천체가 운동이외 다른 변화는 받지 않는다고 믿고). 셋째 부류에는 인간의 이성적인 영혼과 신이 속한다. (271)
“그리고 생명은 신에 속한다. 사유의 현실이 곧 생명이며, 신은 바로 그 현실인 것이다. 신의 자주적인 현실성은 최선의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살아 있는 존재라고 부르며, 영원한 최고선이라고 부른다. 또한 지속적이고 영원한 생명이 바로 신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1072b) (272)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에 의해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며, 또 그 실체는 감각적인 사물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실체는 어떤 크기를 가질 수 없는 존재이며, 또한 부분도 없고 분할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神)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며, 변치도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란 장소의 변화에 뒤이어 생기는 것이다.” (1073a) (272)
“신의 사유가 생각하는 대상은 그 자신에 관해서이다(왜냐하면 신은 모든 사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의 사유는 사유에 대한 사유(a thinking on thinking)가 될 것이다.” (1047b) ..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피노자처럼 인간은 신을 사랑해야 하지만,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72).
신을 “움직이지 않는 원동자(the unmoved mover)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천문학적인 고찰에서 47개 또는 55개의 부동의 원동자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074a) [부동의 원동자가 논리적 개념이 아니라 천물학적 실체였구나... 즉 우주론적 개념이구나. / 별자리의 숫자에 대해 알아볼 것: 사막과 초원에서 페르샤나 에집트가 12(24) 별자리에 상징을 맞추는데 왜 그리스(지증해)는 47개니 55개니 할까? 중국의 별자리 28수와 훈민정음의 28자모는 같은 상사(相似)구조라는 설이 있듯이 말이다. (50NLD)]
[부동의 원동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질료인(質料因)[causa materialis], 동력인(動力因)[효과인 또는 작용인 causa efficiens], 목적인(目的因)[causa finalis], 형상인(形相因)[causa formalis]이라고 불렀다. (273) - [기체(基體, hypokeimenons)가 되는 질료를 바탕[토대]으로 대상의 형상이 새겨진다. / 즉 이데아(대상)의 모습은 질료위에 새겨져 모습을 가질 때, 이데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데아가 부동이니 이것을 본뜨는 창조자(데미우르고스)는 질료(순수 뒤나미스, dynamis/ 필연)에 질서를 부여하여(작용인), 이데아란 목적에 맞게 형상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유지하게 한다. (50NLE)]
[해석상] 신은 영원히 다음과 같은 상태에 있다. 즉 신은 순수사유로서 행복과 완전히 자족 속에 있으며, 실현되지 않는 목적은 전혀 없는 존재이다. (273) - [우리말로 ‘없는 것이 없는 존재’ 즉 ‘있는 것만 있는 존재’ 그런데 ‘있을 것만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있을 것이 더 이상 없는 존재’라야 완전 자족하지 않는가? 결국 벩송은 달리 있을 것을 말한다. 어제가 아니라 아제에는 있을 것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벩송의 견해이다. 들뢰즈는 이를 (식물)-되기 또는 생성(devenir)라 한다. 즉 메시아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수는 사도이지 메시아(크리스토스)일 수 없다. 만일 다 드러낸다면 티끌까지도 불성을 발휘하는 화엄의 세계일 것이다. / 벩송은 “우주가 신들(생명총체)를 만들어내는 기계(la machine)”이라고 한다. (50NLD)]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이나 동물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영혼’[psyche]이라 불렀다. 그러나 ‘정신’[Nous]은 어떤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육신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영혼의 한 부분이 될지 모르지만, 정신을 갖고 있는 생물은 극히 적은 수이다(415a). (276)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 영혼에는 이성적 요소가 있고 또 비이성적 요소도 있다. 이 비이성적인 부분은 이중으로 식물적인 부분과 육구적인 부분으로 되어있다. 전자 어떤 생물에서나 다 찾아볼 수 있으며, 후자는 어떠한 동물도 다 갖고 있는 요소이다(1102b). (276)
“인간에게 이성이 신적인 것이라면, 이 이성에 따르는 생활이야 말로 신적인 생활이다. ... 우리가 내부에 지니고 있는 지고지선의 존재에 따라서 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 양에 있어서는 적을지 모르지만, 그 능력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보다 많은 것을 행하고,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1177b)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플라톤이 가르쳤으며, 후에 기독교가 계승한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불멸을 믿은 것 같지 않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인간이 이성적으로 되는 한 불멸의 신성(神性)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278-279) [삼위일체의 정립에서 예수를 신성으로 올린 것은 플라톤보다 한 단계 위로 인격을 신성화하고, 그리고 예수를 아버지 신의 옆자리에 앉히면서, 신자들도 그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 인접의 유사에 의해 신자들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신앙을 믿게 된다. 더 심한 사기는 죽어서 육신과 더불어 간다는 것을, 예수가 부활하여 천국에 간다고 설교하는 자들의 논법이다. (50NLE)]
제20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279-296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 순수성에 있어서 의심받지 않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책의 일부(5, 6, 7권)는 [의심받고 있다.] (279)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 행복이요, 또한 그것이 바로 영혼의 활동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이 영혼을 두 부분, 즉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눈 것은 정당하다고 한다. (279)
덕에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 두 가지가 있다. ... 전자의 덕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후자의 덕은 습관에서 얻을 수 있다. (280)
... 중용(中庸) 사상 ... 덕은 두 극단의 주간에 있다. ...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요, 너그러움은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고, 긍지는 허영과 비굴의 중용이며, 기지는 익살과 아둔함의 중용이며, 겸손은 수줍음과 몰염치의 중용이다. (280-281)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개인(great-souled man)은 기독교의 성자와는 매우 다른 인격의 소유자이다. 그는 적당한 긍지(pride)를 갖고 있어야 하며, 결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푸대접을 해야 할 사람을 천대할 줄 알아야 한다(1124b). .. 자부심을 갖고 있는(proud) 사람이나 큰 인물(magnanimous man)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술은, 이교도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의 차리를 보여주어 흥미롭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설 때, 니체가 기독교도들을 가리켜 노예노덕이라 말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282) [자발적 예속(노예성)이 기독교 도덕인데 비해, 그리스 윤리는 인격성의 완성으로 가는 길이라 다르다. 게다가 니체는 스스로 의지의 발현과 그 발현을 실현하려는 인간은 신민이나 예속의 길과 다르다. (50NLE)]
“큰 인물은 큰일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므로 그는 가장 선량해햐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참으로 큰 인물은 마땅히 선량해야 할 것이며, 그의 특징은 모든 덕에 있어서 위대성일 것이다. .. 그러므로 이 큰 인물의 위대성은, 바로 덕의 왕관(王冠)과도 같은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덕은 더욱 커지고, 덕이 없는 곳에서는 이 위대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 명예는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며, 자기가 받아야 할 크기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소의 즐거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 /.. 큰 인물은 사소한 위험 속에 뛰어들지 않는다. .. 그러나 그는 큰 위험에 대해서는 곧잘 대항한다. 그는 위험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어떤 조건하에서나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그는 남에게 이득을 깨치는 자이다. 그는 받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대체로 주는 것은 우월한 증거요, 받는 것은 열등한 증거이다. .. 큰 인물이 된 표지(標識)[signe]는 아무것도 또는 거의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기꺼이 서슴지 않고 도움을 주며, 높은 지위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위엄을 보이고, 소인들에게는 위험 같은 것을 전혀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 / 대개 자기의 감정을 숨기는 것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하여 더 염려하고 진리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는 증거로, 이러한 일들은 다 비겁한 부류에 속한다. 그러므로 거리끼지 않고 멸시하는 태도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명한다. 그는 언제나 진리를 말한다. 다만 속된 자들을 비꼬아 줄 때에는 예외이다. .. 그는 칭찬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남을 비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 그는 유익하거나 유용한 것을 손에 넣으려고 하기보다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발걸음이 느린 것이 큰 인물에 더욱 합당하며 깊이 있는 음성과 침착한 어조가 어울린다. .. 큰 인물이란 이런 사람이다. 자기의 가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비굴한 자이며, 자기의 가치보다 지나치는 사람은 허세를 부리는 자이다.”(1123b-1125a) (283-284)
본질적 구조에 있어서 최선의 것을 어느 소수의 인가들에게만 국한 시키고 그 밖의 대중들에게는 그 다음의 것으로 만족하기를 강요하는 사회 자체를 도덕적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고 했으며, 니체도 이에 동조한다. 그러나 스토아철학자들과 기독교도와 민주주의자들은 부인한다. (28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인전제정 또는 귀족정을 옹호하니 말이되는데, 니체는 다르다. 니체의 초인은 특별한 소수(초인)의 정치를 지칭하기보다, 인민이 권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자유인(초인)이 되는 급진적 민주 정치를 이루자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50NLE)]
“인간의 선(善)은 완전한 생활 속에서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1098a ). 그가 말하려는 것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지적 덕(intellectual virtues)은 목적이 되지만, 실천적 덕(practical virtues퍅 )은 덕은 오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도 마찬가지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우정에 대한 견해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정론에는 애정을 포함하여 모든 대인관계가 망라되어 있다. .. 신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 .. 인간이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는가 .. 결론적으로 그것은 선량한 사람인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한다. (289-290)
아리스토텔레스는 ... 쾌락이라는 말을 행복과 구별하여 쓰고 있다. 그러나 쾌락이 없이는 행복도 없는 것으로 그는 쾌락에 대한 태도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쾌락은 결코 선이 될 수 없다. 2) 어떤 쾌락은 선이지만, 대부분의 쾌락은 악이라는 태도. 3) 쾌락은 선이지만 최고의 선은 못 된다는 태도. 그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첫째 것을 부정하였다. 그 이유는 고통은 분명히 악이므로 쾌락은 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290)
신은 언제나 단순하고도 단일한 쾌락을 누리고 있다(1152-1154) (291)
행복은 유덕(有德)한 행동에 있을 것이며, 완전한 행복은 최고의 인간 활동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색활동[이론활동]이다. 명상[theoria]은 전쟁이나 정치나 그 밖의 어떠한 행위보다도 좋은 것이다. .. 실천적 덕은 단지 제2활동에서만 얻을 수 있다. 최고의 행복은 이성의 활동에서만 얻을 수 있다. .. “신의 축복에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며, 그의 활동은 명상적일 것이다.” (291)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더욱더 노동을 무시하였다. 이런 관점이 깨어지는 것은 19세기에 와서야 가능하다]
“자기 자신의 이성을 활동시키고, 육성해 나가는 사람은 그 영혼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고 하겠으며, 신들로부터도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 또한 이 이성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명예롭게 여기는 자들에게 보상을 주리라는 것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들 돌보고 올바로, 그리고 고상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속성은 누구보다도 철학자에게 속한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들에게는 철학자가 가장 사랑스러울 것이다. 또한 철학자들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행복할 것이다.” / 이글은 사실상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결론이라 하겠다. 다음에는 몇 절은 정치학으로 옮아가기 위한 글이다. (1179a) [사변적 사유에서 이성은 인간중심주의(목적론적)이다. 이에 비해 사키야무니가 성문을 나서 만나 것은 걸승(현자)인데, 왜 그 현자가 고행하는 거지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밖의 모든 철학자들의 윤리학에 대하여 우리가 문제 삼아야할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이다. 1) 그 윤리학은 그 안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지 않는가? [러셀: 모순이 별로 없다. /ma 주지주의의 윤리학은 영토안에서 모순이 없을 뿐이다.] 2) 그 윤리학은 저자의 다른 저술에 나타나 있는 견해와 상반되지 않는가? [러셀: 일관성이 있다. / ma 상층으로 향하는 목적론의 체계는 정합적이지만 이론적인데 비해, 윤구병: 삶이 먼저이고 철학은 다음이라 한다.] 3) 그 윤리학은 도덕문제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윤리 감정과 부합되는 해명을 하고 있는가? [심층은 다양체이다. 발현 또는 창발에 따라 다르다. 그 차히에서 각자의 감성에 따라 달리 표출된다.] (50LNE)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자비나 박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 전혀 찾아볼 수 없다.(295) [주지주의자는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스트일지 몰라도 휴마니떼르는 아니다]
대체로 말해서 그의 윤리학에는 정치적 빈곤성이 드러나 보인다. 이것은 이전의 철학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사에 대한 그의 고찰은 너무나 냉냉하고 안일한 느낌이다.(295) [플라톤보다 더 감성적인 것을 무시하여, 귀족적 여가의 학문이 된 것이다. 스토아학문이 다시 영향을 준 프랑스 혁명이 도래하여 인민이 성립할 것이다. 원효와 의상을 비교하면 원효는 인민편인데 비해 의상은 귀족편인 것도 활동의 영역과 계급 성분일 수 있다. 원효는 탈영토화라면 의상은 영토화였다. 실제로 원효의 전설을 지닌 절(寺, 사)는 신라의 영토 밖에 있다는 점이다. (50LNE)]
제2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297-311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흥미가 있고 또 중요하다. 당시의 지식층에 속하는 그리스인들이 한결같이 갖고 있던 편견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부터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준 여러 가지 원리의 근원으로서 중요한 것이다. (297)
그는 ...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카르타고 등에 대해 언급은 하였지만, 카르타고를 제외하면, 그 언급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해서 아무 말도 없으며, 또 그가 세계를 완전히 변모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다. 그의 주장은 도시국가에 국한 되어 있으며... (297) [물론 남아있는 “정치학”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소실된 정치학이 많이 있다고들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 정복지의 헌법 법률 제도를 연구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는 것은 단지 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50NLE)]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귀족정의 옹호에 대해 그 대비로서 (근대) 민주주의를 선호하면서 여러 쪽을 할애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에 대해 잡다하게 비판한다. 부의 소유에 관하여 여자와 노예에 관한 취급, 그럼에도 가정 우선에 대해, 전쟁의 승리자가 지배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 상업으로 돈 버는 것을 혐오하는 것, 고리대금의 비판, 플라톤의 유토피아에서 공산주의적 요소에 대하여 등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민주정 비판], 극단적인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민회를 법률의 우위에 두고, 모든 문제를 독자적으로 결정하였다. 아테네의 법정은 추첨으로 산출된 다수의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배심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흔히 웅변이나 당차심에 따라 좌우되기 쉬웠다. 아마도 민주주의가 비판을 받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05)
혁명의 원인에 대한 긴 논의도 있다. .. 혁명의 주요 원인은 과두정치[귀족정치 또는 군주정치]의 집권자들과 민주주의자들과의 충돌에 있었다. .. “그러나 이 두 파(派)는 모두 자기들이 정부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던 것과 어긋날 때는 혁명을 일으키게 마련이다.”(1301a) (305)
과두정에서 권력가들은 활달한 사람들이어서 어떤 나라에서는 그들이 다음과 같은 맹세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장차 인민의 적이 되어, 그들을 해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강구하겠다.’ 그러나 오늘 날의 부수주의자들은 그들처럼 솔직하지는 못하다. (305-306) [울나라 꼴꽁(극우)는 솔직하게 인민을 개돼지로 취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50NLE)]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치가 필요하다. 첫째 교육에서 정부를 선전하고, 둘째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법률을 존중하며, 셋째 법률이나 행정에 있어서 정의(正義), 즉 “비율에 따르는 평등과 각자의 자기 자신의 분배를 즐거워하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1307a, 1307b, 1310a) (306) - [세 가지 조치에 따른 정체가 사실상 민주정이 아닌가? 급진적 민주정으로 권력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달리, 권력을 보수와 진보가 합의해서 평등과 분배로 나아가는 것, 그것은 인민이 성립하여 51 대 49일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50NLE)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러니하게 마키아벨리와 같은 어조로 참주가 정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정적을] 놓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 필요하면 암살이라도 해야 한다. 참주는 공공식당이나 클럽 등을 갖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적개심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교육을 금해야 한다[박정희 박근혜 양식]. 간첩[세작]을 두되, ... 여자형사와 같은 자들을 채용해야 할 것이다. .. 시민들은 언제나 큰 사업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 왕이 “피라미드”를 만들게 한 것처럼 공사를 일으켜야 한다. 그는 여자들이나 노예들에게 권력[권한]을 주어 그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 또한 전쟁을 일으켜 신하들이 언제나 일에 골몰하도록 하는 ... (1313a, b) (307) - [이런 글을 쓴 것을 러셀은 유감스럽고 불명예스펀 것으로 보았다. / 극우파의 행위를 음모라고 하는데 음모가 아니라 이론적 근거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하다. 전쟁을 일으킨다는 공포감, 빨갱이 사냥이라는 억압, 법률이라는 도구의 편파적 적용(유전무죄, 유권무죄, 무전유죄 무권유죄), 감시와 검열, 반대자 축출을 위한 리스트 작성(블랙리스트) 등을 행한 것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었다. (50NLE)]
국토의 넓이는 언덕 위에서 바라볼 때 전체가 다 내다보일 만한 것이라야 한다. 국가는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1326b)고 하면서 동시에 대외무역도 해야 한다(1327a)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308)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도시국가는 이미 폐물이 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는 마케도니아와 대항하여 스스로를 수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스 전체가 같은 의미에서 폐물이 되어 있다. 최근에 이르러 그렇게 된 것이다. {이 글은 1941년 5월에 씀}. (309) [러셀이 이 책을 마친 것은 1945년이니 시작은 1940년 쯤에 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위기러 파쇼의 등장도 보았고, 게다가 2차 대전의 시작으로 고민이 많아서 서양철학의 지위를 숙고했을 것 같다. (50NLE)]
이 책[정치학]은 형식상으로도 완성된 것 같지 않으며, 교육에 대한 저술로 끝을 맺고 있다. ... / 아동들은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 목적은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덕적인 이상을 표현하는 그림이나 조각을 감상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309-310)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아테네의 열의가 식었으며, 아테네는 고대 문화의 중심이 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이미 다른 데 빼앗기고 있었다. ../ 야만인의 침략한 후에는 ‘신사’[원래 아테네인 남방인]는 북방 야만인들이었으며, 문화인들은 나약한 남방의 교직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르네상스시대까지 계속되었다. ... 르네상스 이후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교양 있는 신사들[인민들]이 정부에 대해 갖고 있던 관념이 점점 일반적인 국민들에게 퍼져나가, 18세기[계몽주의]에 들어와서는 절정에 도달했다. (311)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에서는 19세기에서야 인민이 아니라 지식인이 아테네를 동격하기 시작한다. 두 나라 사이의 차이는 전혀 다른 국가를 만들게 될 것이다. 좌파정권 대 우파(국가주의에서 파쇼로). (50NLE)]
제22장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312-329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기독교 철학자들이 우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이 우월성은 ‘르네상스’이후에는 대체로 상실하게 되었지만, 논리학에서의 우위는 그대로 존속되었다. 오늘에 와서도 모든 가톨릭 철학 교수들과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논리학에서 현대의 새로운 발견에 대하여 계속하여 완고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같은 낡은 체계를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다. (312) [13세기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d'Aquin, 1227-1274)를 지칭하며, 르네상스 이후의 상실이란 제5원소의 허구임을 밝힌 망원경 덕분이다. 그럼에도 논리학에 대한 고집은 언어분석학자들의 “의미론”일 것인데, 이와 달리 “기호론”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상실이란 의미에서 분석 체계와 다른 언어의 논의는 ‘구조’의 등장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보다 수학에서 공리의 붕괴(비유클리트 기하학)와 산술(단위 1)에 대한 군론의 견해에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무한 개념의 확장과 공리의 불확정성 등은 개념론와 삼단논법에 대한 위상(차원)이 협소함을 인정하게 된다. /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의 몰락과정은 새로운 학문들의 성립과정과 같은 방향이다. 간단히 말하면, 상층의 착각에 대해 심층의 생성이 발현하는 과정(방향)도 마찬가지였다. / 그래도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기초와 활용은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그것들이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50NLG)]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에서 이룬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단논법’에 대한 것이다. 삼단논법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추론이다. 대전제, 소전제, 결론이 그것이다. ... 그것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바바라(babara)”이다. (313) [AAA형식으로 불리는 이 1격A형은 256형식의 첫째이다. 256형식을 갖춘 것은 스콜라철학자들이라 한다]
이 체계는 형식 논리학의 시발이었다. 그런 의미로서는 중요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논리학의 시발이 아니라 궁극적 완성태로 생각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비판이 가해질 수 있다.
1. 이 체계 안에 내포된 형식적인 결함
2. 다른 여러 가지 형식의 연역적인 추론에 비해 삼단논법에 대한 지나친 평가.
3. 논리적인 형식으로서 연역에 대한 지나친 평가. (314)
(1) 형식적인 여러 가지 결함 (314-317)
[모든 S는 P이다. / S가 존재하는 P에 속하는지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결함이 있다.]
[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다르다. 후자에서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다.]
[- AAA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이다. 그리스인은 인간이다. 여기서 전자의 그리스인과 후자의 인간은 술어(predicate)인데, 둘은 같은 술어가 아니다. / 사랑은 보편적이다. 신은 사랑이다. - 모든 추상어는 보편적이다. 하나가 지시어가 아니라 추상어 일 때 제국주의가 그에 기대고 있다. ]
이로 말미암아 하나라는 수에 대한 올바른 주장을 세울 수 없었으며, 여기서부터 단일성(l’unité)에 대한 끝없는 형이상학적인 미궁(迷宮)[착각] 속에 빠져 들어갔던 것이다. (317) - [하나의 모순 개념으로 0이 존재한다는 것이 성립될 때까지, 여기서 0은 보집합과 같은 개념으로 성립한다. 0/0=1 는 9/9=1과 같지 않으며 ... 그런데 상층의 하나와 심층의 0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원본이며, 후자는 생성(보다 정확하게는 운동, 잠세태)이다. 후자에는 원본이 없다.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을 끊임없이 넘어서려고 노력(conatus)를 하는데, 모방은 추억과 현재 속에서 찾는다. 왜 있을 것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메시아 또는 알라의 모습이 없는 것이, 부처의 본래상이 없는 것이, 예수를 신격화와 부활을 믿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50NLG)]
(2) 삼단논법에 대한 과대평가 317
삼단논법은 단지 연역적인 논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학은 모두가 연역적인데도 불구하고 삼단논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317)
(3) 연역에 대한 과대 평가 318
‘모든 사람은 죽는다’ .. 오직 [연역법은] 개연성을 지니고 있을 뿐 확실성이 희박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귀납법은 한편으로 새로운 지식을 줄 수 있지만, 연역법은 그렇지 못하다. 논리학과 순수 수학 이외의 중요한 추리는 모두 귀납적이며 연역적이 아니다. 그러나 법률과 신학은 예외이다. 이것들은 그 첫째 원칙을 의심할 여지 없는 원본, 즉 법령전서라든가 성서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318) [법률적 사고와 신학적 사고의 유사성은 김기춘과 인명진의 사고와 닮았을 것이다. 인문학하는 자들이 이들에 말려드는 것은 수학적 사고와 동일하다고 착각하는데 있다. ]
오르가논(논리학)에는 「범주론」, 「분석론 전서(The Prior Analytics)」(여기에 삼단론법이 들어있으며) .. 「분석론 후서(The Posterior Analytics)」 ...
「범주론(category)」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나 칸트나 헤겔의 경우를 막론하고, 그것이 분명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하자면, 아직까지 그것을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범주”라는 용어가 철학적으로 유용한 말[용어]이라고 보지 않으며, 또 어떠한 분명한 개념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19)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10가지 카테고리(범주)가 있다. 실체, 양, 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 등이다. 이 카테고리의 용어에 대한 정의가 오직 한 군데 있다. 그것은 - “내용이 중복되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319)
「분석론 후서(The Posterior Analytics)」 .. 대체로 연역에 있어서는 어떤 출발점이 있어야 하므로 ... 그의 학설은 본질이라는 개념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정의(定義)를 가리켜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에 대한 진술이라고 한다. (320)
우리가 어던 사물의 ‘본질’이라고 말할 경우에 “그 사물에 있어서, 그 성질없이는, 그 사물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 [본질로부터] 우리는 여러모로 다르게 나타나는 사건들에 같은 명칭을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가 상이한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모두 단일한 ‘사물’ 또는 ‘인격’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이것은 단지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다. (320)
실체의 개념도 본질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단지 언어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형이상학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320-321)
‘실체’란 사건을 한 묶음으로 모아 들이는 편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321)
‘실체’는 요컨대 형이상학적 오류라고 하겠다. 또 이 오류는 주어와 술어로 된 문장상의 구조를 세계의 구조로 전환시키는데서 오는 것이다. (322) [물리학자 프랑스와즈 발리바르(Françoise Balibar, 1941-)는 물질(hyle)의 개념이 실체로서 실재하는 물질의 개념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물리학자는 이 개념의 덕분에, 힘인, 질량인지, 에너지인지, 광양자인지 등을 논의하는 기초로서는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즉 질료가 물리학에서 어디에도 쓰이지 않지만, 물리학의 개념에서 더 정치하게 다루려는 학자들에게는 지금까지 정립한 다양한 물리학적 개념들이 아직도 미비하다는 것을 느낄 때, 철학적(형이상학적) 질료의 개념의 범위(한계)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다고 한다. (50NLG)]
제23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323-329
나는 이 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중에서 둘을 고찰해 보려고 한다. 자연학(Physics)과 천체에 대하여(On the Heavens)이다. .. 후자는 전자에서 논하다가 남겨 둔 대목에서부터 시작한다. .. ‘제5원소’(quintessence)니 ‘월하’(달아래, sublunary)니 하는 말들은 이 저서[후자]에 들어 있는 학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323)
운동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 현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물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이 그것이다. (324)하 l 한 dlek.
천체 자체를 신이라고 볼 수 없게 된 철학자들은, 흔히 천체는 신적인 존재자의 의지(will)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자는 이와 같은 질서와 기하학적인 단순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모든 운동의 궁극적인 근원이 의지라고 보았다. 지상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의 변덕스러운 의지가 모든 운동의 근원이며, 하늘에서는 최고 창조자의 불멸의 의지가 그 근원이 된다. (325) - [럿셀은 이런 견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불멸의 의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하늘의 움직임에서 신적 존재보다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들(미학자, 들뢰즈)도 있다. (50NLG)]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연학은 그리스인들이 “퓌시스”(phusis)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고 이 퓌시스라는 말은 보통 “자연”[nature]이라고 번역되지만 오늘날의 자연이라는 말의 뜻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 퓌시스라고 말할 경우에, 그것은 생장(生長)과 관련되어 있다. 도토리의 본성(nature)은 생장하여 떡갈나무가 된다. (325) - [스피노자가 신 즉 자연(Dieu sive natura)이라고 할 때, 그 자연은 인간 본성(human nature)과 다르다. / 무위자연(無爲自然)에서 자연을 서양어로 번역하면, 자연(la nature)이 아니라 그대로 됨(Gracia)에 가깝다. / 모든 신화는 식물에서 그리고 동물로, 그 다음 인간형태적으로, 그 다음 인격으로, 그 다음 아직 모르지만 우주 자체로 갈 것이다. 왜 식물로부터 시작일까? 자연의 생장과 순환에서 상상을 했을 것이다, 씨앗이 서양에서 정자(精子)로 보았던 것은 인간중심적이고, 씨앗의 본래적 의미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50NLG)
본성[자연]은 운동이나 정지의 근원이다. 사물들이 이러한 내면적인 원리를 지닐 때 “하나의 본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리고 ‘본성상’이라는 말은 그러한 사물이나 그런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 할 수 있다. (326)
본성은 원인들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라면 그것은 어떤 것을 목적[목표]으로 하여 작용한다. 여기서 자연은 필연적으로 작용하며, 목적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이르게 된다. (326) [러셀의 모호한 표현으로 보인다. 자연의 작동은 필연이지만 완전성의 목적은 자연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완전성은 목적인이라는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한다. (50NLG)]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동물이나 식물의 성장을 설명하는 데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과학의 발전에 큰 지장을 주었으며, 또 윤리 문제에서도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원인이 되어 왔다. (326)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우키포스나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한 진공(眞空)을 부인하고, 시간에 대해 좀 기이한 주장을 한다. .. 시간이란 계산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그가 어찌하여 계산을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분명치 않다.(327) [원자론자의 진공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진공은 다른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있기는(존재하긴) 한데, 원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바탕이고, 후자에서 진공은 무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50NLG)]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시간이나 몇 날, 몇 해와 같은 것을 시간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어떤 사물은 영원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물은 시간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327)
시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플라톤을 제외하면 누구나 견해를 같이 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도, 그에게서 이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 의하면 우주가 시초를 갖는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327) [시간의 시초를 인정하는 플라톤과 기독교에서, 시초에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 이야기(le mythe)일 뿐이다. 플라톤은 이야기라했고, 중동의 전설따라 삼천리에서도 말씀(logos)이란 이야기일 뿐이다. 이를 믿는 것은 어린애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현존을 믿는 것과 같다. (50NLG)]
그는 천체에 대하여(On the Heavens)라는 논문에서, .. 달 아래 사물들은 생성하고 소멸되게 마련이다. .. 달 아래는 만물이 네 가지 원소, 흙, 물, 공기, 불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5원소[에테르]는 천체를 조정하고 있다. 지상의 원소들의 자연스런 움직임은 직선운동이지만, 제5원소의 움직임은 원운동이다. .. 별이나 유성들은, 불로 되어 있지 않고 제5원소로 되어 있다. (328) [16세기 지구중심설이 태양중심설로, 17세기 직선운동이 포물선을 그리는 운동을 바뀌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또 성경과도 싸움이 벌어진다.(50NLG)]
[제우스는 주신이지만 하나의 신이라는 신격화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신은 아마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에서 왔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야훼라는 이름의 신이다. 그 신이 하나의 신으로 되려면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 메시아의 그리스 번역은 크리스토스이다. / 진시황은 황제가 되어 스스로 제왕이 되었지만 받들어 진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처럼 받들어 진 황제는 한 고조이다. 한 나라 치하에서 유방을 절대군주로 만든 신하들은 자발적 예속(être assujetti)이라기보다 제도 속에 신민(subjectus)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경우는 정복을 통한 예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다양한 지방의 예속을 메타 상위로 만들어야 하니 제왕화를 넘어서 신격화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격화된 것을 크리스트교가 본따서 예수를 크리스토스로 그리고 신격화로 그리고 주신 아버지 옆에 다시 올려 놓으려니 논리상 부활도 필요하고, 게다가 아버지가 신으로 필요하니 인간 여성의 몸을 빌어서 태어난다는 서술적 표현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박통은 진시황처럼 강압으로 신민화를 해보았는데, 이에 익숙해지고 이에 이익을 본 소수의 상층 집단들이 박령(요강공주)에게 자발적 예속화의 길을 간다. 지금 박령의 변호를 자발적으로 맡는 그 집단은 자발적 예속화에 익숙한 것이다. 인민은 박통이든 박령이든 자연에서 나서 자연속으로 돌아가는 인간이며, 사회든 국가든 간에 한 인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예속화도 신민도 아닌 인민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시청 앞에 텐트를 치고 미국 깃발 이스라엘 깃발과 함께 하는 이들은 자발적 예속이 맞다. 이들은 자신들이 미국 신민도 이스라엘 신민도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 일부 꼴꽁은 자식을 미국의 신민으로 보내 그 애비인 자신들도 미국의 신민인 줄 착각하며, 이들은 요강공주에게 한국의 신민인 것으로 행세한다. 이들은 요강공주에게 예속되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런 생각이 거대한 착각이며, 자기 착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50NLI)]
제24장 고대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 330-342
그리스인들의 우수성은 무엇보다도 수학과 천문학에서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330)
탈레(Thalès, Θαλῆς, 전 640-548)스: 피라밑 높이 측정, .. 자기 그림자가 키와 같은 길이 일 때, 그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를 쟀다.
2의 제곱근은 가장 먼저 발견한 무리수로서 ... 제1항은 각각 1에서부터 시작한다. 각 항의 a는 그 전항의 a와b의 합(合)으로 만들며, 각 항의 b는 그 전항의 b에다 그 전항의 a를 두 번 합하여 만든다. ... (1, 1), (2, 3), (5, 7), (12, 17), (29, 41), (70, 99) .. 99/70의 제곱은 거의 2에가깝다. (331)
피타고라스는 직각 삼각형에서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했다.
2의 제곱근 이외의 무리수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특히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 사람인 테오도로스는 이문제에 대해 연구했으며, 플라톤과 거의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 볼수 있지만 플라톤보다 좀 늙은 테아이테토스는 더욱 일반적인 입장에서 연구했다. (332)
에우독소스는 소진법(消盡法)을 발견 내재 완성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아르키메데스가 크게 이용하였다. 이 방법은 적분을 연상시킨다. (332)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은 분명히 오늘날까지 쓰여진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이며, 또 그리스인들의 지능을 보여준 가장 완벽한 기념비 중의 하나라 하겠다. .. 그 방법은 연역적이며, .. 19세기에 와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달되어, 그 전제들은 부분적으로 틀릴 수도 있으며, 단지 관찰만으로도 그것들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334)
로마인 들에게 유클리드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키케로(Cicero, 전106-전43)였다. .. 보에티우스(Boethius, 470경-524) 이전에는 라틴어 번역판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아라비아 인들은 더욱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비잔틴 황제가 서기 760년 경에 칼리프(회교 국왕)에게 그 사본을 한권 보냈다. 그것이 서기 800년경 하룬 알 라쉬드 밑에서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최초의 라틴어 번역본은 1120년에 배드의 애덜라드(Adelard of Bath)에 의해 번역된 것이다. (335) [배드의 애덜라드(Adelard of Bath, Adélard de Bath, 1080–1152)) 영국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점성술, 번역가.]
이제 천문학에 대하여 .. 아침에 떠 있던 별이 저녁의 그것과 같은 별이라는 것까지는 몰랐다. (335) [이 별이 금성이다]
탈레스의 일식 예언은 외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을 말해주는 좋은 본보기로, 그가 이집트나 바빌론에서 배워 들인 것에 어떤 것을 첨부하였다고 볼 것까지는 없다고 하겠다. 그의 예언에서 맞은 것은 요행에 불과했다. (336) [러셀에서도 이집트 바빌론에 대한 무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지구는 중심에 놓여 가만히 정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월식에서 볼 수 있는 지구의 그림자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지구를 행성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 그리고 모든 행성은 지구도 포함하여, 원운동을 하는 데 그것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중앙화(中央火, central fire)”의 주위를 도는 것으로 보았다. ... 중앙화는 ‘제우스의 집’ 또는 ‘신들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태양은 여기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하여 빛을 낸다는 것이다. (336-337)
지구 이외에도 천체가 있는 그것은 대위지구(對位地球, counter earth)로 ‘중앙화’에서 같은 거리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학적인 것이요, 또 하나는 수학적인 신비주의이다. (337)
오에노피데스는 황도(黃道, ecliptic)가 경사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 폰 토스의 헤라클리데스(전 388-315)는 금성과 수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발견했으며,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24시간에 한번씩 돌고 있음을 발견했으며, .. (338)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는 .. 모든 유성은 지구도 포함하여 태양을 중심으로 원원동하며,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24시간 한차례 자전한다고 말했다. (338)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이 학설이 사라진 것을 탄식했다.]
아리스타르코스가 이(가설)를 세운 후에 셀레우코스가 분명히 그 가설을 계승하였다. .. 이 가설을 부인하게 된 이유는 주로 히파르코스(Hipparque, Ἵππαρχος 전v.190–전120) 때문이다. (340)
히파르코스는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을 중심으로 세운 가설을 반대하여, 주전원설을 취하고 또 아를 수정하였다. 이 주전원설은 본래 기원전 220년경에 활동한 아폴로니우스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 후에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Claude Ptolémée, Κλαύδιος Πτολεμαῖος, 후90경-168경)의 명칭에 의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로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주전원설이 발전된 것이다. (340)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ène, Ἐρατοσθένης 전284-전192)(92살)는 지구의 지름을 7,850마일로 추산했든데 그것은 실재의 길이보다 약 50마일이 짧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달까지 평균 거리를 지구의 지름의 29 1/2배로 추산하였다. (341) [아리스타르코스(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230), 히파르코스(Hipparque, Ἵππαρχος 전v.190–전120), 포세이도니오스(Posidonius d'Apamée, gr. Poseidonios, 135-51 av. J.-C.) 등도 활약했다.]
그리스 천문학은 기하학적이며, 역학적[물리학적]이 아니다. 천체의 운동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각은 균일성이 있는 것이며 원운동이이나 또는 이것이 복합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힘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다시 기하학적 입장으로 돌아간 것을 볼 때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뉴턴과 같은 의미에서 힘의 개념은 없어지고 만 것이다. (341-342) [힘 중력 에너지, 광양자 등은 시간이 흘러 나중에 나온다.]
그리스 일류 수학자 명단을 완성시킨 매우 위대한 두 사람이 있다. 아르키메데스와 아폴로니우스로, 기원전 3세기 사람들이다. .. 아르키메데스를 죽인 로마 병정은 독창적인 사상에 대한 사형 선고의 상징이라 하겠다. 로마는 이 죽음을 그리스 세계의 모든 영역에 가져왔다. (342) [이상타, 왜 나에게 아폴로니우스 항목이 “천문학”과 “그리스철학”부분에 빠진 걸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인물이라서 인가? (50NLH)]
(13:37, 50NLH) (14:33, 50NM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