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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르1900웃음18내용4부록
웃음(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RI)
벩송, 김진성, 종로서적, 1983. P. 132.
인간은 “웃게 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웃게 할 줄 아는 동물’이다. 즉 인간은 남을 웃게 만들 수 있으며, 이 특유한 방법은 다른 동물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지성이 발달되어야 또는 언어와 사고의 추상적 능력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이런 방법과 절차를 잘 다듬어 왔고, 예술의 영역에서 그 실례로서 만들어진 것이 희극이다. 벫송은 웃음거리의 절차를 다루면서, 먼저 제1장에서 단편적인 형태, 태도, 몸짓을 다루었다. 그것들을 경직성, 비틀림, 기계주의 및 자동주의에서 보여준다. 이를 이어서, 계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웃음거리로서 상황, 행동, 말에서 찾았다. 그것들은 틀에 박힌 반복과 과장에서, 즉 인형극과 같은 끈에 매인 상황과 행동에서 웃음거리가 드러나며, 행위의 순서가 바로 가야 하는데도 거꾸로 가는 역전에서 웃음거리를, 그리고 두 계열에서 서로 상보관계가 아닌 엉뚱한 간섭현상에서 발생하는 웃음거리를 다루었다. 두 계열의 한번 우연한 마주침은 아자르(hasard)인데 마주침이 다른 계열에 상호연관 없이 구속적이고 관습적 힘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이제 이러한 웃음거리는, 지성이 발달한 인간에게서 인격과 성격이 고착적이고 경직적인 행동을 하는 면에서, 그 인간에게 사회성이 없음을 보여주는 경우에 그가 웃음거리를 만든다. 이런 웃음거리를 연극으로 보여주면서, 누군가는 인간을(관객을 또는 행동자를) 웃게 만든다. 이렇게 웃는다는 것은 현실의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해 교정하게 하고, 벌을 주기도 하며, 수치심을 유발하게 한다. 이렇게 웃게 만드는 예술의 영역으로 희극은 김성을 밑바탕에서 올리는 비극과 다르다. 희극은 다른 모든 예술과 달리 내면(심층)의 연결이라기보다는 표면의 겉면의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희극은 감성을 제외하는 지성의 기능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희극은 감성 또는 감응과 연관 도덕성이나 비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 합류하지 못하는 비사교성을 교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극은 독특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희극은 일반인, 특정 직업인, 관습에 매인 자, 그리고 정해진 집단을 형성하여 고집하는 자들이 대상이다. 즉 사회생활에서 유연하고 조화롭기보다 뻣뻣하고 완고한 고집쟁이에게 교정을 위한 것이라 한다. 다른 한편 희극이 드라마와 차이를 갖는 것은, 후자가 인간적 삶의 계열에서 우여곡절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 긴 과정에서 감정, 감흥, 지성, 성취 등을 포함하는 점에서 당대의 사회성의 반영이다. 거기에는 주인공 개인의 성격이 사회의 특성의 일부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드라마 중에는 자연(본성)을 드러내는 작품도 있을 수 있다.
희극은 사회성을 회복하는 역할을 하면서, 웃음이 시대의 소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웃을 수 있는 것은 표면 겉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이다. 겉면을 뒤집어 안면과 조금이라도 연관시켜서 인격에게 깊이로 들어가는 감동과 감응에 연결되기 시작하면 웃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51SNA)
웃음은 도덕성을 고치기거나 나무라는 점이 아니라, 사교성이 없어서 뻣뻣하고 경직된 인격들에게 경고하는 셈이다. 그래서 한 인격이 사회 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창피를 주고 또는 웃으면서 교정하게 하는 역할이 웃음이다. 이런 역할을 하는 희극은 과정을 통한 절차가 있다는 점이다. 반복, 반전, 상호 간섭들이 있고, 그리고 인격이라는 의미에서 인간성에 연관지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내면을 깊이 있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벩송은 바다 거품과 같다고 하고 거품이 꺼지고 남은 작은 물방울에 짠기가 남는다고 비유한 것이다. (51SNA)
웃음은 심리적 작품이라기보다 사회성에 관한, 어떤 의미에서 양심 또는 양식 위에서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것(non-dit)로서, 폐쇄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이방인들은 그 거주하는 환경에서 사건들에 대해 웃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토에서 자신들만의 웃음이 아니라, 인류가 비사교성일 때 어떤 문제거리를 발생하는가?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것이 발생하고, 트럼프 이전에 미국의 대통령이 북쪽을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트럼프가 김정은을 현명한 지도자라고 한다. 계열을 연결시켜보면 미국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 사회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웃어넘겨야 할 것인데, 동서 독일이 통일비용을 무차게 많이 섰듯이, 우리도 남북통일에 비용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한다. 그 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누구이어야 하는가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51T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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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 155-157
부록을 보면, 20년 동안에서 23판을 찍었다는 것인데, 매년 한 번씩 다시 찍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읽힌 이유가 여러 가지 겠지만, 하나는 프랑스에서 연극의 관심도 지금도 높아는 문화적 측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측면에서 웃음거리로서 웃음보다 유머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나로서는 웃음에 대한 소재를 많이 나오는 것은 같은 시대에도 문화적 차이(차히)가 있다는 것이다. “차히”라고 하는 것은 집단들(사회체) 사이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있다는 것을 존중하지만, 그래도 어울리면 구별이 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즉 상호 대립도 있지만 상호 보완도 있다는 점이다. 문화의 이질성이 서로 같이 있다는 것은 종교의 단위들이 다른 데도 함께 살아간다는 점이다. 웃고 넘길 것인가? 스스로 교정할 것인가 또는 타 종교에 대해 자기의 종교 문화를 고집하는 것이 약간의 추치는 아닐까하는 고민도 들어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프랑스가 카톨릭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상으로 매주 성당에 가는 이는 열에 하나 둘 정도이다. 마치 우리나라 불교 신도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일년 몇 번 절을 찾는 것과 같이 프랑스의 카톨릭교도들도 이와 비슷하다. 게다가 지역적 특성이 있어서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의 특성을 배워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인들 자신들도 지역적 문화의 차히를 잘 모른다. 1882년이래 교육의 4대 목표, 보통, 평등, 무상, 비종교(la laïcité) 중에서 세속화하는 비종교 교육은 다양성의 접속을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한정된 지역적 삶을 보충하는 것은 문학과 역사에서 다루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 학년에서 전체 고등학생에게 철학을 배우게 하면서 인도주의자이며 인성자유주의자로 방향을 잡아준다.
이 작품의 중요성은 표면 위의 사회성이다. 현상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상은 언제나 심층에 뿌리가 닿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표면위에서 뿌리 없이 흔들리지 말자고 웃음거리를 다루고, 웃음이 사회의 소금이 된다는 것이다.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를 건전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사회의 경직성에 대한 교정, 개인적 완고함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변화에도 불구하고 도그마에 빠진 자들에게 가벼운 벌(착오수정)을 주는 효과가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쓰는 시절이 드레퓌스 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고 했다. 옹호파와 반대파가 있는 가정에서 서로가 천정을 향해 총을 쏘는 삽화가 있을 정도이다. 고성을 넘어서 가족간에 편이 갈려 전투을 할 정도라는 삽화이다. 이런 삽화의 걱정처럼, 프랑스 지식인들이 일차대전에서 같은 크리스트 국가 간에 대규모 전투를 했다는 것을 가슴 아파했다. 웃음의 미학에 대해 그가 새로인 언급한 것은 없지만, 그가 제시했던 인간 “웃게 하는 동물”이라면서 웃음거리를 만들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벩송은 1차 대전이 끝나는 시기에 부록을 남긴 것은 전쟁의 상처가 항대 항의 대립이라는 이원구조가 낳은 것으로 보고, 이항 대립에서 부조리, 부조화를 넘어서 사회성을 회복하는 것은 ‘차히’에 대한 이해로서 표면의 교정이라는 점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심층의 연결(접속)이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면서 말이다.
어제 남북이 정상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인격들이 서로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18 09 18-20). 이항 대립을 적대적 관계로 갖는 한 전쟁은 암적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벩송의 견해를 빌리지 않아도 60여년 이상을 체험해 왔다. 이제 다양 인격들이 만나듯이, 서로는 다양체로서 지역과 집단을 내용적으로 인정하며, 감응으로 상호침투하고, 교감과 공명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도 ‘차히’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체제의 차이에서 오는 다양체의 차히야 얼마나 많겠는가! 말투가 다른 표현 또는 격식이 다른 몸짓은 벩송이 말하는 웃음으로 교정하며 하나하나 상호이해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장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대립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을 설파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다양체들의 여러 연결 접속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하는 길도 찾아보자. (51TLI)
* 제23판 부록
희극의 정의와 이 책에서 사용된 방법에 관하여 (1919)
이달의 잡지(Revue du mois)에 실린 흥미로운 글에서 이브 들라쥬(Yves Delage, 1854-1920)는 희극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그가 택한 정의를 대립시켰다. “어떤 것이 희극적이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 사이에 부조화(désharmonie)가 있어야 만 한다.” .. 어디에서 우리의 방법이 그의 방법과 다른지를 밝히는 것이 소용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잡지에 실었던 응답의 요점만을 말할 것이다.
<“웃음거리(le comique)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몇몇 일반적 특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성의 결과를 여기저기서 모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류의 정의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제안되어 왔으며, 논자의 정의도 이러한 방법에 의해 얻어진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 방법은, 논자가 원을 하나 그리고, 우연에 의해 취해진(pris au hasard) 희극적 효과들이 거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 이 정의는 일반적으로 폭이 너무 넓다. ... 나는 그 정의가 몇몇 필요 조건(condition necessaire)을 제시할 것이리라. 하지만 채택된 방법의 충분조건(condition suffisante)을 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 증거는 이러한 여러 정의들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 (155-156) [동등하지 않음: 벩송의 주제는 “웃게 하는 동물”이다. 인격에 대하여 문제거리를 찾는다. 1) 형상(우상)을 따르는 듯한 왜곡된(뻣뻣한) 형태들, 2) 상황과 언어에서 방심과 부조리, 3) 다양한 성격들에서 오는 놀이들(les jeux)과 재담들(mot d’esprit) 등이 있다.]
<“내가 시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희극(la comédie), 소극(la farce), 광대예술(l’art du clown) 등에서 웃음거리의 제작 절차 방식들(les procédés de fabrication du comique)을 찾았다. 나는 이러한 방식들이 보다 일반적인 주제(un thème)에 관해 그 만큼 많은 변양들(variations)이었다는 것을 찾았다고 믿는다. 나는 단순화하기 위하여 주제를 주목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변양들이다. (156)
이 경우에 관념연합의 메카니즘은 극도로 복잡하다. 그 결과 이러한 방법으로 웃음거리에 접근하는 그 심리학자는 언제나 웃음거리를 하나의 공식에 가둠으로써, 일단 웃음거리가 무엇인지 결말을 보지 않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과 일일이 씨름해야만 했다. 따라서 심리학자는 웃음거리의 모든 사실들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심리학자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립되는 예들에게 자기 이론을 적용할 때, 그리고 그 예들이 그 자체로서 웃음거리인 것과 닮았다는 점에서 웃음거리들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였을 때, 사람들은 쉽게 다른 것을,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항상 작업해야 할 것이다. (156-157)
그(심리학자)가 성공하게 된다면, 그는 웃음거리를 제작하는 수단을 부여할 것이다. 그는 학자의 엄밀성(la rigueur)과 정확성(la précision)을 가지고 절차(진행방식)를 이루어 갈 것이다. .. 필수적인 것은 분석이며, 사람들이 재구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완전하게 분석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한 것이 바로 내가 시도했던 기획(l’entreprise)이다. (157).
<“...그러므로 웃음거리 효과는 낳게하는 부조화의 특별한 원인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는 일이 남게 된다.(Il reste donc à chercher quelle est la cause spéciale de désharmonie qui donne l’effet comique) .. 웃음거리의 원인 속에는 사회생활을 미미하게 침입하는 (그리고 특수하게 위반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회는 방어적 반응처럼 보이는 제스처로, 약간은 겁먹게 하려는 몸짓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157)>] - [웃음은 정태적 사회를 유지하는 방편인데, 웃음거리를 만들어 사회를 공공연히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몰리에르는 절대왕정(루이14세)을 지지하는 것인가? 그리고 종교권위에 벗어나고자 하는 것인가? (51QLJ)]
(3:29, 51TKI)
* 참조 인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