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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37권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③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살바야(薩婆若)는 과거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과거의 세상조차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과거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살바야는 미래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미래의 세상은 볼 수조차도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미래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살바야는 현재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은 볼 수조차도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현재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같다고는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과거의 세상은 허망한 것이요 살바야는 진실한 법이기 때문이다.
과거 세상은 바로 나고 멸하는 모양이요 살바야는 나고 멸하는 모양이 아니다.
과거의 세상 및 법은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합하는 일이랴.
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과거의 세상을 보지도 않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합하겠느냐?
미래와 현재의 세상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셨다.
미래의 세상은 나고 멸하는 모양을 제외하고 그 밖의 이치도 동일하다.
또 시간[時] 때문에 3세(世)가 있다고 말하나니,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한 때의 이치는 일시(一時)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 살바야는 바로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지혜이다.
3세(世)는 범부의 허망한 생각에서 생기니 어떻게 살바야와 합쳐지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순금은 헌쇠[弊鐵]와 모양을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 수희품(隨喜品) 가운데 설명하듯이, 보살마하살은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살바야 지혜 등의 모든 공덕을 염(念)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는데 어떻게 과거ㆍ현재의 세상이 살바야와 합하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답】 만일 집착하는 마음으로 모양을 취하면서 살바야를 염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하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독이 섞인 음식은 처음에는 비록 향기롭고 맛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몸을 편치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이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살바야를 분별한다면 마땅히 3세와 합쳐져야 하겠지만 지금은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곧 합하는 일이 없다.
【문】 보살도 역시 생각하기를,
“미래의 세상에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고,
살바야도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살바야를 얻어야 한다.”라고 하리니,
이것을 미래 세상의 살바야와 합한다고 하겠는데 어떻게 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답】 살바야는 삼계(三界)를 뛰어나고 3세를 벗어나서 필경 청정한 모양이다. 수행하는 이는 단지 생각하고 분별하여 “나는 이 살바야를 얻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마치 세간의 법에서 마땅히 얻을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이 일이 생기지 않았고 아직 있지 못한 것과 같을 뿐이다. 시절이 아직 이르지 못했고 인연이 아직 만나지 못해서 도무지 처소가 없으니 어떻게 합쳐지겠는가? 마치 다음날에 소(蘇)를 먹어야 할 터인데 지금 벌써 냄새가 날 것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가전연(迦栴延)의 제자들이 미래 세상 안의 보리(菩提)를 말하면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호(相好)의 몸을 잘 닦으면 나는 장차 와서 그 몸에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나니,
마치 귀한 집 딸이 제멋대로 주저함도 없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가난한 집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잘 장엄하고 방사(房舍)와 장막들을 갖가지로 두루 갖추어 놓으면 나는 장차 그대의 집 안에 가 있겠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여법(如法)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살바야와 3세는 합할 수가 없다.
【문】 그 밖의 다른 법도 심히 많은데 무엇 때문에 단지 살바야만을 말씀하는가?
【답】 이 살바야는 보살이 귀의하고 나아갈 데요 깊은 마음으로 얻기를 원해 3세 동안에 구하고 찾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 중에서는 구하지 않는가?
【답】 뒤에 온갖 법 안에서 구하는 일을 설명할 것이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色]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물질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그와 같으니라.
눈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눈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그와 같으니라.
빛깔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빛깔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무엇 때문에 단지 5중(衆)과 12입(入)만 말씀하시고 18계(界)와 12인연(因緣)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답】 당연히 말씀하셨겠지만, 혹 독송한 이가 잊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5중과 18계와 12인연의 일은 더럽기[垢]도 하고 깨끗하기[淨]도 하기 때문이다.
5중과 12입과 18계와 12인연을 일[事]이라 하는데, 그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도 않고 그것은 깨끗한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도 않다.
이 가운데에는 혹 번뇌[結使]가 생기는 일도 있고 혹은 착한 법이 생기는 일도 있다.
마치 밭은 반드시 곡물을 낼 수는 있되 종자에 따라 나게 되는 것과 같다.
중ㆍ계ㆍ입과 12인연은 바로 일[事]이고, 6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바로 청정한 종자가 된다.
더럽다[垢]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이 보살은 번뇌가 이미 얇아져서 스스로 괴롭히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 보살의 지혜가 깊어서 모든 법이 공한 줄 알고 모든 번뇌가 없으며 단지 모든 공덕만을 쌓으니, 이 때문에 마땅히 18계와 12인연을 말씀하셔야 하는 것이다.
물질 등의 일 가운데서는 마땅히 살바야와 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살바야는 3세(世) 안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고, 물질 등의 일 안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세간의 인연의 화합이요 정해진 성품이 없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檀)바라밀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느니라. 단바라밀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4념처(念處)는 살바야와 합하지 않으니, 4념처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8성도분(聖道分)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논】
【문】 5중(衆) 등은 바로 세간의 법이어서 살바야와 합하지 못하겠지만, 6바라밀은 어떻게 합하지 않는가?
【답】 6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이다.
세간을 위한 단바라밀이면 합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되지만 출세간의 단바라밀이면 마땅히 합해야 된다.
또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부처님의 살바야와는 합할 수가 없다.
또 부처님께서 6바라밀조차도 공하여 오히려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합하겠는가? 37품(品)도 역시 그와 같다.
【문】 이 6바라밀은 도인이나 속인에게 섞여 있기 때문이지만 37품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어떻게 합하지 않겠는가?
【답】 37품은 바로 2승(乘)의 법이어서 단지 열반만을 위할 뿐이나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위하고 있나니,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문】 마하연품(摩訶衍品) 안에도 37품(品)이 있고, 역시 보살의 도인데 어떻게 살바야와 합하지 않는가?
【답】 어떤 보살은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37품을 행하면서 거의 모두를 열반에 회향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합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경】 “부처님의 10력(力) 내지 18불공법(不共法)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부처님의 10력 내지 18불공법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10력 내지 18불공법이 비록 미묘한 법이라 하더라도 살바야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한지라 당연히 살바야와는 합하지 않아야 된다.
또 부처님의 10력 등의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살이 행하는 바이니, 비록 아직 부처님의 도를 못 얻었다 하더라도 점점 닦아 익히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서 얻는 바이니, 보살은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얻는 바이다.
위의 두 가지는 합하지 않아야 되고 아래의 한 가지는 합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아직은 얻지 못한지라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또 공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합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모두 “볼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부처님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고 살바야는 부처님과 합하지 않으며, 보리는 살바야와 합하지 않고 살바야는 보리와 합하지 않느니라.
【논】
【문】 보살 및 보살의 법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부처님과 보리도 합하지 않는가?
【답】 부처님은 바로 사람이고 살바야는 곧 법이다.
사람은 붙인 이름[假名]이고 법은 곧 인연(因緣)이다.
중생(衆生) 내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는 없기 때문에 부처님도 역시 없는 것이다.
중생들 가운데서 존귀하기가 가장 으뜸가는 분을 부처님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또 살바야를 얻으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은 살바야를 얻은 이라 하면 그로써 먼저 이 부처님은 살바야가 필요 없게 된다.
만일 부처님이 살바야를 얻는 이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살바야를 얻는다.”라고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화합한 인연으로 생겨난 선후(先後)는 말할 수가 없다.
또 부처님을 여의면 살바야가 없고 살바야를 여의면 부처님이 없으며, 살바야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고 부처님의 소유(所有)이기 때문에 살바야라 한다.
【문】 부처님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보리(菩提)는 바로 위없는 도[無上道]인데 어찌하여 합하지 않는가?
【답】 보리는 부처님의 지혜라 하고 살바야는 부처님의 온갖 지혜[一切智慧]라 한다.
10력(力)의 지혜를 보리라 하고 열한 번째의 여실지(如實智)를 살바야라 하는데, 이 두 가지의 지혜는 하나의 마음속에서 생길 수 없다.
또 이 10력 등의 모든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보리는 모두 보살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지라 진실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께서 얻으신 살바야만이 진실이다.
지금의 이 보리는 바로 보살의 보리이니, 이 마음속은 허망하고 아직 진실이 못 되는데 어떻게 살바야와 합하겠는가?
또 이 경 안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합하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셨다.
【경】 왜냐하면 부처님이 곧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곧 부처님이며, 보리가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곧 보리이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色]은 있는[有]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없는[無]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항상한 것[有常]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무상한 것[無常]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괴로운[苦]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즐거운[樂]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나[我]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나가 아니라[非我]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寂滅]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공(空)한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공한 것이 아니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모양이 있는[有相]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모양이 없는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조작이 있는[有作]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조작이 없는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만일 보살이 5중(衆)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면서 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때에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세간에는 있다[有] 없다[無] 하는 두 가지의 소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생사(生死)의 흐름을 따르는 이는 다분히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생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는 대개 없다는 데에 집착하고,
나라는 소견[我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며,
삿된 소견[邪見]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또 네 가지 소견[四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삿된 소견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하고,
3독(毒)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며,
무명(無名)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5중은 인연이 쌓여서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쌓임[集]을 모르는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하며,
삿된 벗과 삿된 소견의 외도의 가르침[外書]을 가까이 하는 까닭에 단멸(斷滅)에 떨어져서 죄와 복도 없다면서 없다는 소견을 지닌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있다는 데에 집착한다.
혹 어떤 중생은 모두가 공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으로 이 공에 집착한지라 이 공에 집착하기 때문에 없다는 소견[無見]이라 한다.
혹 어떤 중생은 온갖 6근(根)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있다고 여기나니, 이것을 있다는 소견[有見]이라 한다.
애욕이 많은 이는 있다는 소견에 집착하고,
견해가 많은 이는 없다는 소견에 집착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중생들은 있다는 소견과 없다는 소견에 집착하는데 이 두 소견은 허망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어서 중도(中道)를 무너뜨린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좁은 길을 갈 때, 한쪽에는 깊은 물이 있고 한쪽에는 큰 불이 타고 있어 양쪽이 모두 죽게 하는 것과 같다.
있다는 데에 집착하거나 없다는 데에 집착하는 두 가지의 일은 다 함께 과실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면 인연이 없고, 만일 인연에서 화합하여 생긴다면 이 법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곧 공하다.
만일 법이 없는 것이 진실이라면 죄와 복이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또한 모든 법의 갖가지의 다름도 없게 된다.
또 있다는 소견을 지닌 이와 없다는 소견을 지닌 이는 서로가 어긋난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시비(是非)가 있고
시비가 있기 때문에 함께 다투게 되며,
다툼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업이 생기며,
업이 생기기 때문에 악도(惡道)의 문을 열게 되나니,
실상(實相) 안에는 서로 틀린 것이거나 옳고 그른 것이거나 다툼이 없다.
또 있다는 데에 집착한 이는 일이 만일 무상하게 되면 근심과 괴로움을 내게 되고,
만일 없다는 데에 집착한 이면 모든 죄업을 짓고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된다.
있다 없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등의 허물이 없게 되나니, 이런 것을 버려야 진실을 얻게 된다.
또 이 5중(衆)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5중이 항상하다면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으며,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선악의 과보도 없게 된다.
세간이 마치 열반과 같고 파괴되지 않는 모양이라 한다면 이러한 거짓말을 누가 믿겠는가?
현실에서 죽는 것을 보고 슬피 통곡하는 이것이 중생의 무상이다.
마치 풀과 나무가 시들고 떨어지며 꽃과 열매가 없어짐과 같은 것은 바로 바깥 물건[外物]의 무상이며,
대겁(大劫)이 다할 때에 온갖 것이 모조리 멸하는 이것은 큰 무상[大無常]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5중이 항상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무상은 항상함을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무상함이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무상한 모양이어서 생각생각마다 모두 없어진다면 곧 6정(情)으로 6진(塵)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대경은 다 같이 머무르는 일이 없으므로 반연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어야 하며, 또한 인연과 과보를 닦아 익히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인연이 많기 때문에 과보 역시 많은 것인데 이 일도 얻지 못해야 한다.
또 항상하다는 소견과 무상하다는 소견이 있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이 있다.
5중이 무상하다면 곧 “괴롭다ㆍ즐겁다ㆍ나다ㆍ나 아니다ㆍ공하다ㆍ진실이다ㆍ모양이 있다ㆍ모양이 없다ㆍ조작이 있다ㆍ조작이 없다.”라고 함도 얻을 수 없으니,
이런 뜻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5중이 고요히 사라진다[寂滅] 함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것이다.
고요히 사라졌기 때문에 마치 열반과 같다.
3독(毒)이 활활 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무상한 불에 타고 있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3독의 실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3독으로 저마다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나니,
이 이치에 대해서는 먼저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이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도 얻을 수 없고 반야바라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범부는 보살과 같이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할 수 없으니 어떻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겠는가?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으니, 두 가지 모두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고 한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碍智)ㆍ18불공법(不共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내공(內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제법공(諸法空)ㆍ자상공(自相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6바라밀 내지 여(如)와 법성과 실제,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
보살이 만일 이 부처님 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법이 있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가?
【답】 마치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파괴하는 이가 없고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역시,
‘이것이 보시[檀]이다,’ ‘이것이 간탐[慳]이다.’ 내지 ‘이것이 삼계(三界)이다,’ ‘이것이 실제(實際)이다.’라고 분별하지 않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어떤 보살은 이 착한 법에 대하여 마음 깊이 매어두나니, 매어 두기 때문에 죄가 생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6바라밀 내지 실제는 모두가 공하고 자성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환과 같으므로 그대는 집착하지 말라. 참된 보살은 이를 위하여 행하지 않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신다.
또 어떤 보살은 마음에 집착함이 없이 6바라밀 내지는 실제를 행하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일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라고 말씀해 주시나니,
마치 후품(後品) 중에서,
“6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위하여 내지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여의신통(如意神通)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천이(天耳)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타심지(他心智)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숙명지(宿命智)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천안(天眼)을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누진신통(漏盡神通)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히려 반야바라밀조차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하물며 보살의 신통을 보겠느냐?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먼저 선(禪)바라밀을 말씀한 가운데서 이미 자세히 5신통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또 거듭 말씀하시는가?
【답】 그 경우에는 전체의 모양[總相]을 말씀하면서 이름을 나열하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말씀하고 계신다.
또 공덕의 과보는 이른바 이 5신통이다.
보살은 이 5신통을 얻어야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또 비록 자비(慈悲)와 반야바라밀이 있다 하더라도 5신통이 없으면,
마치 두 날개가 없는 새가 높이 날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용맹한 사람이 무기도 없이 적진(敵陣)으로 들어간 것 같으며,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없어서 이익되는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마른 도랑에 물이 없으므로 윤택하게 해 줌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거듭 5신통을 말씀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한량없는 부처님 법 중에서 특별히 말씀하셨다 해도 허물될 것은 없다.
【문】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5신통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가?
【답】 다분히 방편이 없는 보살은 5신통을 얻으면 다른 보살들을 가벼이 여기면서 마음에 교만을 부리므로 이런 이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데도 오히려 집착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5신통이겠는가?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여의신통으로써 동방으로 날아가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겠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도 또한 그러하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천이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듣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타심지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야겠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숙명지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전생에 지었던 일들을 알겠다.”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천안으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여기서 죽고 저기 가서 나는 것을 보겠다.”라고도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나니, 역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게 되느니라.
【논】 해석한다.
먼저 비록 5신통의 이름을 말씀하셨으나,
지금 여기에서 그 공용(功用)을 말씀하신다.
【문】 보살은 무엇 때문에 “나는 여의신통으로써 시방으로 날아가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 이미 나라는 소견[我見]의 근본을 뽑아버렸기 때문이고,
이미 교만의 산을 꺾어 부셨기 때문이며,
3해탈문(解脫門)과 3삼매(三昧)를 잘 닦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몸이 비록 미묘하다 하더라도 역시 3해탈문으로 들어가나니,
마치 이글거리는 쇠구슬[金丸]이 빛깔은 묘하게 보인다 해도 손으로 댈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 모든 법은 마치 환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가까운 것도 없고 먼 데도 없어서 일정한 모양이 없다.
마치 환술로 만든 사람과 같은데 그 누가 가고, 그 누가 오겠는가?
신통이거나 국토, 이것이나 저것, 멀거나 가깝거나 하는 모양을 취하지 않는 까닭에 허물될 것은 없다.
만일 부처님 앞에 있으면서 선정에 머물러 변화로 한량없는 몸이 되어 시방으로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 해도 분별하는 바가 없다.
이미 법애(法愛)를 끊었기 때문이니, 그 밖의 다른 신통도 역시 그와 같다.
보살은 이 신통을 얻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되어 큰 신력(神力)을 나타내면서 시방세계의 3악취(惡趣) 안에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나니,
마치 왕생품(往生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경】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능히 행하면 악마도 그 틈을 얻을 수 없고 세간의 모든 일들이 바라는 대로 되느니라.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옹호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에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역시 이 보살을 옹호하면서 장애가 없게 하느니라.
이 보살에게 있는 중한 죄는 금생에 가벼이 받게 되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두루한 사랑[慈]으로써 중생에게 가(加)하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지금은 이 보살을 찬양하는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큰 공덕을 얻은 그를 바로 보살이라 하며 지혜와 공력의 과보로 이 다섯 가지의 이익을 얻게 된다.
【문】 악마는 바로 욕계(欲界)의 주인이다. 보살은 사람이며 육안(肉眼)을 가져 자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하겠는가?
【답】 여기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부처님과 모든 큰 하늘들이 옹호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필경공(畢竟空)과 불가득공(不可得空)과 자상공(自相空)을 행하는 까닭에 온갖 법 안에서 모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오가 없고 착오가 없기 때문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의 몸에 상처가 없으면 비록 독(毒) 가루 속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그 독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으면 틀림없이 죽게 되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에 대해서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악마에 대해서도 마음에 성을 내지 않나니, 이 때문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한다.
또 보살은 깊이 인(忍)바라밀과 자삼매(慈三昧)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온갖 바깥의 악(惡)이 해칠 수 없나니, 이른바 물과 불과 칼과 병기 따위이다.
세간의 여러 가지 일[世間衆事]이라 함은 살림살이에 필요한 것으로서,
이른바 생활의 방도를 차리고 배우자를 만나며, 씨를 뿌리고 과일나무를 심으며, 넓은 길에 우물을 만들고 객사(客舍)를 세우는 등 여법하게 다스리는 일들이니, 모두가 뜻대로 다 이루어진다.
탑과 절을 세워서 큰 복덕을 지으려 하거나, 크게 보시를 하거나, 법을 설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려 한다면, 모두가 다 뜻대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은 큰 것이거나 작은 것이거나 간에 모두가 다 여법하게 뜻대로 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세상마다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의 인연을 쌓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온갖 법 가운데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結使]가 얇아지고
번뇌가 얇기 때문에 깊고 두터운 선근(善根)을 내며,
깊고 두터운 선근이 생겼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모두 뜻대로 되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모든 큰 하늘들이 모두가 이 보살을 공경하면서 그의 이름을 찬양하게 되며 모든 용과 귀신들도 모든 하늘이 찬양하는 말을 듣고 와서는 그의 일을 도와 이루어지게 한다. 이 때문에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뜻대로 된다.
또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시고 위덕(威德)을 가하시는지라 모두가 뜻대로 된다.
【문】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평등하신데 무엇 때문에 치우치게 이 보살만을 생각해 주시는가?
【답】 이 보살은 지혜와 공덕이 크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비록 평등하다 하더라도 으레 이런 보살을 생각해 줌으로써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잘하도록 권하게 된다.
또 이 보살은 부처님의 지혜의 기운[氣分]을 얻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안다.
좋은 사람에게 상(賞)을 주고 생각하심이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심은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공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에 들어가도록 부처님께서 생각해 줌으로써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고기의 새끼들이 어미고기가 생각해 줌으로써 살 수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살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큰 하늘들이 옹호(擁護)한다 함은 그가 행한 바를 잃지 않게 하려고 모든 하늘들이 부처님의 생각을 본받기 때문이다.
또 모든 하늘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고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으며, 단지 중생만을 교화하려고 세간에 살고 있을 뿐이므로 그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에 돌보아 주는 것이다.
있는 바의 중한 죄[重罪]라 함은 앞 세상에서 지었던 중한 죄로서 당연히 지옥에 들어가야 되겠지만 반야바라밀을 행한 까닭에 이 세상에서 가벼이 받고 만다.
비유하건대 마치 중한 죄인인지라 당연히 죽어야 되는 데도 세력이 있는 이가 보호해 주면 곤장(棍杖)만을 맞고서 끝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왕자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경한 벌로써 그 죄를 없애는 것과 같나니, 그는 왕의 종성 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진실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종성 안에 태어난 것이고,
부처님의 종성 안에 태어났으니 아무리 중한 죄가 있다 한들 어떻게 중하게 받을 수 있겠는가?
또 비유하건대 마치 쇠그릇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물에 있어도 뜨게 되지만 속이 꽉 차게 되면 빠져버리듯이,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한 지혜로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중한 죄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범부는 지혜가 없으므로 중한 죄에 침몰하게 된다.
또 부처님은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다섯 가지 공덕을 얻게 되는 까닭은 두루한 사랑으로 중생에게 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문】 먼저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무엇 때문에 “두루한 사랑으로 중생에게 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가?
【답】 한량없는 복을 내게 함은 사랑[慈]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이 사랑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생겨서 한량없는 이익을 얻게 한다.
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시고 중한 죄를 이 세상에서 가벼이 받음은 바로 반야바라밀의 힘이며,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뜻대로 다 되고 모든 하늘들이 옹호함은 바로 큰 사랑의 힘이다.
또 두 가지의 반연[緣]이 있나니,
첫째는 중생이고, 둘째는 법이다.
이 보살이 만일 중생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요 만일 법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반야바라밀로부터 생기며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따르나니, 이 때문에 사랑을 말씀하신다 해도 허물될 것은 없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신속히 모든 다라니(陀羅尼) 문과 모든 삼매(三昧) 문을 얻고,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까지 끝내 부처님 뵙는 일을 여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다라니와 삼매의 문에 대해서는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신속히 얻는다 함은, 복덕의 인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지혜의 마음이 날카로워지나니, 이 때문에 신속히 얻게 되는 것이다.
마치 위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다섯 가지 공덕 때문에 신속히 얻게 된다.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함은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일들에는 모두 애착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마치 사람이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면 살아 있으면서도 도리어 지옥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다시 칼과 몽둥이를 들어 서로 해치며 음욕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태(胎) 안에서 태어나고, 또한 음탕한 새[鳥]가 되는 것과 같으며,
성냄이 많아 도로 독한 짐승이나 뱀의 족속으로 나는 것과 같으며,
어리석음이 많아 불나방이 되어 불로 날아들고 땅속에 숨어 사는 벌레들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보살은 부처님과 실상(實相)인 반야바라밀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리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업을 닦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또한 마치 앞에서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는[菩薩願見諸佛]”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끝내 부처님 뵙는 것을 여의지 않는다 함은 사람이 한 세상 동안 부처님을 뵈었다 하더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비바시불(毘婆尸佛) 때에 왕사(王師)로 있던 바라문과 같으니,
그는 부처님과 스님들을 뵈었으면서도 삿된 말로 헐뜯기를,
“이 사람들은 짐승처럼 좋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고 나를 보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었다.
이 죄 때문에 91겁 동안 축생 가운데 떨어졌다.
또 부처님을 깊이 염(念)하기 때문에 끝내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다.
세상마다 염불삼매를 잘 닦기 때문이고, 보살의 마음을 잃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려는 서원을 세우며 태어날 적마다 부처님의 세상에서 있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만날 업연(業緣)을 심어서 언제나 계속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끝내 부처님 뵙는 것을 여의지 않게 된다.
【문】 그것은 과보로서의 일인데 어찌하여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셨는가?
【답】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데, 간혹 결과[果] 안에서 원인[因]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응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의 행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른바 좋은 곳에 태어나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며 항상 법을 듣고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니, 이것을 상응한다고 한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과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거나 동등하다거나 동등하지 않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 법과 다른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거나 동등하다거나 동등하지 않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온갖 법에는 법이 법과 함께 합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조그마한 부분도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두 개의 손가락은 네 곳의 방향이 있되 그 한 곳의 방향은 합하고 세 곳의 방향은 합하지 않음과 같다.
합하지 않은 곳이 많기 때문이니, 어찌 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문】 합한 곳이 있기 때문에 합했다고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합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답】 합한 곳은 손가락 전체가 아니고 손가락의 일부분이다. 단지 이 손가락의 일부분일 뿐이므로 다시 다른 손가락이라는 법이 없으며, 두 손가락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임시로 합한다고 이름 붙였지만 달리 합한다는 법도 없다.
또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을 통틀어서 손가락이라고 하는데, 단지 닿임만이 합하는 힘이 있을 뿐이요 나머지 세 곳은 합한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손가락이 합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종류가 처소를 같이한다 하여 합한 모양이라고 하지도 못하나니,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하여 땅의 모양은 땅 가운데에 있고, 물의 모양은 물 가운데에 있으며, 불의 모양은 불 가운데에 있다.
이와 같이 성품이 다르다면 합한다고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법과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
동등하다[等] 함은 온갖 법은 한 모양이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한다.
모두가 바로 있는 모양[有相]이고 모두가 바로 무상한 모양[無常相]이며,
모두가 바로 괴로운 모양[苦相]이고 모두가 바로 공하고 나 없는 모양[空無我相]이며,
모두가 바로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는 모양[不滅相]이니,
그 일에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한다.
동등하지 않다[不等] 함은 저마다 개별적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마치 형상이 있는 모양[色相]과 형상이 없는 모양[無色相]과 단단한 모양[堅相]과 축축한 모양[濕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마다 다르면서 동일하지 않으니, 이것을 같지 않다고 한다.
보살은 같다거나 같지 않다 함을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온갖 법은 없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에 법이 없고, 법이 없기 때문에 볼 수가 없으며,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같거나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동등하다[等]는 것과 합한다[合]는 것은 바로 익혀서 상응한 것이요,
합하지 않는[不合] 것과 같지 않다[不等]는 것은 바로 상응하지 않은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상응함을 말씀하고 난 뒤에 찬탄하시지 않는가?
【답】 듣는 이가 싫증을 낸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과보의 공덕을 찬탄하시니, 듣는 이가 마음에 즐거움을 얻는 까닭이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신속히 법성(法性)을 얻겠다.”거나 “얻지 않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이란 얻는 모양이 아닌 까닭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법성이라 함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마음속의 무명(無明)과 모든 결사(結使)를 없애고 청정하고 진실한 관(觀)으로써 모든 법의 본래 성품[本性]을 얻음을 일컬어 법성이라 한다.
성품[性]이란 진실을 말하나니, 중생은 삿된 관[邪觀] 때문에 속박되고 바른 관[正觀] 때문에 해탈한다.
보살은 “나는 신속히 법성을 얻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은 모양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오랜 뒤에나 얻어야겠다.”라고도 말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은 더디거나 오래 걸리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법성의 뜻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의 뜻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어떤 법이 있어 법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무명 등의 모든 번뇌가 온갖 법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법의 자성을 잃게 된다.
자성을 잃기 때문에 모두가 삿되고 굽으면서 바르지 않게 되지만,
성인은 이 무명 등을 물리쳐 없애므로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이 도로 환히 밝아지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검은 구름이 허공의 청정한 성품을 가렸을 때 그 검은 구름만 걷히면 허공의 청정한 성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만일 어떤 법이라도 무명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법성에서 벗어나겠지만, 이 일만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떤 법도 무명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법이 법성에서 벗어남을 보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뭇 흐름은 모두가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마치 좁쌀처럼 흩어진 작은 왕[小王]들은 모두가 전륜성왕에게 속한 것과 같으며,
마치 여러 작은 광명들은 모두가 해에 딸린 것과 같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법성은 모든 법을 분별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문】 무엇 때문에 “법성은 모든 법을 분별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 법성에 집착하게 되면 법성을 귀히 여기게 되며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결사(結使)를 내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문】 만일 법성은 공하고 한 모양이어서 모양이 없다 하면 어떻게 모든 법을 분별하겠는가?
【답】 이 법성을 얻고 무명 등의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모든 법의 실상을 깨뜨리면 그런 뒤에는 마음이 청정하여지고 지혜가 명료해지면서 모든 법의 실상을 알게 된다. 법성을 따르면 선(善)이 되고 법성을 따르지 않으면 불선(不善)이 된다.
마치 바차 범지(婆蹉梵志)가 부처님께 묻기를,
“세존이시여, 천지(天地) 간에는 선과 악과 아름다운 것[好]과 추한 것[醜]이 있나이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바차가 말하기를,
“저는 오랫동안 부처님께 귀명하고 있나이다. 원하옵건대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해 주옵소서.”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세 가지의 악과 세 가지의 선과 열 가지의 악과 열 가지의 선이 있나니,
이른바 탐욕은 바로 악이고 탐욕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며,
성냄과 어리석음은 바로 악이요 성냄과 어리석음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며,
살생(殺生)은 바로 악이요 살생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니라.
나아가 삿된 소견[邪見]은 바로 악이고 삿된 소견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니,
사실대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으면 그는 나의 제자이며,
법성에 들어감을 일컬어 득도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
이 법은 법성을 얻는다.”거나 “얻지 못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이 법으로써 법성을 얻거나 얻지 못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어떻게 법성을 얻고 8성도분(聖道分)을 행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가?
이른바 열반을 바로 법성을 얻는다고 한다.
또 성품[性]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고 법(法)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 모든 법성을 얻겠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모든 법성의 이 두 가지 법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필경공(畢竟空)인 까닭이니, 어떻게 반야바라밀로써 법성을 통달할 수 있겠는가?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성이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법성과 합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은 법성이 바로 공이라고 관하지 않고 공이 바로 법성이라 관하지 않으며, 공을 행하여 법성을 얻고 법성을 반연하여 공을 얻는다.
이 때문에 다름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눈의 경계[眼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눈의 경계와가 합하지 않으며,
빛깔의 경계[色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빛깔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안식의 경계[眼識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안식의 경계와 합하지 않느니라.
나아가 뜻의 경계[意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뜻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법의 경계[法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법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의식의 경계[意識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의식의 경계와 합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사리불아, 이 공과 상응함을 일컬어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눈의 경계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눈의 경계와 합하지 않는다 했는데, 눈은 있는 것[有]이요 공은 없는 것[無]이니, 공과 있는 것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또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분별한다.
이 눈이 흩어지고 소멸하면 눈은 곧 공이며, 공하면 눈이라는 이름조차 없게 된다.
원인[本]으로 인하여 있으며, 눈이 공하면 그 공도 또한 없나니, 이 눈이 공함을 분별해 보면 이것은 눈의 공도 아니다. 그렇다면 눈이 공과 합하지 않는다.
또 공은 인연에서 생기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두 가지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식의 경계 역시 그와 같다.
【문】 이 안에서는 무엇 때문에 5중(衆) 등의 모든 법을 말씀하지 않고 단지 18계(界)만을 말씀하시는가?
【답】 당연히 말씀하셨어야 하리라. 혹은 외우면서 베껴 쓰는 이가 망실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18계를 말하면 온갖 법이 포함된다.
어떤 중생은 심색(心色) 중에서는 잘못이 있지만 심법(心法) 중에서는 잘못되지 않나니, 마땅히 18계를 들으면 제도될 수 있으리라.”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단지 18계만을 말씀하신다.
【문】 무엇 때문에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는가?
【답】 공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광[藏]이다.
오직 하나뿐인 열반의 문이니 다시는 다른 문이 없다.
모든 삿된 소견과 쓸모없는 이론을 깨뜨리니, 이것과 상응하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으뜸간다고 한다.
다시 부처님은 스스로 으뜸가는 인연을 다음에서 말씀하신다.
【경】 사리불아, 공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사리불아, 모든 상응한 가운데서 반야바라밀의 상응이 맨 첫째가며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하고 가장 묘하여 보다 위의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반야바라밀의 상응은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수기(授記)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혹은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상응하면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위하여 이익을 지음이 두터울 것이며,
이 보살마하살은 또한,
‘나는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니, 모든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셔야 한다.’거나,
‘나는 머지 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거나 ,
‘나는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거나,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법륜(法輪)을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법성(法性)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고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라는 모양[我相]과 중생이라는 모양[衆生相]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마침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중생은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느니라.
만일 법에 나는 모양[生相]이나 멸하는 모양[滅相]도 없다면 어떻게 이 법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겠느냐?
그와 같아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 되며,
중생은 받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공하기 때문에, 중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여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 되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의 모든 상응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상응은 이른바 공과의 상응[空相應]이니, 이 공과의 상응은 그 밖의 상응보다 수승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공을 익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내며,
보살마하살은 이 상응을 익혀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계율을 범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으며,
산란한 마음을 내지 않고 지혜 없는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논】 해석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함은,
공과의 상응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단공(但空)이고,
둘째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다.
단공만을 행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만 불가득공을 행하면 공도 또한 얻을 수 없으므로 떨어질 만한 곳조차 없다.
다시 두 가지의 공이 있다.
첫째는 방편이 없는 공이니, 두 지위에 떨어지게 되며,
둘째는 방편이 있는 공이니, 떨어질 데가 없이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된다.
또 본래 깊은 비심(悲心)이 있으면서 공으로 들어가면 떨어지지 않지만, 큰 비심이 없으면 곧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두 지위에 떨어지지 않는다.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킨다 함은,
보살이 이 공과 상응하는 데에 머물러 다시는 장애가 없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10선도(善道)와 모든 착한 법을 행하게 한다.
중생들이 착한 법을 행하는 인연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청정해지고 살생(殺生)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명이 길게 되며,
빼앗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풍요하고 쾌락이 있으면서 생각하는 대로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착한 법을 행하면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문】 중생을 교화하면서 부처님 국토는 청정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따로 말씀하는가?
【답】 중생이 비록 착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보살의 행원(行願)과 회향(廻向)과 방편력의 인연을 구해야 한다.
그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청정해지나니,
마치 소의 힘으로 수레를 끌지만 반드시 부리는 사람이 있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따로 말씀하신다.
신속히 얻는다 함은 이 공과 상응함을 행하면서 장애가 없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히 얻게 되는 것이다.
【문】 먼저는 공과의 상응함을 말씀하고 이번에는 반야바라밀과의 상응함을 말씀하며 뒤에는 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의 상응함을 말씀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두 가지의 공이 있나니,
첫째는 반야의 공[般若空]이고, 둘째는 반야가 아닌 공[非般若空]이다.
먼저 공과의 상응함을 말하면 듣는 이가 의심하면서,
“온갖 것은 공하다.”라고 한다.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의 공을 설명해 준다.
다시 어떤 사람은,
“단지 공의 으뜸감[第一]만을 말하니, 무상과 무작은 으뜸가지 않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나니,
이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작과의 상응함도 역시 첫째간다.”라고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공하면 그것은 모양[相]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그것은 조작[作]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름은 하나이면서 구별되는 것이다.
맨 위이기 때문에 높다[尊] 하고, 있는 것[有]을 깨뜨리기 때문에 수승하다[勝] 하며,
이 상응함을 얻으면 다시는 그 밖의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장 묘하다[最妙]고 한다.
마치 온갖 중생 중에서는 부처님이 위없는[無上] 이가 되고,
온갖 법 중에서는 열반이 위없으며,
온갖 유위법 중에서는 착한 법을 익히어 상응함이 위없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그 밖의 이치는 찬반야품(讚般若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문】 만일 이와 같이 공과의 상응함을 행하면 곧 수기(授記)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혹은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는가?
【답】 이 보살은 새로이 도를 행해 육신이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했고 반주삼매(般舟三昧)도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 단지 지혜의 힘 때문에 이와 같이 분별하면서 공에 깊이 들어갈 뿐이다.
부처님은 그 공에 들어가는 공덕을 찬탄하시기 때문에,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보살로서 수기를 얻는 이에 세 가지가 있나니,
마치 수기를 받은 것과 같은 이고,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이며, 이미 수기를 얻은 이다. 「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이 세 가지는 그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문】 이처럼 상응함이 으뜸 가며 위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수기를 주시지 않는가?
【답】 그 밖의 공덕과 방편과 선정 등을 아직 쌓지 못했고 단지 지혜만이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아직 수기를 주시지 않는다.
또 이 보살은 비록 근기가 영리하고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밖의 공덕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수기 주시는 것을 듣게 되면 혹시 교만한 마음을 내게도 되나니, 이 때문에 아직 수기는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찬탄하는 까닭은 그의 마음을 권하면서 정진하게 하려 함에서다.
근기가 영리한 이가 이 공과 상응함을 행하면 마치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고,
근기가 둔한 이가 이 공의 상응함을 행하면 머지않아 수기를 받게 된다.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온하면서 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것을 이익(利益)이라 한다.
다시 두 가지의 이익이 있나니,
첫째는 고통을 여의게 하고, 둘째는 안락을 주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중생들의 몸의 고통[身苦]과 마음의 고통[心苦]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천상의 즐거움[天樂]과 인간의 즐거움[人樂]과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삼계(三界)를 여의고 3승(乘)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아승기에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중생에 관한 뜻은 먼저의 설명과 같다.
세간 사람들은 곧 공훈이 있게 되면 교만한 마음을 내면서 그 보상(報賞)을 구한다.
보상을 구하기 때문에 청정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그렇지가 않아서 비록 반야바라밀과 상응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하더라도 나라는 마음이 없고 교만이 없기 때문에 공덕의 보상을 구하지 않는다.
비록 땅이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그 공훈이 중하다 하더라도 그 보상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말씀하시되,
“이 보살은,
‘나는 반야와 상응하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마땅히 나에게 수기를 주셔야 한다.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
나는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위없는 도를 얻고서 법륜을 굴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시는 것이다.
법륜을 굴린다[轉法輪]는 뜻은 먼저의 설명과 같다.
【문】 어떠한 법이 법성(法性)에서 벗어나는가?
【답】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가 곧 보살이요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가 곧 중생이다.
법성 가운데서 중생이 변하여 법성이 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내지도 않고 중생으로부터 은혜의 보답도 구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 주시는 것도 보지 않는다.
마치 보살이 공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며,
수행하는 이가 공하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역시 공하다.
왜냐하면 부처님 스스로가 말씀하시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이라는 모양[衆生相] 내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내지 않는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히려 법이라는 모양[法相]조차도 내지 않는데 하물며 중생이라는 모양이겠는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 중생은 마침내 나지 않나니, 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곧 그것이 법성의 모양이다.
법성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겠는가?
보살은 중생을 받지 않는다[不受衆生] 함은 신(神)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니, 단지 허망하게 나[我]라고 헤아림이 있을 뿐이다.
중생이 공하다[衆生空] 함은 중생이라는 법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중생은 얻을 수 없다[衆生不可得] 함은 진실한 지혜로써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여읜다[衆生離] 함은 온갖 법은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온갖 법이 자상을 여읜다 함은 마치 불이 더운 모양[熱相]을 여의는 것과 같다.
마치 상공(相空)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으뜸가는 상응은 그 밖의 상응보다 수승하다 함은 위에서의 설명과 같다.
보살이 이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을 행하며 공과의 상응으로 깊이 들어가 본래의 서원을 기억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중생들이 헷갈리고 뒤바뀌어 공한 일 가운데서 갖가지로 집착을 내는 것을 보고는 곧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어,
“나는 이 일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다.” 하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내지만 언제나 6바라밀을 깨뜨리는 법을 내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여섯 가지의 삿되고 뒤섞인 행[惡雜行]을 하기 때문에 6바라밀이 더욱더 자라지 않나니, 더욱 자라지 않기 때문에 신속히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법의 모양을 알고서 이 여섯 가지 나쁜 법의 근본을 뽑아버린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보시는 착한 것이요 간탐하는 마음은 착하지 않아 능히 아귀(餓鬼)나 빈궁함 가운데 떨어지게 함을 알기 때문이다.
간탐이 이와 같음을 알고도 스스로 그의 몸을 아끼고 세간의 즐거움에 집착하는 까닭에 도리어 간탐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면,
이런 보살은 대수롭지 않은 하찮은 물건은 베푸나 중한 물건은 베풀지 못하며, 바깥 물건[外物]은 베푸나 안의 물건[內物]은 베풀지 못한다.
나에 집착하므로 받는 이[受者]에도 집착하고 모양을 취한지라 재물(財物)에 집착하나니, 이 때문에 단(檀)바라밀을 깨뜨리며 비록 보시함이 있더라도 청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보살은 공과 상응함을 행하기 때문에 나를 보지도 않고 또한 세간의 즐거움을 보지도 않나니 어떻게 집착을 내면서 단바라밀을 깨뜨리겠는가?
【문】 만일 나를 보지 않고 세간의 즐거움을 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리지도 않고 또한 단(檀)도 보지 않아야 한다면 어떻게 보시를 행하는가?
【답】 이 보살이 비록 보시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청정하고 공한 마음으로써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보시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중생이 바라기 때문에 베풀어 준다.”라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는 흙을 금은으로 여긴다 해도 어른은 그것을 금은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곧 뜻을 따라 베풀어 주면서도 끝내 주는 바가 없나니, 그 밖의 다섯 가지의 법도 역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비록 똑같이 공으로 여기면서 간탐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단(檀)은 깨뜨리지 않는다.
사리불이나 보살마하살은 이런 공과의 상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항상 이 여섯 가지의 삿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