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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7권
6. 변수면품③
6.4. 온갖 번뇌에 관한 그 밖의 문제[3]
4) 일체 번뇌와 6식(識)의 상응관계
앞서 분별한 수면과 수번뇌 중에서 오로지 의지(意地, 즉 제6의식계)에만 의지하여서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이고, 6식지(識地) 모두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은 몇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소단과 만(慢)과 수면(睡眠)과
자력으로 일어나는 수번뇌는 모두
오로지 의지(意地)에서만 일어나며
그 밖의 것은 모두 6식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견소단과, 수소단인 ‘만’과 수면, 수번뇌 중의 자력으로 일어나는 자재기(自在起)의 번뇌(즉 질ㆍ간ㆍ회ㆍ분ㆍ부와 6번뇌구),
이와 같은 세 종류의 번뇌는 모두 의식(意識)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이 같은 온갖 번뇌와 수번뇌는] 5식신(識身)에 의지하여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85)
그 밖의 일체의 번뇌는 모두 6식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즉 수소단 중의 탐ㆍ진ㆍ무명과, 아울러 그것과 상응하는 온갖 수번뇌, 이를테면 무참ㆍ무괴ㆍ혼침ㆍ도거, 그리고 그 밖의 대번뇌지법에 포섭되는 수번뇌, 즉 방일ㆍ해태ㆍ불신(不信)은 모두 6식신에 의지해야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86)
이치상으로 마땅히 모든 수번뇌에 대해서도 설해 보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거칠게 나타나는 것에 근거하여 논설하였다.
5) 일체 번뇌와 5수근(受根)의 상응관계
① 근본번뇌와 5수근의 상응관계
다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은 낙(樂) 등의 5수근(受根)과87) 지금 여기서 분별한 일체의 번뇌와 수번뇌 중에서, 어떠한 번뇌가 어떠한 근과 상응하는 것인가?
여기서 마땅히 온갖 [근본]번뇌와의 상응관계에 대해 먼저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온갖 번뇌 가운데
‘탐’은 희(喜)ㆍ낙수(樂受)와 상응하고
‘진’은 우(憂)ㆍ고수(苦受)와, ‘치’는 모두와
사견은 우ㆍ희수와 상응한다.
의(疑)는 우수와, 그 밖의 다섯 가지는 희수와
일체의 번뇌는 사수(捨受)와 상응하며
상지의 번뇌는 모두 각기 대응하는 바에 따라
자식(自識)의 온갖 수(受)와 두루 상응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온갖 번뇌 중에서 탐(貪)은 희수(喜受)와 낙수(樂受)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歡行轉],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다.88)
진(瞋)은 우수(憂受)와 고수(苦受)와 상응하니, 근심에서 일어나고[慼行轉],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다.
무명은 앞의 네 가지의 수와 두루 상응하니,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고, 6식과 두루 [관계하기] 때문이며, 그 밖의 번뇌와도 두루 상응하기 때문이다.
사견은 우수와 희수 모두와 상응하니,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意地, 제6의식)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사견은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난다는 것인가?]89)
순서대로 일찍이 죄업과 복업을 지었기 때문이다.90)
의(疑)는 우수와 상응하니,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意地)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유예(猶豫, 불결정의 망설임)를 품은 자는 결정적으로 알기를 희구하여 마음이 수척해지기 때문이다.
[사견을 제외한] 그 밖의 4견(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ㆍ견취)과 만(慢)은 희수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이제 전체적으로 논설[通說]해보면, [일체의 번뇌는] 모두 사수(捨受)와 상응하니,91) 사수는 치(癡, 즉 무명)에 의해 수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치’는 모든 번뇌와 두루 상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뇌가 상속하여 구경(究竟)에 이를 때, 경계가 멀어지고 그것을 취하는 것도 느려져 처중(處中, 不苦不樂)의 욕을 일으키다가 점차 쇠미하여 상속이 끊어지는 것이니, 그때 번뇌는 사수와 서로 수순(隨順)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는 모두 사수와 상응하는 것이다.
어찌 사근(捨根)을 기쁨도 아니고 근심도 아닌 것[非歡非戚]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상응한다는 것인가?
처중(處中), 즉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업을 짓는 사람의 경우처럼, [사근 역시] 함께 한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이다.92)
욕계의 번뇌가 이미 그러하다면, 상지(上地)의 경우는 어떠한가?
상지의 번뇌는 모두 각기 대응하는 바에 따라 자지(自地)의 자식(自識)과 구기하는 온갖 수(受)와 두루 상응한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지(地) 중에 네 가지 식(識)이 존재할 경우, 그러한 각각의 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각기 자식의 온갖 ‘수’와 두루 상응한다.93)
또한 만약 온갖 지 중에 오로지 의식만이 존재할 경우, 그러한 의식에 의해 일어난 번뇌는 의식과 [구기한] 온갖 ‘수’와 두루 상응한다.
그리고 상계의 온갖 지 중에는 식(識)의 많고 적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에는 네 가지의 식이 존재하며,
그 밖의 지(地)에는 한 가지(즉 의식) 만이 존재한다.
또한 수(受)에도 많고 적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ㆍ제2ㆍ제3ㆍ제4정려 등에는 순서대로 희ㆍ낙ㆍ사수와, 희ㆍ사수와, 낙ㆍ사수와, 오로지 사수만이 존재한다.94)
따라서 온갖 지(地) 중에 존재하는 번뇌는 각기 상응하는 바대로 그 지의 식과 [구기하는] ‘수’와 상응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두 가지 의(疑, 상계와 욕계의 ‘의’)는 다 같이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임에도, 어떠한 이유에서 상계의 그것은 희ㆍ낙수와 상응할 수 있는 반면, 욕계의 ‘의’는 희수와 구기하지 않는 것인가?
이욕지(離欲地)에 존재하는 온갖 번뇌는 비록 결정짓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근심이 아니니, 비록 의심의 그물[疑網]을 품었을지라도 정의적인 즐거움[情怡]를 폐(廢)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95)
이는 마치 인간이 애호할 만한 물건을 추구하여 획득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록 힘들고 피곤한 일이 많을지라도 즐거움의 생각[樂想]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색계에서도 역시 의심을 품는 일이 있을지라도 의심하는 중에 선한 품류의 생각을 낳는다. 그래서 그것은 희ㆍ낙수와 상응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비달마장현종론 제28권
[근본] 번뇌와 온갖 수(受)의 상응관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② 수번뇌와 5수근의 상응관계
이제 다음으로 다시 마땅히 수번뇌의 상응관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수번뇌 가운데
질(嫉)ㆍ회(悔)ㆍ분(忿)과 아울러
뇌(惱)ㆍ해(害)ㆍ한(恨)은 우수와 구기하고
간(慳)은 희수와 상응한다.
첨(諂)ㆍ광(誑)과 아울러 수면과 부(覆)는
우수와 희수 모두와 구기하며
교(憍)는 희ㆍ낙수와, 모든 수번뇌는 사수와,
그 밖의 네 가지는 모두와 두루 상응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수번뇌 가운데 ‘질’ 등의 여섯 종류(嫉ㆍ悔ㆍ忿ㆍ惱ㆍ害ㆍ恨)는 모두 다 우근(憂根)과 상응하니,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意地)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뇌’는 희수와 상응하니, 견취의 등류(等流)여서 마땅히 기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간(慳)’은 희수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쁨에서 일어난다’고 한 것은, ‘간’의 상(相)이 ‘탐’과 극히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첨(諂)ㆍ광(誑)ㆍ면(眠, 수면)ㆍ부(覆)는 우수와 희수와 상응하니,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쁨과 근심에서 일어난다’고 한 것은, 이를테면 혹 어떤 때에는 환희심에서 아첨 등을 일으키지만, 혹 어떤 때에는 근심과 슬픈 마음에서 그것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말하기를,
“앞에서 이미 ‘광’은 탐의 등류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다만 마땅히 기쁨에서 일어난다고 해야 한다. 즉 마땅히 우근과 상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는 바로 기쁨의 등류이지 근심의 등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속임수가 올바로 이루어질 때에는 근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광’은 바로 치(癡)의 등류라고 설해야 하는 것이다”1)라고 하였다.
‘교(憍)’는 희수와 낙수와 상응하니, 기쁨에서 일어나고, 오로지 의지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즉 제3정려에 존재하는 ‘교’는 낙수와 상응하고, 그 아래 온갖 지에 존재하는 ‘교’는 희수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설한 온갖 수번뇌는 모두 다 사수와 상응하니, 그 상속이 끊어질 때에는 모두 사수와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또한] 기쁨과 근심 모두에서 일어날[通行, 즉 歡行과 戚行] 뿐더러, 오로지 사수만이 존재하는 정려지[捨地, 즉 제4정려]에도 존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일체의 수번뇌는 사수와 상응한다고 하여도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무명이 [일체의 번뇌와] 두루 상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밖의 무참ㆍ무괴ㆍ혼침ㆍ도거의 네 가지 수번뇌는 모두 5수근과 두루 상응하니,
앞의 두 가지는 바로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뒤의 두 가지는 바로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두 번에 걸쳐 ‘아울러[及]’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힐난[難]과 해석[釋]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테면 ‘뇌’와 ‘광’에 대한 힐난은 앞에서와 같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마땅히 결과와 원인의 상(相)이 다르다고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무참이나 도거와 같은 것도 비록 ‘탐’의 등류이지만, 우수와 고수와 상응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따
라서 앞서 설한 [5]수근(受根)과의 상응관계는 오로지 동류의 원인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상(相)의 차별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2)
즉 근심에서 ‘광’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고 인정한 것은, 마음에 근심하는 바가 있게 되면 남을 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 5개(蓋)
① ‘개’의 종류
앞에서 논설한 번뇌와 수번뇌를 부처님께서는 다른 갈래에 근거하여 ‘개(蓋, nīvaraṇa)’라고도 설한 일이 있으니,3)
이제 다음으로 마땅히 이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개(蓋)의 다섯 가지는 오로지 욕계에 존재하는데
[혼면과 도회는] 먹이와 대치와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비록 두 가지 번뇌이지만 한 가지로 설정한 것으로
[무루의] 온을 장애하기 때문에 오로지 다섯 가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예컨대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5개(蓋)를 설하여 불선의 취(聚)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올바른 설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와 같은 다섯 종류의 번뇌는 한결같이 원만한(완전한) 불선취이기 때문이다.
그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욕탐개(欲貪蓋)이며,
둘째는 진에개(瞋恚蓋)이며,
셋째는 혼면개(惛眠蓋)이며,
넷째는 도회개(掉悔蓋)이며,
다섯째는 의개(疑蓋)이다.”4)
[이렇듯] 계경에서 이미 ‘개’는 오로지 불선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욕계에만 존재할 뿐 색계와 무색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러한 경증에 따라 혼침ㆍ도거ㆍ의(疑)는 그 자체 비록 욕계와 색ㆍ무색계 모두에 통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만 욕계의 그것만을 ‘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혼침과 도거의 두 종류는 오로지 욕계의 그것만을 ‘개’로 설정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수면(睡眠)과 회(悔, 즉 악작)와 화합시켜 설정한 것이니, 수면과 ‘회’는 오로지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번뇌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면과 ‘회’의 경우도 오로지 염오(즉 불선)한 그것만을 ‘개’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혼침과 도거 두 종류와 화합시켜 설정한 것이니, 혼침과 도거는 오로지 염오성의 번뇌이기 때문이다.5)
나아가 ‘의’의 경우도 앞의 네 가지에 준하여 욕계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욕탐개ㆍ진에개ㆍ의개는 각기 하나의 번뇌에 대해 ‘개’라는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였으면서 혼면(惛眠)과 도회(掉悔)의 두 ‘개’의 경우 각기 두 가지 법체(수번뇌)를 합하여 ‘개’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욕탐과 진에와 ‘의’의 경우 먹이[食]와 대치[治]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각각에 대해 ‘개’라는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혼(혼침)’과 ‘면(수면)’, ‘도(도거)’와 ‘회’는 그것에 의해 먹혀지는 것[所食]과 그것을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과 그것의 작용[事用]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법체는 비록 다를지라도 두 가지를 합하여 하나의 ‘개’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즉 욕탐개의 먹이는 말하자면 좋아할 만한 상[可愛相]이며,
이러한 ‘개’를 대치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부정한 것이라는 생각[不淨想]이다.
진에개의 먹이는 말하자면 증오할 만한 상[可憎相]이며,
이러한 ‘개’를 대치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慈)의 선근이다.
의개의 먹이는 말하자면 3세이니, 계경에서
“과거세에 대해 이와 같은 의심을 낳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으며,6)
이러한 ‘개’를 대치하는 것은 말하자면 연성(緣性)과 연기(緣起)를 능히 참답게 관찰하는 것이다.7)
[이처럼 욕탐과 진에 등은 그것의 먹이와 대치가 각기 다르지만, 혼침과 수면, 도거와 ‘회’는 먹이와 대치와 작용이 동일하다.]
즉 혼면개의 먹이는 말하자면 다섯 종류의 법이니,
첫째는 눈꺼풀이 무거워 감기는 것[瞢]등이며,
둘째는 신이 나지 않는 것[不悅]이며,
셋째는 노곤하여 하품하는 것[頻申]이며,
넷째는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되지 않는 것[食不平性]이며,
다섯째는 명료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心昧劣性]이다.
이러한 ‘개’를 대치하는 것은 말하자면 밝은 생각[光明想]이며, 이러한 ‘개’의 작용은 말하자면 두 가지(‘혼’과 ‘면’) 모두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가라앉게 하고 어둡게 하는 것이다.
도회개의 먹이는 말하자면 네 종류의 법이니,
첫째는 친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親里尋]이며,
둘째는 고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國土尋]이며,
셋째는 죽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不死尋]이며,
넷째는 옛날에 겪었던 여러 가지 웃고 즐기며 기뻐하였던 것[戱笑歡娛]과 섬겼던 친지[承奉] 등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를 대치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마타(奢摩他, śamatha,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는 선정, 止로 번역됨)이며,
이러한 ‘개’의 작용은 말하자면 두 가지(‘도거’와 ‘회’) 모두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먹이와 대치와 작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혼침(惛沈)과 수면(睡眠), 도거(掉擧)와 추회(追悔)의 두 가지 법체를 합하여 하나의 ‘개’로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욕탐과 진에와 ‘의’는 바로 원만한(완전한) 번뇌로서, 그 하나하나가 능히 덮고 가리는 하나의 작용을 갖고 있지만, 혼침ㆍ수면ㆍ도거ㆍ회는 원만한 번뇌가 아니어서 두 가지를 합쳐야 비로소 덮고 가리는 하나의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
② 다섯 번뇌만이 ‘개’인 이유
무슨 의미에서 이 다섯 가지를 ‘개(蓋, nīvaraṇa)’라고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 다섯 가지는] 결정코 능히 성도(聖道)와 성도의 가행을 덮고 장애[覆障]하기 때문에 ‘개’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온갖 번뇌 등도 모두 ‘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일체의 번뇌(즉 번뇌와 수번뇌)는 모두 성도와 그 가행을 능히 덮고 장애하기 때문으로,
세존께서 모든 필추들에게
“만약 어떤 법에 의해 덮이고 장애 된다면, ‘안(眼)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능히 알지 못할 것이니, 여기서 어떤 법이란 이를테면 탐 [등]이 바로 그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한 것과 같다.
그리고 온갖 번뇌 하나하나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은 「잡사품(雜事品)」에서 설한 바와 같다.8)
그럼에도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오로지 이 다섯 가지만을 ‘개’라고 설한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실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다시 말해 일체의 번뇌를 ‘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佛) 세존께서 ‘개’의 갈래를 설정하면서 오로지 다섯 가지만을 설한 것은, 오로지 이것만이 5온에 대해 능히 뛰어난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9)
즉 욕탐개와 진에개는 능히 계온(戒蘊)을 장애하니, 순서대로 이욕(離欲)과 이악(離惡)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침과 수면은 능히 혜온(慧蘊)을 장애하니,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비발사나(毘鉢舍那, vipaśyanā, 삼매에 의한 正觀)를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거와 악작(惡作, ‘悔’의 다른 이름)은 능히 정온(定蘊)을 장애하니, 이것은 다 같이 사마타(奢摩他, 선정)를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개’는 점차 출리(出離)의 백법(白法, 즉 열반을 말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으로, 이로 말미암아 그 뒤 업의 과보와 4제(諦)에 대해 의혹[疑]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이 능히 [계온] 내지 해탈온(解脫蘊)과 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을 [장애하여] 그 모두로 하여금 일어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오로지 이 다섯 가지만을 ‘개’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도회개를 혼면개 앞에 설해야 할 것이니, 계ㆍ정ㆍ혜온의 순서로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10)
그렇지 않다.
여기(5개)서 [무루 5온의] 순서를 허문 것은 세존의 의도에 별도의 다른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즉 계경 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정리(正理)에 의거하여
혼면개는 비발사나만이 능히 대치할 수 있고 ‘지(止, 즉 사마타)’는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며,
도회개는 오로지 사마타만이 능히 대치할 수 있고 ‘관(觀, 즉 비발사나)’은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하였는데,
이는 조복시켜 끊는 것[伏斷]에 근거하여 ‘관(觀)’과 ‘지(止)’의 갈래가 혼면과 도회의 두 ‘개’를 [각기] 개별적으로 대치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원한 끊어짐[永斷]에 근거하는 경우라면, 이러한 ‘관’과 ‘지’의 갈래가 대치하는 일체의 작용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여기서는 바로] 이 같은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무루 5온의] 순서를 허문 것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무명은 ‘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말[說]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무명은 덮여지는 것[所覆]이다”라고 설하였는데,
‘덮는 것[覆]’이 바로 ‘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똑같은 짐을 진 것은 온갖 ‘개’로 설정하지만, 무명은 그 중에서도 더욱 무겁기 때문에 [‘개’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만(慢)은 어떠한 이유에서 ‘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만’에 의해서는 능히 수승한 법을 닦는 경우도 있지만, ‘개’는 그 뜻이 저열하기에 ‘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유여사는 말하기를,
“대저 ‘개’는 마음으로 하여금 하법(下法)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만’의 경우 그렇지 않으니, 마음으로 하여금 능히 상법(上法)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온갖 견(見)은 어떠한 까닭에서 ‘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비아(非我)의 견해를 결여한 자가 온갖 유정을 보고 비록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할지라도 능히 염오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온갖 ‘견’은 그 성질이 민첩하고 예리[捷利]하기 때문에(다시 말해 ‘견’은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개’의 뜻과 부합하지 않으니, ‘개’는 그 성질이 느리고 둔한 것[遲鈍]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번뇌 가운데 [혼침ㆍ수면ㆍ도거ㆍ회를 제외한] 그 밖의 것을 ‘개’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앞에서 설한 바에 준하여 마땅히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상 2계의 혹(惑)을 ‘개’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3계의 염오를 떠난 것이기에 첫 번째[初] [계(욕계)의]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 [계]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개’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상계의 혹은 오로지 무기이기 때문으로, ‘개’가 오로지 불선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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