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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資治通鑑)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북송(北宋) 치평(治平) 2년(1065년)에 영종(英宗)의 조를 받들어 사학가 사마광(司馬光)이 짓기 시작하였다. 원풍(元豊) 7년(1084년) 11월에 완성되었으며, 처음 이름은 《통지(通志)》였으나 신종(神宗)에 의해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통감(通鑑)》이라 줄여부르기도 한다. 편년체(編年體) 형식으로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이 진(晉)나라 3경(卿:韓 ·魏 ·趙氏)을 제후로 인정한 BC 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고대 중국 16개조 1362년의 역사를 다루었으며 모두 16기(紀) 294권이다.
이 책은 왕조 시대에는 사마광의 명망과 더불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후술하겠지만 실제 정치를 실시하는데 있어 참고하고 보조로 삼아야 할 책로서 제작된 목적도 있어 《정관정요(貞觀政要)》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제왕학 서적으로 여겨져 왔다. 또한 지금은 산일되고 없는 사마광 당시까지 전해지던 사료를 적지 않게 수록했기에 유력한 사료라고 주목받고 있다. 한국의 역사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황제가 두루 볼 수 없을 정도의 역사책의 방대한 분량을 염려한 황제는 사마광에게 이들 역사책을 하나로 정리한 《통지》 8권을 만들게 했다. 기술은 통사(通史)·편년사(編年史)의 체재를 취하고, 구양수(歐陽修)의 《신오대사(新五代史)》처럼 《춘추(春秋)》에서 그 규범을 모방하고 있다. [1] 치평 원년(1064년)에 처음 영종에게 바쳐진 이 책은 신종대에 이르러, "정치상의 참고에 이바지하는 치정(治政)의 거울"이라는 의미가 담긴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다.
자치통감이라 함은 치도(治道)에 자료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독특한 사관(史觀)에 의하여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감계(鑑戒)가 될 만한 사적을 많이 습록(拾錄)하였다. 편년에 있어서도 3국의 경우에는 위(魏)나라의 연호를, 남북조의 경우에는 남조의 연호를 각각 써서 그것이 정통(正統)임을 명시하였다.
사마광이 이 책을 제작한 의도는 전국 시대에서 5대(五代)까지 1362년의 정치적 변천을 더듬어 그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정돈함으로써 대의명분을 밝혀 제왕(帝王)의 치정의 거울로 삼는 데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자신의 역사관이 대의명분에 집약적으로 관철되어 있다. "신(臣)의 정력이 이 서(書)에 다하였도다"라고 그가 상주(上奏)한 바 있는 19년간의 수사(修史) 사업에는 각 왕조의 정사(正史) 외에 잡사(雜史) 322종이 사용되어 이들 자료에 고증을 가미했으며, 특히 수(隋)·당(唐) 시대의 부분에 있어서는 구양수의 《신당서(新唐書)》편찬 이후에 수집된 자료들까지 채록하여 정사로서의 신·구《당서》나 신·구《오대사》와 더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마광은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날짜순으로 다시 정리해 하나의 '대자료집'('장편'이라고도 불렸다)을 완성시킨(제1단계) 다음에 그 '대자료집' 안에서 사마광이 치세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뽑아 《자치통감》으로서 완성시켰다(제2단계).
제1단계를 사마광 자신이 모두 도맡아 한 것은 아니고, 먼저 사마광이 《통지(通志)》 8권을 찬진(撰進)하자 영종(英宗)이 편찬국(編纂局)을 개설하여 사마광의 주재하에 당시 한대사의 전문가로 꼽히던 유반(劉攽, 그는 당시의 저명한 학자인 유창의 남동생)이 전·후한 시대를 맡고, 당대사의 경우는 사마광의 제자인 범조우(范祖禹, 1041년∼1098년)가 맡았으며, 가장 난관이었던 삼국(三國)에서 남북조(南北朝) 시대 부분은 당시 사학연구의 제1인자로 꼽히던 유서(劉恕)가 맡는 형태로 이루어졌다.(시대별로 그 분야의 역사 전문가가 분담하여 각 시대사를 집필한다는 당시로서는 가장 선구적이고 체계적인 형태의 역사 편찬 사업이었다.) 정사(正史)는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소설(小說) ·묘지류(墓誌類) 등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였다.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에는 ‘신광왈(臣光曰)’이라고 하여 사마 광 자신의 평론을 가하고 있어 그의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신종(神宗)이 《자치통감》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자신이 모은 자료 가운데 고증이 필요한 부분을 따로 정리한 것이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30권)이며, 연표로서 《자치통감연표》(30권)도 존재한다. 부산물로서 《통감목록(通鑑目錄)》(30권), 《통감석례(通鑑釋例)》(1권)은 사마광이 《자치통감》내의 각각의 목록과 범례를 수록한 것이며, 《계고록(稽古錄)》(20권)은 완성된 《자치통감》의 부족한 내용을 사마광 자신이 다시 보충한 것이다.
《자치통감》이 송대에 미친 영향은 크며, 이후 《자치통감》과 마찬가지로 편년체 역사책이나 편년체의 결점을 보충하기 위한 기사본말체 역사서가 잇따라 편찬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 등이 있으며,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비롯해 《자치통감기사본말(通鑑記事本末)》·《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續資治通鑑)》·《속자치통감장편습보(續資治通鑑長編拾補)》 등 아예 《자치통감》의 이름을 따온 것도 있었다. 또 원(元) 초기의 학자 호삼성의 주석(일명 '호주胡注')은 《자치통감》의 기사를 보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다른 사료의 내용도 제공하고 있어 본서를 읽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문헌이며 《자치통감》에 첨부된 많은 주석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스리는(治) 도리에 자료(資)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된다'는 뜻으로, 영종의 뒤를 이은 송신종이 사마광을 치하하며 내린 제목이다. 총 294권, 현대에 번역된 한글 번역본으로도 32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고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 황제 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사기를 고군분투하며 저술한 사마천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저술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와 사기의 중간 위치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사 최고의 명 역사서 중 하나이며 중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는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역사서로 꼽힌다.
송영종이 그간 정리되었던 역사서들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껴 사마광에게 편찬을 명해, 1065년 통지 8권을 저술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후 1084년까지 19년에 걸쳐 주나라(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에서 시작하여 송이 건국되기 바로 전에 존재했던 후주의 세종 6년(959)에 이르기까지 무려 1362년에 걸친 역사를 294권 분량의 편년체로 기록했다. 대개 기전체의 대들보는 사기, 편년체의 대들보는 자치통감 정도로 인식되어 있는듯하다.
송영종이 사마광에게 사서의 편찬을 명한 것은 당시 지나치게 격화되어 있던 구법파와 신법파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구법파라고 보수적이고 꽉막혔다고 볼 수 없고 신법파라고 검증된 확실한 방법도 아니었다. 갈등은 격화되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을 완전히 척살할 상황도 아니었던 송영종은 일단 구법파의 필두였던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귀양을 보내거나 사약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정계에서 영예롭게 물로날 수 있는 제안을 한것이다. 그리고 잠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렇다고 사서편찬이 꼭 구법파에게 불리하다고 만은 볼 수 없는게 사서 편찬을 통해 과거의 가치를 고수하는 견해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치통감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가치, 윤리, 도덕, 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치통감 편찬은 송영종의 절묘한 정치적 타협안이었던 샘이다.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이 아뢰옵니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위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중국))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만 한다. 단지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서 위,진의 연호를 채용했을 뿐, 위를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과 오를 폄하한 것은 아니다. 이는 이른바 "무통설(無統說)"로서 위정통론과 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정도 일단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이 김원중역이 하도 안좋은지라.. 그러나 이 책이 위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위빠 이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떡밥론자들 때문에 퇴색된 감도 있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가장 가까운 예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왕 마오쩌둥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통감 한 질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명나라 황제들이 조공의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만큼 세종대왕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과거에도 분량이 엄청난게 사실이라서 보통 주자가 정리한 자치통감강목이 더욱 퍼졌다. 약어로는 "강목". 야사에서 홍국영이 정조를 구하기 위해 영조의 아킬레스건인 책을 잘랐다니, 가렸다니 하는 책이 이 책. 지금보기엔 강목도 분량이 엄청나고, 잘라먹은 부분도 꽤 되지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으론 꽤나 성공적인 편집본이라고 한다. 분량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거라도 시도해보자. 다만 주자가 강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오리지널 통감의 무정통론을 까면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조선에서도 강목을 많이 접하면서 촉한에 동정적인 여론이 널리 퍼지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이 강목조차 분량이 너무 많다고 징징대면서 이를 더 압축시킨 '통감절요'가 더 많이 읽혔다. 이 책은 주자보다 나중 시기의 사람인 강지가 집안 애들 전용교재로 편집한 버전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명청대에 가면 이미 이 책에 대해 아는 사람은 멸종되어 오히려 자치통감이나 강목을 마스터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유독 조선에서만 통감과 강목을 처박아두고 이것만 파는 선비들이 많았다. 실학자 이덕무와 정약용은 원전을 놔두고 축약본에 매달리는 이런 세태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했다.[4]
6 한글판 완역본
워낙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전권을 읽기 어려웠으나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권중달 교수가 무려 14년의 세월에 걸쳐 완역하여 출판했다.[5] 출판사가 힘들어져서 관둔 적도 있었으나 자치통감을 완역 출간하겠다는 열정이 엄청나, 끝내 자치통감 하나만을 출판하기 위한 출판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2009년에 완간. 진정한 대인배. 총 32권으로 삼화출판사에서 출판 중이다. 총 32권의 정가가 90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의 압박이 있으나 수십년의 노력과 집념이 깃든 완역본이라 그런지 권중달 교수 찬양글을 자주 볼 수 있다. 대학 도서권에 하나씩은 들여 놓도록 압력을 넣어보자 특히 사극 만드는 방송국에...
참고로 자치통감 완역은 번역계의 선두주자인 일본도 아직 못 이뤄낸 일이라고 한다. 다만 통감 원문만을 완역했다는 것이지, 호삼성이나 세종대왕이 달아놓은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편. 호삼성 주석은 권중달 교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만 조금씩 달려있다.
여담으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둘 다 성이 똑같고,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의 이름인 중달은 사마광의 선조인 그 분의 자. 그러나 仲達이 아니라 重達인 게 함정 친척같아보이지만 완전한 남남. 사마씨야 조상 하나에서 갈라지기는 하지만 사마천은 사마씨 시조의 첫째 아들 계통이고 사마광은 차남 계통이다.
마오쩌둥이 무려 17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 ㅎㄷㄷ 읽으라는 공산당 선언은 안읽고! 특히 자세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권 놓고 꼼꼼히 읽었다고.
고려시대에는 이 책을 자리통감(資理通鑑)이라고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려의 제6대 임금인 성종의 휘가 치(治)였기 때문에 피휘를 했기 때문. 이는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부분의 원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말엽 급진개화파의 리더로 유명한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에 읽었던 책도 바로 이것. 김옥균은 방에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가 홍종우에게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