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성영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귀로 산다』가 출간됐다. 좋은 시는 책에 갇혀 있지않는다.성영희 시인은 섬세하고도 우직한 시선을 견지하며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힘을 시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시를 읽으면 시 속 사물들이나 사람들이 손발을 움직이며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의 시편에서는 파도 속 미역귀(「미역귀」)도, 공중 위의 페인트공(「페인트공」)도, 하역장의 나무들(「나무들의 외래어」)도, 몸통 절반이 잘려나간 지렁이 (「환지통」)도 온통 살아서 꿈틀거린다. “없는 발목이 가려워 자꾸 발을 뒤척이는 것처럼/꿈틀거리는 모습이 필생을 건 사투다“라는 문장에서 보듯, 성실하고도 날카로운 은유를 통해 그만의 시적 미학을 축조해 낸다. 만물의 치열한 고투(苦鬪)에 촉수를 곤두세운 시인은 마치 “어제 죽은 이의 사리를 계단에 펼쳐놓고 내일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헹구는 도비왈라”(「여름 궁전」)처럼, 폐허를 두들겨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으로 완성해 내고 있다.
목차
제1부
미역귀 연장의 공식 여름 궁전 아름다운 대칭 춤 꽃무릇 겨울 숲 창문이 발끈, 종 먼지의 계보 아귀 의중 각오의 삼색
제2부
우물우물 맛있나요 이동 만물상 씨앗의 학습 시간 칠월을 순지르다 호미를 걸며 잘생긴 웃음 석양증후군 지붕문서 구들장 햇살 핫팩 소반 빼앗긴 옷 말표고무장화
제3부
페인트공 나무들의 외래어 거미의 생존 방식 굴러야 살지 환지통 하루살이 고사목 좁교 딱정벌레들 바닷속 우체국 족족 붙어 있는 자산어보 오동집 회귀 보고에 관한 진정서
제4부
깃발 돌을 웃기다 셔틀콕 여자만 연대를 옮겨 피다 해녀들 꿈틀, 여주 찬물 탁본 향일암 정점 가을 길들이기
충남 태안 출생. 201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섬, 생을 물질하다』가 있다. 2014년 제12회 동서문학상을 2015년 농어촌 문학상을 수상했다
책 속으로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만져지지 않는 것들이 문득문득 시를 데려왔다 그때마다 슬픔이 절망이 허공이 나비처럼 반짝였다
--- 「시인의 말」중에서
출판사 리뷰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珍羞)로 올려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 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돌의 포자인가, 물의 갈기인가, 움켜쥔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치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미역귀」 전문
추천사를 쓴 이정록 시인의 표현대로 모름지기 시는 “삶을 듣는 귀”일진대,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한 시가 바로 이 시집 표제작인 「미역귀」일 것이다.
“시의 눈길과 발길은, 평정을 잃고 우는 만물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간다. 길은 모두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간다. 자궁이란 집에서 유택이란 집까지 순환한다. 시의 길은 소리의 길이다. 길은 귀로 산다. 시인은 한 손으로 손차양을 하고, 또 한 손으로 귓바퀴를 키워 씨앗 속 새싹의 소리까지 듣는다. 시는 삶을 듣는 귀다. 살림의 시는 ‘바위를 파고’ 바위 가슴에 귀를 새긴다. 귀는 모두 물결 모양이다. 마음을 찾아가는 오래된 길 같다. 성영희 시는 귓바퀴의 물결무늬를 닮았다.” (이정록 시인)
아기처럼 자꾸 뒷걸음치는 어머니 잇몸뿐인 저 입에 나의 빈 젖을 물리고 싶어요 -「우물우물 맛있나요」 부분
중장비의 괴력 없이도 지어지는 꽃들은 이미 씨앗에서부터 학습받은 저희들만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엽전을 닮은 접시꽃 씨앗 그 한 알의 낱알에서 우렁우렁 학습 소리 들립니다 -「씨앗의 학습 시간」 부분
누군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힘껏 찔러 넣어 자국도 없이 박혔다면 그 속에서는 뿌리가 다시 파랗고 우거진 틈을 내 펼치고 있는 것이겠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도 물보라를 덜어 낸 다음에 그 깊이로 가라앉는다 벽에 걸린 겨울 외투의 의중이 나른한 창밖을 내다보는 봄날 오후 위층에서 간헐적으로 못 박는 소리가 난다 삐걱거리는 속내도 아랑곳없이 시계 초침은 쉬지 않고 톡톡 휴일 오후를 박고 있다. 무엇이든 잘 들어가지 않을 때는 그 의중을 물어 살살 돌려 줄 것 -「의중」 부분
가문 밭에서는 오이도 비틀어진다. 시든 줄기 끝에서 꿈틀, 몸 한번 틀었을 뿐인데 볕은 순간을 굳힌다. 채소들이 웅크리거나 휘어진 것은 모두 물을 찾는 몸부림일 것이다. 일직선인 밭고랑도 자세히 보면 물이 많은 쪽으로 휘어져 있다.
봄에 로터리를 치는 트랙터도 물의 방향으로 살짝 방향키가 돌았을 것이다. 휘어진 꽃은 없는데 열매들이 저렇게 휘어진 것은 비틀리면서 떨어진 꽃의 갈증을 기억하기 때문 아닐까
휘어진 열매와 비틀어진 채소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 고랑은 제 물기를 모아 젖을 물린다. 그 밭에서 평생을 보낸 어머니도 허리가 휘어져 있다. 우주가 꿈틀, 휘어진 것들로 은혜를 거둬들이고 휘어진 것들로 뭉클하게 한다. -「꿈틀,」 전문
정 많고 근심 많은 성영희 시인은 이 시집에 수록된 여러 시들을 통하여 어머니와 아버지, 소청도로 돌아간 친구같이 정든 사람들과 삶의 일상에서 추출한 보이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보이고 읽히고 들리는 사람들, 물상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노래했다.
특히 「꿈틀,」이라는 시편에는 이러한 시인의 가치 의식이 자연적인 물상들과 인간과 우주를 하나로 통합하는 드넓으면서도 날카로운 은유적 상상력에 힘입어 응집되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물상들은 오이부터, 밭고랑도, 어머니의 허리도 모두 “휘어져 있다.” 그리고 이 휘어짐에는 “볕”의 기억이, 그 응집이, 생명이 살아 있음을 지켜내기 위해 몸을 한번 “꿈틀”하고 뒤채인 몸부림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시인은 ‘저자의 말’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리지 않는 것/만져지지 않는 것들이/문득문득 시를 데려왔다”고 적고 있다. 이는 곧 타인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들이 시인에게는 고스란히 보이고 들리고 만져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영희의 시세계가 더욱 미덥고 따뜻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폐허를 두들겨 빨면 저렇게 흰 바람 펄럭이는 궁전이 된다.” 성영희 시의 핵심 기둥은 바로 폐허를 바람 궁전으로 만드는 기법이다. 특히 바람이 많이 등장하는 성 시인의 시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훑어 내리면서 아직도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의 펄럭이는 마음의 찢어진 깃발을 보게 한다. 그러니 읽는 이의 등뼈가 우렁우렁 우는 것을 그제야 느끼는 반성 촉발의 시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견디다가 급기야 토해 놓는 울음을 다시 되돌려 꾹꾹 누르는 사람의 마음을 능숙한 솜씨로 그려내고 있다. 성 시인의 시는 울적한 세상의 어느 한 부분에 속을 털어놓는 공감의 손잡이가 되리라 본다. 시는 무릇 그런 공감의 연대가 아니겠는가. 나는 그것을 또 하나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다. 빛이 몰려오고 있다. 그렇게 예감하게 한다. - 신달자(시인)
시를 품는다는 것은 몸에 병을 들이는 것이다. 성영희 시는 끊임없이 세상의 신음을 듣고 고통을 그린다. 시의 눈길과 발길은, 평정을 잃고 우는 만물을 달래어 집으로 데려간다. 길은 모두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간다. 자궁이란 집에서 유택이란 집까지 순환한다. 시의 길은 소리의 길이다. 길은 귀로 산다. 시인은 한 손으로 손차양을 하고, 또 한 손으로 귓바퀴를 키워 씨앗 속 새싹의 소리까지 듣는다. 시는 삶을 듣는 귀다. 살림의 시는 “바위를 파고”(「미역귀」) 바위 가슴에 귀를 새긴다. 귀는 모두 물결 모양이다. 마음을 찾아가는 오래된 길 같다. 성영희 시는 귓바퀴의 물결무늬를 닮았다. “춤추다 굳은 땅은/퇴적도 곡선이다”(「춤」)라는 시구처럼, 그의 시는 불의 고통을 춤으로 바꾸는 ‘내면의 힘’을 잘 보여 준다. - 이정록(시인)
첫댓글 성영희시인 시집출간을 축하합니다
그동안의노고에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