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월"은 근처를 모두 돌아다녔지만 이상하게 "청령포"나 "장릉"을 가지 못했다.
올해를 또 넘기기가 뭣해서 무조건 동서울 터미날로 간다.
미리 전날 "청령포"(淸泠浦)매표소에 전화를 걸어 건너갈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건널수는 있는데 언제 올거냐고 묻는다.
내일 갈거라니까 그럼 됐단다. 무슨 말인지,,,,, 나중에 알게 됐지만.
8시 30분발 영월행 버스에 오르니 출발하도록 몇명밖에 타지를 않는다.
남한강 근처를 지나도록 비는 오지 않지만 잔뜩 흐린 날씨에 걱정이 앞선다.
카메라 백 하나에 작은 우산과 만약의 대비로 등산스틱을 끼웠으니 장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만,,
생각밖으로 버스는 아주 수월하게 11시가 조금 안돼서 "영월"에 도착했다.
오늘 돌아 볼 코스.
버스터미날 - 청령포 - 장릉 - 보덕사 - 창절서원 - 영모전 - 관풍헌 - 금강정.
원래 모두 걸어가려고 했는데 시간도 맞지않고 초행길에 어려워
버스에서 내려 곧장 "청령포"(淸泠浦)까지 택시를 탔다.
청령포 전망대 앞에 있는 "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의 像.
"단종"(端宗)과 "정순왕후"(定順王后)의 像이 있는 앞의 전망대 계단은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그곳을 돌아 "청령포"(淸泠浦)로 들어가는 배를 타는 곳으로 간다.
"청령포"(淸泠浦)로 건너는 배는 한 사람이 와도 건너다 준다.
배삯은 3000원인데 늙은이라고 할인해서 1000원만 받는다.
배를 타러 내려가는 계단이 한참 내려가야 한다.
배에서 내리니 자갈밭이다.
물이 휘돌아 내려가며 이쪽에는 자갈을 쌓아놓고 반대쪽은 암벽이 나오도록 할퀴고 가는 것이다.
"청령포"(淸泠浦)는 섬이 아니다.
그렇치만 그 뒤로는 높지는 않지만 가파르고 절벽이 날카로운 바위산이라 통행할 수가 없단다.
자갈밭을 지나니 송림(松林)이 울창한 입구에 도착한다.
청령포 안에는 약 700여 그루의 금강송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울창한 송림은 2004년 "천년의 숲"으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모두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금강송"(金剛松)이라고 한다.
"청령포"(淸泠浦)는 그리 크지도 않고 놀이터도 아니다.
발빠른 사람들은 30분이면 돌아보기 충분한 장소다.
우선 "단종어소"(端宗御所)로 간다.
근래에 "단종어소"(端宗御所)를 복원하고 단종( 端宗)임금께 고(告)하는 "축문"이 써 있다.
먼저 보이는 곳은 궁녀(宮女)와 관노(官奴)들이 기거하는 집이다.
유배를 가는 사람에게 궁녀(宮女)나 관노(官奴)가 있었을까?
그래도 왕이였기 때문에 그정도 예우는 갖추어 주었을까?
아이 깜작이야!!!
첫방에 물건만 있어 무심코 다음 방을 보다가 사람이 있어 깜짝 놀랐다.
부엌도 있다.
작은 방이 셋, 부엌과 창고가 하나씩 있다.
"단종어소"(端宗御所)
"단종"께서 책을 읽고 계시고, 앞에 절하는 사람은 "단종"쪽이 아닌 북향하여 절을 한다.
옛날에는 직접 절하는 것이 아니고 북향하여 절을 했단다.
끝방에는 임금이 입던 "곤룡포"가 걸려있다.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단종"은 왕이 아닌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이곳에 유배(流配)를 온 것이다.
그런데 하인들도 있고, 하물며 "곤룡포"를 입을 수가 있었을까?
이런 것은 사실대로 만들어 놔야 될듯하다.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
비의 앞면.
세
"歲"
황명숭정무진기원후 삼계미계추체경서 영원영수석
"皇命崇禎戊辰紀元後 三癸未季秋抆敬書 令原營堅石"
(영조 39년가을 눈물을 닦고 어명을 받들어 원주 감영에서 비석을 세움)
지명 청령포.
"地名 淸泠浦"
비의 뒷면.
담장 밖에서 나온 소나무가 "단종어소"(端宗御所)쪽으로 누워 자란다.
"관음송"(觀音松)
저 나무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까?
이곳의 모든 나무들이 그 모습을 보았을텐데,,,,,
"관음송"(觀音松)을 지나 "전망대" 쪽으로 간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제법 가파르고 길다.
망향탑(望鄕塔)
이 돌탑을 "단종"이 쌓았다고 하는데 조금 억지같다.
윗부분은 아마도 관광객이 올려놓은듯하고,
"단종"이 이곳에 머무른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 이걸 쌓을 새가 없었을듯하다.
전망대 끝에 서면 거칠게 서 잇는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인다.
지금은 그래도 잡목들이 많이 있는데 나무들이 없으면 통행하기가 어려울듯하다.
전망대에서 보는 동강.
"노산대"(魯山臺)로 가려면 다시 내려가야 한다.
"망향탑"과 "동강".
중간에 "노산대"로 가는 길이 있다.
지금은 절벽쪽으로 사람이 나가지 못하게 막아놨지만 이곳에서 보는 경치는 좋았을듯하다.
"노산대"에서도 내려오는 계단은 가파르고 길다.
"청랭포금표비"(淸泠浦禁標碑)
다 돌아 내려오면 금표비(禁標碑)가 있다.
동서 삼백척(東西 三百尺)
남북 사백 구십척(南北四百九十尺)
차후 니생 역재 당금(次後 泥生亦在當禁)
"동서로 삼백척(약 91m),
남북으로 사백 구십척(약148.5m)
이후에 진흙뻘이 생겨도 역시 마땅히 금한다."
"영조"(英祖)임금이 세운 표인데 이 내용으로 보면
"영조"임금이 이곳의 지형지물(地形地物)에 대해 잘 알고 있는듯하다.
"청랭포금표"(淸泠浦禁標)
1726년에 세운것이라고 한다.
오늘 돌아 볼 곳이 많기에 부지런히 배를 타고 나온다.
이제 천천히 선착장 주변을 돌아본다.
이곳은 곡류천(曲流川 : 蛇行川)의 대표적인 지형(地形)이다.
여유가 있다면 이런 지형(地形)도 둘러보면 좋겠다.
"단종"의 유배길이 궁굼했는데 여기에 자세히 지도로 그려놨다.
지금의 지도를 비교하면 꽤나 돌아가는 길이다.
물론 저 길은 대부분 산길이였을 것이다.
여기에도 써 있지만 "단종"이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겨우 두달이다.
또한 "단종"의 승하(昇遐)한 곳이나 날자는 불명확하다.
다만 이 "청령포"에서 돌아 가신 것은 분명이 아니다.
이제 "왕방연"(王邦衍)선생의 시비(詩碑)를 봐야 한다.
"왕방연"(王邦衍)선생의 시비(詩碑)는 나루터 오른쪽 다리건너 소나무 숲속에 있다.
시비(詩碑)가 있는 곳에서 본 "청령포"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千里遠原道 美人離別秋)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 (川流亦如我 鳴呼去不休)
시비(詩碑)뒤에 적혀있는 詩의 사연.
천리 원원도(千里遠遠道) 미인이별추(美人離別秋) 차심무소착(此心無所着)
하마 임천류(下馬臨川流) 천류역여아(川流亦如我) 명열거불휴(鳴咽去不休)
그런데 이 이야기는 조금 다른것이 있다.
1, 왕방연(王邦衍)은 정말 이곳 "청령포"에 왔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위의 내용처럼 사약을 가지고 왔다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사약이 내려 올 때는 이미 단종은 영월 "관풍헌"으로 숙소를 옮겼기 때문이다.
2, 왕방연(王邦衍)이 이곳에 온 것이 사실이라면 옛날 우리가 배운것처럼
그는 "단종"이 유배 올 때 모시고 온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월 관아로 갔다는 것이 확실하다.
3, 이 시는 어떤 문서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다.
위의 내용처럼 아이들의 노래를 한시(漢詩)로 지어 전해 졌다면
이 시를 지은 "용계 김지남"(龍溪 金止男)이 들을 때까지
무려 160여년동안 아이들의 노래로만 계속 전해졌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도 금새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4, 왕방연의 시조는 이자리에서 만든 것이 아니다.
우선 그는 이곳에 올 일이 없었을 것이고,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길 예놋다"
"울어 밤길 흐른다"는 말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즉 급류나 계곡의 물처럼 물흐르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이곳은 (옛날에는 모르겠으나) 10월이면 물이 잔잔하여 물소리가 나지 않았을것이다.
분명 이 시를 지은 장소가 다른 곳이거나 그가 와 봤다면 시기가 달랐을 것이다.
다시 나루터 매표소로 돌아와 "장릉"(莊陵)가는 길을 물어본다.
여기서는 택시를 타기도 쉽지않고 걸어서 가 볼참이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물길을 따라서 가는 길이 있다.
이른바 "장돌뱅이길"인데 확실하게 알고 가려고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그길로 가면 안된단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 고개를 넘으면 "영월 소방서"가 나온다.
거기로 가야 한단다.
영월 소방서는 버스로 영월을 들어올 때도 봤고, 택시를 타고 올 때도 본 곳인데
빙 돌아가는 길이다.
어쩌랴.
이곳 사람이 안된다는데 알려 주는대로 가는 수밖에,,,,,
택시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가는 덕분에 "청령포"입구를 알리는 표석(標石)을 확실히게 본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영월로 들어올 때 본 광경인데 천천히 둘러본다.
걸어서 가면 이런 것도 자세히 보게 된다.
차량이 다니는 언덕길을 오르며 내려다 보면 조금 전 보았던 "장돌뱅이길"이 아래로 보인다.
막힌 곳이 없는데,,,,,,
아주 옛날에는 청령포 앞을 지나는 동강 줄기가 이곳을 지나서 흘렀을것이다.
고갯마루에 특이한 비(碑)가 있어 자세히 본다.
"어계비원"(漁溪碑苑)이란다.
"단종"이 승하하자 함안사람 "어계선생"이 청령포로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였단다.
이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장릉"(莊陵)에 가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홍도"란 분의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된 것인지,,,,,,
이런 것이 걸어다니는 여행의 행운이다.
차를 타고 다니면 이런 것을 볼 수가 없다.
조려(趙旅, 1420년 ~ 1489년)는 조선 세종, 문종, 단종 때의 문신(文臣)이며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 은자(漁溪隱者).
1453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 함안(咸安)으로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 368m) 아래에 숨어 살았다.
1420년(세종 2년) 경난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1453년 성균관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폐위하고 왕위에 즉위하자,
불합리한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다 하여,
단종(端宗)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망설임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함안 군북에 낙향하였다.
1456년 단종(端宗)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여 수시로 단종의 안부인사를
"원호"(元昊)의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원호"(元昊), "이수형"(李守亨)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면서 어린 임금의 안전을 기원하였고,
후에 원주 치악산에 올라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원호"(元昊), "이수형"(李守亨)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새겼다.
원주 치악산에 새긴 세 분의 이름. 인터넷에서 발췌.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이보흠"(李甫欽)등이 거듭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서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渡江)했다 한다.
그 뒤 단종왕의 넋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西山) 아래에 은거하여 사람들은 그가 머무르던 서산을 "백이산"(伯夷山)이라 불렀다.
단종 승하 후 3년간 상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고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그를 여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나가지 않고,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698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자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1703년 경상도 유생 곽억령(郭抑齡)등이 상소(上疏)를 올려
"유응부"(兪應孚),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 사육신의 예에 따라
생육신(生六臣)인 조려(趙旅)등도 사당(祠堂)을 세워 제향(祭享)하도록 조정에 건의하여
1706년 생전에 기거하던 백이산(伯夷山) 아래 함안군 원북동에 사당(祠堂)을 세워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원호(元昊),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제향하였다.
사당(祠堂)은 후에 서산서원(西山書院)으로 이름지어졌다.
고갯마루를 넘으면 옛날에 세웠을듯한 "어계비원"碑가 하나 더 있다.
올라가 볼까 하다가 원래 계획했던 일정에 차질이 있을까 하여 포기를 한다.
한참을 더 가다 돌아보니 언덕위에 무척 큰 비석이 보인다.
아,,, 올라가 볼걸,,,, 하며 후회를 한다.
나중에 이분의 후손이 올린 사진을 찾아봤다.
이 분이 "청령포"를 건너지 못하고 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 이 분을 태우고 강을 건넜단다.
그래서 호랑이가 비석을 이고 있다.
영월 소방서 노타리에 있는 이정표.
영월 소방서를 지나 다시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장돌뱅이길"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 다리 아래로 "청령포 전망대"도 보인다.
이길로 왔으면 편하고 빨랐을텐데,,,,,,
여기서 오른쪽의 야트막한 언덕길로 간다.
언덕을 넘어 내려오는 길에 "깨비굴"이 있고 "깨비충신"이란 표가 있다.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푯말은 없다.
이곳까지 오면 멀리 "장릉"입구가 보인다.
첫댓글 역시 역사 탐구의 대가이셔.
덕분에 영월 명소 구경을 잘 하였소.
까마득 했던 청령포을 다시 알게 되어서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