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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산책 스크랩 왕발. 등왕각서 : 唐 王勃, <滕王閣序>
해암 추천 0 조회 183 18.10.24 07: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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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성 남창(南昌)에 있는 등왕각-- 황학루 · 악양루와 더불어 중국 3대 누각의 하나.

보통의 누각이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것과는 달리 등왕각은 평지 위에 서 있다. 지금의 등왕각은 누각 중앙에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 6층짜리의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다.



등왕각(滕王閣)


1. 唐 王勃, <滕王閣序>


豫章故郡, 洪都新俯, 星分翼軫, 地接衡廬. 襟三江而帶五湖, 控蠻荊而引甌越. 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 雄州霧列, 俊彩星馳, 臺隍枕夷夏之交, 賓主盡東南之美. 都督閻公之雅望, 棨戟遙臨, 宇文新州之懿範, 襜帷暫駐. 十旬休暇, 勝友如雲, 千里逢迎, 高朋滿座. 騰蛟起鳳, 孟學士之詞宗; 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 家君作宰, 路出名區, 童子何知, 躬逢勝餞?


時維九月, 序屬三秋. 潦水盡而寒潭淸, 煙光凝而暮山紫. 儼驂騑於上路, 訪風景於崇阿. 臨帝子之長洲, 得仙人之舊館, 層巒聳翠, 上出重霄. 飛閣流丹, 下臨無地. 鶴汀鳧渚, 窮嶋嶼之縈廻; 桂殿蘭宮, 列岡巒之體勢.


披繡闥, 俯雕甍, 山原曠其盈視, 川澤紆其駭矚. 閭閻撲地, 鐘鳴鼎食之家; 舸艦迷津, 靑雀黃龍之舳. 虹銷雨霽, 彩徹雲衢;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漁舟唱晩, 響窮彭蠡之濱; 雁陣驚寒, 聲斷衡陽之浦.


遙吟俯暢, 逸興遄飛. 爽籟發而淸風生, 纖歌凝而白雲遏. 睢園綠竹, 氣凌彭澤之樽; 鄴水朱華, 光照臨川之筆. 四美具, 二難幷.


窮睇眄於中天, 極娛遊於暇日, 天高地逈, 覺宇宙之無窮; 興盡悲來, 識盈虛之有數. 望長安於日下, 指吳會於雲間. 地勢極而南溟深, 天柱高而北辰遠. 關山難越, 誰悲失路之人? 萍水相逢, 盡是他鄕之客, 懷帝閽而不見, 奉宣室以何年?


嗚呼! 時運不齊, 命途多舛. 馮唐易老, 李廣難封. 屈賈誼於長沙, 非無聖主; 竄梁鴻於海曲, 豈乏明時? 所賴君子安貧, 達人知命, 老當益壯, 寧知白首之心? 窮且益堅, 不墮靑雲之志. 酌貪泉而覺爽, 處涸轍以猶懽. 北海雖賖, 扶搖可接; 東隅已逝, 桑楡非晩. 孟嘗高潔, 空懷報國之心; 阮籍猖狂, 豈效窮途之哭.


勃三尺微命, 一介書生, 無路請纓, 等終軍之弱冠. 有懷投筆, 慕宗慤之長風, 舍簪笏於百齡, 奉晨昏於萬里. 非謝家之寶樹, 接孟氏之芳隣, 他日趨庭, 叨陪鯉對, 今晨捧袂, 喜托龍門. 楊意不逢, 撫凌雲而自惜; 鍾期旣遇, 奏流水以何慙!


嗚呼! 勝地不常, 盛筵難再, 蘭亭已矣, 梓澤丘墟. 臨別贈言, 幸承恩於偉餞. 登高作賦, 是所望於群公, 敢竭鄙誠, 恭疏短引, 一言均賦, 四韻俱成.


滕王高閣臨江渚,佩玉鳴鸞罷歌舞。  

畫棟朝飛南浦雲,珠簾暮卷西山雨。

閑雲潭影日悠悠,物換星移幾度秋。

閣中帝子今何在? 檻外長江空自流。




1. 唐 王勃,당 왕발 <滕王閣序> 등왕각서


豫章故郡, 洪都新俯, 星分翼軫, 地接衡廬.

襟三江而帶五湖, 控蠻荊而引甌越.

物華天寶, 龍光射牛斗之墟.

人傑地靈, 徐孺下陳蕃之榻.

雄州霧列, 俊彩星馳,

臺隍枕夷夏之交, 賓主盡東南之美. 都督閻公之雅望,


예장은 옛날 군의 이름이요 홍도는 새 부의 이름인바 별자리로는 익수(翼宿)와 진수(軫宿)에 해당하는 땅으로 형산(衡山)과 여산(廬山)에 인접해 있다.

세 강을 옷깃 삼고 오호를 띠로 띠며 초나라 지역을 굽어보고 월나라 지역을 가까이 둔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의 물산은 하늘이 내린 보배라 용천검(龍泉劍)의 광채가 우수(牛宿)와 두수(斗宿)의 사이를 찔렀으며,

인물이 걸출하고 땅기운이 영험하여 후한(後漢) 때의 이 지방 출신 인사 서유(徐孺)는 덕망이 하도 빼어나 좀처럼 손님을 접대하지 않던 홍주(洪州) 태수 진번(陳蕃)도 의자를 내려놓을 정도였다.

웅장한 고을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늘어서 있고 빛나는 인물들이 뭇 별처럼 활약한다.

오랑캐 땅과 중원 땅이 만나는 곳에 누대와 해자가 있는데 여기에 모인 빈객과 주인은 모두 동남쪽의 멋쟁이들이다.


1)예장군(豫章郡) : 한나라 때 설치한 군 이름으로 당나라 때 들어서 홍주(洪州)로 바꾸었다. 그래서 예장은 군의 옛 이름이고 홍주는 신부(新府)라 했다. 지명이 남창(南昌)으로 바뀐 시기는 오대(五代)부터였다.

2)익진(翼軫):고대 천문학자들은 지상의 행정구역에 대응하는 하늘의 별자리를 만들어 분야(分野)라고 불렀다. 익과 진은 모두 별자리 이름으로 남창은 익과 진의 분야에 속한다. 

3)형려(衡廬) : 형산(衡山)과 려산(廬山)을 말한다. 형산은 호남성 형양시 남쪽에 있는 산으로 주(周)나라 이래로 오악(五嶽) 중 남악(南嶽)에 해당하는 명산이다. 려산은 강서성 구강시(九江市)로부터 약 40키로 남쪽에 있는 명산으로 북으로는 장강, 동쪽으로는 파양호를 접하고 있다. 해발 최고봉이 1500여 미터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나 웅장하고 기묘하고 험난하며 경치가 수려한 산이다. 즉 웅기험수(雄起嶮水)로 이름이 나 있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다.  

4)삼강(三江) : 장강은 팽려호(彭蠡湖)를 지나면서 세 갈로 나뉘어 바다로 들어간다.  

5) 오호(五湖) : 장강 유역의 큰 호수인 파양호(鄱陽湖), 태호(太湖), 청초호(靑草湖), 단양호(丹陽湖), 동정호(洞庭湖) 등을 말한다.  

6) 형만(荊蠻) : 서주왕조와 춘추전국시대 때는 남쪽의 강국 초나라를 비하하여 부르는 명칭으로 본문에서는 초나라 땅이었던 호북과 호남성 일대를 지칭한다.  

7) 구월(甌越) : 서한 때 동월왕이 그 도읍을 지금의 절강성 영가현(永嘉縣)에 정한 이후로 동구(東甌)라 칭했다. 절강성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8)용광(龍光) : 용천검(龍泉劍)의 검광을 말한다. 《진서(晉書)․장화전(張華傳)》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진혜제(晉惠帝) 때 승상 장화가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감돌고 있는 붉은 기운을 보고 당시 천문에 정통했던 남창인 뇌환(雷煥)이라는 사람을 불러 물었다. 뇌환은 그것은 보검의 정광(精光)으로써 검기가 위로 뻗쳐 하늘에 닿았다고 하면서 그 보검은 풍성(豊城)에 있다고 했다. 지금도 이름이 풍성시인 이곳은 강서성 파양호 남단에 있다. 장화는 뇌환을 풍성령(豐城令)으로 임명하여 보검을 찾도록 했다. 임지에 당도한 뇌환은 옥사(獄舍)의 터를 파기 시작해서 4장여를 파내려가 돌로 만든 상자를 얻었는데 그 속에서 뻗어나오는 광채가 눈부셨다. 그 안에서 두 개의 검을 얻었는데 하나는 용천(龍泉)이고, 하나는 태아(太阿)였다. 후에 강을 건너다가 바다에 빠뜨리자 검이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갔다.』

9)서유자(徐儒子)와 진번(陳蕃)의 탑(榻) : 후한서 서치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자가 유자(儒子)인 서치(徐稚)는 집안이 가난했으나 평소에 농사에 힘쓰며 덕행을 많이 쌓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때 진번이라는 사람이 예장(豫章) 태수로 부임해 왔는데 그는 평소에 빈객들을 접대하는 일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서치만은 초대해서 접대했다. 그럴 때마다 특별히 만든 평상을 만들어 두었다가 서치가 간 다음에는 침상을 세워서 벽에 달아놓곤 했다. 이 일로 해서 생긴 하탑(下榻)이란 말은 존귀한 빈객을 접대한다는 뜻이 되었다.  

10)염공(閻公) : 이름은 염백서(閻伯嶼)이고 호광(湖廣) 마성현(麻城縣) 출신으로 당대에 홍주도독을 역임한 사실 외는 알려진 것이 없다.



棨戟遙臨, 宇文新州之懿範, 襜帷暫駐.

十旬休暇, 勝友如雲, 千里逢迎, 高朋滿座.

騰蛟起鳳, 孟學士之詞宗; 紫電淸霜, 王將軍之武庫.

家君作宰, 路出名區, 童子何知, 躬逢勝餞?


명망이 높은 도독 염공(閻公)은 창을 든 호위병을 앞세우고 먼 데서 부임해 왔고 으리으리한 의장을 갖추어 새로 부임하던 풍주(灃州) 태수 우문균(宇文鈞)의 행차도 이곳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백일어치의 휴가 스무날을 얻어 빼어난 벗들이 운집하고 천리 밖에서도 맞이하니 고상한 벗들이 자리를 메웠다.

교룡이 솟아오르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한 맹학사의 문종(文宗) 노릇, 보랏빛 번개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맑은 서리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한 왕장군의 다재다능.

우리 아버지가 교지령(交趾令)이 되어 부임해 가셨으매 내가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에 이 유명한 곳을 지나게 되었을 뿐 어린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이 성대한 잔치에 참석했으리오?


11)계극 : 도독이 행차할 때 표시하는 의장물로 흑적색 비단으로 겉을 싼 창이다.

12)우문신주(宇文新州) : 신주는 당나라 때 영남도(岭南道)에 속한 주로 지금의 광동성 신흥현(新興縣)이다 자사로 부임하는 우문은 이름이 균(钧)으로 당시 등왕각의 빈객 중 한 명이었다.  

13) 십순휴가(十旬休暇):당나라 때 관원들은 매 10일 마다 하루씩 휴가를 얻어 쉬는 규정이 있었다.  

14)맹학사(孟學士) : 이름은 불상이나 당척언(唐摭言)에 홍주도독 염백서의 사위 중의 한 명이라고 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학사는 당나라 때 홍문관(弘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의 관리 명칭으로 서적과 저술에 대한 일을 관장했다.  

15)자전(紫電)은 오나라 손권이 가지고 있던 6개 중 2번 째 보검의 이름이고 청상(靑霜)은 칼날의 예리함이 마치 푸른 기운을 띤 서릿발 같다고 해서 붙인 명검의 이름이다.  

16)왕장군(王将军) : 연회에 참석한 빈객 중의 한 명으로 이름은 불상이다. 남조의 양(梁)나라 장군으로 지략이 겸비한 왕승변(王僧辯)이란 무장을 비유해서 맹학사의 문명(文名)과 호응시켰다.  



時維九月, 序屬三秋.

潦水盡而寒潭淸, 煙光凝而暮山紫.

儼驂騑於上路, 訪風景於崇阿.

臨帝子之長洲, 得仙人之舊館, 層巒聳翠, 上出重霄.

飛閣流丹, 下臨無地.

鶴汀鳧渚, 窮嶋嶼之縈廻; 桂殿蘭宮, 列岡巒之體勢.


때는 구월이요 계절은 가을이라

길 바닥에 고였던 빗물은 다 마르고 차가운 못 물은 맑디 맑은데 노을 빛이 엉겨서 저녁 산이 불그레하다.

빈객들은 말에 위의를 잘 갖추고 길에 올라 높다란 언덕으로 풍경을 찾아간다.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신 등왕(滕王) 전하의 기다란 모래섬으로 나아가니 신선의 옛 집 같은 등왕각이 있는데 주위에는 첩첩의 산봉우리가 푸른 빛을 띤 채 높은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다.

나는 듯 높은 누각에는 붉은색 단청이 흐르는데 아래를 내려다 보니 땅바닥이 안 보인다.

학과 오리가 노니는 강물은 굽이진 섬을 끝까지 감돌고 계수나무와 목란나무로 지은 아름다운 궁전들은 언덕의 형세를 따라 줄지어 늘어섰다.


17)삼추(三秋) : 가을에 해당하는 7,8,9 월을 각각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등으로 구분하여 합해 삼추라 한다.

18)제자(帝子) : 황족(皇族)의 뜻으로 등왕각을 지은 등왕 이원영(李元嬰)을 말한다.  

19)장주(長洲) : 등왕각이 세워진 감강(竷江)의 가운데 있는 섬이다.  

20)선인(仙人)은 등왕을 말하고 구관은 등왕각을 의미한다.



披繡闥, 俯雕甍, 山原曠其盈視, 川澤紆其駭矚.

閭閻撲地, 鐘鳴鼎食之家; 舸艦迷津, 靑雀黃龍之舳.

虹銷雨霽, 彩徹雲衢; 落霞與孤鶩齊飛, 秋水共長天一色.

漁舟唱晩, 響窮彭蠡之濱; 雁陣驚寒, 聲斷衡陽之浦.


수로 장식한 문을 열고 아로새긴 용마루를 굽어보니 산과 고깃배에선 저녁을 맞아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들은 광활하여 시야에 가득하고 시내와 못은 구불구불하여 보는 이의 눈을 놀라게 한다.

여기저기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는 종소리로 사람을 모아 솥을 걸어놓고 식사하는 큰 집안도 있으며, 커다란 배들이 나루터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청작과 황룡을 그린 멋들어진 배도 보인다.

무지개 사라지고 비도 그치니 고운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오고, 저녁놀은 짝 잃은 기러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철의 강물은 높은 하늘과 한 가지 색이다.

그 소리가 파양호(鄱陽湖)의 물가에 구석구석 울려퍼지고 기러기떼 추위에 놀라 그 소리가 형양(衡陽)의 포구로 사라져 간다.


21)종명정식(鍾鳴鼎食) :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 종을 쳐서 식사 때를 알리고 큰 솥을 걸어서 밥을 짓는 대가를 말함.



遙吟俯暢, 逸興遄飛. 爽籟發而淸風生, 纖歌凝而白雲遏.

睢園綠竹, 氣凌彭澤之樽; 鄴水朱華, 光照臨川之筆. 四美具, 二難幷.


먼 곳을 바라보다가 발아래를 굽어보다가 하며 노래를 불러 가슴에 맺힌 감회를 시원하게 토해내노라니 산뜻한 흥취가 무럭무럭 솟아난다. 상쾌한 퉁소소리가 울리자 맑은 바람이 일고 구성진 노랫소리가 엉기어 흰 구름이 걸음을 멈춘다.

등왕각의 정원에는 그 옛날 양(梁) 효왕(孝王)이 만든 휴원(睢園)처럼 푸른 대나무가 우거져 있는데 그 기상이 팽택령(彭澤令) 도연명(陶淵明)의 술을 능가하고, 등왕각의 연못에 핀 연꽃은 조식(曹植)이 시에서 묘사한 업수(鄴水)의 붉은 연꽃처럼 화사한데 그 빛이 임천 내사(內史)를 지낸 사령운(謝靈運)처럼 시를 잘 짓는 좌중 묵객들의 붓을 환히 비춘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는 좋은 시절[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흐뭇한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 등 네 가지의 아름다움이 다 갖추어져 있고, 어진 주인과 멋쟁이 손님이라는 두 종류의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다 모였다.


22)수원(睢園) : 서한의 양효왕(梁孝王)이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남쪽의 수수(睢水) 강변의 수양(睢陽)에 지은 토원(菟園)을 말한다. 푸른 대나무가 많은 원으로 양효왕이 당대의 문사들을 초빙하여 연회를 열고 시부를 짓도록 했다. 매승(枚乘)의《양왕토원부(梁王菟園賦)》가 유명하다. 동원(東園), 양원(梁苑) 등으로도 불린다.

23)평택지준(彭澤之樽) : 팽택은 도연명이 현령으로 근무했던 곳이고 준은 도연명이 국화꽃을 따서 직접 담은 국화주를 담은 술단지다.  

24)업수(鄴水) : 원래 삼국시대 하북의 패자 원소가 업수 강변에 도읍을 세우고 업도(鄴都)라 했다. 후에 조조가 점령한 후에 동작대(銅雀臺)를 세우고 연회를 열자 아들 조식(曺植)이 《동작부(銅雀賦)》라는 글을 지어 그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25)사령운(謝靈運) :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시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의 주제로 했다. 당시 시단에서 그가 지은 문장의 아름다움은 안연지(顔延之)와 더불어 제일이었다. 동진 때 관직이 상국종사중랑(相國從事中郞)까지 올라갔다. 남조의 송(宋)에 들어서도 후작(侯爵)의 작위를 유지하고 관직은 영가태수(永嘉太守)·시중(侍中)·임천내사(臨川內史)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26)사미(四美) : 음악, 음식, 문장, 언어 등의 네 가지 아름다운 일을 말한다.



窮睇眄於中天, 極娛遊於暇日,

天高地逈, 覺宇宙之無窮; 興盡悲來, 識盈虛之有數.

望長安於日下, 指吳會於雲間. 地勢極而南溟深, 天柱高而北辰遠.

關山難越, 誰悲失路之人?

萍水相逢, 盡是他鄕之客,

懷帝閽而不見, 奉宣室以何年?


눈을 한껏 흘겨 중천을 바라보며 한가한 날을 맞아 마음껏 즐기노라니,

하늘은 높고 땅은 아득히 먼지라 우주의 끝없음을 깨닫겠고,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오는지라 차고 비는 것에 정해진 운명이 있음을 알겠다.

도성을 떠나 교지(交趾)로 가는 나는 멀리 태양 아래로 도성 장안(長安)을 바라보고 구름 사이로 소주(蘇州)을 가리키나니 지세가 다한 곳에 남쪽 바다가 깊숙하고 하늘을 떠받친 기등이 높아 북극성이 멀다.

험한 산은 넘기가 어려운데 누가 길 잃은 사람을 슬퍼해주리오?

부평초가 물을 만난 격이라 모두가 연회가 끝나면 곧 흩어질 타향의 길손일 뿐인바

임금님 계신 궁문을 그리워해도 보이지 않고 가의(賈誼)처럼 선실에서 임금님을 받들어 모시려 해도 어느 해에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27)선실(宣室) : 미앙궁(未央宮) 내에 있었던 궁실의 이름으로 주로 황제가 국가의 중요한 제사나 의식을 참석하기 위해 제계를 행할 때 거처했다. 한문제 때 가의가 대신들의 참소를 받아 장사로 좌천되었다가 후에 그의 재주를 아까워 한 문제가 다시 그를 불러 선실을 내주고 귀신의 일에 대해 물었다.



嗚呼! 時運不齊, 命途多舛.

馮唐易老, 李廣難封.

屈賈誼於長沙, 非無聖主;

竄梁鴻於海曲, 豈乏明時?

所賴君子安貧, 達人知命, 老當益壯, 寧知白首之心?

窮且益堅, 不墮靑雲之志.

酌貪泉而覺爽, 處涸轍以猶懽.


아아! 시운은 고르지 못하고 운명은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은 법이라

풍당(馮唐)은 벼슬이 높아지기 전에 늙었고 이광(李廣)은 공을 세우고도 제후에 봉해지기 어려웠지.

가의는 억울하게도 장사(長沙)로 유배되었지만 그것은 성군이 없었음이 아니요,

양홍(梁鴻)은 바닷가에서 숨어 살았지만 그것이 어찌 밝은 시대가 부족한 탓이었으리오?

나는 믿거니와 군자는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달인은 자신의 천명을 알아 늙을수록 더욱 더 건장해지나니 백발 노인의 마음을 어찌 알리오?

가난할수록 더욱 굳세어져서 청운의 뜻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시면 탐욕스러워진다는 탐천(貪泉)의 물을 떠마셔도 상쾌함을 느끼고 물이 말라버린 수레바퀴 자국에 사는 붕어 꼴이 되어도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28)풍당(馮唐) : 한문제 때의 관리로 지금이 섬서성 함양시 동북의 안릉현(安陵縣) 출신이다. 한문제 경호대의 조장 직책의 중랑서장(中郞署長)이라는 소직을 지냈다. 여러 번에 걸쳐 문제 앞에서 직언을 서슴치 않아 중용되지 않았다. 어느 날 운중(雲中)을 지키던 태수 위상(魏尙)이 큰 공을 세웠음에도 사소한 잘못으로 면직되어 감옥에 갇히자 문제에게 말했다. 「상은 매우 가볍고 벌은 매우 무겁습니다.」라고 말하여 한문제의 잘못을 지적했다. 한문제가 깨닫고 특명을 내려 위상을 석방하고 원래의 관직으로 복귀시키고 풍당을 거기도위(車騎都尉)로 승진 발탁했다.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초나라 상국에 임명했다. 다시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가 즉위하여 천하에 현사들을 불러 중용하려고 했으나 그의 나이는 이미 90이 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그의 아들 풍수가 대신 랑(郞)이 되었다.

29)이광(李廣) : 서한 경제, 무제 때의 명장으로 팽생 흉노와 70여 차례에 걸쳐 전투를 치러 큰 공을 세웠으나 끝내 열후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마지막에는 대장군 위청과의 불화로 자살했다.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났다. 후에 흉노에게 항복하여 사마천으로 하여금 「이릉의 화」를 당하게 한 이릉(李陵)은 그의 손자다.  

30)양홍(梁鴻) : 동한의 부풍(扶風) 평릉(平陵) 출신으로 자는 백란(伯鸞)이다. 함곡관 밖의 패릉산(霸陵山)에 은거하여 밭일과 옷을 짜서 생활하다가 한 번은 은거지에 나와 장안을 지나가다 《오희가(五噫歌)》라는 시를 지어 백성들은 어려운 생활에 고생을 하고 있음에도 사치만을 일삼는 조정을 풍자했다. 한장제(漢章帝)가 그 시를 읽고 매우 노하여 사람을 시켜 양홍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양홍은 변성명을 하고 그의 아내 맹광과 함께 제노(齊魯) 지간으로 몸을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후에 오(吳) 땅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해곡(海曲)은 바닷가의 땅을 의미한다. 형처(荊妻)나 거안제미(擧案齊眉)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 되는 맹광은 양홍의 아내다.  

31)노당익장(老當益壯) : 《후한서․마원전(馬援傳)》에 「장부는 모름지기 궁할수록 뜻을 굳게 가져야 하고, 늙을수록 강건한 신체를 유지해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32)청운지지(靑雲之志) : ➀입신출세하여 공명을 떨치는 것 ➁높은 학문과 덕을 쌓아 고명해 지는 것 ➂산림에 들어가 풍월을 벗하며 은일(隱逸)의 생활을 즐기는 것 등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➀의 뜻이다.

33)탐천(貪泉) : 《진서(晉書)․오은지전(吴隐之傳》)에 「오은지가 광주자사(廣州刺史)가 임지에 가던 중 10리 못 미쳐 지명이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당도했는데 그곳에 탐천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샘물을 마시게 되면 염치가 사라지고 마음이 탐욕스럽게 변한다고 했다. 은지가 샘물을 떠서 마시고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옛 사람이 이 샘물에 대해 말하기를, 한 번 마시면 천금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백이숙제를 불러 마시게 해보라! 결코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없음이라! (古人云此水,一飲懷千金。試使夷齊飲,终當不易心’).‘ 자사에 부임한 오은지는 더욱 청빈하고 절조있는 생활을 더욱 엄하게 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34)학철(涸轍) : 《장자․외물편》에 나오는 학철지부(涸轍之鮒)를 말한다. 곤궁한 사람에게 먼 훗날 도와주겠다는 한가한 약속을 하는 사람을 풍자한 우화다.



北海雖賖, 扶搖可接; 東隅已逝, 桑楡非晩.

孟嘗高潔, 空懷報國之心;

阮籍猖狂, 豈效窮途之哭.


북해가 비록 아득히 멀다 해도 회오리 바람을 타면 이를 수 있고, 해 뜨는 동쪽 모퉁이는 이미 사라졌지만 해 지는 뽕나무 가지에는 해 아직 안 저물었다.

맹상(孟嘗)은 성품이 고결하여 관직도 제대로 얻지 못했으면서 공연히 나라에 보답할 마음만 가졌고,

완적(阮籍)은 미치광이 짓을 했으니 어찌 막다른 골목에서 통곡한 그의 미친 짓을 본받으리오?


35)맹상(孟嘗) : 자가 백주(伯周)로 회계(會稽) 상우(上虞)인이며 후한 때 순리(循吏)다. 현령과 군수의 직을 청렴하게 행하여 치적을 쌓아 명성이 있었다. 후에 관직에 물러나 은거했다. 환제(桓帝) 때 양교(楊喬)가 그의 품행을 「청렴한 행위는 속세를 벗어났고, 재능은 뭇 사람 중에 뛰어나다.」라고 평하며 천거했으나 임용되지 못했다.

36)완적(阮籍) : 서진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명이다. 위진교체기의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강한 개성과 자아(自我) 및 반예교적(反禮敎的) 사상을 관철하기 위하여 술과 기행(奇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살았다. 많은 기행 중 「청안백안(靑眼白眼)」의 고사는 유명하다. 조위(曹魏)로부터 정권을 빼앗으려는 사마씨(司馬氏)의 막료를 지냈으나, 권력과의 밀착을 싫어했고, 곤란한 처세와 고독한 사상을 시문에 의탁하였다.  

37)궁도지곡(窮途之哭) : 완적은 항상 미친 행동에 아무 것도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는 항상 혼자서 수레를 몰고 성문 밖으로 나가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겨 길을 가다가 마침내 길이 끊겨 수레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면 땅에 내려 대성통곡을 한 후에 돌아오곤 했다.(《진서․완적전》)



勃  三尺微命,一介書生 無路請纓, 等終軍之弱冠.

有懷投筆, 慕宗慤之長風, 舍簪笏於百齡, 奉晨昏於萬里.

非謝家之寶樹,

接孟氏之芳隣, 他日趨庭, 叨陪鯉對, 今晨捧袂, 喜托龍門.

楊意不逢, 撫凌雲而自惜;

鍾期旣遇, 奏流水以何慙!


나는 매고 남아 드리운 허리띠가 석 자밖에 안 되는 미천한 몸이요 일개 서생에 지나지 않는지라 한나라 장수 종군(終軍)처럼 적을 무찌를 기회를 달라고 청할 길은 없지만 나이는 종군의 그 당시와 같은 약관이로다.

후한(後漢)의 반초(班超)처럼 붓을 던지고 장수가 될 생각도 해 보았고,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만리에 뻗은 물결을 치겠다고 한 남조 사람 종각(宗慤)의 멋진 풍모를 부러워하기도 했었건만, 나는 이제 평생토록 관직에 나아가 동곳을 꽂고 홀을 들 생각을 버리고 만리 밖의 교지에 계신 아버지를 아침 저녁으로 극진히 모시리라.

나는 사씨(謝氏) 집안에서 받들던 보배로운 나무는 못 되지만 맹자처럼 훌륭한 이웃을 만나고,

공자(孔子)의 아들 공리(孔鯉)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처럼 훗날 교지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려고 교지로 가는 길에 오늘 이렇게 소매를 높이 들어 기꺼이 이 용문에 몸을 맡기게 되었도다.

나는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추천해준 양득의(楊得意)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사마상여의 <대인부(大人賦)>와 같은 훌륭한 문장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애석해했는데,

이렇게 종자기(鍾子期)처럼 자신을 잘 알아주는 염공(閻公)을 만났으니 백아(伯牙)가 거문고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연주한 것처럼 멋진 문장을 한 편 지어본들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랴!


39)청영(請纓) : 종군(終軍)은 한무제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사람으로 자는 자운(子雲)이고 제남(濟南) 인이다. 당시 한나라가 남월(南越)과 화친을 행하기 위해 종군을 사자로 삼아 남월왕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남월왕으로 하여금 입조케 하여 무제에게 조현을 올리는 제후의 대열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때 약관의 종군이 스스로 무제 앞에 나아가 청하기를 「저에게 수레를 말의 배에 맬 수 있는 배대끈을 내려주시면 제가 반드시 남월왕을 묶어 데려와 폐하의 안전에 무릎을 꿇게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후에 사람들은 종군청영(終軍請纓)이라는 말을 군대에 들어가 보국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40)유회투필(有懷投筆) : 《후한서․반초전(班超傳)》에 의하면 「집이 가난했던 반초가 하급관리가 되어 문서를 정리하다가 후에 붓을 던져버리고 군대에 들어가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뚫는 공을 세워 정환후(定還侯)에 봉해졌다.」고 했다. 후세의 사람들이 반초의 행위를 투필종융(投筆從戎)이라는 말로 칭송했다. 반초는 《한서》의 작자 반고(班固)의 동생이다.  

41) 종각지장풍(宗慤之長風) : 종각은 남조의 송나라 때 남양(南陽) 인으로 《송서․종각전(宗慤傳)》에 의하면 「종각이 나이가 어렸을 때 숙부가 그에게 포부를 묻자 종각이 긴 바람을 타고 만리에 뻗친 파도를 물리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과연 종각은 후에 장군이 되었다. 종각기문(宗慤棄文)이라는 말은 앞서의 반초투필과 비슷한 말로 쓰인다.  

42)잠홀(簪笏) : 잠(簪)은 관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해 꽂는 비녀이고, 홀(笏)은 관리들의 조회에 나갈 때 비망록을 적기 위해 소지하는 판때기다. 잠홀은 관리들에게 필요한 비품이다.  

43)사가지보수(謝家之寶樹) : 동진의 명신 가문의 사씨(謝氏) 집안에 당시 태부(太傅)로 있던 사안(謝安)이 조카 사현(謝玄)을 마치 귀중한 보옥이나 되는 듯 그의 재주를 높이 사고 있었다. 하루는 사안이 사현에게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자 사현이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영지(靈芝)나 란초(蘭草) 등과 같은 옥수(玉樹)들을 층계 아래에 나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후에 謝家之寶樹라는 말은 집안의 훌륭한 자제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44)도배리대(叨陪鯉對) : 「뜰에 총총걸음으로 외람되게도 공자에게 대답한 리(鯉)처럼 자기도 아버지에게서 배우겠노라!」라는 뜻이다. 추(趨)는 어른 앞에서 총총히 걷는 걸음이고, 도(叨)는 ‘분수에 넘치다, 외람되다’의 뜻이며 배(陪)는 ‘받들다’는 뜻이다.

자가 백어(伯魚)인 공자의 아들 리(鯉)에 대한 이야기로 《논어․계씨편(季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 진항(陳亢)이 백어에게 「그대는 선생님의 자제이니 특별히 배운 바가 많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백어가 대답하기를 「아버님께서 《시경》과 《예기》를 배웠느냐고 물으셔서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시경》을 배우지 않고는 누구와도 말을 할 수 없고, 《예기》를 배우지 않고는 사람 노릇을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시경과 예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45)용문(龍門) : 후한 말 고결한 인품의 이응(李膺)이라는 사람은 아무하고나 사귀지 않았다. 환제(桓帝) 때에 이르자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혼탁해졌으나 이응 혼자만은 도의를 유지하고 고상함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의 선비들은 이응의 접대를 받는 일을 영광으로 알고 초청 받아 접대받기 위해 들르는 그의 집을 등용문(登龍門)이라 했다. 용문(龍門)은 섬서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황하의 급류가 있는 곳으로 황하의 하류에서 물살을 타고 이곳에 이른 잉어가 용문을 통과하게 되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기도 하다. 왕발은 자신을 잉어에 자기를 초청해준 염백서를 이응에 비유하고 있다.  

46)양득의(楊得意) : 한무제의 사냥개를 관리였던 양득의는 한 번은 무제가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읽으면서 찬탄을 계속하며「짐은 이 글을 지은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 심히 애석하구나!’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득의는 무제에게 사마상여가 작자라는 사실을 알려 상여가 무제의 부름을 받게 했다. 상여가 자기가 지어 올린 《대인부(大人賦)》에 「천자가 크게 기뻐하시니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과 같은 기운이 마치 천지간에 가득한 듯 하구나!」라고 했다.  

47)종자기(鍾子期)와 유수(流水) : 춘추 때 사람으로 거문고의 명인 유백아(兪伯兒)가 홀로 산에 올라 거문고를 연주하자 그때 나무를 하러 왔던 종자기가 듣고 백아가 음악으로써 표현하고 싶어했던 뜻을 모두 알아 맞췄다. 그 중 한곡을 듣고는 高山流水覓知音(고산유수멱지음)이라고 말하여 종자기가 유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 들었다는 고사를 지음(知音)이라고 하고 유수는 고산유수를 말한다. 왕발은 자신을 알아주는 염백서를 종자기를 표현했다.



嗚呼! 勝地不常, 盛筵難再,

蘭亭已矣, 梓澤丘墟.

臨別贈言, 幸承恩於偉餞.

登高作賦, 是所望於群公,

敢竭鄙誠, 恭疏短引, 一言均賦, 四韻俱成.


아아! 명승지는 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대한 잔치는 다시 만나기 어렵나니,

왕희지(王羲之)가 곡수유상(曲水流觴)한 난정(蘭亭)도 이미 허물어졌고, 석숭(石崇)이 환락을 만끽하던 금곡원(金谷園)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별에 임하여 이 글을 지어 올리는 것은 성대한 잔치에서 염공의 은혜를 입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중양절을 맞아 이 높은 누각에 올라 부를 짓는 것은 염공께서 여러 어르신들께 바라시는 바인데

내가 감히 보잘것 없는 정성을 다하여 조심조심 짤막한 서(序)를 짓고 한 마디씩 다 읊조리는 터라 4운짜리 시도 함께 완성했다.


48)난정(蘭亭) :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 서남에 있는 정자로, 동진 때 왕희지와 그의 친구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과 함께 모여 주연을 베풀며 우정을 나눈 곳이다. 그때의 일을 주제로 지은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가 명문으로 전해진다.

49)재택(梓澤) : 서진(西晉)의 대부호 석숭(石崇)이 지은 금곡원(金谷園)의 별칭이다. 지금의 하남성 낙양(洛陽) 서북에 있었다.



滕王高閣臨江渚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서 있는데

佩玉鳴鑾罷歌舞 옥을 차고 방울 울리며 노래와 춤 끝나가네.

畵棟朝飛南浦雲 단청 마룻대에 아침 되어 포구의 구름이 날더니

朱簾暮捲西山雨 붉은 발을 걷노라니 저녁 맞아 산에 비가 내리네.

閑雲潭影日悠悠 구름은 못에 그림자 짓고 해는 유유히 떠가나니

物換星移度幾秋 만물이 변하고 별자리 옮겨 몇 해가 지났을까?

閣中帝子今何在 누각 안의 왕자는 지금 어디 있는지

檻外長江空自流 난간 너머 긴 강물만 부질없이 흐르네.



[작품 설명]

파양호(鄱陽湖) 서남쪽에 강서성의 성도(省都)인 남창(南昌)이 있는데 이 도시의 서쪽에 강서성을 종단하는 감강(贛江)이 흘러 북으로 파양호로 들어간다. 이 강의 동쪽 언덕에 높은 누각이 하나 서서 감강을 굽어보고 있다. 바로 등왕각(滕王閣)이다. 등왕각은 당나라 고조(618-626 재위) 이연(李淵)의 아들로 등왕(滕王)에 봉해진 이원영(李元嬰)이 홍주(洪州, 지금의 南昌) 태수로 있을 때 지은 누각이다. 


당나라 고종 함형 2년(671)에 염백서(閻伯嶼)가 홍주수호(洪州守護)가 되었을 때 이 등왕각을 보수하고 그 해 9월 9일 즉 중양절을 기하여 대대적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염백서는 내심 내로라하는 저명 인사들이 다 참석하는 이 잔치 자리를 빌려 자기 사위 오자장(吳子章)의 문장력을 과시하려는 꿍꿍이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그날의 행사 계획을 사위에게 일러주어 미리 문장을 지어보게 했다.


나중에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출중한 시인이 된 왕발(王勃, 650-676)은 당시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애송이였는데 교지(交趾, 지금의 베트남 북부 河內)의 현령으로 유배가 있는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마침 성대한 잔치가 벌어진다는 소문을 듣고 말석에 앉아 상황을 기웃거렸다. 염백서가 좌중에 지필을 돌리며 글을 지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선뜻 글을 짓지 못했다. 염백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말석에 앉아 있던 왕발에게 지필이 돌아갔다. 왕발은 일필휘지로 단숨에 이 <등왕각서>와 <등왕각시>를 써내려 갔다. 좌중의 명사들이 이 애송이 선비의 글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염백서도 자신의 처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서 섭섭했지만 자신의 잔치 자리에 이렇듯 천재적인 문장력을 지닌 젊은이가 참석한 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시보다는 서문으로 유명한 이 작품은 중국문학사상 최고의 변려문(騈驪文)으로 손꼽히는바, 호쾌한 기상도 예사롭지 않지만 형식미가 더 탁월한 작품이다.

 

등왕각


등왕각에서 내려다 본 감강--강가에도 빈 배들이 다닥다닥 줄을 지어 매여 있다. 강 가운데에는 삼각주가 있고 그 건너편으로 일망무제의 평원이 펼쳐져 있다.


누각 난간에서 내려다 보면 싯누런 장강(長江)과는 대조적으로 맑디 맑은 감강이 길게 뻗어 있고 그 위에 유람선인지 어선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배가 몇 척 가는 듯 마는 듯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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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왕(滕王)


이원영(李元嬰 : ?-684)의 왕호다. 당고조 이연(李淵)의 22번 째 아들이며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동생이고 당고종 이치(李治)의 숙부로 정관(貞觀) 13년 (639)에 산동(山東) 등현(滕縣)을 식읍으로 받아 등왕에 피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이연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교만하고 방종하여 누차에 걸쳐 법을 범했다.


등현의 봉지에 부임한 이원영은 사치를 일삼고, 음락을 즐겼다. 또한 멋대로 징수한 부세로 걷은 재물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에 당지의 백성들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할 수 없이 태종 이세민은 이원영을 소주(蘇州)로 옮겨가 살게 했다. 그러나 등현에 있을 때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여러 개의 정(亭)과 대(臺)를 지어 사치하게 놀았던 이원영은 부근 일대에서 이미 악명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열악한 환경의 소주에서 어렵게 지내야만 했다. 또한 그의 봉지 등현(滕縣)도 이미 몰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원영은 얼마 후에 소주자사에서 지금의 남창인 홍주도독으로 옮겼다. 이때에도 그는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악행을 답습했다. 영휘(永徵) 4년(653) 그는 다시 감강(竷江)의 강변에 터를 마련한 후에, 당시 유명한 공인과 장인을 널리 모아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은 누각을 한 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이 바로 왕발에 의해 묘사된 등왕각이다. 고종 조로(調露) 원년(679), 이원영은 다시 융주(隆州) 자사로 옮겨졌다. 융주는 지금의 사천성 랑중시(閬中市)다.


당시 고조는 황제의 자리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어 융주의 낭중으로 물러나 산중에 거하고 있었으나 이원영은 개의치 않고 고조의 궁원에 머물려 장기를 두며 즐겨 놀았다. 다시 가릉강(嘉陵江) 변의 옥태산(玉台山) 허리에 높고 웅장한 행궁을 지었다. 후에 두보가 지나가다 지은 시 중에 등장하는 랑중등왕각(閬中滕王閣)이라는 건물이다. 이원영의 임지를 남창에서 오지인 사천의 랑중으로 옮기게 한 목적은 고종 이치가 그에게 근신하라는 1차 경고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전처럼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계속하며 이치의 경고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여지기승(輿地紀勝)》에 의하면 「랑중에 당도한 이원영은 일찍이 등현에서 행한 폭정으로 얻은 아역비루(衙役鄙陋)라는 악명에 맞게 큰 토목공사를 일으켜 웅장한 궁궐과 높은 누각을 지은 후에 그 이름을 랑원(閬苑)이라 불렀다. 다시 랑중의 옥태산에서 풍경을 즐기기 위해 등왕정(滕王亭)을 지으면서 랑중 생활 5년 동안 그는 즐거움에 묻혀 장안으로 돌아갈 생각을 잊었다.」고 했다. 또 《신당서(新唐書》)에는 「등왕이 좌천되어 랑중으로 임지를 옮겼으나 그는 여전히 국법을 지키지 않고 더욱 방종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또한 녹사참군(錄事參軍) 배위(裵韋)가 보다 못해 이원영에게 간했다가 오히려 매를 맞기도 했다.」고 했다.


한번은 고종이 대대적으로 황실의 제왕들에게 상을 내려 모두에게 채색비단 5백 필을 하사했으나 단지 등왕에게만은 두 수레에 마로 엮은 새끼줄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등왕께서는 돈과 비단은 이미 많이 갖고 계시어 별도로 비단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마로 꼰 새끼줄 두 수레를 드리는 이유는 가지고 계시는 돈을 꿰는 데 사용하시라고 해서입니다.」


고종이 사치하고 방종한 이원영에게 완곡하게 경고를 내린 방법이었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이원영이 지나칠 정도로 호사하고 방종한 생활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한 이유는 잔혹한 황권 쟁탈전 와중에서 자기의 재능을 숨기는 일종의 도회지계(韜晦之計)의 방편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신은 결코 호사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길 뿐이지 황권에는 절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들게 하여 태종 이세민이나 고종 이치의 경계에서 벗어나 자기의 몸을 보전하기 위한 처세라고 보았다.




주석 참고자료 출처 : 옛글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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