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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는
1. 시, 유폐된 시간으로부터의 탈출구
나에게 연필과 크레파스가 주어졌을 때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고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림책을 흉내 내어 그리고 사물의 모양을 보이는 대로 혹은 내 맘대로 그렸을 뿐이었다. 유치원은 말로도 들어보지 못했고 그 시골에 학원이 있었을 리 없다. 혼자 끼적이고 놀다가 흉내 내어 익힌 것, 그게 그림이었다.
주위의 친구들 가운데는 운동을 잘한 친구도 있었으나 나는 몸이 허약했고 운동엔 소질이 없었다. 그리고 힘센 아이들은 끼리끼리 놀았다. 허약한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잘 놀다가도 곧잘 따돌리기 일쑤여서 차라리 혼자가 좋았다. 그럴 때마다 크레파스로 누나들의 노트나 도화지에 그림 그리는 것이 유일한 놀이였을 것이다. 나무를 그렸고 산을 그렸고 소와 염소를 그렸다. 시냇물을 그렸다. 바위와 꽃을 그렸다. 아무도 그것을 그리라고 하지 않았다. 가르쳐줄 필요도 없었다. 내 삶의 내용들이 온통 농촌의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었으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나는 그림을 그렸던 기억밖에 없다.
아, 또 있다 누나들이 읽고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시집 몇 권이 있었다. 겉장도 너덜거리던 그 시집엔 소월도 있었고 안서도 있었고 주요한도 있었다. 그 뜻을 알지도 못하고 곧잘 그것들을 읽었다. 읽다 보니 몇 편은 안 보고도 외울 수 있었다. 지금처럼 책이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어쩌다 읽을거리를 만나면 읽고 또 읽던 시절이었다. 동시집을 만나볼 기회 같은 건 아예 없었다. 처음부터 소월이고 윤동주고 그랬다. 소월과 윤동주는 그래도 시가 어렵지 않고 동시풍의 시들이 많아 어린 가슴에도 쉽게 와서 안겼다.
소월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왠지 모를 서러움에 가슴이 먹먹하여 눈물까지 훔치면서 소리 내어 읽고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무렵이 아마 초등학교 5, 6학년 때쯤 되었지 싶다. 그게 최초로 내가 문학과 만난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나도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주로 외웠던 시편들이 김소월이었는데 그의 시를 흉내 내어 시를 써보기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의 사랑을, 강아지의 공격으로부터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해 강아지에게 달려드는 어미닭의 그것에 비유하여 동시를 써서 칭찬을 받았다. 이 비유를 뒷날 중학교 때 산문으로 다시 써먹어 상을 탔었기 때문에 기억을 한다. 이렇게 쓴 글들을 나만의 노트에 또박또박 정성들여 쓰고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에 했다. 그림을 그렸고 또 같잖은 글을 썼다. 내 안에 내재된 표현 욕구를 그렇게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언제나 우리 가족에게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훗날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워 주고 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어려웠던 가정 형편 아니었나 싶기 때문이다. 위로 일곱을 낳고 나이 오십에 나를 낳은 아버지는 가정경제에 크게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애초부터 가진 게 없었고 연세가 높아감에 따라 몸도 여의치 아니하였을 것이다. 논일에 밭일에 품앗이에 까맣게 타서 토인 같은 어머니가 겨우 나를 버티게 해준다.
함부로 밝히기엔, 별로 자랑스럽지 아니한 큰형과 나와의 가슴 아픈 갈등사가 있었다. 내 성장기에 나는 이유를 모르는 채 지독하게도 싸늘한 시선과 소외를 큰형으로부터 받아야 했다. 내가 그림으로 혹은 글쓰기로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크나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아, 그러나 얼마나 고마운가! 외로움이여, 그리고 가난이여, 그 외로움이, 그리고 가난이 나를 그림으로 또는 글로 나를 표현하게 했으니. 그게 그림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그게 글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나는 나를 표현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허파호흡만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외로움과 가난은 출구가 막혀있거나 보이지 않은 상황으로 말할 수 있다. 거기서 사는 동물은 송곳니와 발톱이 길게 자라서 자신과 또 다른 타자를 물어뜯거나 할퀼 염려가 있다. 그 짐승을 순치시켜주는 음식이 바로 꿈인데, 그림을 통해서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정서적인 호흡행위였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질식해서 식물처럼 시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어린 시절 내가 예술행위를 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그림이었든 글이었든 그것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도모했으며, 외로움 속에서 내 안에 내재된 표현 욕구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을 희미하게나마 터득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그림 그리기는 나로 하여금 숨쉬게 하는 그 어떤 것이었으니 선택에 아무 갈등 없이 나는 화가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더 너른 세상에 나가 세상과 부딪쳐 보겠다고 큰 도시로 나갔던 나는 내게 드리워진 가난의 그림자가 너무 짙다는 걸 깨닫는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림을 더 이상 꿈꾸지 못하게 되자 나는 더욱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초, 중학교를 다녔던지라 많은 책을 접하지 못했는데 대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는 도서실이 제법 잘 정비되어 있어서 책을 접하는 덴 큰 어려움이 없었다. 사립학교였는데 사서 선생님이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폐쇄식 서가였는데 아무 때고 들어가 책을 볼 수도 있었다. 『갈매기의 꿈』, 『어린 왕자』, 『데미안』, 『닥터 지바고』, 『빵만으론 살 수 없다』, 그리고 수많은 국내외 단편소설들, 헤르만 헤세의 시와 소설, 오 헨리의 작품들, 헤밍웨이의 작품 등의 소설도 읽었지만 긴 소설보다는 시를 읽는 데 재미를 붙였던 것 같다. 주로 소월과 청마와 미당, 만해, 두보의 시를 읽었다.
그때만 해도 시인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 2 때였던가.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는 사건이 생겼다.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돌’이라는 제재가 주어졌고 그동안 내가 읽었던 시작품들을 흉내 내어 시 비슷한 꼴을 갖춰 제출했던 것 같다. 그때 받은 상이 미당의 시집 한 권이었다. 그 뒤로 미당을 찾아 심독했다. 내 시에 미당 시의 영향이 전혀 없지 않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땐 시인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그 사건이 나에게 시를 꿈꾸게 할 줄은 몰랐다. 그 뒤 한 차례 더 사건이 있었는데, 전국 단위로 공모하는 무슨 백일장에 담임이었던 국어 선생님이 내 글 한 편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게 동상인가에 당선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상을 받은 학생은 여러 명 있었던 것 같다. 비로소 내가 시인이 되겠다는 어렴풋한 꿈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그림에 대한 꿈이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옮겨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독서를 해왔으나 그 후로는 그 무엇을 향하여 그것들을 해야 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은 허공으로부터 그 형태를 찾아서 빚어낸다. 작품 하나를 빚어내기 위하여 수많은 방황과 번민의 밤을 새워야 한다. 그 많은 방황의 날들을 고시공부 하는 데 바쳤으면 나는 아마 제법 성공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성에 차지 않은 시를 쓰면서 시로서 길을 묻고 길을 내어 가고 있다. 시를 선택한 것이 온전히 나만의 의도가 아니긴 했지만 이제 시를 떠나서는 숨 쉴 수 없다. 가난과 외로움이 나를 시와 만나게 해주었으나 여전히 근원적인 결핍과 외로움은 가시지 않은 것 같다. 그게 내가 아직도, 그리고 이후에도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2. 시,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呪文)
흐르는 바람으로
가락을 빚는 그 사람
아 나는
얼마나를
그 창조의 가슴과 손으로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이고 싶으랴
봄날 아침
문을 여는 꽃
죄 없이 웃는 영혼이고 싶으랴
허영자 「피리」전문
시골을 떠나와 도회지 사립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도무지 낯설기만 한 도회지 생활은 물론 학교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친구들과도 잘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학업성적은 맨 뒤를 맴도는 부진학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 시절까지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시절 내내 그림 그리기에만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그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 탓이었다.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대도시로 나오면 뭐가 달라지겠지 했는데 기다리는 것은 갖은 고생과 절망뿐이었다. 늦둥이로 낳은 나를 뒷바라지해줄 아버지는 경제력을 잃고 병환에 시달렸고 형제들은 제 삶을 꾸려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난한 이모님 댁에 얹혀 지내기도 하고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독서실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하고 여기저기 친척집을 전전하며 학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헤쳐 나아갈 앞길이 막막하기만 하였다. 가난은 불편함일 뿐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어린 나이엔 불편함을 넘어서 절망이기도 하고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당장 4B연필 한 자루, 물감 한 통, 종이 한 장 살 돈이 없는 나는 그즈음에서 그림 쪽에 뜻을 접어야 했다.
가끔 학교 도서실을 찾았다. 딱히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책 저 책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잘 가기 때문이었다. 워낙 놀기만 했던지라 공부도 크게 관심이 없어 학과와는 거리가 먼 책만 뒤적거리곤 했다. 어쩌면 그 어떤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허기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도서실에는 손바닥 만한 문고판 책들이 많았다. 아주 어려서부터 누나들이 보다가 던져놓은 시집을 읽기도 하면서 간간이 나도 끼적이며 시 흉내를 내왔던 터라 문고판으로 나온 시집들을 주로 관심 있게 읽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폐기처분하기 위해 한구석에 쌓아 놓은 책더미를 뒤지다가 얄포롬한 시집 한 권을 찾아 읽게 되는데 당시 유명한 시인들의 시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앤솔러지였다. 사서 선생님께 부탁하자 기꺼이 내게 주셨다. 그 시집에 실린 작품 가운데 유난히 오래, 그리고 차분히 내 마음속 깊이 안기는 시 한 편이 있었다.
허영자 시인의 「피리」라는 작품이었다. 짧기도 해서 여러 번 읽다보니 나중엔 중얼중얼 혼자서 읊기도 했다. 그게 그 뒤로 내가 쓰는 시의 나침반이 될 줄은 그땐 잘 몰랐다. 음악(피리)을 두고 한 말이지만 미술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시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람으로 가락을 빚어내는” 일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고, 그게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이라면 굳이 그림(미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 쓰는 일에는 돈이 들지 않았다. 시를 쓰자! 피리 연주자가 피리소리로 하늘에 사무치고자 한다면 이제 시로써 나는 하늘에 사무치겠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시를 쓰게 되었다.
문예부에 들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적도 없었다. 짱짱한 선배들이 있어서 힘이 되었던 것도 아니다. 이 한 편의 시가 내 안의 그 어떤 새싹에 젖을 물린 것이다. 그림에 두었던 뜻을 접고 지향점을 잃고 있던 나에게 이 시는 둔중한 충격음으로 내 가슴을 울리며 내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어렴풋하지만 시인의 꿈을 처음 꾸게 한 사건이지 싶다. 짐승이 태어날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을 어버이로 여긴다는 각인설이 있듯이 이 시는 나에게 원형적인 시론을 각인시켜 주지 않았나 싶다. 물론 뒷날 다시 화실에 다니며 데생을 하고 소설도 써보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내 시의 내용과 형식을 공고하게 해주는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로지 시에 대한 열망이 그것들보다 컸던 탓이었다.
이 시는 내가 쓰는 시가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말해주었다.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이고 보면 그게 거짓이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하늘에게 거짓이기 이전에 자신에게, 인간에게 거짓이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진솔하고 진실하며 절실하고 간절하며 절박한 그 어떤 것이어야 하리라. 피리를 부는 그 사람의 피리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는 주문”이라 했지만 다른 예술이라 해서 다르랴. 그게 그림이 되었건 시가 되었건 음악이 되었건 춤이 되었건 그것이 예술인 한에 있어서 지녀야 할 본질적인 부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시(詩)자를 파자하여 언(言)과 사(寺)의 결합으로 설명한 걸 기억한다. ‘말씀의 사원’이라는 것이다. 사원에서 신을 만날 때 어느 누가 거짓으로 뉘우치고 다짐하고 기도하겠는가? 사무치지도 않은, 절실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신 앞에 손을 모으겠는가? 시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는 비유로 이해하였다.
이 시는 또한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 왜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답을 보여주었다. 이 시에서 피리 연주자가 궁극으로 꿈꾸는 것은 “죄 없이 웃는 영혼”이다. ‘시가 무엇인가, 시를 왜 쓰는가’에 대한 답은 수없이 많을 것이나, 질곡 속에서 헤매는 젊은 날 내가 시를 쓰는 일로 나를 지탱하고 길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가갔던 걸로 보면 내게 있어 시는 자기구원의 한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있을 온전한 나를 찾아 가장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 꽃 피워내는 그 작업이 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시절 소농으로 이어온 가계에 누대를 걸쳐 내려온 무지와 가난은 우리 집이라 예외가 아니었다.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와 질식할 듯 조여 오는 공기 속에서 가끔씩 터지는 아버지의 울분, 그 속에서 신음하는 어머니, 박탈감과 소외의식과 싸우며 안팎으로 갈등하는 형제들을 지켜보면서 가까스로 견뎌야 했다. 그 젊은 날 숱한 방황과 좌절의 날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시였다. 시를 일러 ‘사무사(思無邪)’라 했던가? 시에는 아름다움과 진실, 올곧음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에 대한 믿음 없이는 시가 있을 수 없다. 시를 통해 이룬 바는 크지 않으나 나는 크게 비뚤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시로 젊음을 건너왔다.
시를 쓰는 작업은 그 무엇보다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이고 “죄 없이 웃는 영혼”을 꿈꾸는 작업이다. 그래서 시 쓰는 작업은 구도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단에 나와 소위 ‘활동’이란 것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세상이 항상 내 마음과 같거나 내 뜻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에게는 시가 장식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희이며 또한 오락물일 수 있다는 것도 뒤에 알았다. 배설이기도 하고 재주일 수도 있고 더구나 권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부나비처럼 시인이라는 허명을 좇고 또 많은 시인들이 이 같잖은 시인의 이름으로 대단한 벼슬인 양 허세를 부리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팔고 사는 일도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혼에 얼룩을 묻히는 것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도 차츰 세상에 물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도둑질하고 남 둘러먹는 것에 비하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정도의 생각으로 나를 합리화하며 적당히 속물이 되어갔다. 왜 아니랴, 나도 가끔은 좀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한때는 문예지를를 기웃거리며 힘에 기대어봤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왕이면 나의 시가 돈이 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지 싶다. 조그만 문학상 하나 받고서 으쓱하던 때가 없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뒷덜미를 잡아채며 그러면 안 된다고, 그게 아니지 않느냐고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그 젊은 날의 「피리」가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시 쓰기는 알아차림이다.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사건,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이것과 저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진행, 무엇보다 그것들의 연계성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그것들과) 관계 맺는 매 순간의 내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살아있음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시는 나를 돌아보고 또한 돌보는 일의 언어적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내게 시는 거울이다. 나를 돌아보고 비춰보는 도구이다. 처참하더라도 그게 내 모습이라면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시의 거울을 통해 나의 정면을 보아야 한다.
나는 시·서·화가 수신의 기본덕목이었던 시절의 고리타분한 시론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어느 예술 분야라 할 것 없이 지나치게 상업성에 물들어 있고, 필연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고요히 돌아보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말초적인 감각의 영역으로 몰아가거나 가치의 진공 영역으로 몰아가고 있음을 본다. 시마저 여기에 어깨를 걸고 함께 춤출 일은 아니다. 수많은 문예지를 통해 수많은 시인들이 배출되고 시집이 쏟아지고 많은 문학상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음도 보게 된다. 좋은 일이다. 이 나라 국민 전체가 시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랴. 하지만 그게 인간 내면을 더욱 깊게 돌아보는 일에 이어졌으면 좋겠다.
도처에 시다. 시인이다. 도저한 수사와 낯선 문법과 매우 기발한 발상에 근거를 둔, 좋다고들 하는 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그래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여 시단을 미래로 끌어가고 있는 듯하다. 소통의 어려움을 넘어서 난삽한 시들이 만연하고 있다. 어느덧 삶은 없고 시만 남아있는 듯하다. 그걸 바라보는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다. 하지만 애써 그들과 그러한 시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양한 모습의 시들이 길항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움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를 쓰는 행위가 자신과 우리를 들여다보는 데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시에서 영혼의 울림이 사라져버리고 울림을 공감할 독자가 없다면 그건 아니지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물론 이건 혼자서 내게 내가 하는 말이다.
나는 ‘시만’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나’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손을 쓰고 발을 쓰고 몸을 쓰고 무엇보다 힘쓰고 무릅쓰고 남은 힘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시를 삶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다. 실사구시(實事求詩)한다. 내게 시를 위한 시는 없다. 내 시는 내가 살아낸 삶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나로 하여금 그림 대신 시를 선택하게 한, 내게 시의 방향을 일러준 「피리」를 생각한다. 얼마나 가까이 갈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다시 시로써 “죄 없이 웃는 영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