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toire de la philosophie(철학사),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2장 1815에서 1850년 까지 종교철학 La philosophie religieuse de 1815 à 1850. 721-732
제1절 발랑쉬 1776-1847 - Ballanche, 1776-1847 721
1815년에서 1830년 사이에는(이 연속적 운동은 1850년에 약화되었다) 특히 사회적 예언주의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은 지난 세기의 계시주의(l'illuminisme)와 종교적 혁신에 다소 깨끗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발랑쉬(Pierre-Simon Ballanche, 1776-1847)의 선언은 이런 점에 강조를 둘 것이다. “나는 나의 세기에 위대한 사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지배적인 사상은 공감과 종교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신 자체로부터 존엄한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 임무란 새로운 사회적 세상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나는 그 임무를 인간적 [인식]역량들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감정들과 관념들의 모든 질서 속에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내밀한 사유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고, 모든 것들 속에서 동화하며 자기의 실체가 되는[되려는] 것이다. 사유의 본성에 의해, 그 사유는 모든 문명의 초기 요소, 다시 말하면 신념(une croyance)을 이루려 한다.”따라서 발랑쉬같은 사상가는 신념을 표현하는 것을 임무로서 여겼다. 그 신념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삶을 조직화하는 힘이라 여겼다. 그것은 신앙(la fois) 자체보다 더 믿고자하는 욕망(le désir)이며, 이 욕망은 이 시대의 특징이다. 발랑쉬가 주목했던 대로, 그것은 그 욕망을 만족시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깊이 있는 욕망이며, 이것을 사회가 당신들에게 부과하도록 요구한다(대화들(Dialogues, 1819), 120쪽). (721)
그러나 발랑쉬는 전통 카톨릭 신자로서 프랑스와 독일의 모든 비의적 환경에 연계되어 있어서, 신념이 사회적 합의와 권위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사회는 당신이 사회에게 요구하는 것을 당신에게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는 반혁명가인 보날(Bonald 1754-1840)에서처럼, 사회는 초월적 실재성과 개인 사이의 필연적 매개이다. 의심할 바 없이 목표는 종교이다. 그 종교는 무엇보다 개인의 안녕을 원한다. 그러나 사회는 필수적인 수단이다. “말하자면 사회 밖에서 인간은 잠재적으로 존재일 뿐이다. 인간은 사회에 의해서 진보하며 완성할 수 있을 뿐이다.”(사회적 재순환의 시론(Essais de palingénésie sociale), 12쪽).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사회는 그자체적으로 메시아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는 “결코 퇴행하지 않는다. 사회는 그 자체적으로 종교적이며, 개인들 보다 훨씬 더 종교적이다.… 사회는 종교적이지 않을 수 없다”(늙은이와 젊은이의 대화들(Dialogues du Vieillard et du jeune homme, 1819)(éd. Mauduit, 126쪽) (722)
사회를 살게 하는 근본적 신념, 그것은 윤회(palingénésie, παλιγγενεσια)를 믿는 신앙이다.이 신앙은 소멸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존재가 소멸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는 존재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에 맞는 목적(la fin 끝)에 틀림없이 도달한다. 피조물은 자기 본질 자체에 의해 목적에 이를 권리를 갖고 있다.”(전집(Œuvres complètes), 제3권, 11쪽). 발랑쉬의 종교는 연속적인 진보가 아니라 무한정한 혁신과 개조(la reprise)의 가능성을 믿는 일종의 낙천적 신념에 근거한다. “인간은 개인적 활동에서처럼 사회적 활동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사회도 스스로를 만들어간다”,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즉 자연을 역사처럼 완전히 고정시키는 이신론자들의 자연적 종교의 본질이 아니라, 크리스트 종교가 그것을 표현하는 전통적 종교의 본질이다. 그 종교의 본질적 교리(le dogme)가 모든 시대를 관통하여 순환하는 도그마(le dogme, 교리)이다. 몰락하기도 하고 부흥하기도 하는 이 준엄한 교리는 일련의 인간 숙명들을 설명하며, 계속되는 입교절차들의 형식으로 숙명들의 발전을 설명한다. 각각의 입교는 속죄와 같은 시련으로 절차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역사는 종교적 의미이다. 역사는 “사유의 서사시”이다(제3권, 81) 이 서사시는 인류 진보에서 각 민족(인민)의 천재(le génie, 재능)에 대해 계속적인 몫을 서술한다. 한 민족의 재능(개인으로서 화신)은 “우주발생론적 사실과 비유되는 불가사의한 사실”이며(제3권, 17), 그 말씀씀이(son langue, 입말)로 행해지는 그 정부의 형태로 표출되어서, 근본적 도그마의 형식들 중의 하나를 본질로 삼는다. “각 민족은 류적 인간의 일반적 전통들 중에 하나의 번역을 갖는다.” 발랑쉬는 덴마크 철학자이며 파리에서 활동한 에크슈타인(Ferdinand Eckstein, 1790-1861)과 독일 고고학자 고문헌학자인 크뢰제(Georg Friedrich Creuzer, 1771-1858)처럼, 그리스 신화, 힌두 신화, 게르만 신화 등에서 이 교리의 흔적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비교신화학과 상징주의에 열중했던 학자들에 속한다. (723)
발랑쉬는 1819년에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윤회의 학설에서는 비코의 역사 “순환론”(corsi e ricorsi, 흐름과 재흐름?)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발랑쉬가 개조 또는 영속적인 다시 시작의 관념에 관하여 비코와 일치된다 하더라도, 비코에 영감을 받은 그 시대에 모든 사상가들에게서처럼 그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그 사상가들을 완전히 대립시킨다는 점이다. 발랑쉬는 비코가 거부했던 종교적 의미를 역사에게 부여한다. 비코는 사회들로부터 자연적 법칙들을 규정했는데, 매우 초자연적인 크리스트교의 발전을 따로 놓았다. 발랑쉬는 자연과 초자연, 역사와 종교를 섞어 놓았다. (723)
발랑쉬에 있어서 사회에는 메시아적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작동하는 그것은 있는 대로 사회가 아니라, 그것은 개인들, 물체들, 정부들, 교직자들이며, 이들의 기능은 인민(민족)의 재능(천재)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심판관이자 이 표현의 충실성의 척도이다. 발랑쉬가 마치 살고 있다고 믿는 시기처럼 “윤회 시기들”(les époques palingénésique)에서는, 다시 말하면 종교적 삶을 새로이 사는 시기들에서는, 재창조되는 신앙과 소멸되었던 옛 표현들 사이에 싸움(une lutte)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중심에 관하여 속고 있다. 신적 사유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 거기에는 더 이상 없으며, 반대되는 중심에서 아직 있지도 않다.”(제3권 108). 이리하여 발랑쉬에게서 목사(교직자)는 자기 임무로부터 뒤로 밀려나 있고, 사람들은 당연히 동시에 종교적이고 반목사적이 된다. 어떤 개인적 사유 또는 집단적 사유도 사회로부터만 자기의 힘을 끌어낼 뿐이다. “그 사유가 수많은 사람들의 사유를 표현하는 찰나에서만, 그 사유는 일종의 전지전능이 된다.” 신적의지와 동화할 수 있는 개인, 자신 속에 한 나라의 깊은 감정을 집중시킬 수 있는 개인은 영웅이다. 쟌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가 이와 같다. 입법자는 사회의 상태 자체에 법률로 기초했을 경우에만 성공한 것이다. 다중(la multitude)은 질서를 창조할 줄 모르지만 “그것을 채택할 찬탄할 만한 본능을 지니고 있다.”(대화들, 97)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합법적 권력은 바로 인민의 동의 위에 근거하며, 루소 같은 이(le Rousseau)에게서 사회계약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회는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던 인간들의 재통합의 결과로 되었던 것처럼, 또는 마치 인민이 자기의 주권을 직접적인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인민의 동의는 도덕적 만장일치이며, 신적 권리와 동일하다. 거기에 권력의 합법성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으로 발랑쉬는 보나파르트(Bonaparte)를 단죄할 것을 허락한다. [왜냐하면] 보나파르트는, 인간들에 대하여 자기의 불신을 가지고서, 신적 사유에 반대되는 인간 사유의 전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724) (47QMA) (57SKB)
제2절 호에네 브론스키 그리고 폴란드 메시아니즘 - Hoëné Wronski et le messianique polonais 724
이 19세기의 초반에 고난을 겪은 폴란드에서 종교 사상이 발전되었고, 이 종교사상은 민족적 사상과 인도적 메시아주의를 가장 밀접한 방식으로 통일하였다. 이 메시아주의 는 보편적 평화와 성령(l'Esprit, 정신)의 통치를 예고한다. 폴란드 시인 미키에비츠(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는 1842년에서 1844까지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강의 했으며, 그는 폴란드 민족에서 평화가 마땅히 조직화되어야 하는 인민들의 메시아(le Messie)를 보았다. 쇼팡(Chopin, 1810-1849)의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들 중의 몇 곡을 사랑하는 이런 열렬한 희망은 폴란드에서 종교적 열정이 갖는 특별한 측면이며, 이 열정이 이 시대에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런 열정은 폴란드 철학자이며 1803년 이래로 프랑스로 망명한 브론스키(Hoëné Wroński, 1776-1853)가 프랑스어로 쓴 많은 저작들 속에 특히 잘 표현되었다. 또한 그는 1827년 교황 레오 12세(Léon XII, en lat. Leo XII, 1760–1829, 재위1823-1829)에 보낸 한 편지에서 메시아주의라는 단어를 썼고, 그리고 그는 이 단어를 많은 작품에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메시아주의의 서설(Prodrome du messianisme, Prolégomènes du Messianisme, 1831), 메시아적 메타정치학(Métapolitique messianique, 1839), 메시아주의: 인간적 지식의 절대적 개혁(Messianisme ou réforme absolue du savoir humain, 1847) 등이 있다. 이 학설 속에는 이 시대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많은 기묘한 것들이 있고, 특히 그의 사상을 잘 포장한 수학적 형식이 있다. 그는 이것이 과학적 엄밀함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당대 위대한 인물들이 그의 기획들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애썼으나 헛된 일이었다. 이 잡동사니(ce fatras) 속에서 학설의 본질이라 할 그의 중심 이념(l'idée, 사상)을 분리할 수 있다. 그것은 자발성의 이념, 창조적 이념이며, 그는 그것을 또한 자기창조(autocréation)라 말한다.각 존재는 영원하며, 자기의 고유한 창조자로서 권능을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 이 자발성은 게다가 자의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브론스키는 창조의 수학적 정식을 발견했다고 허풍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의 역사 철학은 이 형식을 응용인 셈이다. [다음으로] 역사철학은 절대자의 종교를 예고하며, 이 종교 속에서는,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세계에 참여하였던 많은 경향성들을 화해시킬 것이다. 말하자면, 선에로 경향은 고대와 중세에의 신정정치를 생겨나게 했으며, 진리의 경향은 그리스 로마 문명과 유럽에서 표출되었다. 그래서 근본적 안티노미가 등장한다. 즉 진보의 당파인 프로테스탄트주의와 질서의 당파인 가톨릭주의의 대립이다. 크리스트교는 절대적 종교의 준비 작업일 뿐이며, 절대종교는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독단들을, 특히 그중에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것과 같은 독단을 과학적으로 개입시킬 것이다. 정치적으로 브론스키는 인민의 연합(une fédération 연맹)을 예고했다. 이 연합은 폴란드 메시아주의의 근본적 이념들 중의 하나였다. [다른 이념들 중에서], 사람들은 폴란드 낭만주의 시인들, 토비안스키(Andrzej Tomasz Towiański, 1799–1878), 스보바츠키(Juliusz Słowacki, 1809–1849), 미츠키에비츠(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 등에게서 이념의 기원을 발견한다. 르낭이 쓴 유명한 논문은 이 이념의 기원을 프랑스에서 대중화하였다. 그것은 민족(le peuple)과 국가(la nation)를 구별하는데, 전자는 공통 기원에서 나온 집단을, 후자는 다른 기원에서 나온 인간들의 공통적 의지 덕분으로 모인 것을 의미한다. 이 찰나에서 의지에 의해서만 현존하는 폴란트 국가는 그 나라의 불행에서 민족에서 국가로 변형의 [구체적인] 실례로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국가들이 서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경우에 인류성(l'humanité 세계연합)의 탄생으로 등장할 것이다. (725) (47QKC)
제3절 키에르케골 - Kierkegaard 725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골(Søren Kierkegaard, 1813-1855)에게서 종교 사상은 일종의 개인주의와 비인격주의에 이른다. 또한 그의 사상은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가 적대적일 수 있었던 만큼이나 헤겔 학설에 적대적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비인격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따라서 심지어는 인격적 현존의 파괴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못했다. 그의 우울한 기질 때문에, 인격적 현존이 실재성의 첫 도식이 되었다. [첫 도식인] 객관성, 그것은 오류이고, 진리가 거주하는 주관성 안에 있다.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게 될, 주관성은 따로 떨어져 있는 무엇, 홀로 있는 무엇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체계적 정신인데, 도처에서 매개들[매개작용들]을 발견하고 통합하는 이 정신은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은 심층적이고 결정적인 분리작용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실재적인 삶은 하나의 체계 속에 갇혀있기를 거부한다. 그 삶은 통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하는데 있다. (참조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 - Eller, 1843)(fr. Ou bien... ou bien ou L'alternative, deu. Entweder-Oder)). 이 삶은 점진적 진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삶의 여러 전형들이 있다. 이 전형들은 상호 배타적이고, 어떠한 화해도 없다. [그런데 우선] 탐미주의자(l'esthète)가 있다. 그는 현재를 즐기고, 환타지로 가게 내버려 두며, 이어지는 일과 생활에 대해 웃는다. [그리고] 도덕가인 체 하는 자(le moralisant)가 있다. 그는 사회와 가족이 부여하는 모든 의무들에 맞추어 자기의 삶을 선택한다. 결국에 종교적 인간이 있다. 키에르케골에서 종교적 감정은 자연과 정신 사이에, 시간과 영원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연결의 감정이다. 프랑스에서 신앙절대주의자들(les fidéistes)처럼 그는 신앙(la foi)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신앙은, 마치 신에 대한 신앙이 인간적이 되는 것과 같이, 파라독스들과 부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참조 삶의 길의 단계들(Stadier paa Livets Vei 1845)(Stationen des Lebenswege: Etapes sur le chemin de la vie, 1845)) 결국에는 키에르케골에게는 일종의 부정신학이 있다. 이 부정신학은, 마치 사람들이 플로티누스에서 그렇게 보았듯이, 신에 마주하는 영혼을 고독한 절대자 안에다 둔다. 키에르케골 생애의 만년에는 공식교회와 논쟁들로 가득 차 있다. (참조 순간(Øjeblikket. 1855)(Der Augenblick 1855 L’instant, 1855)). (726)
최근에 독일에서 키에르케골의 영향이 다시 일어났다. 특히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참조: 예를 들어, 신의 말투과 신학(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1925(La parole de Dieu et la théologie)에서) 숭배[의례]에 대한 인간의 조잡한 실현에 대해 교회를, 즉 순수 영성(정신성)과 신의 행위로서 교회를 대립시켰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에서 이런 영향의 새로운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726) (47QMC)
제4절 에머슨 - Emerson 1803-1882, 726
랄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는 그의 영향력이나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으로 보아 다음 세기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특히 1832년에서 1840년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는 보스톤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를 졸업했으며, 처음에서 목사의 직능들에 종사해야 했으며, 1832년에 콩코드에서 고독을 즐기려 이 목사직들을 포기했다.그가 칼라일(Carlyle, 1795–1881)을 만났던 유럽의 여행 후에, 콩코드에서 죽을 때까지 은퇴할 것이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 1813-1855) 만큼이나 그는 체계들을 싫어했다. “나는 나의 사상을 인식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이야기할 약간의 필요가 있다. 나는 체계를 갖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주어진 모델 위에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체계는 무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네오플라토니즘의 본질인데) 전체(le Tout)는 최소한의 사건에서 작은 모형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법칙들은 최소한 사실 속에도 전수될 수 있다. 또한 “진리를 공언하는 자에게는 자기 사상들의 비례와 일관성을 건드리는 모든 근심(l'inquiétude)을 금지하는[그만두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그자는 그 만큼 오랫동안 자기의 개별적 인상들과 충실하게 연관 맺을 수 있다.” (1839년 11월 14일, 일기) 또한 그의 사상의 자연적 형성은 수필이다. 이 수필은 그에게 일상적 사실들에서 절대적 법칙의 계시를 알게 해주었다. 온자연(la Nature)은 우리에게 도처에서 개별자와 보편자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시해 준다. 그 자연은 당연히 인간에게 모델로서 쓰인다. “그는, 만일 그가 할 수 있다면, 높은 존재들의, 즉 나무들의 침묵을 모방한다. 또 그것들의 성장의 아름다움, 그것들의 힘, 그것들의 퇴조를 모방한다.” 이리하여 그는 1836년에 자기의 선험주의(transcendantalisme, 초절주의)의 원리들을 진술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하는 정신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관계가 있으며, 따라서 물질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정신 속에 있다… 모든 현상들과 모든 원인 작용들(les causants) 아래에는 우리가 사물들의 본성이라 이름 짓는 몇 가지 법칙들이 있다”(전기, 번역 미쇼(R. Michaud), 1914, I, 227) 이런 결과로 그것의 규칙을 찾아야 하는 것은 그 자체 속에서 이다. “하나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자는 영국교회주의자가 아니어야(non-conformiste) 한다…. 나는 그 성스러움을 번역으로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전적으로 내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어떠한 법칙도 나에게 축성(祝聖)되게 할 수 없으며, 나의 존재의 법칙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있어서 선한 것인 것만이, 즉 올바른 길만이 나의 존재의, 즉 나의 의식의 구성에 따라서 있는 것이며, 악한 것은 반대로 있는 것이다.” 에머슨의 개인주의는 슈티르너(Stirner)의 무권위주의(l'anrchisme)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각각의 개인주의는 동시에 우주이기 때문이다. 위인들(참조: 대표 인간들(Representative Men 1850)(Représentants de l'humanité), 1845년 강연들), 즉 플라톤, 몽떼뉴, 스웨덴보르, 괴테, 나폴레옹 등은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한 자들이다. 에머슨은 미국에서 천재의 이론을 대표한다. 그 이론은 그에게서는 독일 낭만주의로부터 온 것인데 때로는 칼라일에 의해서 때로는 직접적으로 셸링의 독서에 의해서 온 것이다.
선험주의(le transcendantalisme, 초절주의)이란 단어는 이런 것을 함께 묶어서 그의 사유 흐름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모든 경험들은, 이것들이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우주가 우리에게 계시하는 저너머로우리를 데려가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여기서부터 숙명론(le fatalime)이 나온다. 이러한 강조는 가끔 스토아주의를 상기하게 한다. 왜냐하면, 전체는 전체 속에 있으며, 우리들의 숙명(notre déstinee)은 매 순간에 와 닿으며, 사건들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다. 그 선험주의는 신앙의 대상이며, 증명의 대상이 아니다. 에머슨은 자기의 동시대인들인 신앙절대주의자들(les fidéistes), 즉 키에르케골, 뉴먼(Newman, 1801-1890)에 훨씬 더 가깝다. 이 신앙의 철학 운동은 우리들 시대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리고 그는 신학자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11–1882)의 아들인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에게 자신의 이념들(ses idees 사상들)에 의해서보다 더 많이 자신의 기질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헨리 제임스는 에머슨의 친구였다. (727) (47QME) (57SKC)
제5절 신앙절대주의와 프랑스에서 크리스트교 합리주의 Fidéisme et rationalisme chrétien en France 727
7월 왕정(Monarchie de Juillet, 1830-1848)에서 그리고 제2제정(le Second Empire, 1851-1871)의 초기에서 교회 성직 속에서, 사람들은 보날(Bonald, 1754-1840)과 라메네(Lamennais, 1782-1854)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이성의 권력들에 관한 낡은 토론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크리스트교의 한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크리스트교의 합리주의(성 안셀무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당국에서 초감각적 인식의 유일한 근원을 본다는 주제에 대립되는 것으로, 여전히 보았다. 우리들이 현재하는 이 순간에도 로마는 교회 권위가 신앙절대주의라 불렀던 것을 여러 번 단죄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신앙절대주의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이 확실성의 기준이라고, 이성은 신의 현존을 확립할 수 없다고, 성서 문자의 권위는 추론적으로 증명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728)
사람들은 이 정신을 필립뷔셰(Philippe Buchez, 1796-1865)에게서 분명하게 본다. 뷔셰는 카톨릭으로 학력 형성을 한 후에, 우선 상시몽주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1831년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1832년과 1835에서 1838년까지는 카톨릭 신문 유럽(L'Européen)을 편집하는데 참여한다. 그의 사상은 상시몽주의, 보날, 라메네의 [카톨릭]전통주의를 아주 기묘하게 뒤섞기에 이른다. 그의 저술 역사과학 입문: 인류발전의 역사(Introduction à la science de l'histoire ou Science du développement de l'humanité, 1833)는 일종의 크리스트교 역사철학이다. 이것은 두 가지 중요 개념을 토대로 한다. 그 중 한 개념은 크리스트교의 기원을, 즉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신국(Cité de Dieu, 410-426 씀)에서 표현했던 인류의 통일성의 기원을, 토대로 하고 있다. 다른 한 개념은 진보의 개념인데, 교부 철학자 방상 드 레랑(Vincent de Lérins, ?-448년경)에서 발견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뷔셰에게 있어서 진보는 일종의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능동자는 수동자를 변형하면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 변형들은 축적되기 때문이다. 유기체, 사회적 세상, 자연 등은 수동자들이며, 이것들은 또한 인간적 활동에 의해 변형된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진보는 권위 있고 중앙 집중화하는 크리스트교에 이른다. 그 종교에서 영적 권력은 성직자의 지위에 속한다. 그의 저술 철학 총론 시론: 카톨릭 관점과 진보 관점(Essai d'un traité complet de philosophie, du point de vue du catholicisme et du progrès, 1840)에서, 그는 사회적 요구에 응답으로 그리고 절충적 철학에 반대하여 학설적인 교리 문답서를 작성하고자 특히 애썼다. 뷔셰에 따르면 크리스트교 철학은 오류가 있으나, 그렇기 때문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크리스트교 철학이 변증법과 논리학을 크리스트교리 교육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경전(l'Ecriture)을 설명하는 데 만족하는 성서주의자들(les biblici)은 신학박사 학위자들과 신학 대전(Sommes)의 저자들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정신에서, 뷔셰는 사변적 문제에서 조차 확실성의 다른 기준으로 도덕만을 인정했고, 또한 다른 도덕적 권위의 기준으로는 그것의 안녕이 최고법인 사회만을 인정했다. (728)
그러나 신앙절대주의(Le fidéisme)는 종종 루이 보땅(Louis Bautain, 1796-1867)에서 나타난다. 그는 우선 꾸장의 제자였고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였다. 그는 요란하게 개종하면서 1828년에 신부로 서품 받았다. 그는 세미나 교육에서 조금 뒤에 르낭(1823–1892)이 보게 될 결함들과 동일한 결함들을 발견했다. 스콜라철학의 합리주의, 데카르트주의 합리주의, 상식철학의 합리주의의 혼합은 교회의 권위를 일반 이법[이성]에 종속시키면서 정신을 의심에다가 가져갈 수 있다. 그는 그의 저술 19세기 프랑스에서 철학교육에 대하여(De l'enseignement de la philosophie en France au dix-neuvième siècle, 1833를 개혁의 의도로 썼다. 그의 학설 일체는 크리스트교의 철학(Philosophie du christianisme, 1833)에 제시되었는데, 칸트의 비판주의의 성찰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보기에 칸트의 분석론은 주관적 특성을 증명하면서 불확실하게 제일 원리들로부터 출발하여, 스코틀랜드학파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이고, 반면에 변증론은 모든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은 추론, 즉 연역하는 인식 역량일 뿐이다. 이성은 어떤 원리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이 이성보다 “순수 지성”을 그 위에 놓는다. 이 순수지성은 계시된 말ᄊᆞᆷ(la parole, 말투)의 영향 아래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고스(le Logos, 말씀)의 옛 학설이며 보날(Bonald)의 편에 선 한 사람에 의해 다시 사유되었다. 보땅은 로마로부터 단죄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종교에 봉사하는 철학에 참여자로서, 그리고 국가종교로서 가톨릭주의에 봉사하는 참여자로 남았다. (729)
동일한 신앙절대주의(Le fidéisme)가 보네띠(Augustin Bonnetty, 1798-1879)의 학설의 토대였다. 그의 크리스트교 철학 연보(Annales de philosophie chrétienne)는 1830년에 창간되었다. 페라즈(M. Ferraz, 1820–1898)가 말했듯이, “17세기와 18세기의 스콜라의 철학자들이 많이 조롱받았는데, 그 만큼이나 이 스콜라 철학자들에게서, 사람들은 요지부동의 인습적인 정신이 매우 오랫동안 인격화되었다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이 철학자들을 자유로운 사상가들과 혁명가들처럼 싫어하기에 이르렀다.” 보네띠의 학설은 마찬가지로 1853년에 로마로부터 단죄 받았다. 1866년에는 한 번 더, 루방 대학의 교수인 카시미르 우바그(Casimir Ubaghs 1800–1875)로부터 단죄를 받았다. 그래도 그는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이성의 자발성을 부정했다. 그 이성은 외부 교육과 어떤 권위(une autorité)[정부]에 의해서만 활동으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라 한다. (729)
신앙절대주의(Le fidéisme)의 문제는 조금씩 교회 내적인 훈육의 문제로 귀착했다. 그러나 신앙절대주의는 1840년경부터 전통주의의 경향을 포기하고 또한 대학에서 가르치는 공식적인 합리주의와 전적으로 대립되었던 크리스트교의 합리주의와 화해했다. 이 운동에는 특히 수도원장 마레(Henry Maret, 1805-1884)와 가톨릭 신부 그라트리(Joseph Gratry, le Père Gratry », 1805-1872)가 참여했다. 마레의 근대 사회들에서 범신론에 관한 시론(Essai sur la panthéisme dans les sociétés modernes, 1840)는 보땅에 의해 발설된 주제이며, 야코비(Jacobi 1743–1819)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 주제를 발전시켰다. 그 범신론은 오늘날에는 중요한 이교도이며, 크리스트교의 교육을 무시하는 합리주의의 필연적 결실이다. 상시몽(1760-1825)처럼 셸링과 헤겔도, 그리고 비인격적 이성의 이론과 창조의 필연성의 이론을 가진 꾸장도 범신론자들이다. 마레의 크리스트교의 변신론: 신에 대해 크리스트교도의 개념과 합리주의자의 개념(Théodicée chrétienne, ou Comparaison de la notion chrétienne avec la notion rationaliste de Dieu, 1844)은 이성이 무한하고 창조적인 신의 현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크리스트교의 환경에서 발전되는 조건에서만 인정한다. 만일 이성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에 도달한다면, 완전한 존재의 자연적 생산이 범신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게다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학설은 신을 세계에 동일시하면서, 신의 완전함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마레의 마지막 작품인 철학과 종교(Philosophie et religion, 1856)는 무한과 완전함의 관념들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 신의 어떤 것을 만드는 “존재론주의”(un “ontologisme”)로 향한다. (730)
신부 그라트리(Joseph Auguste Gratry, dit « le père Gratry », 1805-1872)는 고등기술학교(Ecole polytechnique)를 나온 오라트와르 수사출신이다. 그는 1882년경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땅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는 1840년에 고등사법학교 부속 사제가 되었으며, 수도원장 마레의 책략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전략을 가졌다. 그는 범신론이 이성에 반대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카톨릭 개혁주의(la Reforme)와 이성을 위험에 빠뜨린 라메네의 전통주의가 이성이 [종교, 신앙에] 봉사한다고 믿으면서, 신앙에 가장 큰 잘못을 범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상위의 지적 관심사들에게 무관심을 증폭시켰다고 믿었다. 그는 모순적인 것들에 대한 헤겔주의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헤겔주의 속에서, 합리적 학설이 아니라, 이성의 진정한 질병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 질병은 모순의 원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730)
그라트리는 합리주의의 전통과, 그리고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질서에 맞는 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 전통을 재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정신에 두 가지 본질적 절차가 있다. 하나는 연역법인데 동일자에서 동일자로 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변증법인데 타자에서 타자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것인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변증법이 그 방향으로 스스로 인도하는 일종의 초월적 존재의 부름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는 매우 다르다. 그런데 진실한 변증법은, 그 제한된 완전함들을 그것들의 제한들이 없는 신에게 부여하기 위해서, 인간의 그 제한된 완전함들로부터 출발한다. 헤겔의 원리는 결국 스피노자주의 유명한 공리이다. 즉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이와 동시에 헤겔은 제한들을 제거하고, 성질들 자체를 제거하고, 그리고 비존재에 동일한, 비규정적인 존재에 이른다. 이에 비해 진실한 변증법을 통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토마스, 데카르트처럼 그리고 심지어는 파스칼도 신의 현존을 증명했다. 그라트리는 이 절차의 탁월성과 보편성을 제시하면서, 기묘하게도 이 절차를 향연에서처럼 시와 기도에 동화시킬 뿐만 아니라, 귀납법의 과학적 철차에도 그리고 적분계산의 적분량에도 동화시킨다. 게다가 이성의 크리스트교적인 성격을 제시하기 위하여 말브랑쉬의 의미와 유사한 의미의 노력을 한다. (731)
수도원장 그라트리는 헤겔의 제자들로서 간주했던 자들, 바쉬로(Étienne Vacherot, 1809-1897), 르낭(Ernest Renan, 1823–1892), 셰러(Edmond Schérer, 1815-1889) 등을 맹렬히 비판했다. 즉 동시대 논증술에 관한 연구(Une étude sur la sophistique contemporaine, 1851)(원제; Une étude sur la sophistique contemporaine, ou Lettre à M. Vacherot avec la réponse de M. Vacherot et la réplique de l'abbé Gratry, 1851)와 소피스트들과 비판(Les sophistes et la critique, 1864)에서 이다. 사람들은 바쉬로 씨에게 편지(Lettre à M. Vacherot, 1851)에서 그의 정열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게 된다. 이 책은 바쉬로가 쓴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대한 비판 역사(Histoire critique de l’école d’Alexandrie, 1846-1854)의 첫 출판에 이후에 쓴 것이다. 편지는 그 당시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인 바쉬로에게 휴직발령을 내리게 했던 원인이 되었다. 이 글은 범신론[플로티누스]과 숙명론[스토아주의]를 암묵적 침투를 고발하는 것으로, 그리고 또한 자연과 기술[예술]들에서 괴물스럽고, 거짓이며, 비지성적인 취향을 고발하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그라트리는 19세기의 소피스트들[낭만주의들]보다 18세기의 소피스트들[백과전서파들]을 더 좋아했다. 왜냐하면 후자는 이법[이성]의 이름으로 신앙을 공격했기 때문이다.이에 비해 전자는 이성[이법] 자체를 공격했다.그런데 그는 이들과 반대로 아직도 신을 믿고 있었던 볼테르 후예들에게 호소했다. (731)
7월 정부(Gouvernement de Juillet, 1830-1848)의 초기에서부터, 보르다-드물랑(Jean Baptiste Bordas, dit Bordas-Demoulin, 1798-1859)은 크리스트교 사상을 보날과 라메네의 전통주의와 비합리주의로부터 구별하고자 애썼다. 그의 작품들 종교와 철학적 잡문집(Mélanges philosophiques et religieux, 1846), 교회의 구성권력(Pouvoirs constitutifs de l'Eglise, 1853), 카톨릭 개혁 시론(Essais sur la réforme catholique, 1856) 등은 프루동(Proudhon, 1809-1865)의 책 혁명과 교회에서 정의에 대하여(De la justice dans la Révolution et dans l’Église, 1858)에 대한 반명제이다. 그는 혁명에 의해 세워진 정치적 자유의 시기는 크리스트교의 역사의 한 국면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모든 실천적 노력은 카톨릭주의를 반동적인 당파들로부터 분리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중세의 스콜라 전통, 교황의 무오류성, 교회의 교육에 한정되어야 했을 성직자 권력들의 너무 과도한 확장, 보르다는 이런 것들에 대해 반대하여 저항하면서, “교회 교직자들의 회심”을 설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대에 전혀 이해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에 친구들 또는 적들이 교회에서 혁명의 적대적 원리를 보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31)
보르다에게서 개혁주의자적 관념들은 공식적인 절충주의에 대립되는 철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의 학설은 데카르트 철학의 성찰과 특히 데카르트 관념들의 이론에 편을 들고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적인 그의] 관념은 그것의 고정성과 필연성에 의해서 이미지들과는 완전히 구별된다[판명하다]. 그리고 인간이 사유의 주인이게 만들어 주는 것과 같은 사유의 양식인 한에서 라고할지라도, [그의] 관념은 마치 신적인 관념들과 꼭 마찬가지로, 동시에 고정된 본질의 표상이다. 따라서 반성에 의하여, 인간은 신적 사유에 다시 연결된다. 이 주제는 또한 플라톤, 플로티누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 주제는 보르다가 위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기원으로부터 거짓이라고 지칭하는 다른 세 가지 주제와 대립된다. 하나는 에피쿠로스의 주제이며 이것은 관념을 감각에 동일시하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으로, 관념들 속에서 정신의 정교한 노력으로 단순한 생산물들을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키티움의 제논[스토아의 제논]의 것으로 행동과 인식에서 인간과 신의 섞으면서 인격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구별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본다. 개인적 활동성에 자기의 위치와 독립성을 남겨두면서 상대적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이다. “개별성이란 근대사회의 토대이며, 모든 진실한 진보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개별성은 우리의 모든 잠재력(권능)을 작동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 그것은 크리스트교보다 앞선 사회로 우리를 후퇴시키는 것일 것이다.” 동일한 정신에서[정신적 사유에서], 그의 학설은 데카르트주의, 실체의 이론과 무한의 이론의 첨부(Le Cartésianisme suivi de Théorie de la Substance et de celle de l'infini, 1843)의 마지막에 진술되어 있는데, 그 학설의 목표는 실재성 속에서 무한한 것들을 다른 질서들로 구별하면서, 창조된 정신[인간]에게 일종의 자치를 피조물[사물들]과 더불어 보장하려는 것이다. 이 창조된 정신도 자기 방식으로 무한하여, 신속에서 발견되는 관념들 중에 어떠한 것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732) (10:11, 47PMI) (11:15, 57SKD)
*
# 참고문헌 Bibliographie 732
III.
J. Himmelstrup(1890–1967) et K. Birket-Smith( ?-?), Søren Kierkegaard, International Bibliography, Cophenhgue, 1962. Trad. fr. indiquées dans G Gusdorf, Kierkegaard, 1963, 209-211.
J. Wahl(1888–1974), Etudes kierkegaardiennes, 1938, 2éd., 1949.
Kierkegaard vivant, Collique international, UNESCO, 1966.
IV.
Emerson(1803–1882), Th Complete Works, 14 vol. Boston, 1903.
M. Gonnaud, (1925-2017), Individu et société dans l'oeuvre de R.W. Emerson, 1964.
V.
M. Ferraz(1820–1898), (Histoire de la philosophie en France au XIXe siècle; traditionalisme et ultramontanisme, 1880.
M. Nédoncelle(1905-1976), Les leçons spirituelles du XIXe siècle, 1937.
*
1803 랄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선험주의(Transcendentalist, 초절주의) 작가. 유럽 여행에서 로마에서 밀(John Stuart Mill)을 만났고, 밀은 칼라일을 만나기를 권했다. 그리고 스위스에서 페르네-볼테르 집(제네바 부근에 있는 프랑스 땅이다)을 방문하고, 영국으로 가서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칼라일(Thomas Carlyle)을 만난다. 1934년 미국으로 돌아오다. [그후 평생을 콩코드에서 지내다] 1835년에 둘째 부인 잭슨(Lydia Jackson)과 결혼한다. 그는 첫 부인으로부터 1834년과 1837년에 많은 상속을 받는다. – 수필들: 첫 계열(Essays: First Series, 1841), 수필들: 둘째 계열들 (Essays: Second Series, 1844, 대표 인간들(Representative Men 1850) / -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멘토이자 친구.
1820 페라즈(Marin Ferraz, 1820–1898) 철학사 전문, 리용 대 교수. 19세기 프랑스 철학사: 전통주의와 교권지상주의(Histoire de la philosophie en France au XIXe siècle; traditionalisme et ultramontanisme, 1880(J. de Maistre, de Bonald, Lamennais, Ballanche, Buchez, Bautain, Gratry, Bordas-Demoulin, etc. 집필)
1888 발(Jean André Wahl, 1888–1974), 프랑스 철학자. Etudes kierkegaardiennes, 1938.
1890 젠스 힘멜스트루프(Jens Himmelstrup, 1890–1967), 덴마크 법률가 철학자. 바케트-스미드(Kjeld Birket-Smith, ?-?) / 동명이인? (Kaj Birket-Smith, 1893–1977) 덴마크 문헌학자, 인류학자. 많은 저서 목록에 키에르케골에 관한 것이 없다.
1905 네동셀(Maurice Nédoncelle 1905-1976) 프랑스 철학자. 신부, 신학으로 박사학위. 20세기 유심론 강의록들(Les leçons spirituelles du XIXe siècle, 1937.
1912 귀스도르프(Georges Gusdorf, 1912-2000) 독일 유태가계 출신 프랑스 인식론자 철학자. ENS 출신.
1925 고노(Maurice Gonnaud, 1925-2017), 1945년 ENS, 1949년 영어로 교수자격. 미국에서 불어 교수이후, 프랑스에서 리용대학에서 영어 교수. 에머슨과 소로(Thoreau, 1817-1862)에 대한 글을 썼다. 고노는 에머슨과 소로를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로 보았다. 에머슨의 작품에서 개인과 사회(Individu et société dans l'oeuvre de R.W. Emerson, 1964)(박사학위논문) « Le transcendantalisme contre les pouvoirs : du libertaire à l'insurgé », p. 199., « Emerson et Thoreau : où est le maître ? Où est le disciple ? », 1994.
(10:32, 47QMI) (12:21, 57SK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