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즐거운 나의 집 / 오정순
모니터엔 K가 보낸 메일이 떠 있다. 진작 스팸메일로 차단했어야 했다. 휴대폰까지 꺼둔 채 사라졌다가 삼일 후에 메일을 보내는 그의 버릇은 여전하다. 월례행사가 되버린 가출에 덤덤할 때도 됐는데 나는 번번이 화가 난다. 그런데 이번 메일은 다르다. 군데군데 흘려놓던 협상의 여지가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다. K는 결별을 원하고 있다. 한 번 더 메일을 읽어보려는데 수화기에서 격앙된 엄마의 음성이 튀어나온다.
“내가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방을 빼? 그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거니?”
그제야 엄마와 통화중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시간 넘게 붙들려 있어야 할 게 뻔해 컴퓨터를 켰었다. K가 보낸 메일이 와 있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듣고 있냐고 묻는 엄마의 음성은 잔뜩 독이 올라있다. 나는 K의 메일을 삭제하며 동시에 엄마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몇 번째야, 지겹지도 않아?"
엄마는 인정머리라고는 눈곱 마치도 없는 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평소대로라면 하숙생이 그렇지 뭐, 한두 번 당했어? 하고 엄마를 달랬을 것이다. 엄마가 말하는 그 인간이란 한준식씨를 말한다. 하지만 그는 함부로 도맷값으로 넘어갈 하숙생이 아니다. 엄마에게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은 엄마를 위로할 기분도 아니다.
메일을 다시 읽는다. K는 나와 취향이 달라 힘들었다고 했다. 내가 골라주는 넥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매야 하는 것, 감기기운이 있는데 점심으로 콩나물 국밥을 먹지 않은 것을 변명하는 일, 큰누나가 막내 동생을 다루는 듯한 내 말투, 잠자리를 할 때마다 배란일을 물어보는 내가 싫었다고 했다. 나를 떠나는 이유가 열 가지나 된다. 취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열 개 정도는 많은 게 아니었다. 사상이나 종교에서 오는 견해의 차이가 그 정도였다면 K와 나는, 둘 중 하나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헤어지는 이유가 개인적인 기호나 습성 때문이라면 좀 유치하다. 나는 아직도 흑백영화 ‘애수’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감성이 살아있는 서른다섯 살이다. 때로 그런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행복도 포기할 수 있다고 믿는 내게 취향을 바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K는 내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건 문제가 달라진다.
메일 말미에 K는 서로 부담을 주지 말자고 했다. 부담이라는 낱말을 보는 순간 K와 나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K도 그걸 노린 것이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적다는 것과 내가 직장 상사라는 것, 내게 얹혀있다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내게 밀리고 있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K가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했을 때 나는 부담 갖지 말라 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K를 보고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나는 K가 그깟 말에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그게 싫지는 않았다. 내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남자의 자존심이나 책임감, 이런 걸로 연결하자 그가 꽤 괜찮아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벌을 서는 아이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라고 했다.
나는 K 메일에 들어가 본다. 그의 비밀번호는 아직도 예전 그대로이다. 그에 비해 나는 비밀번호를 수시로 바꿨다. 메일을 잘 첵크하지 않는 K의 습관을 알면서도 내 비밀번호를 알아낼까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주 바꾸다보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그의 비밀번호를 알아낸 것도 잃어버린 내 것을 찾다가 전리품처럼 챙긴 것이었다. 기억에 남는 영화, 탄생석, 별명, 이런 힌트들로 비밀번호를 풀다가 문득 K의 메일이 궁금했다. 생년월일이나 전화번호로 비밀번호를 만들지 말라는 경고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가장 먼저 그의 생년월일로 비밀번호를 넣었다. 빙고! 그의 메일이 스르르 열렸다. 그의 메일은 대출업체 아니면 음란사이트에서 보낸 것들로 꽉 차 있었다. 친구도 없나, 하며 로그아웃하려다 문득 네이버나 야후도 알고 싶은 호기심이 들었다. 같은 비밀번호를 쓰는 그곳도 스팸메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 무미건조한 메일이 단 한 번 빛을 발할 때가 있다. 내게 이별통고를 보낼 때다. 그것 때문에 메일 주소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비밀번호를 알아맞혔다고 해서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내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K가 내게 보낸 메일은 이미 삭제되고 남아있지 않다. 혹시나 휴지통을 열어본다. 내 짐작대로다. 스팸 메일과 섞여 휴지취급을 받고 있다. K에게 확인사살을 당한 기분이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벌렸던 가출은 실전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 그런데 횟수가 거듭될수록 세련되어가는 것은 K뿐만이 아니었다. 반복에서 오는 면역력이 생기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시 내 메일함으로 돌아온다. 휴지통에서 K의 메일을 복원한다. 보관함으로 옮긴다. 머지않아 K는 내게 보낸 메일이 부담스러운 날이 올 것이다.
말수가 적은 K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게다가 개념이나 원칙이 없는 옷차림은 사무실 분위기를 썰렁하게 급변시켜버리는 그의 말주변과 맥이 통했다. K가 남성 속옷 회사의 광고부서 직원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K가 낙하산이라는 말이 돌았던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K가 읍소재지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깡촌 출신인데다 윗사람 누구와도 인맥이 없다는 게 밝혀지자 소문은 꼬리를 감췄다. 나는 업무에 서툰 K가 사사건건 거슬렸다. 부장에게 K를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건의했다. 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마침내 참았던 화가 폭발한 날이 오고 말았다. 나는 K가 제출한 보고서를 내동댕이쳤다. 내겐 사람을 키워서 부려먹을 만큼 인내심이 없다, 너하고는 못해먹겠다! 했다. 그 날 K 혼자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는 것을 미스 서가 봤다고 했다.
나는 K가 제출한‘내 남자를 벗겨라' 라는 기획안을 부장에게 올렸다. K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고 경영진은 올 겨울 TV방송 광고로 K의 기획안을 채택했다. 빨간 고추잠자리 회사 로고를 도안한 CEO는 K처럼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사원은 회사의 밝은 미래라며 침이 마르게 격찬했다는 후문이었다. K는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광고 프로그램을 연수하는 특전까지 거머쥐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마시던 커피 잔을 놓치고 말았다.
그날 부서 회식이 있었다. 회식 장소에서 나는 K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K를 축하해주기 위한 모임이었지만 K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상사로 낙인찍힌 나는 불편했다. 하지만 직속 상사인 내가 빠질 수 없었다. 부장이 일어나기 전까지 꼼짝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도 물론이었다. 부장과 K는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마주 앉은 부장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활처럼 몸을 구부린 K의 와이셔츠 위로 빗살무늬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났다.
나는 많이 취했다. 그래도 K가 나를 택시에 밀어 넣고 뒤따라 타는 것을 모를 만큼은 아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내리자 K는 나를 업었다. 남자의 등에 가슴을 밀착하고 있다는 느낌은 야릇했다. 나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생기지 않도록 가슴으로 K의 등을 힘주어 눌렀다. 업혀있는 동안 나는 서너 차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K가 나를 소파에 내려놓았을 때 K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K가 옆자리에 없었다. 나는 그가 간 줄 알았다. 그때 욕실에서 소리가 났다. 발자국을 죽여 가며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K가 수납장 문고리를 고치고 있었다. 팬티만 걸친 채 드라이버를 들고 있는 K의 뒷모습을 보니 그가 오래전부터 같이 살았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몇 번이나 되뇌었던 필름이 끊겼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대신 사람을 부르려했는데,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K가 입은 팬티 때문이었다. 그는 반세기 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하얀 면으로 만든 삼각팬티를 입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직원 설문 조사지를 분석하면서 개념 없는 답안지의 작성자가 K라는 생각을 했었다. 빨간 고추잠자리 속옷을 입지 않은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나는 홍대리에게 사우나를 가던지 어떻게 해서라도 K가 입은 팬티 브랜드를 알아보라고 시켰었다. 남자 속옷 회사 직원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애사심 운운하면서 한 말이었다. 만약 빨간 고추잠자리 회사 로고가 없다면? 나는 목에 손을 들이대며 잘라버리는 시늉을 했었다.
그날 퇴근 무렵 나는 K에게 내 아파트의 가구 위치를 바꾸고 싶다는 문자를 날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한 쪽 눈을 질끈 감으며 윙크를 보냈다. K를 위해 빨간 고추잠자리 팬티와 러닝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솟았다. 아파트로 온 그에게 나는‘자유를 입는다’라는 내가 만든 카피가 버스 한 면을 차지한 채 도심을 달렸던 팬티를 입으라고 했다. 그러나 카피가 추구하는 자유와는 정반대인 자물쇠가 채워진 그림이 들어 간 팬티였다. 젊은 연인과 신혼부부에게 꽤나 잘 팔리는 제품이었다. 자유와 속박의 역발상이라는 평을 한 것을 보고 웃었던 게 생각났다. 다음 날은 몇 달 전 김인경 개인전에서 샀던 15호짜리 유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K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자신을 머슴 부리듯 부려먹었다고 했다. 나는 K가 못을 박거나 여섯 개 묶음들이 생수병을 드느라 팔뚝에 힘줄이 도드라질 때마다 온몸이 짜릿했다. 문득 내 몸 안에 한 마리 빨간 잠자리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다음 광고 콘셉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이쯤해서 영미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세 번째가 뭘 시키는 거였지? 하고 문자를 보냈다. 대답대신 앙큼한 년이라는 문자가 긴급편지로 왔다.
직장인 몸치 탈출 댄스 동호회에서 영미를 만난 것은 서른 살 때였다. 영미와 내가 몇 번 커피를 같이 마셨던 것이 골드미스 클럽의 시초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영미가 그녀의 동창 셋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서른 셋 살 되던 해 영미의 동창 세 명이 앞 다투어 결혼을 해버리는 바람에 영미와 나만의 클럽이 되고 말았다.
영미와 장난삼아 남자가 생긴다면 뭘 시킬래? 하고 키득거렸던 적이 있었다. 하루에 한가지씩 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영미는 죽어도 삼일은 못 넘기겠다고 했다. 그것 밖에 안 돼? 라는 내게 영미는 한꺼번에 먹으면 체한다. 천천히, 맛있는 부위부터 라며 이죽거렸다. 섹스 파트너를 원하는 영미와는 달리 나는 영구적이면서 튼튼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다. 그녀는 최근 다이캐스팅이 취미인 남자와 헤어졌다며 아이를 낳은 것처럼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났다. 적금까지 깨서 구입한 미니어처 자동차 열 개로 남은 사랑은 그녀답지 않게 꽤나 진지했던 것 같았다. 사랑은 이따금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할 때가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나는 영미에게 말했던 일들을 K에게 해달라고 했다.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는 조건도 지켰다. 벽에 그림을 건다거나 고장 난 수납장 문을 고치는 것은 영미의 표현대로 삼일을 못 넘기는 일시적이었다. 하지만 매주 토요일 마트에 간다거나 화, 목, 토 정해놓고 산책을 하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지만 나는 K에게 결혼을 서두르는 압박을 준적은 없었다. K가 프러포즈할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와 K의 관계를 가장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방법이 결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K가 연락도 없이 사라질 때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불안은 조바심으로 나타났고 K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K는 함께 마트에 다녀오는 토요일 오후마다 내가 화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K는 나와의 관계를 줄행랑을 놓는 것으로 정리했다. 비겁하지만 그것도 헤어지는 방법 중의 하나인 것만은 확실했다.
K와 나의 관계를 냉정하게 판단할 시간은 충분했다. 앙상한 등 때문이라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감정은 남녀관계를 막연하고 식상하게 만들어버린다. K를 향한 나의 감정은 정리가 돼있는 편이었다. K가 만취한 나를 아파트까지 데려다 준 것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전부터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K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K의 기획안에 필이 꽂힌 부장과 CEO 때문이었다. K와 부장과 CEO, 세 사람의 삼각구도를 감지하는 순간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었다. 그것은 빨간 고추잠자리 로고를 도안한 CEO의 의식세계를 엿보는 것과 같았다. 그동안 나는 CEO와 부장의 유치한 상상력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들을 속물로 취급해버렸다. 그제야 내가 무시하면서 간과한 부분, 기업주의 사업관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한 나의 불확실한 미래가 피부에 와 닿았다. 나는 부장과 CEO가 남자라는 공통분모를 가볍게 봤다. 살아남으려면 그들의 끈적거리고 던적스러운 관계를 파악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만만한 상대가 K였다. 상사의 지위를 이용하여 K가 어떤 인생관과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지 샅샅이 파헤쳐 볼 참이었다. K만 정복하면 그들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는 일은 시간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K와 월드컵 응원을 하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하룻밤을 보내는 것 같은 관계는 맺고 싶지 않았었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 심심찮게 나오는 그런 종류의 에피소드를 증오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변명해도 K와 나의 동거는 그 아류작이란 오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임신을 했다.
지난 토요일, 양주 반병을 마신 영미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나는 방이 너무 많아, 침실, 손님 방, 드레스 룸, 아기집, 하고 말했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인생은 생각지도 않느냐며 차라리 결혼을 하라고 쏘아붙였다. 영미는 싱글 맘, 멋있지? 하며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엄마는 싱글 맘이었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당시에는 싱글 맘이라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키워야하는 상황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머리채를 휘어 잡히면서도 끝내 아버지를 밝히지 않았다. 여관을 했던 할머니는 장기 투숙객 중에 한 명이라고 짐작했다. 짚이는 데가 있었던 할머니는 회사원과 고시생을 지켜봤다. 할머니의 짐작이 맞았다. 엄마를 임신시킨 사람은 오년 째 사법시험을 보던 고시생, 나의 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왜 하필 그놈이냐며 엄마에게 잊어버리라 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산전수전 겪으면서 몸에 밴 사람 보는 눈을 믿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임신시킨 사람이 회사원이었더라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식을 올려줬을 거라 했다. 할머니 눈에 비친 나의 아버지는 싹수가 노란 인간이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금고에 손을 대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엄마의 눈두덩에 시퍼런 멍이 든 것을 보며 할머니는 아버지를 하루라도 빨리 빼어버려야 할 충치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눈이 정확했다. 쫓겨난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비겁한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라고 했다. 비겁한 남자의 기준이 누구인지 뻔했다. 할머니 말대로 비겁하지 않는 남자를 찾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남자라는 존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와 첫사랑인 영식뿐이었다. 모두 비겁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에 따라서 낱말의 개념까지 변화시키는 힘을 가졌다. 아버지가 할머니 눈에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그의 아이도 갖고 싶고 돈도 훔쳐다 주고 싶은 사랑이었다.
K와 살면서 최소한 일주일은 행복했다. K가 처음으로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았던 날, 나는 밤을 꼬박 새워 K의 휴대폰으로 사랑한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는 문자를 오십 통이나 보냈다. 일주일 동안 내가 누렸던 달콤함의 대가치고는 잔인하다 싶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당한 것이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아버지나 영식처럼 K도 비겁한 남자였다. 그러나 나는 울고불고 해서라도 K를 잡으라고 스스로를 부추겼다.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말을 거역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잡지 못했던 것도 내가 영식을 놔준 것도 할머니 때문이라는 원망까지 들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기준에 맞추면 사랑은 신기루 같았다. 꿈을 좇는 사랑은 싫었다. 자로 잰 듯한 도덕과 윤리로 채워진 사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서로 치고받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 36.5도의 체온을 가진 남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를 합리화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K와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나는 엄마만큼 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이는지 엄마처럼 한 순간 사랑에 빠져 접싯물에 코를 박는 바보가 나였다.
나는 서른다섯이 될 동안 남자에게 당당했다고 자부했다. 더구나 남자 속옷 회사 입사 십 년차, 광고부 팀장 오 년 차인 나는 남자의 심리나 몸을 누구보다 잘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회사 제품 구매자의 70퍼센트가 미혼 여자라는 조사결과 덕분에 나는 빨간 고추잠자리 패밀리에서 밀려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회사는 남자보다 남자를 더 잘 아는 여자를 필요로 했다. 여성의 소비 심리를 자극해서 빨간 고추잠자리 제품을 구매하게 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다. 운 좋게도 내가 만든 카피가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에서 좋은 광고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바닥에서 업적이란 끝없이 리필을 해야 하는 음료수와 흡사했다. 다시 채우는 음료는 매번 새로워야 하고 사람의 입맛까지 사로잡아야했다. 반복이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거는 현재로 가는 흘러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고 현재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기준일 뿐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남자의 속옷이란 가려야 할 곳을 위해 존재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빨랫줄에 남자 손님들의 속옷이 걸려있어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속옷을 내다 걸은 투숙객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엄마가 여관을 접고 하숙으로 업종을 바꾼 후 좀 더 고급스럽고 야한 속옷을 봤을 때도 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빨간 고추잠자리 회사가 주최한 광고 공모전 카피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했다. 지방대학 심리학과 4학년이었던 내겐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나는 남자 팬티의 오줌구멍을‘발산’이라 표현했다. 자유를 상징하는 고추잠자리의 이미지를 살렸다는 심사평이었다.
팀장 자리를 두고 나는 입사 선배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기혼녀였던 그녀보다 미혼인데다 경력도 부족한 내가 불리할 거라고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나를 택했다. 예상 밖의 결과에 모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름대로 분석이 돌았지만 수긍이 가는 견해는 없었다. 발표가 있기 전 막연하게 품었던 나 혼자만의 생각이 있었다. 승진 시기가 신제품으로 고가의 자극적인 헴라인 팬티를 내놓으려는 시점과 맞물렸다. 주 구매자인 미혼 여성을 겨냥한 매출 전략이 필요할 것이고 그렇다면 기혼인 선배보다 내가 유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했었다. 만약 선배가 미혼이었다면 어땠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었다. 선배는 술은커녕 커피 한 잔 사는 법이 없는 자린고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추측이 맞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팀장이 된 후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경험의 부재는 감각의 부재였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의 팬티를 개면서 식구들의 눈을 피해 한번쯤은 오줌구멍을 만졌을 동료들의 사소한 경험조차 없었던 나는 그들을 앞 설 수 없었다. 상상만으로는 그들의 손끝에 저장된 감각을 따라잡기가 역부족이었다. 언제나 나는 바닥을 드러낸 논바닥처럼 아이디어의 빈곤에 시달렸다. 회사는 광고부와 홍보부를 이끌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원했다. 광고나 선전의 규모가 커지면서 디자이너나 카메라 맨 등 스텝을 통솔할 수 있는 디렉터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올라갈 자리는 눈에 보이는데 내 것이 될 수 없는 암담함이 나를 괴롭혔다.
K가 이별을 통고하던 날 한준식씨도 하숙집을 나갔다. 시청 공무원인 그는 꽤 괜찮은 남자였다. 깐깐한 엄마 마음을 차지한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가끔 만나는 내게조차 나와 동갑인 딸이 있다면 서도 말을 놓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의 친구인 순심 아줌마 일이라며 내게 한준식씨 이야기를 꺼냈다. 순심 아줌마가 호적을 합치지 않아도 늘그막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며 엄마는 힐끗 나를 봤다. 나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엄마의 이성 문제는 앞으로도 관여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나 나는 엄마에게 정절과 도리를 요구할 자격은 없었다.
하숙비가 밀리거나 반찬 투정을 하며 유별나게 트집을 잡는 하숙생은 엄마에겐 앓던 이와 같았다. 골칫거리 하숙생이 방을 빼는 날이면 엄마는 콧노래를 부르며 겨울이라도 얼음을 띄운 냉면을 식탁에 올리곤 했다. 하지만 한준식씨가 나간 빈자리는 성난 잇몸처럼 엄마를 괴롭혔다. 나는 엄마와 한준식씨가 조만간 헤어질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부인의 병원비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는 쌈짓돈을 풀지 않았다. 쌈짓돈은 엄마가 남자에게 가지는 애정지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였다. 엄마가 한준식씨에게 돈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시간이 해결 할, 엄마가 지금까지 알았던 여느 남자와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하소연을 들어줘야 했다. 엄마가 후유증을 앓는 기간은 순전히 나 하기에 달렸다. 한준식씨는 엄마의 사랑니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가 물려받은 여관은 여인숙이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여관이라면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는 내 의견은 콧방귀를 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 여관을 여인숙으로 취급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두 개 뿐인 변소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불 보듯 뻔해도 엄마는 모른 척 했다. 아줌씨 그라도 변소는 서너 개는 있어야지라, 하고 변비가 심했던 장기 투숙객 강 씨 아저씨가 투덜거렸을 때 엄마는 발끈했다. 그래서 여관이지만 여인숙 요금을 받는 것 아니냐고 방에 있는 손님들 들으라고 마당에서 소리를 질렀다. 따지고 보면 엄마는 받을 요금 다 받는 것이었다.
방은 모두 이십 개였다. 보통 대 여섯 명의 장기투숙객을 빼면 열다섯 개 남짓한 방에 손님이 들었다가 빠져나갔다. 자전과 공전주기처럼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서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목적으로 돌고 돌았다. 엄마는 주머니를 채우고 어떤 사람들은 배설 욕정을 채우고 또 어떤 이들은 부족한 잠을 채웠다. 열다섯 개의 방이 차야 엄마의 하루가 끝났다. 방이 차지 않으면 엄마의 하루는 자정이 넘어도 계속 되었다. 그래서 역전 주변의 숙박업체중에서 가장 늦게 문을 닫는 집이 우리 '고명딸' 여관이었다.
장기 투숙객은 때로 친척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는 그들을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우리 여관은 엄마 기분만 맞춰주면 끼니때마다 숟가락을 얹을 수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경제적인 사람이었다. 돈이던 감정이던 함부로 쓰지 않았다. 엄마에게 딴 마음을 품고 덤비는 작자들도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엄마 손에 놀아난 것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김달구 아저씨도 엄마의 희생양 중 한명이었다. 엄마는 돼지 불고기 상추 쌈 점심 한 끼로 김달구 아저씨를 여관 지붕 위로 올려 보냈다. 아저씨는 손재주가 좋았다. 몇 시간 만에 깨진 기와를 갈아치웠다. 다음 날 아저씨는 여관 벽을 밝고 환한 노란 색으로 칠을 했다. 그 다음 날은 방마다 도배를 하고 또 수도꼭지를 고치고 목욕탕 타일을 바꾸고 전등을 갈았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김달구 아저씨가 엄마 손을 잡았다. 순간 엄마는 뭐 이런 작자가 있어! 하고 그를 밀어제쳤다. 김달구 아저씨는 어이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웃음을 치며 사람을 홀려놓고 이제 시치미를 떼냐고 대뜸 소리를 높였다. 엄마는 내가 언제 이녁 좋다고 한 적 있소, 이녁 여자가 된다고 한 적 있소? 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김달구 아저씨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없긴 없지만, 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만약 김달구 아저씨가 주먹깨나 쓰는 사람이었다면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더 고칠 게 없는 날 김달구 아저씨의 운명도 끝났다. 엄마는 장마를 앞두고 집안 수리를 마쳤다. 지붕에서 물이 새는 일도 없었고 칙칙했던 벽도 산뜻해졌다. 새로 갈아 낀 전구는 환하게 빛났다. 집수리를 한 덕분인지 몰라도 그해 여름 장사는 꽤 쏠쏠했다고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여관을 정리하고 하숙을 시작한 것은 내가 여고생이 되던 해였다. 힘에 부친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은 나 때문이었다. 만취한 중년 남자가 내가 직업여성인 줄 알고 방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은 여관을 관둬야한다는 엄마의 결심을 앞당기게 했다. 우리 고명딸 여관은 직업여성이 심심찮게 들락거렸다. 엄마는 손님이 아가씨를 찾을 때마다 전화로 불러주는 일로 짭짤한 부수입을 챙기고 있었다. 엄마는 아가씨들이 고맙다고 인사조로 찔러주는 몇 푼만으로도 만족했다. 나중에 그녀들의 밥그릇 싸움이 크게 번지는 바람에 엄마까지 불똥이 튀고 말았다. 엄마가 포주는 아니라고 증인을 서준 아가씨들 덕분에 벌금도 내지 않고 잘 마무리되었다. 그 후로 엄마는 증인을 서주었던 아가씨들만 불렀다. 엄마의 수입은 한 푼도 줄어들지 않았고 더 돈독해진 그녀들과의 관계 때문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었다. 역시 엄마는 경제가 뭔지 알았다.
엄마는 따로 살림집을 얻는 방법도 생각해 본 것 같았다. 그러려면 일하는 아줌마를 두 명은 둬야 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엄마 성격에 어림도 없었다. 엄마는 여기저기 물어보고 고민도 많이 한 듯 했다. 결국 엄마는 여관을 팔았다. 그리고 이미 오를 때로 오른 가격을 주고 시청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이층집을 샀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엄마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멀리 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 장래를 위하여 웃돈을 얹어 집을 샀다. 여관을 팔고 집을 사고 하숙을 시작하는 결단력과 추진력은 미처 몰랐던 엄마의 다른 모습이었다. 한 편, 저토록 강인한 엄마가 왜 아버지를 놓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융자금 이자 때문에 생활은 빠듯했지만 하숙은 그런대로 잘 되었다. 그런데 우리 집 바로 코앞에 전문대학이 들어섰다. 집값이 껑충 뛰었다. 우리 하숙은 미리 선불을 걸고 대기하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엄마와 친한 사람들이 줄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는 이런 새치기 손님에게 신경을 썼다. 모르는 사람보다 낫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방은 모두 일곱 개였다. 엄마와 내가 하나씩 쓰고 나머지는 하숙생을 받았다. 영식은 우리 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이 층 방을 쓰는 하숙생이었다. 그는 새로 생긴 전문대학 강사였다. 그는 끼니를 거르면 안 된다는 그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원룸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는 내 신랑감으로 영식을 점찍었다. 집안이 좋고 교수가 될 거라는 영식의 배경 때문이었다.
엄마는 영식을 향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내게 엄마는 맹한 년이라고 했다. 엄마는 내가 영식을 만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영식의 어머니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녀는 우리 집을 발칵 뒤집어 났다. 말로는 밀리지 않는 엄마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오히려 당신이 뭔데 사람을 무시해요? 하고 대들었던 것은 나였다. 영식의 어머니는 아들의 짐을 마당으로 끌어내며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쭈뼛쭈뼛하는 아들의 손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대문을 나서던 그녀는 서슬이 시퍼런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노려보았다. 며칠 후 영식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로 학교를 옮겼다고 했다. 그렇게 영식과 끝났다.
엄마는 충격이 컸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까지 엄마는 방을 뺄 때나 사람을 들일 때 주도권을 뺏긴 적이 없었다. 영식 어머니에게 봉변을 당하면서 엄마는 방만 빌려줄 뿐 하숙생의 삶에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언젠가 엄마가 맞닥뜨릴 현실이기도 했다. 한동안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 때문에 힘들었다. 기가 푹 죽어 있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내 자신이 슬퍼졌다.
영식을 다시 만난 건 그 일이 있은 지 일 년 후였다. 빨간 고추잠자리 회사 입사가 늦춰지는 바람에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던 커피 숍에서였다. 내가 먼저 가게 문으로 들어오는 영식을 발견했다. 그는 자리를 두리번거리더니 창가에 앉았다. 그가 주문하러 카운터로 왔더라면 나와 마주쳤을 것이다. 그는 손목시계와 문 쪽을 번갈아보며 책을 읽고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커피숍에 온 지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나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단 삼 십분 만에 육 개월 동안의 연애를 끝내버린 그에게 그토록 놀라운 인내심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삼십분이 지났다. 마침내 그가 문 쪽을 향해 손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머리를 나부끼며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초미니 미니스커트가 발랄해 보였다. 그녀도 영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직 결혼은 안했군. 나는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카운터 앞을 지날 때였다. 자기 와이프 캐나다에서 왔어? 하고 묻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날, 나는 영식에게 문자를 보냈다. 똑바로 살아!!! 전송 완료라는 신호음이 울렸다. 나는 그의 바뀐 휴대폰 번호를 몰랐다. 허공으로 쏘아올린 것이었다. 기지국에 잡힌 전파가 서울을 배회하다가 영식의 불량 양심을 콕, 찌를 것이었다. 갑자기 통증을 느낀 그가 가슴을 쓸어내리길 바랐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앞으로 몇 번 더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지 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으면 싶었다. 사실 일 년 전, 그와 헤어지고 몇 번 그에게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냈다. 전화를 받기는커녕 문자에 대한 답장도 없었다. 며칠 후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 라는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한준식씨가 돌아왔다는 엄마의 음성은 들떠있다. 엄마는 그의 빚을 갚아줬다고 했다. 나는 엄마와 한준식씨가 협상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는 한준식씨를 위해 자존심을 굽힌 것이다. 나는 엄마가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믿는다. 엄마가 내린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스에 K의 짐을 담는다. 와이셔츠 일곱 장, 양복 두 벌, 청바지 두벌과 셔츠 두 장, 팬티와 러닝 일곱 개, 책 열권, 칫솔, 스킨과 로션, 헤어 젤이 전부다. 구겨 넣으면 가로 오십 센티, 세로 오십 센티 박스 하나면 충분하다. 모두 내가 사준 것이다. K와 함께 살면서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그래서 무겁고 부피가 나가는 옷이 없다. 나는 K의 겨울옷을 사려고 카탈로그를 주문했었다. 컴퓨터 옆에 방금 도착한 카탈로그가 놓여있다. K가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와 나는 카탈로그를 보고 옷을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박스가 가볍다. 내가 K에게서 차지했던 무게처럼 느껴진다. 그건 반대로 그에게서 새처럼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뱃속의 아이 아빠가 K라는 것은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또 그가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다.
K의 짐을 넣고 테이프로 서너 번 감아 밀봉한다. 내일 킥 서비스를 불러 회사로 박스를 보내려 한다. 월요일 아침 K의 책상에는 발신인 이름이 없는 박스가 올려져있을 것이다. 나는 박스를 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도록 빨간 고추잠자리 팬티 위에 넌 아웃이야, 라고 쓰인 에이 포 용지를 올려놓는다.
나는 이번 신상품의 콘셉트를 배부른 아내가 남편의 속옷을 고르는 것으로 결정한다. 요즘 드라마에서 임산부 역할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탤런트 S양을 떠올린다. 그녀라면 막 태동을 시작한 아이의 아빠 속옷을 고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신상품은 더 과감하게 은밀한 곳을 강조할 것이다. 그녀의 웃음이 담고 있는 반전이 이번 기획안의 생명이다. 탤런트 S양은 속옷을 통해 섹스 욕구를 보상받는다는 이중구조를 잘 표현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기획안은 빨간 고추잠자리 회사에서 나의 마지막 광고가 될 것이다. 서른다섯, 팀장 오 년차, 치고 올라갈 자신이 없으면 떠나는 게 이 곳의 생리다. 헤드헌터를 통한 이직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다. 자신을 잘 포장하는 것도 경쟁력이다. 어제 몇 군데 이력서를 넣었던 곳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히트를 쳤던 몇 건의 카피 덕분이다. 처음으로 과거의 업적이 내 손을 잡아 준 것이다.
휴대폰이 울린다. 부동산 중개업자이다. 엄마가 작은 방을 중개업소에 내놓겠다고 한 게 생각난다.
“이미 나갔어요.”
전화를 끊으려다 급하게 덧붙인다.
“앞으로 방을 내놓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동물 모빌에 달린 스위치를 누른다. 비제의‘즐거운 나의 집’에 맞춰 무지개 색깔 동물이 춤을 추며 빙빙 돌아간다.
신춘문예 응모자들이 원고를 보내고 난 뒤, 떨리는 마음으로 연말의 하루 하루를 살얼음판 걷듯이 지내는 것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심사를 하는 마음도 두렵고 떨리게 마련이다.
한 편의 작품마다 담긴 영혼의 무게를 다 감당할 수 있는지, 눈이 어두워 숨어서 빛나는 부분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작품을 다시 들춰 보곤 한다.
올해 들어 전북도민일보에 응모하는 소설 작품의 분량이 대폭 증가했다.
‘문학의 위기’가 운위된 지 꽤 된 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이십대에서 칠십대까지, 나이차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상상력의 경연장이 신춘문예의 장이다. 더 새롭고, 더 깊고, 더 정돈된 상상력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게 된다.
도합 65편의 응모작 중 여러 차례 다시 넘겨본 작품은 “캣츠 아이”, “티눈-오래 된 기억에 대하여”, “실어증에 대한 소고”, “이불”, “난민일기”, “환을 보다” “비행”, “연꽃동”, “너에게 간다” 등이었다.
각각의 사연으로, 서로 다른 빛깔로 빛나는 말의 잔치는 휘황했다. 매우 독특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작품도 있었고, 기본기를 충실히 닦은 작품들도 있었다.
모두 후일을 기약할만한 내공을 쌓고 있다는 점을 꼭 여기 적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작으로 선정되지 못한 이유는, 대개 의욕의 과잉에서 빚어지는 부작용 때문이었다.
소재에 충실하다 보니 작품의 내적 질서가 흐리다거나, 자신의 설계한 언어의 숲에 스스로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경우가 대표적인 부작용에 해당한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다한 집필 피로로 인해 오히려 안이한 결말에 안주하는 경우와 소재를 비틀고 비틀어 기괴하게 만드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이 그다지 안이하지도 또 기괴하지도 않듯이, 우리 삶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에는 삶의 진진함이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선작으로 “즐거운 나의 집”을 뽑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목소리의 장단고저를 조절할 줄 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벼운 이야기에 무게를 실을 줄도, 무거운 이야기에서 경직된 느낌을 지울 줄 아는 문장 수련의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다.
경이로움과 환멸, 삶은 늘 그 사이에 있다고, 작가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당연함에 핍진성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의 목소리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이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낙선자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지금 당장 시작하시라고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