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의 아이콘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 Che Guevara
출생 | 1928년 |
---|---|
사망 | 1967년 |
본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
국적 | 쿠바 |
의대를 졸업했으나 의사의 길을 걷는 대신 사회의 병을 고치는 혁명가가 되었다.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 쿠바에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볼리비아 혁명 당시 볼리비아 정부군에 사로잡혀 총살당했다.
짙은 눈썹에 먼 곳을 바라보는 눈, 덥수룩한 머리에 시가 하나를 물고 있는 젊은 남자의 책이 한때 서점가를 뒤덮은 적이 있다. 바로 《체 게바라 평전》이다. 멀리 남미에서 혁명을 주도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이 젊은이가 어째서 전 세계적으로 혁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일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고 말한 체 게바라.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로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52년, 8개월간의 남아메리카 모터사이클 횡단여행은 순진한 의대생을 가난에 시달리고 착취당하는 남미 사람들의 문제를 고뇌하는 혁명가로 바꾸어 놓았다.
의대에서 나병을 전공했던 게바라는 한동안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병보다 사회를 좀먹는 병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각각의 소국 집합체로 여기지 않고 해방시켜야 하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으로 여겼다. 그는 '라틴' 혈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 전체가 모인 '히스패닉 아메리카'라는 국경이 없는 개념을 생각했다.
1953년 6월 그는 정식 의사가 되었지만, 의사생활 대신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 살바도르를 떠돌아다니다 과테말라에 들어갔다. 과테말라는 당시 하코보 아르벤스 구즈만 대통령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이끌고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부의 개혁방향이 마음에 들었던 게바라는 그곳에서 진정한 혁명가의 길을 모색한다.
그는 페루 경제학자 힐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통해 아르벤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쿠바의 산티아고 공격으로 피델 카스트로와 연결되어 있는 쿠바 망명자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1954년 5월 15일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르벤스 정부에게 보내는 화기가 푸에르토 바리오스에 도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에 대해 우익 정권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후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아르벤스는 멕시코 대사관으로 도망쳤고, 게바라는 저항을 주장하다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르헨티나 영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몇 주 후 멕시코로 넘어갔다.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와 다른 개도국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 상태를 개혁하려는 어떤 정부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니코 로페즈를 비롯하여 과테말라에서 만난 다른 쿠바 망명자들과 다시금 친분을 다지면서 카스트로 형제를 알게 된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혁명군을 이끌고 있던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의 만남을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만남'이라고 훗날 표현했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겨우 80명의 인원을 데리고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얼마 후 바티스타의 공격을 받은 부대는 거의 전멸해 겨우 22명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프랑크 파이스가 이끄는 도심 게릴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으며 본부를 세웠다. 게바라는 훗날 자신은 이때 진정한 혁명전사로 거듭났다고 회상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게바라는 반란군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타임〉은 피델 카스트로의 보좌관이던 그를 '카스트로의 두뇌'라고 지칭했다.
1958년 7월, 게바라는 특유의 게릴라전으로 라스 메르케데스 전투에서 1,500명의 바티스타군을 물리쳤다. 그해 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쳤고, 1959년 1월 게바라가 이끄는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2월에 들어선 혁명정부는 게바라를 '쿠바 인'으로 선언했다. 새 정부의 수뇌가 된 게바라는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새 쿠바 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토지 재분배가 가져올 사회적 정의'라고 말하면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농장 소유 면적을 제한하고, 설탕 플랜테이션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1959년부터 그는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며, 서방 세계에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전 라틴아메리카의 연합을 추구했던 게바라와 쿠바 혁명의 성과를 지켜내는 일에 매달리던 카스트로의 노선은 점차 갈리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적 이상을 이야기하는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갔다. 게바라는 흐루시초프 체제하에 변해가는 소련의 모습과 점차 1인 절대권력체제를 추구하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실망하고 1965년 10월 자취를 감추었다. 2년간 행적이 묘연했던 그는 당시 콩고 내전에 참전하여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온 게바라가 향한 곳은 볼리비아였다. 브라질,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의 목전에 있는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이미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위험한 반란분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당장 볼리비아에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 군사를 지원했다.
1966년 말부터 일 년 가까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운동을 했던 게바라 일행은 산악 지역에 사는 볼리비아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볼리비아 농민들은 당시 게바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게릴라들을 '쿠바 인들'이라고 빈정대며 부르기도 했다. 또한 볼리비아 공산당 역시 비협조적이었다.
볼리비아군에 쫓겨 산악 지역을 방황하다 지친 몸으로 라이게라에 도착한 17명의 게릴라들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했다. 게릴라들이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사전에 이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볼리비아 군대로 쿠바 인들이 왔음을 알렸다. 혁명을 지원하리라 믿었던 가난한 농민들이 혁명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2주 정도 라이게라 부근에 머물던 게바라의 게릴라 그룹은 그곳을 둘러싼 볼리비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몇 명은 전사했으며, 부상당한 게바라와 동료들은 생포되어 처형당했다. 처형 당시 게바라는 서른아홉 살에 불과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착취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의 꿈은 결국 라이게라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젊은 청년들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
영화로도 제작되었답니다.
============================
그를 노래한 이들도 많지요.
Soledad Bravo / Hasta siempre Commandante Che Guevara
Soledad Bravo는 1943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베네수엘라로 이주했다.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에서 건축, 심리학, 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베네수엘라의 보석’ 이라 불릴 정도로 베네수엘라
최고 가수다. 노래도 잘 했지만 그녀는 늘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민중의 애환을 노래에 담은 가수이기도 하다.
이곡의 가사를 한국말로 바꾸면 이렇다고 한다..
영원하라.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
그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배운 거지요,
그대의 용기가 불타오를 때 죽음도 막을 수 없었답니다.
(후렴)깊고 투명한 그대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집니다. 우리의 사령관 체 게바라
영광스럽고 강한 그대의 손이 역사를 향해 뻗치면
산타클라라의 모든 이들이 그대를 보기 위해 깨어난다네.
(후렴)
그대는 봄의 태양 속에 바람을 불사르러 오셨죠.
그대의 빛나는 미소로 깃발을 땅에 꽂았죠.
(후렴)
혁명에 대한 사랑이 그대를 새로운 과업으로 이끌었죠,
그대의 강한 팔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후렴)
우리는 전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대와 함께 그랬듯이..
피델과 함께 그대에게 외칩니다. 그대는 영원한 우리의 사령관! (후렴)
이곡을 만든 카를로스 푸레블라 외 많은 다른 저항, 반전 가수들도
'Hasta siempre Commandante Che Guevara’를 불렀다.
원조 카를로스 푸에블라의 Hasta siempre Commandante Che Guevara
https://www.youtube.com/watch?v=fcnH8oK8FlY
쿠바의 유명한 Buenavista Social Club도 불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J6ZjnxnDSOM
미국의 반전 가수 존 바에즈도 불렀고,
https://www.youtube.com/watch?v=V1zAMzDaTVs
프랑스의 배우이자 샹송 가수인 Nathalie Cardone도 즐겨 불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86LSuXi5TLU
==========================
그와 관련한 책들은 다음에서만도 164건이 검색될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관련도순출간일순
프랑스 일간지 '파르지앵'의 전문기자 장 코르미에가 엮은 체 게바라 평전. 코르미에는 1981년부터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체 게바라의 삶을 가까이에서 그러나 전체적으로 조...
문학적 감성을 통해 바라본 세대와 국경을 넘어 사랑받는 혁명가 체 게바라 이야기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1967년 사망 당시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속에는 색 연필로 덧칠...
죽는 순간까지 흔들림 없이 신념과 의지를 온몸으로 실천한 체 게바라는, 총을 든 게릴라 이전에 억압받는 민중에게 무한한 애정을 품고 함께했던 세계시민이었다. 그가 혁명에 성공한 쿠...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은 그동안 혁명가 혹은 낭만주의자의 이미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 관료로서의 체 게바라의 행적을 살펴본다. 1959년에서 1965년까지 쿠바 ...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죽음 앞에 선 체 게바라의 전설적 게릴라 일기를 국내 최초로 스페인어 원전 번역한 것이다. 이 일기는 체 게바라가 1966년 11월 7일 볼리비아 ...
의사이고 여행자이고 남편이고 시인이며 아버지이고 사람을 사랑했던 혁명가, 체 게바라. 『체게바라전』은 일본 나오키 상 수상자이기도 한 저자가 체의 출생에서부터 전성기, 그리고 최후...
===========
그가 남긴 명언들을 모아 봅니다.
[체게바라 (Che Guevara | Ernesto Guevara de la Serna) 명언]
1. 나는 해방가가 아니다. '해방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2.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3. 리얼리스트(realist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들자.
4. 많은 이들이 저를 모험가라고 부르겠지만, 저는 다른 류의 모험가입니다.
자기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가입니다.
5. 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 주어진다.
6.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할 때마다 우리의 함성을 들어주는 귀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팔을 들어주려고 뻗치는 또다른 손이 있다면 죽음을
환영하라.
7.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8.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9. 폭군은 폭군으로 변할 새 지도자로 대체될 뿐이다.
10. 죽음을 각오한 이 투쟁에는 전방이 따로 없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그
어떤 나라의 승리도 우리의 승리인 것처럼, 패배도 우리 모두의 패배이다.
11. 침묵은 다른 방식으로 펼친 주장이다.
12. 아름다운 혁명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손끝에 있는 것이다.
13. 태양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뜨거운 가슴을 찾아 헤맬 줄
알아야 한다. 그 길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 할지라도.
14. 다른 누군가가 내 총을 집어 들고 쏘기를 계속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
15. 네가 나를 죽이려고 왔다는 걸 알아. 쏴, 겁쟁이야! 너는 그저 한 사람을
죽일 뿐이야.
16.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과감한 실행이다.
17. 젊음은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에 달렸다.
18. 사랑은 그 어떤 문도 열 수 있는 만능열쇠이다.
19. 승리를 향해서 끝없이 전진하라.
20. 에베레스트 산도 무수한 사람들이 도전하다가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정복되고
말았음을 명심하라.
21. 우리를 위해서 나를 내어줄 수 있을 때 인간은 아름답고 앞으로도 아름다울
것이다.
22. 민중을 향한 사랑과 정의, 관대함 없이는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없다.
23. 무조건적인 순종은 불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없다.
25.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이성으로 세상 모든 불의에 맞서 격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다.
26. 밤 하늘에 수 많은 별들이 반짝이듯이 모든 민중들의 눈동자도 저렇게
반짝일 수 있다면…
27. 나도 남들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것은
나 혼자만의 성공이므로..
28. 내가 절어진 커다란 사명은 나는 가까이 민중 편에 살 것이다.
29. 만일 이 세상에 둘로 나눈다면 나는 기꺼이 민중 편에 설 것이다.
==========
객관적인 눈으로 본 그에 대한 책도 소개합니다.
신화·전설·우상을 벗어나서 본 체게바라
<책소개>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
표주연 기자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책갈피 출판사
얼마 전 TV의 한 드라마에서 한 탤런트가 입은 옷에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주변을 둘러봐도 체 게바라가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에 관한 책도 20여 종이 시중에 나와 있고 최근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도 상영됐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체 게바라에 열광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 마이크 곤잘레스는 1999년 시애틀 시위 이후 크게 성장한 국제 반자본주의·반전 운동에 참가한 새 세대가 체 게바라에 열광하고 그 이미지가 마치 그 운동에 상징처럼 부각되는 것이 이 책을 쓴 이유라고 말한다.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은 체 게바라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쿠바 혁명을 다룬 입문서다. 체 게바라에 관한 책이 많이 출간됐지만, 대부분은 책들이 인간 체 게바라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가 그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치우쳐 있다.
그러나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은 체 게바라의 생애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의 사상의 장점과 단점을 격동의 중남미 상황에 비추어 고전적 마르크주의 관점에서 흥미진진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체 게바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쿠바 혁명에 대해서도 그 과정과 정치적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체게바라 정치적 분석
열렬한 관심에 비해 사람들은 체 게바라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혁명가 체 게바라를 인간적인 면모만 부각해 영웅으로 만들어서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책은 체 게바라가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혁명가가 되는지, 어떻게 자신의 독특한 혁명 전략인 게릴라전을 발전시키는지,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는지, 자칭 공산주의자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 지도자들의 정치적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옛 소련과 쿠바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게바라의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는 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게바라가 죽은 뒤 어떻게 신화·전설·우상으로 부상하게 됐는지 등을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
영웅신화, 도덕적 헌신성이라는 한쪽 측면만 강조되는 현재의 체 게바라 열풍 속에서 혁명가 체 게바라에 대한 정치적 분석서가 처음 출간됐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 의미는 크다.
그리고 국내에 쿠바 혁명과 관련된 책이 없는데, 유일하게 쿠바 혁명을 알기 쉽게 정치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 체게바라는 '준비된' 혁명가는 아니었다
전기 작가들과 회고록 저자들은 체 게바라의 삶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혁명적 인식의 씨앗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래서 게바라가 추키카마타 광산의 경험이나 어릴 때의 경험들에서 이미 혁명가가 될 조짐이 보였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암시와 조짐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게바라가 개인적 비극에 몹시 가슴 아파하고, 사랑을 주고받으며, 삶을 즐기고 청년의 활력과 자신감이 넘치는 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정치적 각성은 과테말라의 경험을 통해 진행됐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 그들은 왜 게릴라전을 선택했을까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공유한 전략은 대중이 아니라 대중의 이름으로 투쟁한다고 자처하는 소수의 혁명 전사들이 수행하는 게릴라전이었다. 남미의 혁명을 일으키고 확산시키는 방법으로써 게릴라전을 자신의 혁명 전략으로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과테말라 혁명의 경험에서 체 게바라가 이끌어 낸 교훈이라고 주장한다. 즉 과테말라 혁명이 실패한 것은 무기와 군사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간 계급 출신의 피델 카스트로가 소수의 무장 투쟁이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 것과 같은 생각이었다.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실용주의와 이상주의의 충돌
다른 책에서는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가 완벽하게 의견이 일치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카스트로의 실용주의와 체 게바라의 이상주의가 충돌한 것과 혁명 성공 후 체 게바라를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한 카스트로의 견제를 언급하고 있다.
◆체게바라의 사회주의는 맑스의 그것과 다르다.
체 게바라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체 게바라의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체게바라의 이미지 마케팅. 그는 이용당했다(?)
최근 체 게바라의 남미 여행 일기를 영화화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개봉돼 전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죽은 뒤 그는 하나의 문화 상품이 되고, 그에게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내기보다는 신화·전설·우상이 되었다. 저자는 쿠바에서 카스트로가 쿠바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수단으로써 게바라를 이용한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게바라가 그를 역사가 없는 이미지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피해자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쿠바 외부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게바라의 이미지를 부활시키고 재발견하고 체 게바라가 원했던 더 좋은, 더 인간적인, 더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를 갈망하고 있고, 게바라가 착취와 전쟁에 대한 비판의 상징이 됐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원한 것은 미국에서 독립한 민족국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고, 당연히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쿠바 혁명의 지도자인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당을 무척 싫어한 반공주의자였고, 쿠바에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에서 독립한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1959년 1월 1일에 혁명을 성공하고 한동안 미국 정부에 공존을 추구했으나 실패하고 미국과의 긴장이 강화되자 1961년 4월에서야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한 점을 언급하고 있다.
마이크 곤살레스 지음/이수현 옮김/239쪽/7,800원
=====================
그에 대한 객관적인 눈을 위하여
그를 비판한 글들도 함께 제시합니다.
판단은 늘 그렇듯이 읽는 이의 몫이겠지요~~
훔베르토 폰타바,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
(2007년, 센티널, 23.95 달러, 224쪽)
1928년에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중남미 여행 도중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서 쿠바 공산혁명에 참여했고, 혁명 후에는 쿠바의 산업장관을 지냈다. 유엔 총회 참석 후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돌아 온 게바라는 소규모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콩고에 가서 내전에 참가했고, 볼리비아에서 잠입해서 활동하던 중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생포되어 1967년 10월 9일 처형됐다.
‘20세기의 예수’?
그 후 게바라는 전 세계 좌파의 아이콘이 되었다. 당시 유럽과 미국을 풍미한 新좌파 운동에 힘입어 게바라는 聖人(성인)으로 추앙됐다. 장 폴 샤르트르는 게바라가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처형 후에 공개된 그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놓은 예수를 닮았다면서, 그를 ‘20세기의 예수’로 부르기도 했다. 反美(반미)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게바라의 초상이 등장했다.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사가 찍은 머리칼을 휘날리는 게바라의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인물 사진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이 사진을 프린트한 티셔츠는 전 세계에서 인기상품이 됐다. 그가 썼다는 ‘모터사이클 일기’는 그의 사망 30주기를 맞아 영어로 번역됐고, 게바라 傳記(전기)도 여럿이 출간되었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모터사이클 일기’를 토대로 같은 이름의 영화를 제작했고, 락 그룹 산타나의 리더인 카를로스 산타나 등 많은 연예인들이 게바라 티셔츠를 걸치고 다니는 등 게바라는 대중문화의 영웅이 돼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게바라를 미화한 책이 여러 권 출간되었고, 어느 철없는 가수는 게바라를 추앙하는 음반을 냈다.
체 게바라의 생애
그렇다면 도대체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인가 ? 그에 관한 이야기는 좌파 진영에 의해 과장되거나 미화된 부분이 많아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가 의심스럽지만, 대체로 알려진 바는 다음과 같다.
아르헨티나의 중상층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의 의대를 다니던 중 모터사이클을 타고 중남미를 無錢(무전)여행하면서 빈곤과 압제에 시름하는 민중의 삶을 목격했다. 학업을 마쳤지만 인턴을 하지 못해 정식 의사가 되지 못한 게바라는 과테말라에 머물렀는데, 그 때 쿠데타가 일어나서 과테말라의 합법 정부가 전복됐다.
과테말라를 떠난 게바라는 멕시코시티에 잠시 머물렀는데, 거기서 망명 중인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났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카스트로 형제와 다른 쿠바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쿠바 남부 해안에 상륙해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간 지역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의 지대장으로 활약했는데, 산타클라라에서 쿠바 정부군의 무장 열차를 탈취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1959년 1월, 쿠바의 바티스타 대통령은 도미니카로 망명했고, 카스트로는 쿠바 전역을 장악했다.
쿠바 국립은행장, 산업장관 역임
게바라는 라 카바나 수용소장으로 舊(구) 정권 인사들을 심문하고 처형하는 일을 맡았다. 게바라는 쿠바 국립은행장이 되었고, 이어서 산업장관이 됐다. 1964년 12월 게바라는 쿠바 정부 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해서 주목을 샀고, 중국, 이집트, 북한, 알제리 등 여러 나라를 방문했다. 평양에서 게바라는 쿠바가 북한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1965년 3월에 아바나에 돌아온 그는 공항에서 카스트로의 환영을 받았으나 곧 뉴스에서 사라져 버렸다.
1965년 4월에 게바라는 십여 명의 쿠바 군사요원을 이끌고 내전 중인 콩고에 잠입해서 현지 공산세력에 합류했다. 콩고에서 게바라의 부대는 쿠바 출신의 反共(반공) 용병과 남아공화국의 용병의 지원을 받는 콩고군의 추격을 받다가 철수했다.
1966년 말 게바라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볼리비아에 잠입해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몇 번의 전투를 벌였다.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잠입했음을 파악한 미국의 중앙정보국은 쿠바 출신 요원을 파견해서 볼리비아 정부군과 함께 게바라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동부의 작은 마을 라이구에라에서 포위된 게바라와 그의 동료는 항복했다. 다음날 볼리비아 정부군은 게바라를 총살했다.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군의관은 게바라의 두 손을 절단해서 별도로 보관했고, 사체를 비밀 장소에 매장했다. 1997년 볼리비아의 발레그란드 비행장 활주로 아래에서 두 손이 없는 게바라의 유골이 발견됐고, 쿠바 정부는 게바라와 그의 동료 6명의 유골을 반환 받아서 산타클라라에 게바라 기념관과 靈墓(영묘)를 건립했다.
게바라의 진실
게바라가 대중적 우상으로 떠올랐지만 게바라의 진실을 파헤친 책은 찾아 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 쿠바 출신의 훔베르토 폰타바가 금년 봄에 펴낸 책 ‘체 게바라의 진실을 폭로한다’는 의미가 깊다. 저자 폰타바는 어릴 때인 1961년에 그의 가족과 함께 쿠바를 떠나서 미국에 정착했다. 중남미 정치를 전공한 그는 쿠바를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미국의 ‘쓸모 있는 바보들’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발표했다. 저자는 게바라와 관련이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과 쿠바 정부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기록에 근거해서 이 책을 썼다.
‘모터사이클 일기’는 쿠바 정치선전부가 출간
저자는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일기’는 쿠바의 정치선전부가 출간한 것이며, 카스트로가 책의 서문을 썼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믿는 진보진영과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어리석다”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저자는 게바라가 최소한 1만 4천명을 처형한 대량학살범이며, 미국 본토에서 건물 폭파를 시도한 테러범이라고 단언한다. 흑인해방군이란 지하단체를 이끌던 로버트 콜리어는 1964년 8월에 쿠바로 가서 게바라를 만났으며, 그 해 말 게바라가 뉴욕을 방문하던 중 게바라를 다시 만나 ‘자유의 여신상’ 등을 폭파하는 계획을 의논했는데, 콜리어의 그룹에 경찰관이 잠입해 있어서 이들은 폭발을 일으키기 전에 검거됐다.
많은 사람들은 “게바라가 아르헨티나에서 의사로 편안한 삶을 즐길 수 있었는데 혁명을 위해 몸을 던졌고, 쿠바 혁명 후에도 아바나에서 권력자로서 행세할 수 있었지만 콩고와 볼리비아에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 갔다가 순교했다”고 말한다.
게바라는 의대를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도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게바라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에서 의학학위를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게바라가 의학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학위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지만 저자는 게바라가 의대를 다녔다는 증거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농민의 편으로 알려졌지만 게바라는 매우 부유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에 입성한 후 바닷가에 위치한 당시 쿠바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저택을 차지해서 새로 결혼한 백인 아내와 함께 귀족적 삶을 즐겼다. 저자는 게바라의 이런 이중적 성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본다.
카스트로가 게바라를 만나서 함께 쿠바로 배를 타고 향했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의사로 알았다. 게바라가 배에서 멀미를 하고 천식 발작을 하면서 의사를 불러 달라고 신음할 정도가 되자,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죽으면 바다에 처넣으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다. 게바라가 국제적으로 떠 오른 계기는 1958년 12월에 있었던 산타클라라 전투인데, 저자는 이 전투 이야기가 완전한 조작이라고 말한다.1959년 1월 4일자 뉴욕타임스는 산타클라라에서 게바라가 지휘하는 혁명군이 바티스타 정부군 3000명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물리쳤다고 크게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전투에 목격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발견된 게바라의 일기는 이 날 전투로 자기 부대원 중 1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당시 주민들은 총소리가 나서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을 나갔다. 바티스타 정부는 정부군 373명과 탄약을 가득 실은 열차를 혁명군이 진입해 있는 산타클라라로 보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게바라는 철도 레일을 뜯어내고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열차가 나타나서 혁명군이 총을 몇 방 쏘자 열차에서 정부군이 응사했다. 혁명군 몇 명이 백기를 들고 열차에 다가섰고, 게바라가 정부군 지휘관에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약속한 것과 다르단 말이야”라고 외쳤다.
열차를 보낸 정부군 대령은 게바라로부터 수십만 달러를 받고 열차와 탄약을 팔아넘긴 후 마이애미로 도망갔는데, 정작 열차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몰랐던 것이다. 사기가 꺾인 정부군은 항복했고, 게바라는 카메라 기자를 불러서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연출해서 외신에 뿌렸다. 그러면서도 게바라는 포로로 잡힌 정부군 중 27명을 戰犯(전범)으로 처형했다.
소녀, 임신부 직접 총살
게바라 전기를 쓴 좌파 학자들은 게바라가 피그스 灣(만) 침공사건 때 쿠바군을 지휘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썼다. 1961년 4월 쿠바 출신으로 구성된 자유전사군은 군대가 미군 지원 하에 쿠바 남쪽 해안을 침공해서 수비 중이던 쿠바 정부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2차 공습과 군수 지원을 거부함에 따라 침공군은 탄약이 떨어져서 항복하고 말았다.
저자는 당시 포로로 잡혔다고 2년 후에 6200만 달러 몸값을 주고 송환된 쿠바 反共전사들의 말을 인용해서, 정작 게바라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전투에 무능한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발탁된 이유는 따로 있다고 본다. 1957년 1월, 카스트로는 정부군 첩자 노릇을 한 농민 게릴라 한명을 처형하도록 자신의 경호원에게 지시했다. 경호원이 머뭇거리자 그 옆에 있던 게바라가 권총을 빼어 들어 표정도 변하지 않고 관자놀이를 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카스트로는 집권 후 소련에서와 같은 숙정을 할 때 게바라가 유용할 것임을 알아 차렸다. 카스트로는 라 카바나에 정치수용소를 만들고 게바라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라 카바나에선 게바라의 총살대가 바티스타 정부의 장교와 하사관은 물론이고 가톨릭 司祭(사제), 지식인, 공무원, 선량한 양민을 쉬지 않고 사살했다. 게바라는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들을 권총으로 직접 사살하기를 즐겼다. 게바라는 어린 소녀와 임신한 여성도 직접 사살했다. 저자는 “게바라는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화국 백인 정권의 감옥이 아닌 게바라의 감옥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카스트로 정부의 산업장관이 된 게바라는 소련식 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쿠바에는 공업을 일으킬 만한 자원이 없었다. 그러면서 게바라는 소련을 비난하고 중국을 칭찬해서 카스트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자 목숨 구걸
저자는 게바라가 콩고에서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도 거짓말이라고 본다. 전투다운 전투를 해 본 경험이 없는 게바라는 콩고의 정글 속을 헤매다가 아바나로 귀환했다.
게바라는 콩고에서 못 이룬 꿈을 볼리비아에서 이루려고 했다. 게바라가 쿠바에 남아 있으면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한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 가서 죽으면 소련과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의 지시를 받은 볼리비아의 공산 叛軍(반군)은 정부군에게 게바라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쿠바 출신인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 펠릭스 로드리게스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합류해서 45명으로 구성된 게바라의 부대를 추적했다.
1967년 9월 27일 정부군은 게바라 군의 진지를 기습해서 다수를 사살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게바라는 권총을 버리고 항복했다. 그러면서 게바라는 “쏘지 말라. 나는 체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것이 당신들한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게바라는 자기가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게바라를 죽이기로 이미 결정한 볼리비아 군은 다음날 게바라의 다리와 몸통에 총을 쏘아 죽이고 그가 전투 중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게바라의 시체가 공개되자 세계가 떠들썩해졌다.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천식과 열대기후로 몸이 약해진 게바라가 최후까지 싸우다가 실탄이 떨어져서 항복했는데, 볼리비아 군부가 그를 처형했다고 써댔다. 하지만 볼리비아 군부의 기록과 로드리게스의 진술은 전혀 달랐다. 게바라가 항복할 때 그가 내려놓은 권총에는 실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처형 직후 시체 사진이 보여 주듯이 그는 삐쩍 마르지도 않았다. 게바라는 형편없는 비겁자였을 뿐이다.
게바라 부대의 일원으로 콩고와 볼리비아의 정글을 누빈 다니엘 알라콘은 게바라가 죽은 후 칠레를 거쳐 쿠바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카스트로가 기적적으로 돌아 온 자기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쿠바를 탈출해서 오늘날까지 파리에서 살고 있다. “카스트로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죽어서 소련과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했다”고 알라콘은 회고했다.
‘매춘국가 쿠바’를 찬양하는 할리우드 배우들
저자는 진보 언론과 할리우드 배우들이 게바라를 우상화하는 것은 한심하다고 말한다. 할리우드의 배우들이 쿠바를 방문하면 카스트로 정부는 철저하게 보호하고 환대한다. 그래서 이 멍청한 배우들은 카스트로가 훌륭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는 것이다.
오늘날 쿠바의 중요한 수입원은 외국인 관광객이 뿌리는 달러이다. 정작 게바라를 동경해서 쿠바를 찾은 젊은이들은 쿠바 사람들의 삶을 보고 환상에서 깨어난다. 오늘날 쿠바를 찾는 외국인들은 대개 섹스 관광객이다. 젊은 여자 값이 워낙 싸기 때문에 쿠바는 필리핀과 태국을 젖히고 굴지의 매춘국가가 됐다. 저자는 자기 부모의 나라가 공산체제 40년 만에 가난한 매춘국가가 됐다고 한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