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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스트 인 파리’의 한 장면. |
서래마을이 아니더라도 거리를 걷다보면 심지어 골목 안에서도 불어 이름 간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커피 전문점이나 음식점 간판 말고도 화장품부터 시작해서 의류, 제과점, 미용실, 아파트 브랜드 등에 특히 불어가 많다. 의식주 생활 외에도 문화예술 문학 외교 계통에서 마치 우리말처럼 굳어진 불어도 꽤 된다.
화장품 브랜드는 다수가 불어다. 라네즈(눈, 雪), 라크베르(푸른 호수), 에튀드(학습), 에스프와(희망), 마몽드(나의 세계), 아르드포(피부의 예술)…. 우리 어머니 세대가 많이 썼지만 립스틱을 말하는 루주(rouge)는 ‘빨간’이란 형용사다.
대표적 제과 브랜드인 파리바게트(바게트는 막대빵), 파리크라상(크라상은 초승달 모양의 빵), 뚜레주르(매일)도 불어다. 동네 제과점 이름 중에 ‘뺑(pain)’이 들어간 게 많은데 뺑은 빵이다. 우리말 빵은 포르투갈어 빠오(pao)가 일본을 거쳐 들어와 정착한 단어라는 게 정설이다.
고급을 지향하는 아파트 이름에는 왜 불어가 단골로 쓰이는지 모르겠다. 상테빌(건강한 마을) 쉐르빌(사랑스런 마을) 리슈빌(부자동네) 센트레빌(번화가) 르메이에르(최고) 데시앙(그림)…. 센트레빌과 데시앙은 사실 국적 불명 단어다. 불어로 하면 상트르빌(centre ville)이 돼야 맞다. 데시앙은 불어 데생(dessin)에 사람을 뜻하는 영어 접미사 ‘an’을 결합해 만든 이름으로 보인다.
‘아무르(amour)’는 사랑이고 ‘메르시(merci)’는 고맙다, 멸치볶음처럼 들리는 ‘메르시 보쿠(beaucoup)’는 대단히 고맙다, ‘파르동(pardon)’은 실례한다, ‘엘레강스(élégance)’는 우아함, ‘샤르망(charmant)’은 매력적, ‘시크(chic)’한 것은 단순하면서도 무언가 세련된, ‘누아르(noir)’는 음울한 암흑가 영화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사회지도층 인사의 도덕적 책무를 말한다는 것도 대체로 다 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맞는 표기다. 오블리주는 ‘책임을 진다’는 동사로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는 ‘봉(bon)’이다. 영어로 굿(good)이다. 해가 있을 때의 인사는 오전 오후 구분 없이 ‘봉주르(Bonjour)’다. 지금은 문을 닫은 서울 근교 북한강변의 명물 카페 이름이 봉주르였다. 마라토너 이봉주의 별명도 됐다. 프랑스인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세시봉”(C’est si bon, 아주 좋아요)이 있다. 리액션을 할 때는 “아, 봉”(Ah, bon, 그래요?)이라고 한다. 명동에 있던 세시봉은 70년대 포크음악의 산실이었다. “세라비”(C’est la vie, 인생 뭐 다 그런 거지)란 말도 유행했다.
의미가 이상한 쪽으로 ‘한국화’한 불어들도 꽤 있다. 룸살롱과 카바레가 한때 성업했다. 거기엔 마담들이 있었다. 여종업원이 있는 이상한 카페도 많았다. 살롱(salon)과 카페(café)는 프랑스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모여서 담론을 나누었던 사랑방으로 프랑스 문화의 정수였다. 카바레(cabaret)는 선술집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우리 식으로 치면 극장식 주점 같은 곳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물랭 루주’(Moulin Rouge, 빨간 풍차)가 대표적 카바레다. 마담(madame)은 결혼한 부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파리지앵(파리에 사는 남자)이나 파리지엔느( 여자)들이 들으면 분개할 일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
프랑스어 발음이 어려운 듯 보이지만 사실 몇 가지 원칙만 알면 다른 언어보다 훨씬 쉽다. 단어 끝의 자음이나 모음 e, 맨 앞 자음 h는 발음이 안 나고, ‘an’처럼 철자 n이나 m 앞에 모음이 있을 때는 콧소리 ‘앙’ 발음이 난다. 프랑스 최대 자동차 메이커 ‘르노’는 철자가 좀 어려운 ‘Renault’인데 누군가가 ‘르놀트’ 라고 발음해서 망신당한 일이 있었다.
불어 발음은 우리나라 외래어 표기법과 마찰을 빚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어 등 라틴 계열 단어에는 쌍자음의 된소리(경음, 끄 뜨 쁘 쓰 쯔)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외래어 표기법은 현지 발음을 고려하지 않고 된소리를 쓰지 못하게 통일시켰다. ‘파리’는 ‘빠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렌지’가 ‘아륀지’로 표기될 수 없듯이.
프랑스 여행을 가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가자고 하면 못 알아듣는다. ‘벡사이’라고 발음해줘야 “아, 봉” 그런다. ‘마르세이유’도 ‘막세이’다. 알파벳 R의 발음이 우리 자음 ㅎ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이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고민한 결과라고 하지만, 한글이야말로 지구상 모든 언어의 발음 표기가 가능한 과학적 자모를 갖춘 언어라는 점에서 유감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어 공부에 목을 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유난스럽게 불어를 좋아할까. 결국은 프랑스의 고급한 이미지와 부드러운 발음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는 격조 있는 문화예술의 나라이고, 명품 패션의 고장이고, 사람들에겐 사랑과 낭만이 넘치고, 왠지 삶의 질과 여유가 느껴지는 나라다. 불어는 억양이 편안하고 귀에 착 감긴다. 불어로 말하는 사람은 왠지 시크하고 엘레강해 보인다. 독일어처럼 강한 파열음이 아닌 부드러운 된소리와 콧소리 섞인 발음 때문이다. 초콜릿보다는 ‘쇼콜라’가 더 달콤하게 들리지 않을까. ‘멜랑콜리’하면 왠지 더 폼나게 우울해 보이고, ‘엘레강스’하면 고 앙드레 김이 생각나면서 더 격조 있게 우아해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불어 단어는 무엇일까. 지명이긴 하지만 ‘파리’가 아닐까 싶다. 올해 국내에서 개봉한 외국 영화 중에 제목에 ‘파리’가 들어간 것만 무려 5편이었다. 이례적이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 개막작이었던 로드무비 ‘파리 투 마르세유:2주간의 여행’도 7일 개봉했다.
이에 앞서 ‘로스트 인 파리’ ‘파리의 밤이 열리면’ ‘파리로 가는 길’ ‘파리 시청 앞에서의 키스:로베르 두아노’가 개봉했다. 모두 독립영화 계열의 작은 영화들인데, 8월에 개봉한 ‘파리로 가는 길’은 무려 11만 명이나 봐 독립영화 블록버스터가 되었다.
한국인의 파리 사랑이 각별하다 보니 원제에 파리가 들어가지 않은 프랑스 영화도 한국에선 제목에 파리를 달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올해 영화들은 프랑스의 전원과 파리 시내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감성영화들이 많아서 그런지 중장년 여성 관객이 압도적이었다.
‘파리로 가는 길’에서의 유명한 대사다.
얼떨결에 영화 제작자 남편의 프랑스 동업자 자크(아르노 비아르)의 승용차에 동승해 파리로 가게 된 미국 여인 앤(다이앤 레인). 자크가 차 뒷좌석을 꽃으로 채우고 나타나자 행복해하며 말한다. “프랑스는 왜 꽃향기도 이렇게 다른 거죠?” 파리로 가는 길에 자크는 계속 맛있는 레스토랑과 풍광 좋은 곳에 앤을 데려간다. 여자는 늦을까봐 안달이 났다. 남자는 말한다. “파리는 어디 안 가요(Paris can wait).” 이 영화의 원제목이다.
‘파리 투 마르세이유’도 로드무비이지만 풍경보다는 프랑스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바로 ‘톨레랑스(tolérance)’다. 고집불통 꼰대 보수 아재와 자유로운 영혼의 흑인 청년 래퍼가 사사건건 부닥치다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과정이다. 톨레랑스는 단순한 관용이나 자비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의 의견이나 취향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토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신이 톨레랑스고, 그것이 프랑스의 위대한 정신의 토대다.
2012년 개봉한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아마 파리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경배)였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문화예술이 만개했던 벨 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 의 파리를 그린 영화다. 피카소, 헤밍웨이, 달리, 장 콕토, 만 레이,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작가와 화가들이 대거 화면 속에서 부활했다.
이 영화 속에서 파리를 찬양한 대사다.
“파리의 아침은 아름답고, 파리의 오후는 매력적이며, 파리의 저녁은 마법 같고, 파리의 깊은 밤은 마술이다.”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연상케 한다. |
▶사족
우리가 흔히 쓰는 불어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봤다.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고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아, 이게 불어였구나, 하는 단어도 있을 것이다. 불어 표기는 생략했다.
랑데부 바캉스(피서 가는 것만이 아니고, 휴가나 방학은 다 바캉스라고 한다) 데뷔 데자뷔(기시감) 자메뷔(미시감) 앙상블 앵콜(프랑스에서는 안 쓴다) 장르 시네마 미장센(화면배치나 장면, 이게 왜 샴푸 이름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몽타주(영화 편집, 우리나라에선 현상수배가 되고 말았다) 레스토랑 메뉴 셰프 카페 비스트로(카페와 비슷) 카페오레 아페리티프(전채) 앙트레(메인 푸드) 뷔페 소스 피망(고추, 우리가 먹는 피망은 불어로는 ‘푸아브롱’이다) 쇼콜라 슈크림 무스 고로케(원발음은 크로켓) 크레페(원발음은 크레프) 부케(무엇이든 한 다발이란 뜻인데, 우리나라에선 신부가 드는 꽃다발이 되었다) 옴므(남자) 팜므(여성) 팜므파탈(치명적 매력을 가진 여자) 마드모아젤(미혼 숙녀) 마담(부인) 무슈(신사) 베베(아기) 앙팡(어린이) 가르송(소년) 피앙세(약혼자)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유니크 실루엣 샹들리에 슈미즈 판탈롱 베스트 망토 베레(베레모) 란제리(원발음은 랭주리) 코르셋 마네킹 로망 엘레강스 파라솔 바리캉(제조업체 이름에서 유래) 메종(집) 카테고리 프롤로그 에필로그 모놀로그 에스프리 데카당스 르포르타주 앙가주망(참여) 아방가르드(전위) 클리셰(진부한 표현) 오브제 르네상스 에티켓(원래 표찰이라는 의미, 궁정문화에서 규범을 적어놓았다) 마스코트 발라드 콩쿠르 아틀리에(작업장, 우리나라에선 화실이 되고 말았다) 그랑프리 브로슈어 크레용(연필, 우리나라에선 색연필) 데생 크로키 자르댕(정원) 앙케트 모나미(내 친구) 쿠폰(원어는 쿠퐁, 영미권에서도 쓰지만 대체로 바우처라고 한다) 바통 아그레망 데탕트 쿠데타 베테랑 레지스탕스 사보타주 빨치산(대원, 원발음은 파르티장) 캄플라지(원발음은 카무플라주) 울랄라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맞는 표기, 오블리주는 ‘책임을 진다’는 동사로 하나의 문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