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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구전하는 병서인 36계의 제 31계는 미인계이다. 미인계는 무력보다는 미인을 이용하여 정치나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세계 역사상 미인계를 이용한 전례는 얼마든지 있다.
삼국지에는 경국지색인 초선이가 여포를 이용하여 동탁을 죽이는 미인계가 등장한다.
제1차세계대전시 독일은 세기적인 미녀 간첩 마타하리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고급정보를 수집하여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는 미인계가 있었다. 그 것이 바로 이승만의 미인계이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 이승만과 모윤숙에 의해 전개된 치열한 미인계를 소개한다.
한 국가 건국의 이면에는 피눈물나는 선열들의 노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1. 해방공간에서의 한반도 상황
가. 미,소의 한반도정책
‣ 미국
태평양전쟁 후 미국정부는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만 장악하고 있으면 되지 한반도까지 탐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깝지도 않고 역사적으로도 한국에 이해관계가 적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남한에 미군을 주둔시켜 보니 경비가 막대하게 들어 제2차대전 후 군축을 서둘러야 할 판국에 하루라도 빨리 남한에서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자국의 체면만 살릴 수 있다면 조속히 남한에서 철군을 단행하고 한국문제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를 바랬다. 미 육군 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적다고 판단하고 1947년 4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해야 된다고 공언한 바 있었다.
‣ 소련
소련은 1860년부터 한국과 이웃이 된 이래 한반도에서 꾸준히 부동항을 얻으려 했던 나라로서
한반도내에 친소정권이 세워지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철수하더라도 두만강 건너편에 주둔하면서 한국에 언제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은 이승만을 위시한 남한의 대다수 우익인사들이 판단한 대로 38선 이북지역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만들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여 자국의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고 했다.
나. 이승만의 건국투쟁
이승만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의 정책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남한에서 철수하려는 미군을 당분간 붙들어둔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이어서 UN에 가입한 다음 UN의 권위와 외교력을 동원하여 북한에서 소련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다.
그는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단정수립 불가피론을 제창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트루먼 대통령을 위시하여 의회 지도자들과 국무성 관리들, 언론계 인사들 등을 만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 전에 한국인이 스스로 정부를 세우는 것을 도와야 된다고 설득 했다.
이승만은 새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 미국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1945년에 창설된 UN이라는 국제기구의 권위를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미국의 권위를 빌어 새 나라를 세우게 되면 그 나라는 미국의 괴뢰국가가 되지만 UN의 권위를 빌린다면 정당성을 지닌 떳떳한 나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 한국문제 UN으로 이관
1947년 여름에 제2차 미소공위 회의(47.5.21-10.18)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는 제1차 미소공위 회의 때(46.3.20-5.12)와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구성함에 있어 한국의 여러 정당 중 어느 정당을 협의대상으로 삼느냐 라는 문제로 미소 대표 간에 평행선을 달리는 설전을 벌이다가 1947년 10월 21일, 해체되고 말았다.
끝없는 설전에 질린 마샬(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은 신탁 통치안을 완전히 포기하고 9월 17일, 한국문제를 UN에 상정했다.
이승만이 주장해왔던 대로 UN을 통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했다.
한국문제를 껴안게 된 UN총회는 1947년 11월 14일의 본회의에서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북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미국 안을 43 대 0으로 채택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독립정부가 수립된 후 7월 1일까지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결의를 했다.
UN의 결의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 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써 구성된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현지조사를 펼쳤다.
2.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가. 메논
1948년 1월 8일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60여 명이 한국에 도착했다. 위원단은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의를 열고 메논 박사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K. P. S. 메논은 인도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고 샌프란시스코 유엔창립총회의 인도 대표로주중 인도대사를 역임했다. 주중 인도대사로 근무하던 중 유엔이 파견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일원으로 1948년 1월 내한했다.
메논은 1948년 1월 8일부터 3월 18일까지 한국의 건국과 관련된 유엔의 결정이 진행되는 숨 가쁜 시기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단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외무부장관으로 영전하여 본국으로 귀임했다. 4년여 외무부장관직을 수행한 후 1952년 소련 주재 인도 대사로 부임하여 9년여 근무했다.
사진 1. 메논 박사
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
1월 14일 서울운동장에서 2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위원단 환영대회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1월 22일 소련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 점령 하의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되자 남한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입장이 두 갈래로 갈렸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유엔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1월 25일까지만 해도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2월 10일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않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총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엔한국위원단도 국가별로 의견이 갈려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중립을 표방했으며, 시리아 대표는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공산 측에 유리하게 활동했다. 의견이 분분하자 메논은 뉴욕으로 가서 유엔총회의 의견을 듣기로 결정했다. 사실 메논을 비롯한 인도의 입장은 ‘한국의 부자연스러운 분단을 영구 고착화할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이 애초에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던 것을, 이승만이 미인계를 이용해 1948년 3월 12일 표결에서 남한의 독자적 선거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 메논, 유엔에서 “남한에서의 총선거” 요구
당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은 좌우합작이 가능한 중도파 김규식을 한국의 지도자로 밀고 있었고, 메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논은 2월 19일 유엔 소총회에 참석하여 유엔한국위원단 의장으로서 한국 사정을 설명하고 “유엔은 빈손으로 조선을 떠날 수 없다.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는 별개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중앙정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 이승만은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다”라고 연설했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승리였다. 인도의 메논 대표는 찬표를 던졌는데 부표가 예상되던 인도의 태도 돌변은 많은 의혹을 샀다. 인도정부와 메논간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유엔소총회는 1948년 2월 26일 유엔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지역에서 총선을 실시할 것을 가결함으로써 역사적인 제헌의회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될 수 있었다.
3. 이승만의 미인계
가. 모윤숙
‘남한지역에서의 총선 실시’라는 대업(大業)을 성사시킨 메논이 한국으로 돌아오자 이승만은 그를 얼싸안고 목메어 울었다.
메논이 본국 정부의 의견을 거슬러가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바꾸는 과정의 배후에는 모윤숙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1934년 이광수의 소개로 만난 안호상(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는데, 그 후 남편과 결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모윤숙은 메논과 만남의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 온 유엔한국위원단의 숙소가 자신이 살던 회현동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국제호텔이었다.
유엔한국위원단 환영 파티에서 모윤숙과 첫 대면한 메논 박사는 첫눈에 모윤숙의 문학적 재능과 인품에 반하여 파티가 끝나고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비서를 통해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했다.이날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수시로 만나 시와 인생을 논했고,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다.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저녁 메논을 이화장 만찬에 초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마침 이날 메논은 하지 장군과 저녁 선약이 있었는데 모윤숙으로부터 이화장 만찬 연락을 받자 “선약이 있으니 차나 한 잔 마시고 나오겠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화장을 방문했다.
사진 2. 모윤숙
나, 모윤숙과 메논의 사랑
모윤숙은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하는 과정에서 그가 김규식이 주장하는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정부 구성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윤숙은 그것이 이상적인 통일론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이승만이 주장하는 남한만의 총선거론이 한국의 장래를 위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저녁 이승만과의 만남이 이승만과 남한을 위한 중대 고비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모윤숙은 메논에게는 비밀로 하고 하지 장군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메논 박사의 비서를 사칭하고 “오늘 저녁 메논 씨가 급한 일이 생겨 저녁식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약속을 다음으로 미뤄 달라”고 거짓말을 했다. 덕분에 메논은 꼼짝없이 이화장에 붙들려 이승만과 식사를 해야 했다. 만찬이 끝난 후 이승만은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며 한국 정세를 간절하게 호소했다.
메논이 유엔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이봐 윤숙이, 밤이 좀 늦었지만 메논 씨를 좀 데려와. 중요한 일이야”하고 명을 내렸다. 모윤숙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 수 있어요” 하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이승만은 “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고비에 밤낮이 어디 있나. 전화 좀 걸어 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하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모윤숙은 메논에게 금곡릉 산책을 가자고 불러낸 다음 체면 불구하고 이화장으로 안내했다. 이승만이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인삼차를 마시고 있는 사이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을 부엌으로 불러내어 한지에 붓글씨로 쓴 두루마리를 주었다.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저명인사들의 서명이었다.
당시 한국위원단은 자신들이 협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정당 사회단체의 인물들을 공식으로 인정하는 요식행위로 최소한 200명 이상의 지지자 서명을 받은 연서 명부를 요구했다. 김규식이나 김구는 지지자 서명을 이미 제출했으나, 이화장은 이기붕이 깜박 잊고 제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타이프를 쳐서 사인을 하거나 도장을 찍은 서명은 무게가 없다고 하여 모두 한지에 붓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프란체스카 여사가 모윤숙에게 전달한 서명은 대부분 가짜였다. 이승만의 비서 윤치영이 꼬박 하루에 걸쳐 서로 다른 필적으로 이름을 쓰고 도장을 파느라 땀을 흘린 것이다. 후에 모윤숙이 이 문제로 항의하자 이승만은 “정치라는 게 그런 거야. 모르면 가만 있어”라고 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모윤숙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화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메논 씨의 코트 주머니에 이 두루마리를 가만히 넣었다. 이것만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죽을죄를 지었어요. 실은 금곡릉이 목적이 아니라 이 두루마리가 목적이었습니다. 이 박사를 이해해 주시고 좀 비사무적으로 된 일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서류는 사무국을 통해 나에게 와야 유엔에 도달하는 거예요. 이런 비공식적인 일을 이 박사는 왜 미스 모에게 시킬까요. 그는 포기한 줄 알고 있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잔인하리만큼 냉엄했다.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모든 이유는 시일이 지난 후에 역사가 의장님께 일러 줄 겁니다. 이 서류를 만약 의장님이 성공시키신다면 말이죠. 저는 의장님을 믿습니다. 온 한국민과 함께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한국 사람은 지금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가만히 내 손에 악수를 청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는 암시였다.메논 씨는 하지 중장의 의도나 중립노선을 걷고 있는 인도 정부의 훈령을 묵살하고, 아니 그 자신의 애당초 생각과도 어긋나게 유엔총회에서 이 박사의 노선을 채택하도록 역설, 이 박사를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라고 찬양하고 2주일 후에 다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엔한국위원단의 임무가 끝나 영영 인도로 돌아가기 며칠 전, 우리는 이화여대에서 두 번째 강연을 끝내고 이번에는 이화장이 아닌 진짜 금곡릉으로 마지막 산책을 갔다.’
다. 메논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
이승만은 메논이 유엔소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후 더 초조해졌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보를 쳐야 해, 윤숙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그가 잊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해” 하고 말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직접 타이프를 친 다음 ‘매리언 모’(Marion Moh, 모윤숙의 영문 이름)라고 끝맺고는 모윤숙에게 사인을 하라고 했다.
이 박사가 모윤숙의 이름으로 메논 씨에게 친 전보는 일주일 동안에 10통이 넘었다. 메논은 모윤숙이 그렇게 유창한 전보문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꼬박꼬박 답전을 보내주었다. “한국민이 원하는 대로 힘쓰고 있소. 선이(모윤숙의 딸)에게 초콜릿을 전해 주기 바라오”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다.’
메논은 1965년에 자서전 『많은 세계들』(Many Worlds)에서 당시 자신이 남한만의 총선거로 입장을 바꾸게 된 과정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모윤숙은 시인일 뿐만 아니라 애국자였다. 그녀의 태도는 상당히 단순했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의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남한에 주권공화국을 세우려 투표하는 것은 나라 전체의 독립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배반이었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개의 시도 읊어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만일 나의 나라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공직 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라. 후일담
이승만은 모윤숙의 공적에 대한 보답으로 1949년 6월 회현동에 집을 한 채 주면서 여기서 문화 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이것이 펜클럽의 모체가 되었고, 이 집은 한국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여기에 문예사의 간판을 걸고 『문예』지가 탄생했고, 이를 이어받아 조연현이 『현대문학』을 발간했다.
모윤숙은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받고 귀국하는 길에 1949년 2월 메논의 초청을 받아 인도를 방문했다. 모윤숙은 인도에 한 달 간 머물며 국빈 대접을 받았고, 네루 수상과 환영만찬을 함께 했다.
1949년 3월 17일 오후 3시경, 모윤숙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연세대 뒷산에 있는 언더우드 2세(원한경) 댁에서 교수 부인들이 모였다. 이때 공산당원이 모윤숙을 살해하기 위해 원한경의 집에 침입해 총격을 가했는데, 그만 원한경의 부인 에델 언더우드 여사가 그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모윤숙은 6‧25 때 피난을 가지 못하고 적 치하의 서울에서 3개월을 숨어 살았다. 이 와중에 『뉴욕타임스』에 모윤숙이 한강에서 사망했다는 오보가 실렸다. 그 때 인도 외무장관이 된 메논은 뉴스를 접하고 인도 신문에 장문의 애도사를 썼다. 얼마 후 모윤숙이 살아 있다는 내용이 다시 보도되자 메논은 주일 인도 대사에게 “모윤숙을 찾아내 일본으로 피난을 시켜 달라”라고 협조를 부탁했다.
주일 인도 대사는 수소문 끝에 모윤숙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걸었다. “메논 장관의 요청이다. 주일 인도 대사관 내에 숙소를 마련해 놓았으니 딸과 함께 일본으로 초청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메논은 모윤숙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다시 곤경을 당하면 누가 매리언(모윤숙)과 써니(모윤숙의 딸)를 보호해 주겠소. 써니는 인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옥스퍼드에 유학 시킬 테니 빨리 일본으로 가서 몸을 회복한 후 인도로 오시오.”
메논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국내 곳곳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문을 모아 1948년 『메논 박사 연설집』을 발간했다.이 책의 발간 과정에서 이승만이 서문을 직접 썼는데, 그만큼 이승만이 메논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대 최고의 인격과 지식과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메논과 모윤숙의 국경을 넘나든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한 편의 담백한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이승만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아름다운 드라마는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모윤숙은 한국 전쟁중에 그는 낙랑클럽을 이끌고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였는데, 모윤숙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논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 접대한 사람은 델레스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콜터, 밴프리트 장군과 무쵸 대사 등이었다.
1951년 부산의 피난지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휴전 후에는 계속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하였다.
서울을 수복한 뒤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하였고, 이후로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후 1960년 국제 팬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등을 수여받았으며 제5공화국에서는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고, 1989년에는 예술원 원로회원에 추대되었다. 사후에는 199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러한 모윤숙을 대한민국건국을 부정하는 종북좌파들이 가만 둘리가 없다. 창녀니 뭐니 온갖 욕지거리를 다 퍼붓더니 결국 친일파 제조공장인 소위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곳에서 친일파인명사전에 모윤숙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