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만능주의 외 9편
강상기
저 노을을 보라
죽음 이쪽 바다에
가진 거 모두를 아낌없이 뿌린다
바다는 황금가루 넘쳐흐르고
황금구름 속을 황금갈매기 날고
가난한 어부조차 황금 노를 젓는다
이 황홀한 황금만능주의 앞에
풍요로운 몰락의 선물이 되어
나는 황금 상으로 고요히 서 있다
뱀이 하늘을 날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빛났다
한탄강이 흐르고
솔 푸른 절벽 바위 아래
임꺽정이 솥단지 걸었다는 고석정을 지나
건물은 부서져 남은 벽만 빠꼼빠꼼 총알구멍이 난
철원 노동당 사무소에서
무심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한 마리 독수리가 공중에 원을 긋고 있었다
굵은 허리띠 같은 것이 독수리의 목줄기를 감고 있었다
뱀은 비로소 알았다
목숨을 던져야만
하늘 세상 볼 수 있음을
자유인
큰 도로 양쪽 인도에 행인들이 녹색등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서 있다 한 중년 남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유유히 걸어간다 건너편 행인 사이를 빠져 나갈 때까지 그는 당당했다 신호위반이니 민주주의의 기본이 틀렸다는 것과는 아랑곳없었다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자동차도 그의 앞에 멈출 뿐이었다 행인들은 신호가 바뀌자 서로 어긋나는 길들을 종종거리다 느낌표처럼 사라졌다
꿈꾸기
택시기사가 불평을 한다 술 담배 다 끊고 오직 택시 몰아 다섯 식구 근근이 먹고 살면서 1년에 500만원을 모았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것이 꿈이었기에 코피 쏟아 일했다 그렇지만 지상전셋방은 1800만원 달란다 지하전세 빼도 모자라 관악구에서 광명시 변두리로 쫓겨나야 했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에이, 이러니 혁명을 생각할 수밖에, 확 세상 한번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택시기사는 살고 싶지 않은 질주를 하며 통곡하듯 외쳤다
감씨
버스 정류장 바닥에 감씨가 버려져 있다 감씨를 발로 살짝살짝 건드려 보다가 문득 이 감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싹을 틔우지도 못하고 이 겨울에 이리저리 발로 채어 뒹굴다가 끝나버릴 것이 아닌가? 이 감씨가 흙을 만났더라면 푸른 잎을 살랑거리며 감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홍시도 매달릴텐데 뱃속에서 자라다가 가위질에 사라지는 것들처럼 한세상 이렇게 끝나다니!
한쪽 발을 빌리다
아이젠도 없이
북한산을 올랐다
등산객들에 밟힌 눈길은
미끄럽고 위태했다
길동무가
왼쪽 발 아이젠을
벗어 주었다
미끄러운 산행을
한쪽 발씩 나누니
북한산이 울안 뒷동산이었다
기다림
산은 춥고
눈발이 흩날렸다
하산길
절 담벼락에 서 있는
목련나뭇가지에
막 터질듯이
부풀어 있는
꽃숭어리
악의 축
한국인 부부는 중국이 호기심천국이었다 돈독이 독버섯처럼 퍼진 나라에서 부부는 택시를 탔다 한적한 산길에서 차가 멈춰 섰다 손짓발짓 택시를 밀어달라는 뜻 눈치 채고 착한 남편은 아내를 차에 두고 택시를 밀었다 시동이 걸리고 택시는 멀리 사라졌다
일주일 뒤돌아온 아내 시신의 장기는 적출되어 있었다
비
명상의 봉오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에
너는 왔다
바다를 거처로 삼고
하늘을 여행하는 순례자여
유리벽에 갇히다
카메라가 빼곡한 거리와 실내,
지하주차장에도 지하철에도 은행에도 사무실에도
몰래 몰래가 자유스런 세상,
신용카드 사용도,
위치 추적이 가능한 핸드폰도,
하루의 동선이 그대로 노출되는
몰래가 자유스러운 부자유 시대의 편리함이여,
사방에서 번득이는 눈초리에
진정 내가 없다
강상기
전북 임실 출생.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색풍토』,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 『자신을 흔들어라』.
강상기 연보
1946년
임실군 삼계면 신정리 215번지에서 강두열(부), 최예분(모)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그때 아버지는 21살, 어머니는 19살이었다. 젊은 부모라서 양육은 주로 조부모님 몫이었다. 어린 내가 경기를 일으켜 죽을 지경에 조부가 우황을 먹여 살 려내다. 1950년 불안한 집안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포성소리를 들으며 지내다.
1951년
저녁에 빨치산이 집에 들어와 약탈을 하다. 조부께서는 나를 등에 업고 빨치산이 요구하는 대로 곡식을 내주었고 어머니는 재봉틀만은 뺏기지 않다. 임실군 오수의 시장 부근에 있는 집으로 부모님이 이사하다. 아버님이 오수초등학교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찾아간 부모 집에서 엄마가 낯설어 여름날 열어 논 창호지 문 뒤로 숨다. 이후 말썽만 피웠다.
1952년
완주군 삼례로 이사하다. 부친이 삼례초등학교로 전근되셨기 때문이다. 삼례지서 뒤 어느 집에 세들어 살았다. 재봉틀서랍에서 돈을 꺼내 동네가게에 가서 호루라기, 눈깔사탕, 비과 등을 사서 동네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다. 저녁 무렵 엄마가 돈의 용처를 물었다. 어머니는 나를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하면서 대나무자로 마구 때렸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무리지어 동네아이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나를 지도자감으로 생각해서 지도했어야했다. 몇 달 후 성당이 있고 농협창고가 있고 기차역이 가까운 후정리로 이사를 하다.
1953년
삼례초등학교에 입학하다. 등교는 아버지 출근길에 항상 동행했다. 하굣길은 집에서 기르던 검정개 메리가 교문에서 기다렸다.
1954년
살던 집이 관사였는데 조부께서 불하받다. 집 앞 텃밭 500여 평도 사다. 우물이 깊어 물이 좋기로 동네에서 유명해서 이웃들이 물을 길어가다. 집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이루어졌고, 밭농사를 지으니 먹는 게 푸짐하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아욱, 가지, 부추, 단수수, 양파, 고추, 토마토, 참외, 수박 등. 그러나 밭에서 풀을 뽑고,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하다. 거기다 돼지까지 기르고 있어서 독새풀을 베어다 돼지한테 먹이고 또 논농사도 2400평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심부름을 해야 했다.
1955년
동네 아이들과 철교 위를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다리 아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수영도 할 줄 몰랐는데 물살에 쓸려 냇둑 물풀이 많은 곳에 처박혔다가 아이들한테 구조되다.
1956년
내가 제일 기다리는 것은 방학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는 임실 고향에 계시는 조부모님 댁에 가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조부께서 붓글씨와 한자를 가르쳐 주셨기에 좋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시조를 암기해서조부께 들려드리면 몹시 좋아하셨다. 저녁에는 조부님은 한시도 지으시고 시조창도 하시면서 방안까지 들어와 있는 달빛 속에 앉아 계시다. 조부님은 전우선생 제자로서 한학자이셨고 고종황제 인산 일에 맞춰 한양에 가셔 3․1만세운동에도 참여하시다.
1957년
어머니가 아프시면 내가 밥을 하기도 하고 간식거리를 만들어서 동생들과 함께 먹기도 했는데 어머니께서는 “네가 큰딸이었으면 좋을 뻔 했다”고 하시면서 아쉬움을 나타내다.
1958년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종로통으로 지나가는 전차가 좋아서 일없이 여러 번 타다. 부모님이 용돈을 많이 주셨는데 거의 쓰지 않고 다시 집에 가져가다. 부모로부터 칭찬을 기대했으나 몹시 꾸지람을 듣다. 쓰라고 준 돈인데 바보같이 쓰지 못했다고. 나는 그 뒤로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불안해서 다 써버리는 낭비벽이 생기다.
1959년
삼례중학교에 입학하다. 담임선생님이 도서관 담당이셨다. 나는 담임선생님 보조역을 하면서 도서 대출과 반납 업무를 맡다. 이때 많은 책을 접하게 되다. 세계위인전과 탐정소설을 많이 읽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자 학교에서 이승만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고 8절지 갱지를 나눠주다. 나는 마침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를 읽었던 터라 8절지 2장반을 쓰다. 학내에서 장원을 해서 상장과 상품을 받아 집에 가져갔더니 아버님께서 몹시 역정을 내시다. 상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다. 나는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끼다. 수업 도중에 이승만을 찬양했던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배척되다. 나는 이때부터 시사에 관심을 갖게 되다.
1961년
담임선생님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선생님이셨다. 학생들이 하교하고 난 뒤 음악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가 좋았다. 더구나 선생님은 『자유문학』을 구독하시면서 시를 열심히 쓰시는 분이었다. 학급문고 『복사꽃』을 프린트본으로 간행하기도 하다. 군사쿠데타로 민주정권이 붕괴되다. 혁명공약을 암기하라고 했고 학생들에게 배척당한 선생님들이 다시 교단에 서다.
1962년
목포해양고등학교 항해과에 진학하다. 유달산 아래에 있는 학교였는데 교실유리창 밖으로 목포 앞바다가 잘 내려다 보였다. 국립학교여서 수업료는 면제받았고 교복과 급식비를 제공받다. 군대식 교육인데다 3월에 심한 독감에 걸려 고생한 탓인지 학교 수업도 재미가 없었다. 하굣길에는 항구에 들러 뱃고동을 불며 떠나는 외항선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숙생활을 하고 있을 때 최희준의 <하숙생>이 라디오연속극 주제가로 흘러나왔는데 특히 그 노래를 지금도 좋아한다.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다가 1학기 말에 사촌형이 다니고 있던 전주 신흥고등학교로 전학을 하다. 신흥고등학교는 숲에 둘러싸여 캠퍼스가 몹시 아름다웠다. 점심때는 항상 좋은 음악을 들려주어서 정서적으로 퍽 좋았으며 기독교 학교인데다 선생님들께서 민주적으로 학생들을 대해 주다. 국사 선생님 강의에 매료되어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된 계기가 되다. 국어수업시간에 가을에 관한 수필을 쓰게 되었는데 내 글이 잘 되었다고 「가을의 상견」이라는 제목으로 교지에 실리다. 처음으로 내 글이 활자화되다.
1963년
학교공부에 전념하다. 삼례에서 전주까지 통학을 했는데 한 번은 밤 10경 이미 출발하고 있는 마지막 열차를 가까스로 탔는데 그만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순간 모자를 포기할까 뛰어내릴까 하다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렸다. 플랫홈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 쓰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12킬로키터가 되는 신작로를 걸어 집에 돌아오다. 달이 밝고 저녁을 굶은 탓이었는지 그 밤은 나에게 색다른 느낌을 안겨주다.
1964년
교내 백일장이 있었다. 희망자만 참여하게 되었는데 백일장에 참여하는 친구를 따라 교내 언덕 숲에서 그 친구 가방을 지키고 있는데 그 친구가 기다리기 지루할 테니 너도 써보라고 해서 쓰다. 그 친구가 내가 쓴 시를 가져가 제출하다. 그 작품이 장원을 하다. 나는 내 재능을 묻고자 신석정 시인을 찾다. 신석정 시인은 술부터 가르치고 시 이야기는 하지 않다가 전송하면서 열심히 써보라고 하시다. 대학입시를 팽개치고 시만 쓰다. 그리고 전주 고교생 혼성동아리 <길>동인을 만들다. 삼례 금성다방에서 가을에 시화전을 했는데 신석정 시인은 방명록에 “시도는 가시밭길이다”고 쓰셨고 당시 국어를 가르치셨던 허소라 시인은 “영원한 기약을…” 이라고 쓰시다. 학교에서 간행하는 『신흥춘추』에 산문을 발표하다. 한일회담반대 시위에 참가하다. 보릿고개에 이웃돕기 호소 교내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얻다. 술과 담배를 배우다. 술과 담배는 교지 편집을 하면서 중국요릿집 뒷방에서 배우다.
1965년
전주교육대학에 입학하다. 교사가 되는 꿈은 중1때부터다. 위인전을 읽어보니 성인들의 공통점이 제자가 있는 스승이다. 성인들은 해와 달 같지만 나는 작은 반딧불이라도 되자고 생각하다. 기숙사에 입사하다. 그러나 한 달 만에 기숙사를 나오다. 한 방에 다섯 명이 생활했는데 소설가 박범신도 나와 한방을 사용하다. 내 기숙사 등록비 1,410원을 누군가 훔쳐다가 제 앞으로 등록을 해버려서 나는 기숙사를 나오다. 도둑은 내 이삿짐을 천연덕스럽게 역까지 들어다 주다. 나는 강의 시간에 잘 들어가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보다가 해가 저물면 술을 마시다. 주로 여친들이 술을 사다. 신석정 시인이 『문학춘추』에 추천을 해준다고 해서 시를 보냈는데 재정난으로 출판이 되지 않아 햇빛을 보지 못하다. 공부는 하지 않아서 11개 과목이 재시험에 걸려 재시험을 봐 통과되고 문화사 1과목이 재수강에 걸리다.
1966년
학보사 편집장을 맡다. 『시문학』에 「봄이설」 「바다」 두 편을 발표하고 ,『현대시학』에 「새로운 풍물」을 발표하다. 월간 종합지『세대』 6월호에 제1회 시 부문 「이천이백만헥터의 딸기밭」으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다.
1967년
장수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다. 2학년을 담임했는데 수업 중에 아이들이 너무 몸을 꿈틀거리는 이유가 몸에 이가 많은 탓이었다. 수업을 팽개치고 이를 잡아 필통에 담으라고 했더니 도망간다고 해서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고 집에 가서 오늘 수업 중에 이를 잡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하라고 했더니 그 뒤로 아이들은 수업 중에 몸을 트는 아이가 없었다. 나는 법정 수업대로 오전 수업만 하는데 다른 분들은 6교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일제고사 때문이었다. 나는 일제고사 성적이 나쁘면 오후까지 수업하고 방과 후에 함께 오락하는 시간을 없앤다고 했더니 2학년 다섯 반 중에서 항상 일등을 했다. 오후에는 아이들을 점심을 먹고 나오라고 해서 냇가로 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합창도 하고 오락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아 주다. 그러나 새로 지은 깨끗한 교실에 환경정리를 하라고 해서 교훈과 급훈만 걸어놓고 뒤에 시사판은 정리를 하지 않았더니 장학사가 검열 와서 호통을 치기에 “나도 국가로부터 자격을 부여받고 학생을 지도하는 거다. 내 아이들은 내가 지도한다. 천편일률적인 이런 시사판은 오히려 학생들의 상상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맞서다가 사표를 내다. 지금은 그 순박했던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1968년
상경하여 사촌형 집에서 얹혀 지내다가 아버님 권유로 원광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다. 시인이신 박항식 교수님의 도움이 컸다.
1969년
원광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정양 시인의 국어시범수업을 참관하다.
1970년
익산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동료 교사해직에 반발하다가 사표를 내다. 가을에 상경하여 김지하의 「오적」이 발표된 사상계를 읽고 신춘문예에 응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1971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부문에 「편력」이 당선되다. 군산중앙상고 교사로 부임하다. 공동시집(최학규, 채규판, 강상기) 『이색풍토』(한얼문고)를 간행하다. 영어를 배우기 위하여 몰몬교회에 나갔는데 그놈들은 한국말을 배우기 위하여 영어를 잘 쓰질 않아서 나가지 않다. 길 지나가는 양키놈들을 붙들고 이야기를 하면 여자 소개해줄 거냐고 물어서 때려치우다. 학교 직원 한 분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데 교회로 인도해서 나갔다가 목사가 부자집이나 권력 있는 집만 심방하고 가난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싫어서 교회에 나가지 않다. 퇴근하면 영화동에 가서 술을 마셨고 심심하면 월명공원을 산책하면서 장항 쪽 제련소 굴뚝연기를 바라보다.
1972년
익산 원광여자고등학교에 부임하다. 원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다. 총각교사로서 고3 입시수업을 들어갔는데 처신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 가급적 학생들과 개인적 면담을 피하다. 참으로 풋풋하고 예쁜 아이들도 많다. 아내감을 골라볼까 생각했는데 나이 차가 많이 날 것이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고, 이래저래 생각을 접다. 대학원공부에다가 학생들 입시까지 지도해야 했기에 시 쓰는 일은 뒤로 미루다.
1974년
원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하다.
1975년
8월4일 뒤늦게 방위에 입대하다. 5,000원을 주면 면제해 준다고 하는 동사무소 병적계 직원의 제의를 거절했더니 바로 방위 영장이 나오다.
1976년
전주경원동 동사무소에서 9월29일 이병으로 제대하다. 12월5일 7살 연하의 최승희와 결혼하다.
1977년
원광여자고등학교에 재부임하다. 익산시 마동에 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신혼살림을 차리다. 늦가을에 장녀 영욱이 태어나다.
1978년
익산시 영등동 변두리에 단독주택을 마련하다. 작은 정원을 예쁘게 가꾸다.
1979년
초겨울에 차녀 신욱이 태어나다.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고 해서 밤새 친구들과 술을 마신 탓으로 다음날 학교 수업 중 창밖에 토악질을 하다.
1980년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더 매서운 추위가 닥치다. 나는 교권옹호위원회를 만들어 교육정상화 노력을 했다는 이유로 5.17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하여 11월에 강제 해직되다. 이후 인물연구소 임중빈 사무실에서 출판부장으로 석 달 근무하다.
1981년
군산제일고등학교에 부임하다. 교장은 교육정상화 노력을 한 열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해줄 것을 부탁하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광웅 시인과 함께 근무하다. 익산에서 군산까지 출퇴근을 하다.
1982년
<오송회> 사건으로 20여 일 동안 불법구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11월 25일에 구속되다.
1983년
5월 23일 선고유예로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되다. 7월 28일 광주고등법원에서 법정 구속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되다. 12월 27일 대법원에서 상고기각하다.
1984년
김남주와 함께 같은 방에서 지내다가 3월26일 만기 출소하다.
1985년
익산에 있는 단독주택을 팔다. 그동안 진 빚을 갚고 전주시 우아동 18평 아파트 전세로 들어가다. 정보기관의 방해를 어렵사리 물리치고 전주한샘학원에서 대입국어 강의를 하다.
1986년
생활난으로 인한 수렁 속에 미래가 보이지 않다. 1월 27일 협의이혼을 하다. 전남 광주 한림학원에서 대입국어강의를 하다. 돈이 모아지지 않아 서울학원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다.
1987년
서울 경일학원에서 강의를 하다. 코밑과 눈 주위에 치약을 바르고 6월 항쟁 시위에 참가하다. 방배동에 33평 아파트를 사다. 10월20일 재결합을 하다.
1988년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김영석 시인을 만나다. 우연히 우편함에 있는 편지를 보게 되어 확인한 결과 바로 내 집 위층이었다. 이후 소설가 김준일, 이윤기, 시인 서정춘, 조영호도 김영석 시인 집에서 자주 보게 되다.
1989년
방배동에 15평 오피스텔을 사서 책을 옮겨놓고 친구들도 주로 이곳에서 만나다.
1990년
12월 20일경 5박6일 태국 여행을 하다. 학원 강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는데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나의 전과 사실이 드러나다. 겨우 단수여권이 발급되어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보기관에서 나의 언행에 대해서 다른 강사들을 조사하다. 학원 강의가 바빠 중고 자가용을 구입하여 기사를 고용했는데 계속 말썽을 부려 면허를 취득할 필요를 느끼다.
1991년
운전면허를 취득한 후 중고를 팔고 신형 수퍼살롱을 구입하다. 8월 초순에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일본을 여행하다. 12월 하순경 직장동료와 함께 싱가포르,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여행을 하다.
1994년
4월에 늦둥이 아들 현욱이가 태어나다.
1995년
경일학원에서 강남청솔학원으로 옮기다.
1996년
1월에 싸이판을 여행하다. 3월 18일 산문집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있다』(글나루)를 출간하다. 양수리 「사랑터울」 카페 옆에 22평 빌라를 전세내다.
1997년
5월 18일 산문집 공저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살림터)를 출간하다.
1998년
3월 20일 시집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엔터)를 출간하다. 시 전문 계간지 『시와 함께』를 창간하여 겨울호를 발행하다.
1999년
『시와 함께』 봄호와 여름호를 끝으로 폐간하다. 9월에 진안제일고등학교로 신규 발령을 받다.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파면된 지 17년 만에 다시 교단에 서게 되다. 전주 부모님 댁에서 진안까지 출퇴근을 하다.
2000년
진안에 다세대주택 전세를 얻다. 자취하면서 지내다. 마이산 금당사에 들렀다가 주지인 성호스님을 알게 되다.
2001년
전교조 진안군지부장을 역임하다. 12월 23일 차녀 결혼하다.
2002년
1월 아내, 장녀, 늦둥이와 함께 중국 남부지역을 여행하다. 2월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인정을 받다. 5월 하순에 뉴욕에서 유학 중인 장녀 졸업식에 참석할 겸 아내, 늦둥이와 함께 미국 동부지역을 여행하다.
2003년
3월 서울 석관중학교로 전입되다. 박해전회장의 권유로 인터넷신문『참말로』에 교육에세이를 연재하다.
2004년
2월 20일 교육에세이집 『자신을 흔들어라』(문원출판)를 출간하다. 교육에세이집을 읽은 김제 문수사 주지 수진스님을 만나게 되다. 수진스님은 원광여자고등학교에서 내가 가르친 제자다. “너는 나중에 중이 될 것이다”라고 내가 말한 일이 있는데 말이 씨가 되다.
2005년
3월 이수중학교로 전보되다.
2006년
5월 2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오송회>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진실 규명을 신청하다. 9월 중국 북경지역을 여행하다.
2007년
1월 28일 장녀 결혼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4월 3일 조사 개시를 의결하고 조사를 진행하다. 6월 13일 국가는 위법한 확정판결에 대하여 피해자들과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내리다. 7월 18일 광주고등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다. 10월 모친께서 영면하시다.
2008년
2월 25일 시집 『민박촌』(시와에세이)을 출간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08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하다. 11월 25일 재심에서 <오송회> 사건 관계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다.
2009년
이수중학교에서 8월 하순에 정년퇴임을 하다. 늦둥이가 민족사관고등학교에 합격하다.
2010년 차녀가 원장으로 있는 방배동 <사랑채한의원>에서 일을 돕고 있다. 봄에 간행할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시에티카 초대시인(작품론)
‘황금 노’, 그 역설의 미학
호병탁
1.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책상이나 의자는 내 정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외적 객체이다. 그들은 나의 작업공간에서 유용한 집기의 일부로서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책상과 의자일 뿐 그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의 사고와 무관하게 배타적으로 존재하며 나를 그들의 외부에 남아 있게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책도 책상이나 의자처럼 외적세계에 존재하는, 즉 여타의 사물과 같은 물질적 객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책은 내가 그것을 펼쳐 보는 순간 스스로 둘 사이의 폐쇄되었던 장벽을 허물고 자신을 개방하기 시작한다. 이제 책은 나의 의식에 기대어 존재의 근거를 갖게 되고 이것이 누구에게나 독서행위에 발생하는 최초의 현상일 것이다.
내가 강상기의 문학 작품을 앞에 대할 때 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기를, 다시 말하면 그것을 읽는 나의 내부에 존재하기를 주장한다. 혹은 그것은 나를 그의 내부에 존재하도록 요구한다. 독서를 통해 한 대상물, 즉 강상기의 작품 의미를 파악하기 시작하자마자 작품이라는 물질적 객체는 자신의 객체성을 단념하는 한편, 독자인 나는 강상기라는 타인의 이성적 존재의식을 지각하기 시작한다. 이는 강상기가 사고한 것을 사고하는 것으로 그의 의식과 내 의식의 마주침에서 둘의 경계는 무너진다. 최소한 내가 독서행위를 계속하고 그것을 끝낼 때까지는 종이위에 써진 그의 작품은 질료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이미지와 관념으로 변하여 나의 내적 자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유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다. 어떠한 관념도 그것을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은 나 자신이 그러한 관념의 주체가 된다. 모든 관념은 언어적 진술로 주체적 원리인 나를 위해 봉사한다. 여기에서 모순이 야기된다. 내가 강상기의 글을 읽고 있을 때 어떻게 내가 하지도 않은 언어적 진술에 대한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이든 사유한다하자. 사유하자마자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나 자신의 두뇌에서 비롯된 사유임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독서행위를 수행하며 나는 시인의 정신세계에 속하는 사유를 나의 정신세계 속에서 사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모든 사유는 주체가 있어야한다. 이 경우 나는 낯선 사유의 주체가 내 안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강상기는 최소한 내가 그의 글을 읽는 동안은 나를 밀어내고 나의 정신세계를 차지한다. 이러한 독서현상의 특성은 낯선 이미지와 관념들의 주인인 강상기에게 내 안으로의 길을 내어줄 뿐 아니라 주체적 원리의 모순 또한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즉 나는 나 자신을 잠시 망각하고 낯선 사유의 주체와 동화되어야하는 것이다. 랭보의 말마따나 “나는 한 타인이다.”
2.
위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람직한 독서현상(비평)은 바로 타인의 느낌을 내 속에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두 의식이 동화’되어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을 견지하며 그의 시를 읽을 것이다.
이번에 발표된 그의 모든 시들은 나름대로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처럼 광채를 발하기까지의 연마과정과 결과물의 미적효과에 대한 소상한 연유를 밝히기에는 더욱 긴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지만 그 중 반짝이는 별 하나를 정시(正視)해 본다.
저 노을을 보라
죽음 이쪽 바다에
가진 거 모두 아낌없이 뿌린다
바다는 황금가루 넘쳐흐르고
황금구름 속을 황금갈매기 날고
가난한 어부조차 황금 노를 젓는다
이 황홀한 황금만능주의 앞에
풍요로운 몰락의 선물이 되어
나는 황금 상으로 고요히 서 있다
―「황금만능주의」 전문
얼핏 보아도 발표된 그의 시편들은 ‘황금만능주의’, ‘뱀이 하늘을 날다’, ‘자유인’, ‘한쪽 발을 빌리다’, ‘악의 축’, ‘유리벽에 갇히다’와 같이 무언가 현실에 대한 거부와 저항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제목들이 많다. 물론 내용도 제목이 그대로 연장되어 찬바람이 부는 시편도 개중에는 있으나 역설적으로 대개의 작품에는 제목과는 정 반대의 따뜻한 훈풍이 일고 있다. 바로 이 시의 경우가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 시는 점묘화법으로 그려진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이다. 대낮의 열기를 품던 태양은 이제 황금가루를 물결 위에 뿌리며 조용히 수평선 너머로 하루를 접고 있다. 구름도 갈매기도 금빛으로 물들었다. 포구로 돌아오는 고깃배의 어부가 젓는 노도 금빛으로 반짝인다. 대자연이 아낌없이 선사하는 이 황홀한 풍경을 바닷가의 한 나그네도 황금의 정물처럼 서서 바라보고 있다. 이 시는 그림이다. 애틋한 서정이 가득한 그림이다.
황혼의 바다풍경을 언어로 묘사한 이 그림은 이미 충분한 심미적 효과를 성취했다. 그러나 문학에는 그림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즉 석양의 바다라는 외적 풍경의 재현뿐 아니라 그것을 보고 느끼는 인간의식의 내면을 재현하는 영역 또한 존재한다.
‘법화경’에서는 금, 은, 마노, 유리, 거거, 진주, 매괴를 들어 칠보라 하고 그중의 으뜸이 황금이다. 강상기는 이 짧은 시에서 황금을 여섯 번이나 거론한다. 특히 2연은 행마다 ‘황금가루’, ‘황금구름’, ‘황금갈매기’, ‘황금 노’ 등으로 풍요로운 금빛이 넘실거리고 있다. 황금은 불의 제련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가장 고귀한 획득물이다. 불의 단련이라는 세상의 시련을 거쳐 얻어진 황금의 이미지는 현세의 가치체계의 최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이 금이 ‘금언(金言)’이나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형용사적 형태의 역할을 하게 되면 이때의 금은 비유적 표현이 되면서 현세적 가치에서 초월적 가치로 격상된다.
그런데 언제나 가치의 격상을 구현시키던 금의 최고 가치는 구름이나 갈매기를 수식하는 순간 무가치한 것으로 추락한다. 황금구름은 저녁나절에나 석양에 젖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냥 구름에 불과하다. 황금 갈매기도 황금 노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현세의 가치체계에서도 보잘 것 없을 뿐 아니라 생활의 본보기가 될 귀한 말이나 부처의 입에서 나온 불멸의 법어를 가리키는 금언처럼 초월적 가치도 없다.
강상기는 외적으로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풍요로운 바다를 그렸지만 그의 내면의식이 그려낸 것은 가난한 바다일 뿐이다. 갈매기는 끊임없이 배가 고파 끼룩거리며 물고기를 찾는다. 발동기도 없이 노를 저어 배를 몬다는 것은 어부의 신산한 삶을 의미한다. 황금빛으로 물든 이 가난한 것들을 바라보는 ‘나’는 바닷가를 뛰고 달리지 못하고 조상처럼 고요히 서 있을 뿐이다. 이제 그의 그림에는 역으로 페이소스가 가득하다. 그는 가난함과 풍요로움이 동시에 한 풍광으로 묘사되는 아이러니를 창출했다. 즉 묘사된 것과 의미된 것이 반대가 되는 표현방법이 사용된 이러한 아이러니는 시인의 의도적인 의식과 역설적인 사유의 산물이다. 이는 시의 문학적 성취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여하튼 강상기는 한 그림에 두 가지의 뜻을 담아내고자 하는 비논리적 역설의 추구에 멋들어지게 성공하고 있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현세는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사실로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다운 삶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부정한다. 실제는 황금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의식은 그것의 ‘지배자’가 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현상은 ‘행복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서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되어진다. ‘황금’ 자체는 황홀할지 모르나 우리의 이러한 의식 앞에 ‘황금만능주의는 황홀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황홀한 황금만능주의’라고 말한다. 또 다른 아이러니가 생성된다. 이때 시인의 의식에 포착된 대상은 인간의 배금주의의 대상인 황금이 아니라 자연이 저녁나절 빚어낸 황금빛이다. 바다, 구름, 갈매기, 노를 온통 황금빛으로 칠하고 있는 자연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황금만능주의자이다. 자연이 만든 황금만능은 아름답다. 따라서 황홀한 것이다. 짤막한 이 시구에는 이와 같은 사유들이 비상하고 있고 역설은 그 존재가치의 근거를 가질 뿐 아니라 시의 미적효과를 제고시키고 있다.
형식주의자들은 이 시에서 ‘나’를 ‘선물’이라고 말하는 데서 유일한 은유를 발견하고 이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선물’이 ‘풍요로운 몰락의 선물’이라는 데 있다. 몰락은 망해서 없어짐을 의미한다. 풍요는 많이 있어 넉넉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의 상식으로 ‘풍요로운 몰락’은 있을 수 없는 궤변(paradox)이다. ‘있음(有)’으로 인해 풍요함도 있는 것이지 ‘없음(無)’으로는 결코 풍요가 될 수 없다. 사실 ‘풍요로운 몰락’ 자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다. 무미한 언어의 습관성을 깨버림으로서 시에 감각적으로 혹은 정서적으로 신기성과 암시성을 담으려하는 시인은 이러한 메타포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유추를 통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실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데서 메타포는 시작되는 것이며 ‘나’와 ‘선물’의 관계는 여러 각도로 유추가 가능하다. 하지만 ‘풍요’와 ‘몰락’은 서로 전혀 닮지도 않았을 뿐더러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그저 반대선상에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강상기의 의식은 이점을 노리고 있다. 사전적 정의로 정반대인 풍요와 몰락은 서로의 의미를 나누어 가졌고 결국 ‘풍요=몰락’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었다. 시적비유는 창조이고 창조는 그 창조가 있기 전의 기존사실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새로운 의미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의미는 이 시에서만 한 번 통할 뿐이다. ‘시는 바로 새 의미의 창조’라면 ‘풍요로운 몰락’은 성공적이다.
지는 해는 몰락을 의미하며 지는 해가 만드는 황금 빛 풍광은 풍요롭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적 유추이며 시인의 의식은 차라리 없음으로 인한 정신적 풍요를 지향한다.
3.
앞에서 이 시는 그림 같다고 언급한바 있다. 이는 이 시가 강력한 시각적 심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게 우선 오관을 통한 외부세계의 감각적 지각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어서 시인은 의미의 모체인 이런 감각적 경험들을 생생하게 재현시키려고 노력한다. 추상적 의미 이전에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자극함으로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시선을 끌어당기려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황혼의 황금빛 바다를 감각적으로, 특히 2연에서, 묘사함으로서 강한 시각적 심상의 성취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의 제목은 심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황금만능주의’다. 제목에서부터 역설의 사유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풍요의 바다는 가난의 바다로 은유된다. 황금만능주의는 황홀한 것이 되며 풍요는 몰락의 의미를 갖게 된다. 심상의 발전적인 전개는 메타포다. 우리의 사유가 좀 더 예리하게 이 짧은 시를 정시한다면 한 두 개의 메타포만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시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 덩어리로 되어있음도 알 수 있다.
황금 노를 팔면 당장 모타 달린 멋진 배로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목제로 된 어부의 황금 노는 삐걱거리며 낡은 배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부는 계속 가난할 것이다. 이 ‘황금 노’의 역설은 강상기의 다른 시편 여기저기에서 자주 산견된다.
강상기는 이 풍요로운 황금빛 바닷가를 뛰고 달릴 수 없다. 슬픈 눈으로 고요히 서서 지켜볼 뿐이다. 움직이지 않는 황금 상처럼.
호병탁
충남 부여 출생.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칠산주막』. 평론 『인가된 무지』 외 다수.
―『시에티카』2010. 상반기 제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