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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 낚시 통신 /윤대녕
-새로움의 한 징후
1990년대 한국 소설의 징표는 사인성(私人性) 또는 내면성의 복원이다. 1980년대의 거대 이념이 붕괴하면서 “리얼리즘, 문제적 개인, 역사, 진정성”(진정석)과 결별한 그 1990년대 소설의 중심에 윤대녕(尹大寧, 1962~ )이 있다. 윤대녕은 여로형 소설의 작가다. 자폐적이고 내성적인 윤대녕의 작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어디로 떠난다. 선운사, 쌍계사, 남해 금산, 속초, 감포 앞바다, 유럽으로. “그의 인물들은 흔히 바닷가, 사막, 사찰,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과 같이 사람이 많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출세나 돈벌이나 권력이 아니라 구도나 사랑, 혹은 아름다움이다.”
각주1)
그들은 대부분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나 “희망의 밥그릇은 비워진 지 오래고 혁명을 꿈꾸기에는 벌써 나약해져 있는 나이”(「January 9, 1993 미아리 통신」)인 30대 남자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독신이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며,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그들의 동선은 현실과 신화, 실재와 환상 사이를 지나는 존재의 시원(始原)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래서 윤대녕 소설의 한 화자는 “내게는 꿈이 생시요 생시가 곧 꿈이다.”(「빛의 걸음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은어 떼와 같은 존재들이다.
정말 나는 지금까지 내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아주 낯선 곳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삶의 사막에서, 존재의 외곽에서.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그들을 부르는 것은 ‘그녀들’이다. 그들은 “삶의 사막”에서 메마른 일상과 버거운 싸움을 벌이다가 홀연히 ‘그녀들’의 호명을 받는다.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렇다. 어느 정체 모를 집단에서, 그녀가, 나를 부른 것이다. 그녀가 아직 이 서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니!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그녀들’의 호명을 받고 그들은 모천, 즉 존재의 시원으로 나아가는 행로에 들어선다. 그들은 ‘회유중’이다. 「은어 낚시 통신」에서 그를 불러낸 그 여자는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당신도 돌아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먼 곳에 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간 돌아오는 길을 영영 잊어버리게 될지도 몰라요.”라고.
윤대녕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는 평택 · 의정부 · 대전 등지로 전학을 다닌 끝에 초등 학교를 마친다. 어릴 적에 윤대녕은 평범한 아이였다. 작가는 “나는 병약한 소년이었고 누나 동생들에 비해 학교 공부도 그닥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며, 도대체 아무 특징도 없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1981년 그는 중 · 고등 학교 때 백일장에서 받거나 현상 문예에 당선되어 받은 상장 몇 개를 들고 단국대학교 불문과에 문예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1988년 『대전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 소설 「원」이 당선되고, 이태 뒤인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소설 「어머니의 숲」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작가로 나선 이래 그는 창작집 『은어 낚시 통신』(1994) · 『남쪽 계단을 보라』(1995) ·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1999), 장편 소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1995) · 『추억의 아주 먼 곳』(1996) · 『달의 지평선』(1998) · 『코카콜라 애인』(1999) 등을 펴낸 바 있다. 그는 1994년에 제2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1996년에 「천지간」으로 제20회 ‘이상 문학상’을 차지하며, 1998년에 「빛의 걸음걸이」로 제43회 ‘현대 문학상’을 받는다.
윤대녕을 소설가보다 시인에 더 가깝다고 말한 사람은 김화영이다. 김화영은 윤대녕의 소설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야기의 연속성보다는 비약적인 암시와 이미지를 통한 형상화, 섬광과도 같은 순간의 포착, 순간과 순간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과 단절의 표현에 능하다.”고 쓴다.각주2) 윤대녕 소설의 화자인 ‘그들’의 삶은 탈역사적이며 탈정치적인 공간 위에 세워진다. ‘그들’의 눈길은 현실이나 역사 같은 바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다. 많은 비평가가 윤대녕 소설의 주제로 “내면성의 추구”를 꼽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일상 또는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 있다. ‘그들’은 지금―여기에 머물지 못하고 ‘저 곳’을 향해 떠난다. 그런데 ‘그들’의 떠남은 공간 이동이 아니라 시간 이동이다. ‘그들’이 목적지로 삼고 있는 ‘저 곳’은 존재의 시원 또는 원초적 고향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윤대녕 소설의 내면성 추구의 주제가 때때로 ‘여자 찾기’로 변형된다고 말한 사람은 김정란이다. 김정란은 “윤대녕의 ‘여자 찾기’는 그렇게 내면성의 추구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단정지어 말한다. ‘그들’의 주변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들’이 서성거린다. “그녀는 잡힐 듯, 잡힐 듯, 작가의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증발해버린다.”각주3) 윤대녕의 소설 속에서는 많은 여자가 갑자기 사라지고, 주인공들은 사라진 여자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으며 그 행방을 추적한다.
『추억의 아주 먼 곳』에 나오는 권은화가 대표적인 경우다. 현실의 공간에서 증발해버린 ‘그녀들’은 “사막에 사는 사람” 또는 “상처에 중독된 사람”(「은어 낚시 통신」)들인 ‘그들’을 불러낸다. 「천지간」에서 문상을 가던 작중 화자는 애초의 목적지를 버리고 무엇에 홀린 듯이 낯선 여자를 따라 땅끝 마을까지 흘러간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름 · 직업 · 옷 · 용모 등 ‘그녀들’에 대해 꽤 세밀한 정보를 주는 편이다. 그러나 흔히 ‘그녀들’은 실체가 아니라 추상이며 환영이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자아의 정체성 안에 실체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김정란). 그래서 “매양 헛것에 쫓겨 기어이 떠나게 돼도 거기서 또 번번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욱 낯설고 사막이 아득했다.”(「은항아리 안에서」)는 작중 화자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윤대녕의 소설에서 여자들은 더러 ‘꽃’이나 ‘서역의 사막’ 또는 ‘아버지의 환영’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은 종종 어떤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이를테면 “요즘 나는 자주 이런 꿈에 시달려. 잠결에 누가 뚜벅뚜벅 다가와 나를 툭툭 치며 잠을 깨우는 거야.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처럼 말이지. 하지만 눈을 뜨는 게 두려워. 그렇게 깨고 나면 내가 여기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말발굽 소리를 듣는다」)라고. 그러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저기를 향해 떠나는 것은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의 어찌할 수 없는 본래적 기질이다. 그래서 그들은 “삶의 거적때기를 벗고, 닫혔던 모든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것도 훌렁 벗어버리고 때로 길 떠나자 하는 마음을 어찌하랴.”(「신라의 푸른 길」)라고 탄식하듯 말한다. 낯익은 현실이 아니라 낯선 저 어디에 있을 것만 같은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들’은 하염없이 저 존재의 시원으로 회유한다.
그녀는 산란중인 은어처럼 입을 벌리고 무섭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세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벽에 모로 기대어 천천히 흐느끼기 시작했다.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은어 낚시 통신』(문학동네, 1994)
그러나 그 먼 존재의 시원, 말하자면 내가 원래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보다 많은 밤과 낮을 필요로 해야 했다.
긴 흐느낌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가까스로 그녀에게 다가가 살아 있는 자의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차디찬 손을 완강하게 거머쥐었다.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윤대녕의 주인공들은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현실을 거슬러올라 존재의 시원을 찾아간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주,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머나먼 도정을 그려내는 작가 윤대녕은 그의 소설이 현실 도피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역사를 신화적 상징의 거울에 비춰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원형을 통해 우주적 질서와 존재의 순수성을 환기시키고 싶다.”고 덧붙인다.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징후의 하나인 윤대녕 소설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길 위에 서 있다. *
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대중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개인의 발견
⊙ '댄디'의 출현
패션이나 스타일을 일컫는 말 중에 '댄디즘'이라는 말이 있다.
또 흔히 멋을 잘 부리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댄디'라고 부르기도 한다.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캐주얼한 멋보다는 귀족적이고 품위가 느껴지면서도 주류적인 것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말은 19세기 유럽사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 유럽은 자본주의와 상업주의가 전면으로 드러나던 시기였고 그런 상황에서 다수의 시민은 전에 없던 물질적인 풍요를 대중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귀족들이 지녔던 경제적 특권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누렸던 것은 정신적이고,우아하고,고상한 문화적 가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만이 유럽의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댄디'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유행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말하자면 고상하고 우아한 멋,특히 정신적인 고상함을 추구하는 존재들이었다.
모든 것이 교환가치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정신적,문화적 가치만큼은 단순히 자본으로 포섭될 수 없었고, 이에 천박한 대중으로부터 일탈을 꿈꾸던 존재들이 소위 정신적 귀족주의를 추구하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곧 '댄디'였던 것이다.
싸구려 대중주의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정신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공동체적 흐름에 함몰되거나 종속될 수 없다는 자존감이 곧 '댄디즘'의 핵심이다.
한국사회는 1970,80년대 급속한 산업화를 거쳐 90년대에 이르러서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근검 절약,저축이 미덕이었지만 90년대는 소비주의 문화가 만개할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고 가구마다 소비문화의 상징인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도 물질적 풍요와 소비문화가 드디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불어 이 시점에 한국사회는 정치적으로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가 실현되어 그간 사치스럽게 생각해왔던 개인적인 삶을 맘껏 누릴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될 수 있었다.한국사회에서 서구유럽의 '댄디즘'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즈음이다.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 한쪽에서는 대중적인 소비문화가,다른 한쪽에서는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 대중과의 거리두기
한국소설은 1970,80년대 리얼리즘이 주류를 이뤘다.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모순과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계급의 모순이 팽배했기 때문에 리얼리즘적인 모색이 이루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는 소설 창작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리얼리즘의 주제였던 사회적 문제와 일정한 거리를 둔 작품들이 창작된 것이다.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에는 70,80년대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이나 특정한 주의 · 주장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지극히 사적인 체험이 소설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프리랜서 사진작가이다.
'나'는 한때 신문사에 임시로 고용되어 어릴 때 아버지와 은어낚시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낚시터에 대한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는데 이 기사를 계기로 '나'는 '은어낚시 모임'이라는 비밀스러운 모임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게 된다.
누구로부터 어떻게 해서 초청장이 전달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초청장에 인쇄된 에드워드 커티스의 「호피인디언」이라는 사진을 보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나'는 커티스의 사진집을 어떤 여인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 여자는 3년 전 제주도에서 광고를 찍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여성 모델이었는데 '나'는 그녀와 밤바다에서 우발적인 관계를 맺은 후로 특별한 이유 없이 만남을 유지해왔었다. 그런 어느 날 그녀는 이별을 고하며 사라졌고 그 후로 그녀는 잊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청장의 앞면에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커티스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결국 고심 끝에 정체불명의 초청에 응하게 되고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고 나타난 여성과 조우하게 된다.
작품의 간략한 줄거리에서 느껴지듯이 이 작품에서 70,80년대식의 리얼리즘적인 사유를 찾아보기는 극히 어렵다.
주인공은 현실 문제를 고뇌하는 지식인도,노동자도,민족주의자도,이데올로기도 아닌,타인과 교류하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 독신 남성일 뿐이다. 또 그에게 일어난 사건도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성격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과 '은어 낚시 모임'의 사람들이 당시만 해도 대중에게 낯설고 소설에서조차 잘 등장하지 않았던 문화적 경험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빌리 할리데이의 재즈,에드워드 커티스의 「호피인디언」,빨간색 스포츠카,제인 버킨의 「예스터데이 예스터데이」,짐자무시의 영화,엘뤼아르의 시 등등이다.
이것들은 대개 당시 한국사회에서 그다지 대중성을 얻지 못한 것들이었거나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로 취급받는 것들이었다.
적어도 상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대중이 쉽게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이것들은 공동체적 가치라든지,대중주의적 유행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문화적 대상이었는데 이러한 것이 작품 속에 등장했던 이유는 결국 대중 속에 함몰되지 않으려는 욕망의 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새로운 개인의 발견과 공동체의 위험
"보충해서 말하죠. 우리들 최초의 모임은 이 년 전 봄에 시작됐죠.
당시 무명 배우였던 그녀와 동갑내기 친구인 잡지사 기자,대학강사,화가 이렇게 몇몇 사람들이 신촌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갖게 된 게 동기가 됐죠.
저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들은 모두가 사람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자주 만나 공통의 것을 찾으며 좀더 은밀한 방식으로 모임을 키워나갔죠.
그후 건축가,수련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가수,시인들이 더 들어왔고 집단의 동일성을 확보하자는 뜻에서 육십사 년 칠 월 생들만으로 모임을 제한했어요.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처럼 살아요.
하지만 역시 삶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아무튼 우리는 한두 달에 한 번쯤 은밀히 모였다가 헤어지곤 해요. 어떻게 보면 두 겹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
현실적인 삶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그렇게는 살아지지 않으니까,말하자면 지하에서 다른 삶의 부락을 하나 더 세운 거예요.
우리가 은어를 문장으로 한 것도 다른 뜻이 아녜요. 말하자면 우린 여기서 거듭나기 연습을 해요.
어떻게든 우리 방식으로 버티고 사는 법을 배운단 말이죠."
- 윤대녕,「은어낚시 통신」
위의 인용은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나타난 여성이 '나'에게 모임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대목이다. 위의 인용에서 확인되듯이 '은어 낚시 모임'에 모인 이들은 모두가 삶에 뿌리를 박지 못한 이들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일상적이고 대중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대중 속에 함몰시키지 않고 자기의 영혼,자기의 정체를 지켜나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인 셈이다.
'우리 방식으로 버티고 사는 법'이란 대중과 거리를 둔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에 다름아니며 이렇게 보면 이들은 19세기 말 유럽사회에 등장했던 '댄디'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작품에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은어'라는 상징물에 대한 해석이다.
은어는 회귀성 어종으로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은어는 도시의 부박한 삶 속에서,혹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유행 속에서,혹은 공동체적 가치추구라는 명분 하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존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민족,이념,계급의 모순 속에 묻혀 있던 '개인'을 찾아 나선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공동체로부터 벗어난 개인의 삶을 한번 되돌아 볼 필요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공동체의 결속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이 과연 거대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지부터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신적 귀족주의를 추구하는 댄디즘이 자칫 자본의 지배를 조장하고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위험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출처 :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