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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어떻게 익어가느냐? 업의 결과가 어떻게 익어가느냐?
두 번째는 행위에 대상에 따라서 업의 보가 다르게 익어갑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밥을 한끼 누구를 사줬단 말입니다. 밥을 한끼 공양했단 말이에요.
어떤 대상한테 밥을 한끼 사줬느냐. 그것에 따라 과보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이 왜 부처님께 기를쓰고 공양 올리려고 합니까?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세속적인 다른 사람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 낫다라는 판단하에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악한 사람, 나쁜 사람 천명한테 보시하는 것 보다
일반인 한 사람에게 보시사는 것이 낫고, 일반인 천명에세 보시하는 것 보다
착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고, 착한 사람 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는
수행자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고, 수행자 천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는
깨달은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얘기 했단 말입니다.
즉 그 행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과보를 가져온다.
부처님께 정말 지극한 마음으로 연등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연등공양을 올렸던
그 과보로써 부처님이 되기 위한수계를 받게 되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 정성스럽게 올렸던 그 공양 때문에 큰 복락을 누릴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대상에 있어서 어느 도적 두목한테 밥을 사주고 돈을 줬다 생각해보세요.
그럼 그 도적이 그 돈 가지고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도적질하는데 쓰고 나쁜 짓 하는데 쓸거라는 말이죠.
그 대상이 그렇다라는 것을 알진데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대상에 따라서 업이 전혀 다르게 익어가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살면서 말로써, 생각으로써, 행동으로써 행위를 한단 말입니다.
행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행동이 바로 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위의 결과를 가져온다. 어떤 행위를 해야하느냐.
첫 번째 의식으로 깨어있는 행위를 해야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어떤 대상에게 그것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에서 뭐라합니까? 좋은 도반과 함께 해야된다. 좋은 스승을 모셔야 된다.
숫타니파타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될 수 있으면 자기보다 나은 의식 수준을 가진 사람과 벗을 하라.
나보다 못한 사람과 벗을 했을때 그 사람과 물든다는 얘기지요. 그것을 배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욕심이 많은 사람과 집착이 많은 사람을 친구로 가지면 그 친구랑 밥이나 한끼 먹고
이런저런 잡담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나도 그것이 나도 모르게 배어있습니다.
그 친구가 "요즘에 뭐 서울에 아파트가 투자하면 돈이 많이 된다더라. 거기에 재미를 봤다.
너같이 애들 교육을 시키면 애들을 망하게 하는거야. 애들 교육을 시키려면
과외 백만원 이백만원 그것이 뭐 작은 돈이냐. 그 돈 아끼지 말고
애들한테 막 과외도 시키고 뭐도 시키고 뭐도 시키고 해라."
서울 강남에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도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같이 살게되면 거기에 물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럼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해야 될 것 같단 말이에요.
그렇게 안하면 이 자식이 왕따가 될 것 같고 그렇게 느낀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은 여러분, 너무 부자 동네가서 살면 안됩니다.
너무 부자동네 가서 살면 아파트 좋으니까 좋다, 있어보인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무 부자 동네 가서 살면 내가 돈도 그만큼 없는데 그 동네 가서 살면 어때요.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부터 자꾸 위축이 되고 뭔가 안좋은, 헛된 욕망,
내 그릇은 그 만큼 안되는데 그런 것들을 받게 되니까 안좋다 하는 얘기죠.
그래서 중요한게 뭐냐하면 우리가 행위를 하고 살지않습니까?
우리가 하루종일 행위하고 사는거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행위하고 사는 거니까.
그런데 어떤 대상한테 행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뭐에요. 내 주변에 아름다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 수행자, 도반, 스승
전부 훌륭하시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한 행위가 아름다운 도반에게 가서 미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쓸데없이 어디가서 잡담이나 하고 이런저런 모임에 참석하느니
달마모임회, 어떤 진리의 모임, 수행하는 모임, 기도하는 모임, 공부하는 모임
이런데 자꾸 참여하면 저절로 공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서는 말을 한 마디 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다르게 익어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될 수 있다면 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될 수 있다면 좋은 스승님을 만나려고 애쓰고,
또 좋은 도반을 만나려고 애쓰고, 또 내 가족을, 내 남편을, 내 자식을
나와 좋은 도반으로 바꿔놓는 겁니다.
아름다운 지혜로써 바꾸는 거죠.
그리 됐을때 내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어떤 대상에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익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똑같은 행위였지만 더 큰 복덕을 받는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것처럼 나쁜 사람 천 사람에게 보시하느니 나쁜 친구 천 사람에게 아무리 가서
밥을 사주느니 그것이 무슨 큰 공덕이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수행하는 좋은 도반 만나서 맨날 지혜로운 도반을 만나서 밥을 사주고 다니라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법에 대해서도 듣고 진리에 대해서 듣고 그 밥 사준 것이 두배 세배로
큰 이익이 되고 복덕이 된단 말입니다.
어떤 대상에게 했느냐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또 절에서는 대중공양이라는 말을 많이 하죠?
왜 대중공양을 많이 하겠어요? 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보다 여러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큰 공덕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제가 될 수 있으면 얼마 전에 사찰 순례 갈때도 그러고 큰 행사가 있다고 그러면,
사찰순례 갈때 뭐 사찰순례비 3만원 받을 것을 2만원만 받더라도 혹시나
대중공양 내실 분이 있으면 내셔라 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120명이 가는데 귤 하나씩 보시해봐야 얼마 안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같은 돈으로 120명에게 공양하는 겁니다.
장병 여러분들에게 초코파이를 하나씩 사 준단 말이에요.
초코파이 한 박스에 만 얼마 하는데 그 돈으로 98명에게 보시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대중공양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대중들이 함께 감사해하고 함께 누릴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회향의 장입니다.
더구나 수행하는 대중이고, 공부하는 대중이고 오늘 같은 경우
이렇게 법문을 듣고 간식을 먹는단 말이에요.
또 법문에 취해서 먹는 간식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같은 보시를 했어도 다르게 익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특히 절에서 스님들이나 선방에 있는 스님들에게 이렇게 대중공양도 가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특히나 행위의 대상, 대상이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행위의 대상에 따라 업이 다르게 익으니까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아주 아름다운 대상으로 바꾸면 된다는 말입니다.
즉 도반을 만나고 도반과 함께하는 즐거움, 부처님 진리와 함께 하는 즐거움.
이런 즐거움 속에 항상 살게 되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게 됐을때 아주 큰 공덕을 짓게 되는 것이고
선업을 더 크게 짓게 되는 겁니다.
세번째로 어떻게 또 다르게 익느냐?
이것은 과보를 받는 시간에 따라서 다르게 익습니다.
나쁜 업을 지었단 말이에요. 업이라는 것은요, 오래되면 될 수록 쉽게 말하면
그 업이라는 것은 이자가 붙는 겁니다.
악업을 지었다. 악업을 지었으면 그 업을 빨리 받는 것이 좋습니다.
나쁜 업 일수록 빨리 받는 게 좋습니다.
지금 받으면 감기 한 번 오고 말 업인데 나중에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에 받으면
그냥 위궤양이 오고 고혈압이 오고 그럴 수도 있단 말입니다.
악업은 늦게 받으면 늦게 받을 수록 더 커진단 말입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업을 받아야되는 그 찬스에 딱 받아야지 그때가 우주 법계가 계산 했을때,
우주법계는 항상 우리를 돕는 관점에서 사랑과 자비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모든 일을 벌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업을 지은 것은 수미산을 넘을 만큼 악업도 있고 선업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업을 지금 받을 것이냐 언제 받을 것이냐는 우주 법계가 정하는데 뭐에 따라 정하겠어요?
우주 법계는 오직 사랑 그 자체고 동체대비 그 자체입니다. 자비 그 자체다.
자비로움으로써 이 사람이 이 업은 지금 받아야지만 가장 빨리 녹는 것이다싶을 때 그때 보내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그 업을 받을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받으면 예를 들어 여러분이 괴로운 일이 생겼다하더라도 그 업을 지금 받으면 행복한 거에요.
그나마 지금 받으면 나은 겁니다. 그것이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에 받으면 더 괴롭다.
그 업을, 과보를 받으려고 해야지 자꾸 거부하면 안된단 말입니다.
나쁜 업이라고 자꾸 거부하려고 하고 좋은 업은 자꾸 땡겨 받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업을 땡겨 받으면 조금만 받고 땡입니다.
그런데 좋은 업은 묵혀두면 묵혀 둘 수록 어때요? 더 큰 공덕이 쌓인다.
그러니까 좋은 업은 늦게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좋은 업은 땡겨 받으려고 기를 쓰지요.
로또 자꾸 사잖아요. 로또 사는 게 뭡니까?
내가 그나마 지어놓은 복을 로또로 한방에 받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한방에 받으면 거기서 복은 탁 끝납니다. 로또 당첨 되어서 그 돈 가지고 남들에게 베푸는 사람만 빼고는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쓰는 사람 치고는 어때요?
전부다 1년 안에, 2년 안에, 5년 안에, 10년 안에, 15년 안에 다 망합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복을 미리 땡겨서 다 받았으니까.
복은 다 받아놨으니까 법계가 나에게 줄 것이 이제 없는 겁니다.
그 복도 안되는데 기를 쓰고 미리 땡겨 받았다. 그 얼마나 갑갑한 일입니까?
그래서 과보를 받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게 익는데 좋은 업일 수록 천천히 받아도 괜찮다.
나쁜 업일 수록 빨리 받는게 좋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겼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업을 녹이기에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지금 그 과보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럼 그것을 받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 시기를 내마음대로 바꾸려고 아주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감기가 왔다. 감기가 왔으면 그냥 앓으면 됩니다. 충분히 앓아주면 되요.
굳이 약먹지 않아도, 어지간하면 약 안 먹는 것이 좋습니다.
안 먹고 이겨낼 수 있는 거면 이겨내는 것이 좋아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자연 치유할 수 있는 본연의 능력이 누구에게나 구족되어 있는데
우리는 자연치유의 생명력 자체를 우리가 약을 자꾸 톡톡 털어 먹음으로써
생명력을 자꾸 땅에 떨어지게 만드는 겁니다. 약화시키는 거에요.
그래놓고 이제 내 스스로가 이겨내기가 힘드니까 자꾸 약도 먹고 하는 겁니다.
옛날에 우리들 어릴때 자라면서 어땠습니까? 눈 오면 밖에 나가서 하루종이 눈싸움 하면서,
장갑도 별로 없어서 눈에 막 뒹굴며 동상이 걸릴만큼 뛰어 놀고 그러고 들어와도 누가 감기 걸립니까?
감기 잘 안걸려요. 건강하죠. 옛날엔 집이 추웠으니까.
옛날 우리 온돌방 밖에 벽지 같은 거 바를 때 어때요?
공기가 다 스며들거운요. 웃풍이 세단 말입니다. 바닥은 따뜻하고. 그렇게 웃풍이 세어야 좋은 거에요.
그 바깥 공기를 그대로 안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사니까 어떻습니까? 잔병치레가 없단 말이에요.
스스로 자연 치유의 힘이 다 있어요. 약도 별로 복용 잘 안하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싸매고 에어컨, 온풍기, 보일러해서 이중 찬단막을 다 해놓고
아이들 춥다고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이렇게 됐을때는 더 큰 병이 오는 것 처럼
병이 온다 그러면 좀 앓아주는 게 좋습니다.
또 앓아줌으로써 자연치유력도, 생명력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약이라는 것은 무조건하고 부작용이 다 있습니다.
위장약이다 이거는 간에 안좋고, 어디에 안좋고, 또 사람을 몽롱하게 만들고 또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데이터가 있는데 모든 약은 그 기관에 좋아지게 하는 반면에
나머지 기관들에 아주 상당히 안좋은 것들을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그런일을 우리가 안해도 되는 일은 안해도 되는데 왜 하느냐.
업을 받을때 어지간하면 그냥 받는 것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보를 받는 시기에 따라서 다르니까 그 시기는 누가 결정하느냐.
법계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다는 겁니다.
내가 결정한다고해서 나쁜 업이 오면 콱 막으려고 애쓰고 좋은 업이 오면
더 집착해서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때 그 일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법계가 자비의 목적에 의해서 그것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 네 번째로는요. 어떻게 다르게 익느냐면 과보를 받는 공간에 따라서 다르게 익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과거에 어떤 업을 지어서 감기로 우리에게 온단 말입니다.
감기에 걸렸다 하는 것도 악업을 받는 거죠. 그러데 여러분, 복을 많이 지으면 어떻겠어요?
복을 많이 지으면 부자 나라에 태어나겠죠? 그죠?
한국같은 부자 나라에 태어나겠죠? 그런데 복을 안 지어놓으면 어떻겠어요?
복 지은 게 없으니까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복을 지은 사람이 똑같은 업을 지었어요. 이 사람이 악업을 지어서 한번은 감기를 된통 앓아야 됩니다.
그런데 복을 많이 지어서 다음 새에 한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사람은 어때요.
그 과보를 받느라고 감기에 걸렸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약 한방 딱 맞으면 난단 말이에요. 감기로 죽는 사람은 없잖습니까?
그런데 소말리아나 가난한 나라, 약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나라에서 된통 감기에 걸렸다.
그러면 치명적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과보를 받는데 어떤 공간에서 받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차원의 결과를 가져오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 공간은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얼마만큼 복을 지었느냐. 거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에요.
예를 들어 어떤 거사님께서 예전에 한번 쓰러지셨는데 정말 쓰러지자마자 바로 발견해 가지고
병원에 가서 정말 2분만 늦었어도 이분은 돌아가시는 거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 2분을 미리 알고 탁 모셔가지고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예를 들어 아프셨을때 마침 누가 옆에 있을때 딱 다쳤으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무도 없었다면 이 얼마나 불행인 거에요.
마침 병원에 진료라도 갔을때 쓰러졌다면 그 사람은 사는 겁니다.
그런데 혼자 있을때 다쳤다. 어떤 공간에 있었느냐에 따라서 주변에 누가 함께 있었던 공간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그 공간이라는 것이 뭐에요.
내가 얼마나 복을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에 따라서그 공간이 달라지는 겁니다.
좋은 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고 나쁜 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고
복지 시설이나 의료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고
안 되어 있는 나라에 태어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평소에 복을 많이 지어 놓아야 된다. 그거에 따라서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4가지로 업을 다르게 익는단 말입니다.
업을 지을 때 의식수준, 즉 행위자의 주체가 누구냐? 그 행위를 하는 업을 짓는 사람이 누구냐?
업을 지을 때 내가 어떤 의식이었냐? 여러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업을 지을 때 의식에 그것의 결과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고 말씀드렸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사업을 구상합니다.
군종병으로 있던 친구 하나가 옷 장사를 한단 말이에요.
옷을 디자인을 해서 직접 만든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가 옷을 디자인해서 만들때 이 옷이 잘 팔릴지
안 팔릴지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아십니까? 디자인 한다는 것이 행위잖아요?
디자인 하는 그 의식 수준. 행위 의식 수준에 따라서 그것이 많이 팔릴지, 안팔릴지가 결정 됩니다.
왜냐하면 그 옷을 만들면서 "야, 이게 빨리 만들어져서 대박 나야지." 막 조바심나는 마음으로,
욕심내는 마음으로 욕심에 입각해서 옷을 만들잖아요. 그러면 욕심이 개입되어서 옷을 만드는 겁니다.
그럼 그 옷은 망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때 의식수준이 깨어있는 복 짓는 의식 수준이 아니고
가난한 의식 수준이었단 말이에요.
뭔가 욕심에 가득찬 의식 수준으로 옷을 디자인 했기 때문에 시중에 나가도 그 옷은 잘 팔리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옷을 만들때 의식 수준이 깨어 있으므로써 만들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새벽기도도 하고 기도하라는 얘기입니다.
기도하면 항상 의식이 깨어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복을 짓고 마음이 부처님을 향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의식으로써 모든 일을 하면 그 일은 그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비우고 염불이라도 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라도 한 두번이라도 독송을 하고
마음을 비우고, 집착이나 욕심을 버리고 "이 옷을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입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라는
그 마음으로써 옷을 만들었다. 그것은 그것 자체에 벌써 결과가 담겨있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만든 것 아니겠어요?
그 의식을 우주 법계가 다 기억하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 옷은 잘 팔릴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식당 주인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대박 날지 안 날지는
맛이 있느냐 없느냐에 결정 나는게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음식을 준비할때 내가 얼마만큼 돈이 들더라도 좋은 재료를 쓰겠느냐.
이걸 쓰는 목적이 빨리 돈 벌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냐.
아니면 이 음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주고, 먹고나서 건강하고
이런 어떤 의식수준으로 그 음식을 만드느냐 그거에 따라서 그 집이 장사가 잘될지 안 될지는
고스란히 결론을 내 놓고 시작하는 겁니다.
물론 또 다른 차원의 그 사람의 업 이런 것도 다 있겠지만.
그래서 어떤 의식으로 그 행위를 하느냐가 중요하다.
제가요, 경험을 합니다.
제가 책을 내잖아요. 그런데 제가 마음이 좀 덜 갔었고, 집중이 덜 됐었고, 뭔가 굳이
책으로 내고싶지 않았었는데 책으로 낸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런 의식으로써 집필 됐었던 책은요, 쉬이 잊혀지고요.
금새 한 두판 내고서 종적을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제가 의식이 좀 더 맑았고, 좀 더 마음을 쓰고, 이타적인 마음이 좀 깊었고 이런 경우는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도 그때 의식수준이 어땠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첫번 째 의식의 주체, 깨어있는 어떠한 의식으로 그것을 행했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대상에게 그것을 했느냐가 중요하단 말이죠.
그 다음에는 어떤 때 과보를 받느냐. 그리고 또 어떤 공간에서 받느냐.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첫번 째는 깨어있음으로 그 행위를 해야 하고
또 좋은 도반과 좋은 스승과 주변에 좋은 인연의 복을 지어야 한단 말입니다.
좋은 인연복을 지어야 좋은 인연 사람들에게 더 아름다운 과보를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이죠.
세번 째는 과보를 받는 때가 중요하다. 그때가 언제냐. 지금 이 순간이다.
그러니까 자꾸 과거로 미루려고 하지 말고 미래고 미루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받아야 할 것은
분명히 받아들이고 넘어가야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과보를 받는 공간을 결정 짓는 것은 우리의 복력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만큼 복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또 얼마만큼 인연복을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공간이 결정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악업을 지었지만 아주 운좋은 공간에 있을 때는
그냥 약 한방에 끝날 수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운이 안 좋은 공간에 있을 때는 그냥 그것으로써 내 생명이 다하는 결과를
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항상 복을 짓고 살아야 된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소금물의 비유처럼 우리가 지금까지 지어왔던 업은,
그것은 우리가 바꿀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매순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업은 우리가 충분히 변화를 시켜나갈 수가 있고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 업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가는 연장입니다.
우리 업은 물론 우리가 태어나면서 자기가 가져온 것도 있지만 그 업을 자꾸만 바꾸고,
바꿔서 변화시키는 게 삶의 방식이에요.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삶의 궤도를 수정하느냐?
예를들어 여러분이 소년 소녀 가장을 만나서 따뜻한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뭔가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겨울이 되니까 옆에 독거 노인이 혼자 사는데 쌀이라도 갖다 드려야지 하고 쌀을 갖다 드린다.
갖다 드렸을때 이를테면 그렇단 말입니다.
한 3년 뒤에 파산할지 모르는데 그 소년 소녀를 도왔던 그 복덕 때문에
파산이 5년 뒤로 늦혀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한번만 도운 게 아니라 분기별로 한 번씩 찾아가서 도왔다.
그럼 파산이 한 10년, 20년 뒤로 늦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계속 지으면 어때요. 이번 생애 파산 안 할 수도 있다 하는 얘기입니다.
또 이를테면 우리 법당에 쌀공양 올라온단 말입니다.
내 생각에 쌀공양 올라오는 거 떡방앗간에 갖다주고서 대신하는 것 이것도 좋지만
쌀공양 올라오는 것 부처님전에 공양 올렸다가 우리 자매결연된 삼각동 오치동에 힘드신 분들,
독거 노인분들이나 어렵게 사시는 분들. 그분들 얘기 들어보니까 쌀값이 몇만 원씩 나가는게 그렇게
돈이 아깝다고 하더라고요.
그분들에게 이렇게 한 번씩 가서 공양해 드리고 하는 것도 그래서 그렇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힘들에 살아가는 이웃을 위로해주고 그런단 말이죠.
이를테면 미운 사람에게 불같은 화를 내고 그럴 사람들이 마음의 영상을 통해서 화를 다스리고
증오심을 내려놓고 용서해 주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한 1년 뒤에 올 수 있었던 화병이나 무슨 위장염이나 위암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질 수가 있습니다.
막 급한 성격, 화가 나고 이러는 것을 내지르지 않는 그것으로 인해서 위암 될 것이 위염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렇다는 얘기죠.
또 아끼고 절약하고 펑펑 쓰던 사람이 "아, 아끼고 절약해야지." 하고 절약하던 습관 때문에
내가 한 5년 뒤면 강제로 퇴직할 사람인데 그 퇴직이 한 10년 뒤로 늦혀질 수도 있다.
얼마만큼 내가 복을 짓느냐에 따라서 파리나, 모기나, 풀벌레 이런 중생들을 함부로 죽이는 업을
별 생각없이 짓던 사람이 "야, 내가 일체 모든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하는 마음으로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서 방생하는 마음으로써 산다. 그렇게 되면 내 목숨이 한 20년 후면 내가
죽어야 될 사람인데 30년, 40년 뒤로 늦혀질 수도 있다 하는 얘기죠.
그렇게 우리 삶은 끊임없이 내가 어떤 업을 짓고 어떤 복을 짓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은 끊임없이
삶의 궤도를 수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몸이 좀 안좋다 하는 사람은요. 사람들을 좀 간호하고, 사람들에게 건간을 심어주고
또 맛있는 것도 전달해 주고 또는 병자를 간호하는 이러한 복덕을 지으면 몸이 건강해지기 쉽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오히려 가난할 수록 사람들에게 공양도 해주고, 뭔가 좀 사주고 가난하다 하는 사람일 수록
뭔가 자꾸 베푸는 그런 걸 해야되요.
부처님 말씀 공부해도 나는 이해가 잘 안된다. 자꾸 부처님 말씀을 전파하도록 더 노력해야 되고
법문을 더 듣고 그렇게 해야되고 법을 자꾸 나눌 수 있어야 되고 그렇다는 거죠.
이렇게 업은 전면적으로 궤도 수정이 가능한데 궤도 수정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결론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업을 바꿀 수 있느냐?
첫째는 복을 짓는 겁니다.
복덕을 증장하는 거에요.
두 번째는 수행을 하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증장시키는 겁니다.
불교는 복덕과 지혜를 증장시키는 종교입니다.
복과 지혜의 종교라 그랬단 말입니다.
즉 복덕을 지음으로써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수행과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닦아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복덕을 지음으로써 자비와 사랑을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었을 때 내 업이 달라진다.
또 기도 수행을 통해서 지혜를 증장시켜 놨을 때, 욕심을 비우고, 집착을 비우고 마음을
공부해 왔을 때 우리 업이 전혀 다른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써 바뀌게 된다.
과거에 가지고 있는 업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지만 삶이 전혀 다르게 바뀔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 나는 과거의 업이 워낙 안 좋기 때문에 한 생각 돌이킨다고 안 바뀌어."
안 바뀌지 않는단 말이에요. 과거에 아무리 나쁜 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업은 바뀔 수 있다.
95명을 살인했던 살인자도 회심해 가지고 깨달음을 얻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업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을뿐더러 그것을 바꾸는
끊임없이 복과 지혜를 증장하므로써 업장을 소멸시켜 나아가야 하고
내 삶을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성숙하게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우리가 이번 생에 온 목적이고 우리의 어떤 업을 가볍게 하고 가야되는 어떤 사명이라고 생각을 하셔서
복과 지혜, 많은 복을 베푸시고 사랑과 자비와 나눔을 좀 최대한 많이 실천하시고
또 기도하고 수행하고 정진하고 지혜를 닦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 경전을 독송하므로써
지혜를 증장시키는 그런 삶을 살아나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첫댓글 ()()()세상에 진리 있음 가장 큰 기쁨...감사합니다...행복합니다...사랑합니다...덕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업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을뿐더러 그것을 바꾸는 끊임없이 복과 지혜를 증장하므로써 업장을 소멸시켜 나아가야 하고 내 삶을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성숙하게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우리가 이번 생에 온 목적이고...' 꽃돼지 법우님,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이렇게 마음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함께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