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憲宗)은 "순조"(純祖)의 유일한 친손자이자,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외아들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가 "헌종"(憲宗)의 "왕세손 책봉"을 불과 4개월 앞두고, 2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요절했다.
어린 "헌종"(憲宗)은 고작 4세의 매우 어린 나이에 "동궁"(東宮)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할아버지 순조(純祖)역시 1834년(純祖 34년), 44세에 죽자, "헌종"(憲宗)은 불과 8세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서, 10세에 즉위한 할아버지 "순조"(純祖)와 "단종"(端宗)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영조"-"정조"에 이어서 2번째로 "祖父"에서 "孫子"로 권좌가 이어지는 "조손"(祖孫)계승의 절차를 밟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할머니인 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실시했다.
"경릉"(景陵) 들어가는 입구.
"경릉"(景陵)은 "동구릉"의 아홉번 번째 능이다.
"경릉"(景陵)자리는 1608년 "선조"의 목릉(穆陵)이 조성되었으나 능상의 석물(石物)이 무너지는 문제가 지속되자,
1630년(인조 8년)에 "목릉"(穆陵)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심명세"의 상소(上疏)로 "천장"(遷葬)을 확정하고
능을 파고 현궁(玄宮)을 열어 보니 물기도 없고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지금의 "목릉"(穆陵)으로 천장(遷葬)하고 그냥 둔 자리이다.
2017년 11월에 갔을 때는 오른쪽의 "수복방"(守僕房)이 훼손된 채 주추만 남아 있었다.
2024년 11월에 갔을 때는 "수복방"(守僕房)이 완전히 복구되어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이곳과 몇 곳에는 "수라간"(水剌間)이 없다.
1843년 8월 25일 헌종(憲宗)의 첫째왕비인 "효현왕후"(孝顯王后:1828~1843)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9월 2일에 능호를 "경릉"(景陵)으로 정하고 "산릉"(山陵)의 후보지로
창릉(昌陵)의 좌강,과 용마봉 아래 신촌, 남양주 휘경원(南楊州 徽慶園),
목릉(穆陵)의 옛 자리가 올랐는데 세 번의 간심(看審)을 거쳐 "목릉"(穆陵)의 옛자리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다음해에 "계비"(繼妃)"효정왕후"(孝定王后)를 맞이한다.
6년 후인 1849년 6월 6일에 헌종(憲宗:1827~1849)이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정하였으나, 효현왕후(孝顯王后)의 경릉(景陵)에 쌍릉으로
조성하여 "경릉"(景陵)으로 합하여 부르게 되었다.
능상(陵上)의 석물들은 쌍릉(雙陵)이 배치될 수 있도록 옮겨 세우고,
헌종(憲宗)의 능침을 두르는 난간석(欄干石)과 혼유석(魂遊石), 좌향석(座向石)만 새로 만들어 배치하였다.
1903년 11월 15일 계비(繼妃)"효정왕후"(孝定王后:1831~1903)가 경운궁 "수인당"(壽仁堂)에서 승하하자,
3차의 간심을 거쳐 12월 2일에 경릉(景陵) 좌변(左邊)으로 결정하였다.
1904년 1월 29일에 국장(國葬)을 행하고 2월 22일에 공역이 마무리되었다.
"효현왕후"의 능침이 조성될 때 세운 능상 석물을 "헌종"과 "효정왕후"가 합부(合祔)되면서
점차 영역을 넓혀 옮겨 배치하고 "혼유석"과 "난간석"만 새롭게 조성하였다.
이로써 "경릉"에 "헌종"과 두 "왕후"의 능침이 나란히 배치되어 "삼연릉"(三連陵)의 이례적인 모습이 되었다.
"경릉"(景陵)의 "정자각"을 오르면 "건원릉"에서 보았던 "배위"(拜位)인지 모를 석판이 있다.
이런 형태는 다른 능에는 없다.
아래에서는 아무리 올려다 보아도 "능"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자료사진.
자료사진.
자료사진.
기회가 된다면 꼭 능상에 올라가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싶다.
경릉(景陵)의 비각(碑閣)
대한(大韓)
"헌종성황제경릉"(憲宗成皇帝景陵)
"효현성황후부좌"(孝顯成皇后祔左)
"효정성황후부좌"(孝定成皇后祔左 )
조선(朝鮮)이 1897년 10월 2일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함으로 비석의 글씨를 갈아 없애고
"대왕"(大王),"왕후"(王后)가 아닌 "황제"(皇帝), "황후"(皇后)로 다시 각자(刻字)했다.
"부좌"( 祔左)는 남편과 아내를 합장(合葬)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는것을 말한다.
즉 헌종(憲宗)이 중앙이 아니고 오른쪽에, 왕후들이 왼쪽에 묻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