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하고 둔함…사람에 있지, 마음에 있진 않아”
<57>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3
[본문] 그대가 스스로 말하기를 근기가 둔하다고 하였으니, 시험 삼아 이와 같이 반조하여 보십시오. 근기가 둔함을 능히 아는 사람은 또한 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빛을 돌이켜서 반조하지 아니하고 다만 둔한 근기만을 지켜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면 이것은 환영과 허망 위에 거듭 환영과 허망을 더하는 것이며, 헛꽃 위에 다시 헛꽃을 첨가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능히 근성이 둔함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둔하지 아니합니다. 비록 이 둔한 것을 지키고 있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한 이 둔한 것을 버리고 참구할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과 ‘一體’
“당장 달을 보아 손가락을 잊을 것”
[강설] 사람의 근본인 본래의 마음을 깨닫는 데는 유식하다거나 무식하다거나 머리가 영리하다거나 둔하다거나 하는 점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학문상의 문제이지 마음의 이치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음공부는 스스로 둔하다고 하는 그 근본뿌리를 깨닫는 일이다.
그러므로 둔하다고 하는 그 자체를 돌이켜 반조하면 가장 훌륭한 공부다. 둔하고 영리함은 본래 없는데 스스로 “나는 둔하다. 나는 둔하다”라고 한다면 허망하여 아무것도 없는데다 다시 허망을 더하는 격이 된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에 차라리 화두를 한번이라도 더 드는 것이 참선공부의 지름길이다.
[본문] 취하고 버리고 영리하고 둔함은 사람에게 있고 마음에는 있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과 일체(一體)이며 둘이 아닙니다. 만약 둘이라면 법이 평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난이 가르침을 받고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것이 모두가 허망한 일이 됩니다.
또 진리를 찾고 실상을 구하는 것이 더욱 어긋날 것입니다. 다만 일체며 둘이 아닌 마음이 결정코 취하고 버리고 영리하고 둔한 데 있지 아니함을 안다면 당장에 달을 보아 손가락을 잊을 것이며, 곧바로 한칼에 두 동강을 낼 것입니다.
만약 다시 머뭇머뭇하며 앞일을 생각하고 뒷일을 계산한다면 빈 주먹 안에 실물이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며, 육근과 육경의 법에서 헛되이 눈을 눌러 헛꽃을 보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오음의 세계에서 허망하게 스스로 갇히고 집착하는 것이라 마칠 때가 없을 것입니다.
[강설] 불교에서 가장 잘 쓰는 말이 일체유심조라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우리들 이 한 마음에 달렸다. 우리들의 이 한 마음은 삼세 모든 부처님과도 하나다. 만약 부처님이라고 해서 이 한 마음이 우리와 다르다면 진리가 평등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진실로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수많은 가르침을 받고 부처님은 세 번이나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것이 모두가 허망한 일이 될 것이다. 또한 진리를 찾고 실상을 구하는 것이 더욱 어긋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불교는 이 한 마음의 원리위에 건립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 한 마음의 이치만 바로 안다면 한순간에 불교를 아는 것이 된다. 온갖 방편에 이끌리지 않고 진리를 바로 볼 것이다.
[본문] 근년에 들어와서 한 종류의 삿된 스승들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아무런 일(是事)도 관계하지 말고 쉬고 또 쉬어라. 그리고 공부를 한다는 소리(做聲)도 하지 말라. 공부를 한다는 소리를 하면 새롭게 무엇을 한다는 사실(今時)에 떨어질까 염려된다.”라고 합니다.
[강설] 대혜선사는 간화선을 주창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일이 그동안 간화선과는 다른 참선법인 묵조선을 비판하고 배격하는 일이었다. 가끔 스스로 “구업을 아끼지 않고 비판한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대단히 심한 비난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 단락에서도 묵조선의 옳지 못한 견해와 공부를 잘못 지시하고 있는 삿된 스승들이라고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삿되다는 말이나 외도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출처 : 불교신문 20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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