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핵소 고지’를 보고 나서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이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념을 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신념은 그 자신이니까.”
“어떤 사람이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제칠일안식일교인 데스몬드 도스(Desmond
Doss)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핵소 고지’는 가치관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며 서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흔히 학문에서의 근친교배는 생물학적 근친교배만큼이나 해롭다고 한다. 그것은 학문의 다양성을 해치고 결국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할 때 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설명은 생물의 다양성을 말하며 이는 자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연은 놀라우리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나타낸다. 화재로 검게 그을린 산에서도 다시 풀은 자라고,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죽음의 땅이 된 곳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자라난다. 자연에 있는 복원력과 생명력은 어쩌면 그 자체 안에 깊이 내재 되어 있는 종의 다양성에 기인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을 종교와 사상의 문제로 옮기면 어떨까? 종교와 사상은 가장 배타적이기 쉬운 영역이다. 그 둘은 순수성을 귀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순수성이 희미해지는 것을 가리켜 종교의 타락이라고 하고 학문의 타락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치는 매우 적어진다. 그런데 내가 가진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나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모든 사상이 다 귀하고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나 사상이 진리를 모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종교나 우리의 사상이 진리를 다 담을 수 없다면 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에 대해서도 그 자체를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종교나 사상이 자기의 범위를 넘어서 다른 종교나 사상을 억압하거나 고쳐주려고 할 경우에는 폭력이 작동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인류를 위한 다양한 생각과 신앙이 획일화되고 단순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유전적인 질환이나 외래의 바이러스 또는 자체적인 오류에 대하여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표현과 사상과 양심의 자유, 또는 종교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해야 할 귀중한 가치다. 그리고 그 보호의 틀은 단지 별개의 존재를 인정하고 침해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다양성이 확보된 공동체를 만드는데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구촌이며, 또는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갈 자유가 있다. 그런데 어떤 사상과 양심은 그 사람을 옭아 매는 포승줄과 같아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묶여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곳 저곳에 상처가 날 수 있다. 그 때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하듯이 마음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은 그것을 싸매주고 약을 투여하고 때로는 수술도 하면서 그를 돕는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그는 점차 건강해져 갈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강압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를 살리려는 오직 사랑의 섬김 만이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의 진정성은 알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의 사상에 충실해야 하며, 또한 서로에게서 배우려는 겸손함을 가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지구라는 한 행성이자 거대한 배에 탄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함께 할 때 성숙하고 회복되며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