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5일 (월) 정말로 정말로 좋은 친구
오늘도 오전 4시 30분 기상. 인체시계가 말썽이다. 시차가 계속 바뀌는 항해를 하니, 인체시계가 다시 한국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일어난 김에, 새로 밥을 지어 어제 스리랑카 사람이 전해준 치킨 카레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윈디를 살펴보니, 24일까지 바람은 좋다. 방향도 속도도 적당하다. 생각보다 빨리 랑카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미리 실어 둔 디젤 제리 캔을 단단히 묶는다. 어제 물도 다시 채우고, 기본적인 출항 준비는 마쳤다. 김기자님이 가지고 오실, 엔진 부품하고 C80을 교체하면 완벽하다. 김기자님이 오시면 18일 오전 출항 때까지 시간이 없을 테니, 오늘 미리 야채와 계란도 사두려고 한다.
샤워를 하고 세탁물을 널며 생각한다. 스리랑카가 내게 치유의 시간을 주었지만, 나는 역시 서둘러 한국으로 가고 싶다. 고향이 이리 그리우니 역시 한국인 맞다. 나는 안전하게 돌아가야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제 카페 겸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나를 방문하시는 김기자님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존 : 그는 와서 얼마나 있다가나?
나 : 2박 3일 이다.
존 : 그는 다른 비즈니스가 있어서 오는 건가?
나 : 아니다. 그저 나를 보고 몇 가지 부품과 한국 식품을 전해주러 오는 거다.
제니퍼 (필리핀인 크루) : 그럼 네가 그 친구의 비행기 표와 비용을 주는 건가?
나 : 아니다. 그가 자비로 오는 거다.
제니퍼 (필리핀인 크루) : 어! 그는 엄청난 부자인가보다.
나 : 그렇지는 않다. 그는 한국의 중산층이다.
여기서 다들 뭔가 대단히 충격을 받은 표정들이다. 그 먼 거리를, 짧은 일정으로, 자비를 들여, 단지 나에게 물품 몇 개를 전달해 주러 온다니.
카페주인 : 그렇다면 그 친구는 너에게, ‘정말로 정말로’ 좋은 친구인가보다.
나 : 그렇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고, 우리는 고향 강릉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한다.
오히려 나는, 엔진 고장 등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정신이 팔려, 김기자님의 방문에 대해 그저 감사하다고만 생각하고, 오시면 일정과 예전 수리, 부품 교체 출항준비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외국인들이 김기자님에 대한 정리를 이렇게 해준 거다. ‘정말로 정말로 좋은 친구’ 맞네. 누가 또 내게 이렇게 힘든 일정의 방문을 해주겠나? 이런 깨달음이 또한 세계일주 항해의 예상치 못한 장점이다. 항해가 길어질수록, 내 삶에 명현현상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출항 준비를 한다고 하니, 해외안전지킴센터에서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최근 싱가포르 해협 해상강도 증가 동향을 안내 드릴 필요가 있어 연락드립니다.
23년 1-3월간 해상강도사건이 총 18건 발생했고, 특히 3.27-31. 기간 동안 4건의 해상강도가 집중 발생한 바 있습니다.
주로 Pulau Cula(쿨라 섬) 인근 해역에서 9건이 발생했고 이 중 6건이 무장강도에 의해 발생하였습니다. 야간 취약시간대 예부선(曳艀船) 등 취약선박 대상 강도가 침입해 선용품 등 탈취하는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차후 동 해역 인근 항해 시 이를 반드시 유의해 주시고, 동남아해적퇴치기구(RECAAP)에서도 동 사항을 사건사고 경보 발령으로 23.3.31자로 이를 알린 바 있습니다.
랑카위 진입 시에 다시 안내를 드릴 예정이나 말라카 해협 전반에 해상강도 출몰 우려가 있으니 이를 반드시 숙지하시고 안전한 항해를 해주실 것을 요청 드립니다.]
가슴이 덜컹하는 문자다. 주로 새벽과 야간 항해 중 발생 한다고 하니, Pulau Cula(쿨라 섬) 인근 해역은, 오전 8시쯤 들어가 일몰 전에 빠져 나와야할 상황이다. 항로를 다시 잘 살펴보자.
오전 9시 40분. 호주 배 Infanta(왕녀, 공주) 호의 선장 부부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한다. 밖에 나가서 먹자고 한다. 하긴 배에서 뭐 준비하려면 더워서 죽는다. 외식이 답이다. 각자 더치페이 하면 되니까.
오전 10시. 아프리코 마켓에 야채를 좀 사러간다. 툭툭 기사를 불러 왕복 400루피(1,713원)를 내가 먼저 부른다. 아님 걸어가면 된다. 마켓에 가서 20~30분 대기 시간까지 포함한 가격이다. 이젠 10일에 어느 정도 먹는지 내 식사량과 종류를 가늠 할 수 있다. 생각보다는 쩨쩨하게 산다. 특히 야채류는 많이 사면 상해서 버리기 십상이다. 점심으로 먹을 햄버거와 핫독을 하나씩 사온다. 두 개가 570루피(2,440원) 다. 점심은 이것으로 때우자. 곧 이런 소소한 일상이 그리워 질 때가 온다.
마트에서 작은 양배추 2개, 통마늘 5개, 오이 10개, 초컬릿 비스켓 1박스. 더 살게 없다. 며칠 전, 물이나 음료수 등 무거운 것들은 이미 다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17일 오후에 한 번 더 최종 점검 하면 된다.
돌아온 다음, 툭툭 기사에게 오후 5시 ~ 6시 사이에 여기 있을 거냐? 묻는다. 그렇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Fort 까지 800루피에 (3,425원) 갈 거냐? 고 물으니, 파란 툭툭을 기억하라고 한다. 오케이 딜. 사실 지금까지 폴이나 요셉 패거리는 친구인 척, 친한 척하며 툭툭 비용을 늘 더 비싸게 불렀다. ‘존’은 그들이 Greed(탐욕) 스럽다고 한다. 문제는 100~200 루피 더 주는 게 아니다. 외국인인 우리에게만 더 바가지를 씌우려는 게 문제다.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다음에 오는 선장들이 피해를 본다. 그래서 툭툭 금액 등을 보다 확실하게 정산해야 한다.
정오. 다시 스리랑카 아버지 '대런'이 왔다. 제네시스 사진을 몇 장 찍어간다. 아들에게 보낸단다. 내게 물고기를 준다고 한다. 정중하게 거절한다. 뭔가 달콤한 것과 차를 가지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온단다.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일단 알겠다고 하고 감사하다고 한다.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핫독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다. 뭔가 입맛이 좀 다르다. 내일 아침으로 핫도그를 먹어야겠다. 샀으니 남기기 아깝다.
오후 2시. 존의 터그보트로 갔다. 다들 출항준비로 바쁘다. 존은 아직 본사의 출항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존과 함께 세일 요트에 관해 수다를 떤다. 그는 35~40피트면 충분하고 스코틀랜드와 지중해 연안만 항해할 거라고 한다. 본인이 엔진부터 리깅, 선저페인트까지 다 수리 가능하니 계류비만 빼면 큰돈이 들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런 게 진짜 요트 선장이다.
오늘 존의 표정이 어둡다. 페이스북을 열어 어떤 남자의 사진을 보여 준다. 그는 63세이고, 존이 처음 터그보트 일을 시작할 때 사수였단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터그보트가 뒤집혔다. 터그보트는 바닥에 넓어서 절대 안전한 줄 알았는데, 존의 설명을 들으니, 전진은 문제가 없는데 2~3 노트로 후진 할 때, 방향을 틀면 뒤집힐 수 있다고 한다. 불과 3~4초 만에 확! 뒤집힌다고 한다. 그러니 존의 옛 동료는 탈출할 시간이 없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존의 배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존에게 오래 살라고 말한다. 나는 내년이나 후년 여동생 부부와 함께 그를 보러 에딘버러에 가고 싶다. 그도 딸과 함께 한국에 올수도 있다고 한다. 터그보트가 그토록 위험한지 처음 알았다.
별다른 변동 사항이 없으면, 존은 내일 16일(화요일) 오전 10시 출항이다. 내가 가서 손이라도 흔들어 줄 예정이다. 김기자님 부자가 호텔에 계시면, 존을 배웅하고 호텔로 모시러 갈 거다.
오후 6시 호주 선장 Gavin 부부와 함께 Fort로 갔다. 툭툭 비용은 800루피. 첫날 갔던 Ivy 레스토랑에서 맛난 식사를 하며 수다를 떤다. 알고 보니 Gavin은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2005년에 일 때문에 호주 퍼스로 간 거다. 94세 된 그의 양부는 여전히 에딘버러에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산다. 그는 2~3년 에 한 번 씩 에딘버러에 간다. Gavin은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인 ‘존’과는 친해질 사이도 없이 존이 떠나버리게 됐다며 아쉬워한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마리나로 돌아왔다, Gavin이 자기 요트로 가서 차 한 잔 하자고 한다. 그의 요트에 가니 존에게서 16일 출항이 아니라 17일로 하루 더 미루어지게 됐다고 문자가 왔다. Gavin 에게 존을 부를까? 하니 대환영이란다. 존에게 전화하니 냉큼 달려왔다.
오후 8시 40분. 정말 신기한일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내가 인사 시킨다. 이게 뭔 일이래? 두 사람은 서로가 스코티쉬라는 걸 확인하더니 스코틀랜드 영어로 막 떠든다. 진짜 이건 영어도 아니다.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다. 한국이라면 제주도 방언으로 떠드는 거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해 하는 얼굴만 봐도 즐겁다. 한창 떠들더니 존이 내게 묻는다. 너 알아 듣니? 아니 30%도 모르겠다. 그들은 맥주를 한잔씩 마시더니 Gavin 이 위스키를 꺼내기 시작한다. 스코티쉬끼리 본격적으로 자리를 펼 모양이다. 나는 그들에게 딸 리나와 통화해야 한다고 자리를 비켜준다. 내일 김기자님이 오시면 모두 인사 시켜 줄 수 있게 됐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