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외성과 고려 토성 그리고 강주 토성 발굴 이야기
오랜 기간 땅 속에 묻혀 잊혀져 가다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이 역사 속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되니..
이런 일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
아들아, 우리가 사는 진주에서는 최근 이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고고학적 발굴이
잇따라 이어지며 관심을 받고 있다. 들어보았느냐?
최근 진주에서의 고고학적 성과는 모두 옛 성곽에 관한 것으로,
하나는 진주성 외성 성벽과 고려시대 토성의 흔적이 발굴된 일이고,
또 하나는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성곽으로 추정되는 강주토성의 발굴소식이란다.
진주의 군사, 행정의 중심지 위치와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 또 어떻게 변해왔는지..
끊어지고 잊혀져서 희미해진 그 역사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이다.
또 잊혀졌던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까 싶어.
아들아, 진주성과 남강은 진주의 상징이고, 자존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중심이고, 오랜 역사를 함께해왔기 때문이지.
이전에도 아빠가 얘기했었지. 기억하느냐?
옛 진주성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 남아있다고
진주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이중구조였지
지금의 진주성은 그 그림대로라면 내성만 복원이 되어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이고,
규모는 원래의 약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거야.
옛 성의 북쪽 성곽 외곽에 있던 대사지(大舍池)라는
성벽을 방호하는 해자 역할을 했던 연못이 메워져 없어졌다는 것도 있어.
그 자리엔 지금 도로가 나고, 또 시가지 건물들이 서 있지.
아들아, 진주성의 동문인 촉석문(矗石門)에서 남강을 가르는 진주교 사이에는
뭐가 있었냐면..한때 진주의 명물이었던 남강의 장어 식당 거리가 있었지.
아빠가 어릴적부터 봐와서 익숙한 모습은 그것이었는데..
그곳의 식당가와 빌딩들을 철거하고 진주시에서 1592년 10월의 진주대첩을
기리고자 '진주대첩 기념광장'을 조성하기로 했단다.
2017년 12월, 해당 부지에 문화재 시굴조사를 했더니 진주성 외성의 기단석을
발견했고, 이때문에 2018년 4월부터 정밀 발굴조사를 했더니..
조선시대 축조된 길이 110m정도, 너비 6~7m, 높이 4m 정도의 석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주성의 외성이었지.
출토된 진주성 외성의 모습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새로 발견된 진주성 외성의 하단부에는 고려시대 축조된
토성 흔적까지 나왔고, 건물지와 배수로, 우물이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이 한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엄청난 발견이 아니냐.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또 진주의 시가지 개발과정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그렇게 묻혀서 잊혀져 가던 7년 조일전쟁이란 역사의 중심에 서있었던 진주성의
성곽이 이렇게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게다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건물지와 우물, 배수로 흔적,
통일신라시대 기와편,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의 흔적까지
나왔다고 하는구나.
이게 무슨 의미인가 보면..
첫째는 진주성의 역사가 최소한 통일신라 전후한 시기까지 유물로 그 실체가
증명된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 통일신라 전후 시기부터 지금 진주성 위치가 진주의 중심지로 기능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되니..그만큼 진주성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둘째, 진주성의 연혁을 보면 고려 말인 우왕 5년인 1379년에 목사 김중광(金重光)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기존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 고려시대의 토성의 존재가 실제 유구로 입증되었단 말이다.
셋째는 7년 조일전쟁 직전인 1591년 경상감사 김수가 진주성의 외성을 수축하여
성의 규모가 커졌고, 이후 진주성의 성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오히려 방비에 불리하다는
문제가 있어 그 규모가 조금 축소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진주성의 외성과 내성의 연결고리와 구조 그리고 수차례 행해진 조선시대 진주성 외성의
수축의 역사까지, 없어졌다고 알고있던 진주성 외성의 실체가 건재하여 남아있었음을
확인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 아니더냐.
아들아, 진주성 촉석문 밖 진주성 외성과 고려시대 토성..그밖의 여러 유물이 발굴되어
지금은 진주대첩 기념광장 조성이 보류되고 정밀발굴조사에 들어가 발굴기간이 연장되고
진주대첩 기념광장 조성사업의 존폐여부, 새로 발굴된 유적에 대한 보존과 활용 등에 대해
새로 논의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 진주사람들 모두가 고민해서, 현명한 답을 찾아야 할 시점이 되었지.
아빠 생각은 진주성 외성과 고려시대 토성의 유적은 덮혀서는 안되고, 보전되어
많은 이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한번 어떤 답이 나올지 지켜보자꾸나
강주토성
아들아, 그리고 또하나의 대단한 발굴이 진주의 남쪽 경계에서 이루어졌단다.
진주와 사천의 경계지역인 진주시 정촌면 예하리..
최근 진주에서 뿌리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공들여 개발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나말여초, 그러니까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고려 초기 9~10세기에
축조된 토성이 발견되었단다.
이번에 발견된 진주성의 토성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가야부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의 유물이 한번에 발굴되어 관심을 끌고 있어.
발견된 토성의 길이는 약 115m정도..동서로 긴 장타원 형태의 토성으로 성벽의
원래 길이는 450m 정도, 폭은 6,7m정도, 높이는 2~3m정도이지만 실제 높이는
약 5m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해자, 집수정, 삼국시대 거주터 유적까지
발견되었고, 토성은 가야시대 집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구나.
강주토성 발굴현장
아들아, 이 토성의 축조시기는 진주성의 옛 토성보다 오래되었고, 축조된 위치는
사천에서 진주로 향하는 길목이다.
토성의 위치와 방향은 사천의 바다 방향에서 오는 외적을 막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고
길이 450m 정도의 작은 규모의 토성이라 이곳이 진주 전체를 관할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겠으나,
진주에서 사천, 사천에서 진주로 향하는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겸했을 것이다.
또 인근의 정촌면 예하리 강주연못이 고려시대 후기까지 활용된 군영터라고 하니..
왠지 강주연못의 옛 군영터와 연계하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이 토성은 정촌면 등 주변 옛 지명을 고려해 진주의 옛 지명인 강주의 이름을 취하여
강주토성(康州土城)이라 명명하고, 현장방문과 조사를 완료한 후..
향후 보전과 활용방향을 논의하고 있다는구나.
아들아, 훗날 보전되고 공개되는 어느 시점에 진주성 외성과 고려시대 토성,
그리고 강주토성까지 너를 데리고 한번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아빠는 그 날이 기다려지는구나.
거대한 역사의 현장이었던 그곳이, 천년의 역사가 머지 않아 우리에게 돌아와..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될 그 날 말이다.
----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