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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3) - 2023 .10. 12(목) |
이번 성지순례는 마산교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순례이다. 마산교구에는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 대산 성당,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명례 성지의 6곳의 성지가 있다. 이중 앞의 3곳은 1차 때 순례했고 뒤의 3곳을 이번에 가기로 한다. 여기에다가 주교회의 성지사목회의 인준 성지는 아니지만 경남 서부 지역 중심 성당의 역사성을 가진 문산 성당을 넣어 4곳의 성지를 목표로 한다.
순례 순서는 일단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바로 진주 문산으로 가서 문산 성당을 순례한 후 거리의 역순으로 대산 성당,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명례 성지를 순례하면서 돌아오기로 했다.
10월 중순이라 가을이 한창 익어가는 시기에 가을 나들이로서도 제격이다. 07시 30분 성당을 출발하여 10시가 조금 지나서 문산 성당에 도착하였다.
문산 성당 - 동·서양식 성전 건물이 조화를 이루다 |
문산(文山) 성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서부 경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공소이며 성당이다. 문산 성당은 1883년 소촌(召村) 공소에서 시작되어 1905년에 성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1913년부터 소촌 본당에서 문산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먼저 문산 성당의 연혁과 발전과정을 살펴본다.
공소 이전 교우촌 시대(1860경-1883)
마산교구 지역으로 신자들이 들어온 경로는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 숨어 있던 교우들이 남쪽으로 낙동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합천, 창녕, 의령, 밀양, 진영, 함안 등지에 교우촌을 세웠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오래된 공소들이 남아 있다. 둘째는 1827년 정해박해가 곡성(谷城)을 시작으로 해서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되자 지리산과 백운산을 넘어 서부 경남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함양을 본거지로 하여 단성을 거쳐 문산, 고성, 통영, 거제도로 흘러갔다.
문산 지역에는 신자 최(崔) 루도비코가 전라도 달구산에서 이사를 와서 살면서부터 복음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는 이웃에 살고 있던 강문주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함안에 살고 있던 강문주의 사위 구필경이 처가에 내왕하는 동안 최 루도비코에게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함안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교하였는데,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의 아들 복자 구한선이 문산으로 이사하여 활발히 전교하였다.
이 시기에 문산의 교우 제씨(諸氏)는 딸을 진주의 비라실에 사는 외인 장익금(張益今)에게 출가시켰다. 삼 형제 중 막내인 장익금이 부인의 권유로 처가에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그의 전교로 두 형제들도 모두 신자가 되었다. 이렇게 문산에 뿌리를 내린 천주교 신앙은 다시 진주의 비라실(현 진주시 장제동) 인동 장씨(仁同張氏) 집안으로 전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비라실 공소(현 장제동 성당)를 형성했다. 1868년 순교자 윤봉문의 시신을 몰래 빼돌려 묻은 사람도 바로 장익금 바리실 공소 회장이었다. 병인박해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진주의 교우촌들은 1880년대에는 안정을 찾았다.
공소 시대(1883-1905)
진주 함안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진주에 사는 양반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과 중인 구한선(타대오)이 순교한 사실로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박해시대에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그의 복사였던 함안 대산 출신인 복자 구한선 다대오와 함께 1865년경에 거제도를 방문했으며 이듬해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구한선 타대오와 정찬문 안토니오는 체포되어 진주 관아에서 순교하였다. 박해가 끝난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은 1880년대에 들어와서 이곳의 교우촌은 재건되었는데 이 중 문산 소촌 교우촌(현 진주시 문산면 소문리 58-1)과 진주의 비라실 교우촌(현 진주시 장제동)은 박해 이후 경상도를 전담하게 된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에 의해 1883년에 모두 공소로 설정되었다.
소촌 공소는 1890년대 초 부산 본당(초량 본당, 후에는 범일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 6월 진주(晋州) 본당이 설립되면서 이 본당 관할이 되었다. 당시 진주 본당 신자수는 1,054명이었는데, 그중에 소촌 공소 신자수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후 1900년대에 마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다시 마산 본당 소속이 되었다.
본당 설립 초기 시대(1905-1923)
1904년 무렵 마산 본당의 무세 신부는 소촌 공소의 본당 승격을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뮈텔 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 입국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마리오 신부를 1905년 9월 22일자로 무세 신부의 보좌로 임명하였다. 그에 앞서 무세 신부는 이미 마산 본당 관할 중에서 소촌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 본당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줄리앙 신부의 임명은 곧 소촌 본당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산에 도착한 줄리앙 신부는 즉시 소촌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1월에 가서야 삼곡리(三谷里)에 초가 세 채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새 성당 부지를 물색한 끝에 1907년 소문리의 현 성당 부지 2,400평과 조선 시대 때 역관서 건물의 하나였던 찰방관서(察訪官署)를 매입하여 수리하여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초대 주임 줄리앙 신부는 1909년 봄에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선교 및 지역 계몽 사업의 일환으로 배명학교(培命學校, 1926년 폐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멀리 통영, 거제, 사천, 곤양, 함안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1915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긍련회(矜憐會)를, 그 이듬해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다.
한옥 성당 건립 시대(1923-1937)
이때까지 성당은 찰방 관서 건물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400여 년 된 노후 건물이라 더 이상의 보수가 어려워짐에 따라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 재임시인 1923년 11월 23일 기와집 한옥 성당을 신축하였다.
신축된 성당은 정면 6칸에 우측면 4칸, 좌측면이 3칸으로 된 장축형 평면의 전통 한옥 양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축용 목재나 기와를 구하기 어려워 경남 고성의 어느 사찰을 헐어내고 나온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중앙 통로 양쪽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13개의 원형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기둥에 사용할 만한 긴 목재가 부족했던 탓인지 어떤 것은 짧은 목재기둥을 연결해 쓰기도 했다. 연결부는 구멍을 파서 나무쐐기를 박아 고정했는데 투박한 모양새임에도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다.
1920년대 문산 본당은 경남 및 전남 지역의 관할 공소만 무려 97개소에 달해 사제의 공소 순회 기간만 7개월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공소 담당 전교 회장을 따로 임명하여 사목의 효율화를 도모하였고, 무의탁 행려노인들을 위한 고조원(孤助院)을 설립하여 지역 복지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8년경 본당 단체로는 전교회, 성모 부인회, 공교 소년회(公敎少年會), 호상계(護喪契), 가톨릭 오시(五時) 품꾼회 등이 있었다.
새 성당 건립 시대(1937-1950)
이어 5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32년 5월 29일에는 3천여 명이 참가한 진주 지역 최초의 성체 거동을 문산 본당에서 거행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1935년 8월 22일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37년 5월 6일 새 양옥 성당과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고 기존의 한옥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새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로 10m × 37m의 긴 장축형 평면으로 세워졌다.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우리 여건에 설계 시공했다고 한다.
새 성당 건립 무렵 1937년 4월 8일 본당 내에 성모 성심원(聖母聖心院)을 개원하여 1957년경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합병하였다.
혼란의 시대(1950-1964)
한편, 1950년부터 10여년 간 본당 신부가 일곱 번이나 교체되는 일이 발생하자 공동체 역시 분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6 25 직후 배급받은 구호물자의 처리 과정에서의 관리 체계의 허술함으로 본당 내에 불신 풍조가 만연하면서 1957.3-1959.3, 1960.-1964.1. 사이에는 신부 부재의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기간 동안 옥봉동(玉峯洞) 본당의 주포니(C. Giupponi, 콘스탄시오) 신부와 사천(泗川) 본당의 라우리올라(G. Lauriola, 굴리엘모) 신부가 격주로 성무를 집행함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재정비 발전 시대(1964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64년 1월 본당에 부임한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를 중심으로 본당 내 단체들을 재정비하여 근 15년 만에 본당을 정상화하였다. 이후 문산 본당에서는 1970년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환 순회 집회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에 앞장섰고, 1980년대에는 주일학교에 과감히 투자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 연수, 신용 협동조합 강습 등을 통한 끊임없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990년에는 성모 동산을 마련하고 요셉상을 안치하는 등 성당 안팎의 조경 사업에 힘썼으며, 1994년 11월 25일에는 소화유치원을 완공하고 옛 유치원 건물은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문산 본당은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몇 차례 보수 공사를 시행했다. 옛 한옥 성당은 서양식 새 성당이 건립된 후 유치원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강당으로 개ㆍ보수하면서 원래의 마룻바닥을 화강석 바닥재로 교체했다. 또한 사제관을 개축하고 주방 건물을 신축하며 성당 지붕과 제대 등을 보수하여 2002년 3월 10일 축복식을 가졌다.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문산 본당의 한옥 양식과 고딕 양식의 두 성전은 동서양 건축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공존함으로써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주차장에 내리니 왼쪽에는 소화유치원으로 가는 표지판이 서 있고 정면을 바라보니 종탑이 높이 솟아 있는 성당이 있고 그 앞 좌우로 왼편에는 한옥 건물이, 오른편에는 양옥 건물이 있다. 가까이 가보니 한옥 건물은 구 성당이고 양옥 건물은 사제관이었다. 사제관 앞 잔디밭에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있다.
경내로 들어가니 한옥 건물 모서리에 문산 성당 안내판과 소촌역 터 안내판이 있다. 이 있다. 이곳이 옛날에는 소촌역(驛)이었던 것이다.
역(驛)또는 역참(驛站)이란 관리들이 출장을 가거나 사신이 왕래할 때 교통과 숙식의 편이를 도모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의 장은 종6품 찰방(察訪)이다. 소촌 찰방은 진주를 비롯하여 고성, 사천, 거제, 진해 등 15개 지역을 관리하였다.
소촌 역참은 교통의 요지로 찰방관사를 중심으로 그 앞에 역리(驛吏)들의 관사와 가족들이 사는 역촌을 이루었다. 1885년 역참이 폐지되고 소촌 성당이 개설되자 초대 주임 줄리앙 신부가 이들 건물 10여 동과 주변 땅 2,400평을 사들여 성당 건립의 기초를 삼았던 것이다. 역참에는 교통 수단으로 말을 많이 길렀기에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가끔 성당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한옥 구 성전
한옥 성전 앞으로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데 건물 왼쪽에는 아담한 송단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1923년에 지은 이 건물은 올해로 딱 100년이 되는 건물이다. 건축사적 가치가 있어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는 표지가 붙어 있다.
성전 내부는 아름드리 기둥과 들보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고 천정의 서까래가 정연하다. 옛날에는 단일 건물로 대단한 성전이었으나 지금은 성전으로 사용되지 않아 제단도 제대도 없어 아쉬움을 준다. 굳이 제대를 없애야만 했을까? 간이 의자가 가지런하게 놓여져 있는 걸로 보아 회의실이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앞면 대들보에 십자고상이 걸렸고 그 좌우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교구장 주교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앞벽에는 순교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사진이 붙어있다.
그런데 천정 아래 벽면에는 둘러가면서 역대 본당 사제들의 사진이 죽 걸려 있고 또 공소나 초기 성당 시기의 진기한 사진들이 걸려있어 전시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양옥 새 성전
현재의 성전으로 가기 위해서 한옥 성전 뒤로 돌아들면 아담하게 조성된 조그만 동산에 예수 성심상이 반겨주신다. 그 뒤로 약간 높은 위치에 우뚝 솟은 현재의 성전 건물이 솟아 있다.
1937년에 지은 이 성전은 고딕식 성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이다. 물론 그 동안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흠 없이 깔끔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다.
성전 내부에 들어가니 제대 좌우로 독서대와 강론대가 있고 앞쪽 좌우로는 성모상과 순교복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제대 뒤로는 감실이 있고 그 위로 예수님상과 뒤편에 12제자상이 평면으로 시립하고 있다.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데 그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성화 양식으로 그려져 배치되어 있다.
성전 아래 왼쪽에는 수녀원이 있다. 수녀원은 온통 정원의 수목으로 덮여 있어 건물이 겨우 보일 정도이다. 정원수가 잘 다듬어져 관리가 되고 있는데 들머리에 은목서(銀木犀)와 금목서(金木犀)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금목서는 한창 꽃이 피었다.
금목서의 금목(金木)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잘한 황금꽃이 잎에 가려서 색조는 드러나지 않으나 만리향이라는 별명답게 향기가 주위에 진동하고 있다. 이처럼 드러내거나 뽐내지 않으면서 인품의 향기를 은은히 풍기는 사람과 늘 함께 한다면 얼마나 축복일까? 기다리거나 바라기보다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수녀원 앞으로는 성요셉 부자상이 있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나오는 길에 성전 및 예수성심상 동산에서 환경 보호하는 교우들 중 자매님 한 분을 만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劉) 세실리아라는 자매님인데 원래 친정은 정찬문 성지가 있는 사봉 공소 바로 아래 동네 출신이라고 한다. 오늘이 봉사하는 날인지 물으니 특별한 날이기보다는 수시로 나와서 자기 집처럼 일을 찾아 봉사한다고 한다. 읍지역이라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역사와 전통이 서린 한적한 성당에서 친교와 화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이 참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읍지역이라고 그리 작은 성당도 아니다. 주일 미사에 나오는 교우들이 4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쉼터에 가서 꼭 차라도 한잔을 마시고 가라고 권하여 성당을 돌아가니 성모 동굴이 조성되어 있고 따로 찻집 쉼터가 있어 차 한 잔씩을 하고 돌아섰다. 쉼터 옆에도 예수님이 계신다
11시가 다 돼 가는 시간이다. 이제 두 번째 목적지인 대산 성당으로 간다. 대산 성당은 함안군에 있기에 다시 남해고속도로에 차를 올려 김해 쪽으로 가야 한다.
대산 성당 - 순교 복자 구한선 타대오, 고향에서 잠들다 |
대산(大山) 성당은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246-3 (도로명 주소, 함안군 대산면 대산 중앙로 183)에 있다.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76년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성당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대산 성당의 연혁
함안군 대산 지역 교우촌은 남강 저습지에 살던 교우들이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치명일기에 등장하는 구한선 타대오 순교자(1844-1866)가 이 지역 출신인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1883년 파리 외방선교회 보고서엔 함안 지역 공소가 등장하며 판공성사를 위해 외국인 신부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다.
대산 성당의 모체는 가등(佳嶝) 마을이라고 불리는 교우촌이다. 가등 교우촌은 1850년대에 이미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1885년경에 영산에서 이주한 정기문 요한이 전교하여 300여명의 신자를 가진 신앙공동체가 되었다고 한다. 가등공소란 이름은 1897년부터 등장하고 인근 마을 동박 공소라는 이름도 1899년에 나온다.
1932년 함안군 가야읍에 본당이 설립되자 대산 지역의 공소는 가야본당의 관할이 되었으며 1967년에 와서 대산공소는 준본당이 되었고 1976년 5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모후를 주보성인으로 대산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초기의 신자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주일미사 중에도 비가 오면 논에 물대러 간다고 나가버리는 웃지못할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당시 교적부에는 신자수가 700명이 넘었다고 하며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수도 약 27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91년 현재의 성당 터인 대산면 구혜리에 성전을 신축하고 공소를 가등 마을에서 구혜리로 이전하는 과정에 많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대산 성당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구한선 타대오의 시복이 추진되면서 신자들의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성지 조성과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며 숭고한 신앙의 유산을 지키고 순교영성을 키워나가고 있다.
구한선 타대오는 누구인가?
구한선은 1844년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나리골은 남강 하류의 늪지대로 낙동강과 만나는 지점에 가까운 곳이라 여름이면 넘치는 물 때문에 살기를 꺼렸고 미나리꽝이 많은 곳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유학 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고 신장(神將) 부리는 요술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른이 된 후 소촌 교우촌(현 문산 성당)에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병인박해 직전에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복사로 선택되어 고성, 통영 교우촌을 거쳐 거제도까지 전교 여정에 동행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또 옥에 갇혀서는 주요 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하기도 했다. 이 말은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하게 매질을 시켰고,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참았다. 관장이 소리 한 마디 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문밖에 늙으신 어머니가 와 계시는데 소리를 내면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느냐고 대답했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했다. 죽음 직전까지 간 그를 포졸들이 거리에 내다 버렸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한 주일 만에 장독으로 선종했다. 죽은 뒤 그의 이마 위에는 품(品)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23세의 꽃다운 나이, 막 피어난 꽃송이로 떨어졌다.
순교자의 무덤 찾기와 성지 조성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의 신씨(愼氏)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묻혔다. 그러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의 묘는 고이 보전되기 어려웠고 점차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순교자의 묘는 약 100년 후인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인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묘를 찾던 중 대산 공소회장인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윤 바오로 회장은 구한선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순교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소 안에 있다.”라는 말과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 증언의 내용은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나와 그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래서 신씨들의 묘소를 살펴본 결과 묘소 한쪽 구석에 봉분이 거의 없어진 묘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고, 발굴 결과 구한선 타대오의 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후 1976년 5월 8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대산 본당은 순교자 신심을 강조하며 그해 9월 외교인의 묘소 안에 있던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가등산 자락 평림면 가등리로 이장하고 돌봐 왔다. 그리고 2002년 5월,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9월 18일 순교자 현양미사와 묘지 축복식을 갖고 인근에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갖췄다.
순교자 묘 주위로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묘 양옆에는 야외제대와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뒤에는 대형십자가를 세워 순례자들을 맞이했다. 그런데 성역화 10여 년 만에 묘역 바로 앞까지 공장이 들어서고 앞으로 더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끄러울 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의 성지 접근성이 떨어지기에 이장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편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마산교구는 시복식과 묘역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자의 유해를 인근 대산 성당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2016년 5월 7일 대산 본당 설정 4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며 성지조성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20일 묘지 이장 작업을 진행해 복자 구한선 타대오의 유해를 대산 성당 1층에 마련한 성전 내의 무덤 경당 제대에 모시고, 10월 29일 교구장 배기현 주교 집전으로 복자 구한선 타대오 성지 기념제단 봉헌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넓은 마당에 조성한 ‘희망의 동산’에 기념제단(유해 일부 안치) 및 어머니 쉼터(안내 센터) 등을 마련하였다. 특히 희망의 동산은 대산 성지는 자매교구인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와의 공동기금으로 조성하여 지역민에게도 열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순교자 기념성전
12시가 조금 지나서 대산 성당에 도착. 성전은 검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로 마치 견고한 토치카 같은 느낌을 준다. 전깃줄이나 방송 캐이블이 어지러이 걸려 있어 미관을 많이 해치고 있다.
안내도를 보니 시설은 퍽 간단하다. 정문을 들어가면 벽돌을 깐 마당 왼쪽에 성전 건물이 있는데 2층은 성전이고 1층에 무덤 경당이 있는데 바로 순교 복자 구한선 타대오의 묘실이다. 성전 1층 앞에 성모님이 서 계신다. 마당 오른쪽에는 무슨 창고 같은 건물이 있는데 한쪽은 안내센터 겸 휴게실인 어머니 쉼터이고 한쪽은 화장실이다. 그러고 벽돌 마당 안쪽에 넓은 잔디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이 희망의 동산인데 그 끝에 야외 제대가 있고 오른쪽에 사제관이 있다.
순교자 기념 성전은 2층에 있다. 1층 사무실 옆의 강당 입구 맞은편 성모님께 인사들 드리고 벽돌 경사로를 따라 올랐는데 중간쯤 예수 성심상을 모신 탑이 솟아 있다.
성전 내부는 한 마디로 어둡다. 그나마 교우석 장의자가 밝은 색조를 띨 뿐 성전 안의 모든 시설물이 어두운 색깔이다. 전면 감실형 제대에는 벽면에 십자고상을 모시고 있고 검붉은 벽돌조 그대로를 보여준다. 감실과 제대, 독서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회청색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대신 유리창이 대신하고 있고 상하 유리창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걸렸다. 역시 어두운 조각상이다. 성당 후면 2층에 성가대석이 있다.
무덤 경당
성전 참배를 한 후 1층으로 다시 내려와서 순교 복자 무덤 경당으로 들어갔다. 무덤경당 입구 표지판이 쓰여 있는 문을 들어가니 현관 격인 실내 벽에 순교자의 후손을 살아 있다라는 목각이 걸렸고 대산 성당 안내, 그리고 순교복자 구한선의 생애와 구한선 무덤 발견 경위가 구한선 타대오 입상 그림과 함께 게시되어 있다. 한쪽에는 성모상이 있다. 그리고 벽면 위쪽에는 역대 주임신부인 듯한 사진이 걸렸다.
‘순교자의 후손을 살아있다’에서 후손이란 좁은 뜻의 후손을 말하는지 아니면 오늘날의 모든 교우들을 지칭하는지 애매하다. 딱히 후손의 공적만 높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후자로 해석되어야 될 것 같다.
구슬로 수놓은 십자가와 큰 문고리가 달린 경당 문을 들어갔다. 전면 제대 벽에 십자고상이 걸렸고 그 앞에 흰색 제대형의 순교자 묘가 있다.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 묘소라고 안내되어 있다. 묘 가운데는 유리로 된 창 같은 것이 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조성된 것 같은데 희부옇게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묘 앞에는 푸른 장미 다발이 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푸른 장미는 사랑의 기적, 아니면 기적 같은 사랑을 말한다는데 이는 순교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2층 성전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를 볼 수 있다.
독서대와 교우석을 갖춘 경당으로 미사도 드릴 수 있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희망의 동산 - 야외 기념 제단
일명 희망의 동산이라고 하는 넓은 잔디밭에는 순교복자 구한선 타대오의 유해의 일부를 안치한 묘소이며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전 1층 무덤 경당과 이곳이 둘 다 묘소인 셈이다. 잔디밭 왼편 곧 성전 뒤에는 농협 건물이 바싹 붙어 있어 성지의 경관을 해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이다. 그것을 가리기 위함인지 경계지점에 구한선 순교자의 상을 흰색 벽돌 벽면에 조각했다. 이 희망의 동산은 조성은 자매 교구를 맺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세카우 교구에서 지원했다
야외 제단 곧 순교자 묘는 벽이 없는 4개의 기둥과 천장만 있는 구조물인데 묘는 1층 무덤 경당에 있는 육면체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뒤로는 순교자의 지조를 말해주는 것 같이 푸른 대나무 숲으로 둘러져 있다. 희망의 동산 오른쪽에 사제관이 있다.
사제관을 마지막으로 희망의 동산을 둘러본 뒤 나오는 길에 화장실 옆에 붙은 어머니 쉼터에 잠시 들렀다. 버려진 창고 같은 허술한 건물 안에 무슨 휴게 시설이 있을까 했는데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는데 앉아 쉬고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봉사자가 없을 때는 유자차든 커피든 마음대로 즐기며 기도와 휴식을 맛보고 가시라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방문자를 맞이하는 따뜻한 배려가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1시가 다 되어 늦은 점심시간이기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유해를 이장하기 전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가등산에 있는 구한선 타대오 묘에 가볼 계획이었으나 시간 관계로 줄이고 대신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한다.
이제 점심 식사를 하기위해 면소재지 마을의 중심거리로 나갔다. 일반 음식점 한 곳을 찾아 들어가니 된장찌개, 김치찌개 칼치정식 등의 메뉴가 걸려 있었다. 칼치정식을 시켰는데 밑반찬부터가 시골 인심이 듬뿍 담겨 있는 차림이었다.
식사 후 오후 일정은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와 명례 성지이다. 먼저 김해에 있는 박대식 빅토리노 묘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에 의존하여 가야한다. 30여분이면 도착할까 했는데 네비게이션이 혼선을 일으켜 오다가다를 반복하면서 경로를 바꾸는 등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길에 소비하고 오후 3시가 넘어서 성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