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3. 쿠차 불교와 키질석굴
무자트강 절벽에 펼쳐진 ‘환상의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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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차 키질석굴> |
사진설명: 무자트 강변 동서 2㎞에 걸쳐 236개나 개착된 키질석굴은 중국 신강지역 최고의 석굴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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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쿠차 시내에서 키질석굴로 가다보면 나오는 염수계곡 전경. |
2002년 9월21일. 무자트 강변에 있는 쿰트라 석굴을 보고, 쿠차 최대의 석굴인 ‘키질석굴’로 발길을 돌렸다. 기원 전후 쿠차에 도착된 불교는 서역의 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에 석굴을 남겼지만, 그 가운데 키질 석굴은 동 투르키스탄(중국 신강성 일대) 지역 최고의 석굴로 평가된다. 쿠차 시내에서 출발한 차가 어느덧 염수(鹽水)계곡을 넘어가고 있다. 이름 그대로 하얀 염분으로 뒤덮인 계곡.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계곡을 넘어 30분 정도 달리자 사진에서 많이 보던 키질 석굴의 절벽이 저 멀리 나타났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많은 발굴자들에 의해 훼손되고 파괴된 석굴 아니던가. “이곳에 왜 석굴이 개착됐을까. 불교는 언제 쿠차에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실크로드가 동서 문명교류의 간선(幹線) 역할을 할 당시, 타클라마칸 사막남북에 펼쳐진 서역북로와 남로에는 많은 숫자의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정치·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고, 갖가지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대표적인 나라가 남로의 호탄국, 북로의 쿠차국(龜玆國)·투르판국(高昌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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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쿠차지역 석굴 분포도. |
호탄국과 함께 동 투르키스탄 최대의 오아시스 국가였던 쿠차는 구자(龜玆), 구자(丘玆), 굴자(屈玆), 굴지(屈支), 굴자(屈茨), 구이(拘夷) 등으로 표기되거나 불려졌다. 산스크리트어 ‘쿠치’의 음역인 이 명칭들은 대부분 ‘곡궁’(曲躬) 또는 ‘굴곡’(屈曲)을 의미한다. 굴곡이 심한 쿠차의 지형(地形)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여 진다. 최근의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쿠차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 경부터지만,〈한서〉에 의하면 전한 무제(기원전 141~88) 당시 이미 인구 80,000명, 승병(勝兵) 20,000여명에 달하는 나라였다. 기원전 2세기 초에 나라 형태를 갖춘 쿠차국이 성립돼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발견된 석굴만 236개…개착 역사는 베일에
그러면 쿠차에 언제 불교가 전래됐을까. 유감스럽게도 쿠차 지역에 언제 어떻게 불교가 전래됐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아육왕식괴목인연경〉에 아육왕(인도 아쇼카왕)이 왕자 법익(쿠나라)에게 물려준 영토 가운데 쿠차·호탄 등이 포함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인도와 쿠차 사이에 교섭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 당시 쿠차에 불교가 전래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중국보다는 빨리 쿠차에 불교가 유입됐을 거라는 점이다. 어찌됐던 쿠차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기원전 2~1세기, 기원 전·후 경, 기원후 2세기 초경 등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언제 쿠차에 불교가 전파됐던 간에 약 3~4세기경 쿠차 불교는 발전의 정점에 도착해 있었다. 서진 시기(265~316) 역사를 기록한〈진서(晋書)〉권97 열전편에 “쿠차에 약 1000여 개의 사원과 탑이 있다”고 적혀있고,〈출삼장기집〉에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 상당수의 쿠차 불교도들이 중국 내지로 가 역경에 종사했다. 왕궁에 불입상 등의 조각이 화려하여 광경이 사찰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쿠차 불교의 발전은 8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7세기 초 이곳을 방문한 현장스님(?~664)의〈대당서역기〉에도 “큰 성의 서문 밖 길 좌우에는 각각 높이 90여척의 입불상이 있다. 가람은 100여 소, 승도는 5000여명, 사람들은 공덕 쌓기를 다투어 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790년 토번(티벳)이 쿠차를 점령하고, 위구르가 진입하면서 쿠차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12~13세기 이슬람이 불교를 밀어내자, 불교는 쿠차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키질석굴 입구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3시였다. 차에서 내려 절벽에 펼쳐진, ‘실크로드 불교미술의 꽃’인 키질석굴을 쳐다보았다. 무자트 강 좌측 절벽 동서 2km 거리에 걸쳐 조성된 키질석굴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키질’ ‘키질’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여행하던 많은 구도자들이 머물렀을 키질석굴. 현재까지 발견된 석굴 수는 모두 236개.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는 석굴이 135개 정도. 이 가운데 90개 정도가 예배하고 설법하는 차이탸굴이고, 나머지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비하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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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질석굴 77굴에서 출토된 천부상두부. 베를린 인도미술관 소장. |
쿠차 불교의 역사처럼 키질석굴의 개착사도 신비에 쌓여있다. 석굴에 관한 정확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개착되기 시작했는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20세기 초 이곳을 조사한 독일탐험대가 대강의 시기를 정했지만, 중국 신강쿠차석굴연구소에 의해 보다 구체적 정해졌다. 취재팀에 석굴을 안내한 쿠차석굴연구소 정려평(程麗萍)씨는 “키질석굴은 크게 초창기 발전기 번영기 쇠락기의 4기로 나눈다. 초창기는 3세기말~4세기중엽, 발전기는 4세기중엽~5세기말, 번영기는 6~7세기, 쇠락기는 8세기~9세기 중엽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에 따르면 47, 48, 77, 92, 118굴 등은 초창기에, 13, 32, 38, 83, 84, 114, 171굴 등은 발전기에, 현존 석굴의 50% 이상은 번영기에, 129, 135, 197굴 등은 쇠락기에 개착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서역불교조각사〉(일지사)를 저술한 임영애씨도 “키질석굴의 조영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인 5~7세기는 쿠차 불교의 번성기로 현재 키질석굴의 50% 이상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고 분석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쿠차 지역엔 많은 석굴사원이 개착됐는데, 국왕의 후원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7세기까지 조영되던 석굴은 그러나 8세기 중엽부터 더 이상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 9세기 중엽이 되면 석굴은 완전히 폐기되기에 이른다.
일본·독일 탐험가 석굴사원 벽화 약탈
중국 정부에 의해 신강쿠차석굴연구소가 개원되고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전에도 키질석굴은 외국인(중국 측은 이들을 ‘약탈자’로 부른다)들에 의해 여러 번 조사됐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03년, 독일의 그륀베델이 1906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1907년, 러시아의 베레조프스키 형제가 1907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09년(2회),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1913년(3회), 독일의 르 콕이 1914년, 서북과학조사단의 황문필 일행이 1928년, 신강문물조사팀이 1935년에 각각 조사했다. 1935년의 조사에 의해 석굴 번호가 매겨지고, 236굴 전체의 존재가 확인됐다. 외국인 조사가 가운데 일본의 오타니탐험대와 독일의 그륀베델은 특히 욕을 많이 얻어먹는다. “석굴사원의 벽화를 대량 도려내, 일본과 유렵으로 반출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파괴의 흔적은 석굴에 그대로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정려평씨가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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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질석굴 앞에서 만난 위구르 노인. |
카메라를 포함한 일체의 물건을 보관소에 맡기고, 계단을 따라 석굴로 천천히 올라갔다. 정려평씨가 직접 우리들을 안내했다. “키질 천불동 - 정려평씨는 항상 천불동이라고 불렀다 - 최고의 굴인 17굴로 먼저 가겠습니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석굴인데, 들어가는 입구 위에 그려진 교각미륵보살 그림이 유명합니다.” 굴 안에 들어가 그림을 보니 과연 그러했다. 미륵보살의 목이나 어깨엔 호화로운 장신구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옛날 구자국의 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교하게 배치된, 키질 천불동 특유의 마름모꼴 문양이 천장에 가득했다. 정려평씨에 따르면 “마름모꼴 문양은 바미얀에서 들어온 것”이다. 바미얀에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을 거쳐 쿠차에 도착한 문양. 다시금 쳐다보았다. 불교도 그렇게 쿠차에 도착했고, 중국 대륙을 넘어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리라. 마름모꼴 문양에 자연스레 정이 갔다. 2002년 4월에 본,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대불이 있었던 석굴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쿠차까지 얼마나 먼 거리인가. 그 사이엔 험난한 파미르고원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 길을 구도자들이 왕래하며 불교를 전했고, 문양까지 갖고 온 것이다.
당나라 때 조영된 77굴로 들어갔다. 안쪽 벽에 그려진 부처님 열반상이 이목을 끌었다. 10개의 장방형으로 기획된 천정엔 갖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기악천(伎樂天)이 보였고, 동서 양 끝엔 합장한 천인(天人)이 배치돼 있다. 여러 악기를 든 기악천이 차례로 그려져 있지만,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 힘들었다. 공개되는 18개의 석굴을 차례로 둘러본 뒤 쿠차석굴연구소로 내려갔다.
석굴 주변 풍광도 아주 훌륭했다. 석굴에 정신이 팔려 보지 못했던 것이다. 석굴을 오르내리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찬찬히 풍광을 살폈다. 무자트 강이 앞쪽에 흐르고, 석굴과 강 사이엔 싱그러운 백양나무 숲이 있다. 가슴이 탁 트일 만큼 멋진 풍경이었다. 감상에 젖어있는 그 때, 백양나무 숲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과 함께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사원, 바미얀에서 조성되기 시작한 대불(大佛), 파미르고원 서쪽의 여러 문화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쿠차에 들어오는 광경도 상상 속에 그려졌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우리나라로 전파되는 불교도 보이는 듯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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