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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수만(李秀滿) |
출생 | 1952년 6월 18일, 서울특별시 |
본관 | 전주 이씨[1] |
직업 | SM엔터테인먼트 대표 |
학력 |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 농업기계전공 학사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노스리지 컴퓨터공학 석사 |
가족 | 부인, 슬하 2남 형 이수영, 조카 써니[2] |
수상 | 2012년 코리아 소사이어티 문화상 2012년 제1회 가온차트 K-POP 어워드 K-POP 공헌상 |
이수만 - 파도
2009년 6월에 샤토 무통 로쉴드로부터 와인 기사 작위를 받았다. 결국 와인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음모론자들은 이 사진을 가지고 이수만이 프리메이슨에게 기사작위를 받았다며 인터넷에 퍼트리기도 했다.
이수만 소유의 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녀시대의 써니가 이 사람의 조카다. 형의 딸이라고 하니 즉 써니의 작은 아버지다. 관계가 관계인 데다, 써니가 소녀시대에는 제일 늦게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데뷔했기 때문에 낙하산 논란이 있으나, 써니가 방송 출연하여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작은 아버지는 몰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먼 과거에 기갑창세기 모스피다의 오프닝곡을 부르기도 했다.
코갤에서의 별명은 흰수만. SM 소속 가수의 팬들이 그의 생일에 축하와 함께 '이수만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줄줄이 단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섹고쿠와 함께 양대 연예계 원피스 캐릭터.
이수만은 현재 SM의 지분 24.43%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2,100억원 어치의 주식을 소유한 연예계 최대 주식부자 였었다. 양현석은 2012년 초 지분가치 1,400억원으로 2위였으나 싸이의 초대박으로 주가가 상승하여 2012년 9월 24일 계속된 주가 상승으로 양현석의 지분가치는 3,000억원을 넘어 부동의 1위에 올랐다. 배용준이 315억원으로 3위를 차지한것을 비교해보면 넘사벽 수준.
한편 1986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납자루떼>라는 컬트적이고 괴상한 영화의 OST를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1987년 이현세 원작의 만화를 영화화 한 "지옥의 링"의 주제가도 그가 불렀다.
최근엔 KB투자증권의 TVCF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화합을 도모중. 이수만부터 보아, 시원, 최강창민, 브라이언, 트랙스의 정모.
가격 : 24000원
2012.12.24
K-pop 성공신화, 그 주역을 말하다
SM Entertainment 대표 이수만의 삶을 통해 그가 대중문화에 기여한 바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어떠했는지, 그의 음악 멘토는 어떻게 만났는지, 또 어떤 과정을 통해 포크 가수였던 그가 유명 사회자가 될 수 있었는지, 문화산업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인지 등 그동안 우리가 궁금해했던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러나 성공대로를 힘차게 달려온 그에게도 무명 음반기획자로서의 고독, 수많은 실패로 얼룩진 어두운 시기는 존재했다. 이수만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그의 흔적을 따라가 보자.
그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능력이 매우 탁월하며, 현재 문화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가 결정적으로 실패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던 계기는 H.O.T, S.E.S, 신화와 같은 아이돌 1세대 그룹을 청소년 문화 아이콘으로 키워내면서부터였다. 또한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에 소속사 연예인 기사를 싣기 시작하면서,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세계로 눈을 돌려 한국 문화 컨텐츠의 가능성을 드높여 문화 수출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업적은 개인의 활동이 아닌,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시장개척사 그 자체라 할 만큼 눈부시다. 이수만의 성공신화 외에도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조력자와 경쟁자에 관한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여러 스타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 그들의 인간적인 면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Part 1 행복
01 1952년, 부산
02 음악에 눈뜨다
03 클리프 리차드의 추억
04 청개구리홀에 나타난 ‘4월과 5월’
05 욕심 없는 마음
06 이종환을 만나다
07 음악으로 만난 수줍은 여인
08 샌드 페블즈와 함께
09 바다가 보이는 젊은 날의 풍경
10 아이디어 뱅크 전유성
11 맑고 고운 노래 〈맷돌〉
12 록커 이수만
13 방송국 DJ가 되다
14 《대학가요제》를 진행하다
15 MTV에 빠진 유학생
16 카페 헤밍웨이
Part 2 슬픈 마네킹
17 홍종화를 영입하다
18 뉴에이지 음악의 기수
19 댄스 음악의 진용을 갖추다
20 최초의 기획 아이돌 현진영
21 발라드로 돌아오다
22 신혼은 아름다워
23 흐린 기억 속의 그대
24 시장의 쓴맛을 보다
25 또다시 찾아온 낭떠러지
26 SM의 두뇌 유영진을 얻다
27 날개를 펴지 못한 유망주들
28 마흔셋에 낳은 첫 아이
29 H.O.T 캐스팅의 비사
30 캔디가 된 전사의 후예
31 본격적인 스타 마케팅
32 S.E.S와 누나부대의 출현
33 팬덤 문화의 빛과 그림자
34 해외시장에 도전하다
35 ‘신화’ 창조의 시작
36 초등학생 권보아
37 대륙을 향한 발걸음
38 SM 코스닥에 입성하다
39 SBS와의 갈등
40 Fly to the sky의 비상飛上
41 ID; Peace B
42 H.O.T의 해체
43 보아, 일본 열도를 삼키다
44 공금횡령 사건의 진실
45 신인가수 잔혹사
46 No.1의 대활약
47 동방신기 이야기
48 록 음악에서 길을 잃다
49 에이스의 그늘에 가려진 걸그룹 천상지희
Part 3 더 보이즈
50 멀티 유닛 슈퍼주니어
51 슈퍼주니어, 공연예술의 슈퍼맨이 되다
52 빛나는 컨템포러리 밴드 샤이니
53 함수 소녀들 f(x)
54 소녀시대, 소녀들의 시대를 열다
55 SM과 SNS
56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57 K-POP 대부의 리더십의 비밀
58 이수만의 CT론
59 젊은 경쟁자들 양현석과 박진영
60 버추얼 네이션과 SM의 미래
참고문헌
이 책은 이수만과 그가 일궈온 SM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그와 힘을 합쳐 대한민국의 문화산업을 개척해온 사람들에 관한 역사적 보고서이다.
이수만은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 등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중문화 스타들을 보유한 SM 엔터테인먼트의 창업자이다. 그는 1981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MTV가 몰고 온 문화적 현상에 크게 감명받아 1985년 귀국해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유학을 마쳤을 때 미국인 평균소득의 두 배가 넘는 초임 연봉의 편안한 일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마다하고 험난한 가시밭길로 나섰다.
이수만이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고교시절 교내행사에서 보았던 임성훈과 최병걸에 대한 동경과 선망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SM을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약 20년이 흐른 1989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검증되지 않은 새내기 음반제작자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창업 직후 그는 원조 아이돌 스타 현진영을 키워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는 현진영을 유혹의 마수로부터 지켜내지 못했고, 이후로 잇단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그가 실패의 늪에서 탈출한 것은 1996년 H.O.T를 데뷔시키면서였다.
이수만은 국내시장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H.O.T, S.E.S, 신화와 같은 내로라하는 인기 보증수표들이 벌어들인 수익을 일본 시장 개척에 쏟아 붓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가 일본 시장 개척의 첨병으로 내세운 사람은 15세 소녀 보아였다. 그는 3년간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보아를 일본 활동에 적합한 가수로 조련하였다. 그러나 한국 출신 가수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사례가 극히 드물었던 시절인 터라 10대 소녀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킨다는 그의 발상은 대단히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다.
일본 활동 초창기의 보아는 일본 대중음악시장의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 시장의 밑바닥을 훑고 다니는 근성 있는 자세로 성장의 발판을 차근차근 만들어나갔다. 보아는 배용준이 욘사마로 불리기 이전부터 이미 SM발 한류를 도쿄 거리에 퍼뜨리는 문화 외교관 역할을 해내며, 감동적인 무대로 일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아는 일본 진출 2년 만에 일본 음악시장을 삼켰다.
보아의 뒤는 동방신기가 이었다. 동방신기는 보아가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서 일본시장을 개척해갔다. 동방신기는 탁월한 재능에 힘입어 일본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동방신기와의 계약문제가 돌출하면서 이수만은 멤버들 가운데 세 명을 잃고 한동안 실의에 빠지고 만다.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가 차례로 성공하면서 이수만은 다시 영광을 되찾게 된다. 이 팀들은 동영상 공유사이트 유튜브와 소통과 대화의 중심채널이 된 SNS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면서 SM 엔터테인먼트가 전 세계로 급속히 그 영향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사실에 고무된 이수만은 2012년 여름 SM이 전 세계 70억 명의 인구를 거느린 가상 국가(Virtual Nation)를 향후의 목표로 전진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수만은 SM이 문화산업에서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CT, 즉 Culture Technology(문화 기술)를 꼽았다. 그는 CT를 전문적인 문화예술인을 키워내 시장에서 평가받는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그가 이끄는 SM 엔터테인먼트는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마케팅으로 이어지는 체계화된 프로세스의 구축을 통해서 이러한 CT를 성공적으로 구현해왔다.
이수만은 전근대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꾸려져온 한국의 문화산업을 첨단화하고 세계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SM 엔터테인먼트를 연예계 최초로 코스닥시장에 입성시키는 개가를 이룸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대중문화 기획자로서의 입지를 한층 더 공고하게 다졌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SM 엔터테인먼트를 코스닥에 등록시키기 전에 있었던 내부 거래로 인해 공금 횡령 혐의를 받고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되고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었다. 그는 그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미래를 향해 대담하게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려는 그의 긍정적인 의지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수만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함께 열정적으로 일하도록 만드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왔다. 남다른 소통능력이야말로 문화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의 종사자들이 탐낼 만한 그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고비를 헤쳐 나온 그의 인생항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로 기죽어 지내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미래로 나아갈 도전의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이수만은 1990년대 후반 S.E.S를 일본에 진출시킨 이래로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맡아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까닭에 그는 ‘한류전도사’로 불려왔다. 한류는 한국과 외국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에서 효과적인 윤활유 역할을 해왔고, 그는 이러한 현상을 ‘Culture First Economy Next’라는 표어로 요악한 바 있다.
이수만은 인적자원이 부존자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성과물인 한류를 선두에서 개척해왔다. 그런 이수만의 옆에는 양현석과 박진영 같은 걸출한 도전자들이 있었고, 이수만이 이들과 만들어온 치열한 경쟁구도는 한국 문화산업의 희망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예감시키고 있다. 이수만과 그의 다양한 라이벌들이 써내려온 이야기 그 자체야말로 한국 문화산업의 성장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수만을 중심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벌어진 한국 문화산업의 역사를 동시대의 전체적인 시대상과 쉽게 비교해가면서 생생하게 읽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게는 한류와, 크게는 대한민국의 문화적 미래에 대한 독자 나름의 판단과 전망을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문화산업 개척자에 관한 보고서
이 책의 저자들은 대중음악에 관한한 문외한들이다. 그런 그들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K-Pop의 대부’ 혹은 ‘한류의 전도사’로 불리는 이수만에 관한 문헌이 책자 형태로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기이하게 여기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이 책이 아이디어 단계에서 최종적인 인쇄물로 간행되기까지는 꼬박 3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책에는 이수만이 출생한 1952년부터 그의 삶을 좇아서 2012년 현재까지 그가 펼쳐온 다양한 대중문화 활동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의 소년기로부터 청년기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현대사 격동의 편린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가 음악의 세계에 몸담기 시작한 1970년대 그의 음악 인생의 멘토라 할 수 있는 4월과 5월의 리더 백순진과의 활동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야기들이다. 그가 어떻게 포크 가수에서 유명사회자가 되었는지 또 연예계와 인연을 정리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문화산업에 투신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를 이 책으로 만날 수 있다.
현재 이수만은 SM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으로서 문화계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수많은 성공 이전에 그는 오랜 세월 실패의 어두운 그림자와 사투를 벌여야했던 고독한 음반기획자였다. 그가 실패의 꼬리표를 떼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자신의 치밀한 기획력으로 H.O.T, S.E.S, 신화 등을 청소년 문화 아이콘으로 키워내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그가 성공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SM 엔터테인먼트 밖의 한 인물이 있었다. 그 사람은 잡지발행인 신성철이다. 신성철이 발행한 [뮤직라이프], [포토뮤직], [토마토], [I Love Star] 등은 1990년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이 책은 어떻게 이수만이 이들 잡지의 영향력을 자신의 품에 안게 되었는지와 잡지의 영향력이 급격히 몰락한 2000대 초반 인터넷으로 그의 영향력을 이동시켰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런 부분은 이수만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수만은 2000년 4월 연예계 최초로 SM 엔터테인먼트를 코스닥에 입성시켰다. 이로써 그는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연예기획사의 대주주가 되었다. 이 무렵 전후로 그는 해외시장 공략에 맹렬하게 매진하였다. 국내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해외에 쏟아 붓는 그의 모험적 도전은 SM을 전형적인 내수기업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수출기업으로 발돋음시켰다. 개별 가수가 수행하던 해외 활동을 뛰어넘어 조직적으로 해외활동을 확장하고 거기에 지속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이수만의 업적은 한국 대중문화의 해외시장개척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H.O.T, S.E.S, 신화, Fly to the sky,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등을 이수만이 CT(Culture Technology:문화기술)라고 부른 SM의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마케팅으로 연결되는 체계화된 프로세스로 아시아 정상급 가수들로 성장시킨 그의 활약상은 한국 대중문화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내 준다. 이 책은 이들 그룹들이 아직 연습생이었던 시절부터 전 세계를 누비는 스타가 되기까지의 성장의 면면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런 기록을 통해서 독자들은 스타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수만의 성공신화를 만들어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다양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이수만을 애태우게 하며 실패의 상실감을 안겨주었던 SM 안팎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상세하게 담고 있다. 독자들은 동시에 이전에는 어떤 기록으로도 쉽게 만나볼 수 없었던 이수만과 경쟁관계에 서 있거나 적대적인 갈등관계에 있었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이수만을 중심으로 한 K-Pop의 태동기로부터 발전의 주요한 역사적 흐름을 정밀하게 접근함으로써 한류의 성장과정을 평가하고 한국산 문화 콘텐츠의 발전 가능성을 심도 있게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이수만이 SM의 새로운 사업 목표로 설정한 버추얼 네이션(Virtual Nation)의 발전 전망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나무위키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1195/read?bbsId=G003&articleId=977771&itemId=277]
"칭기즈칸도 프랑스는 못갔다. 한류는 간다, 정복할 것이다"
거창한 야심의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인류사의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 징기스칸도 못간 그 프랑스를 ‘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정복해 버리겠다’고 벼르는 야심만만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이수만이다.
아주 오랜만에 이수만의 소식을 듣는다 (지금 그를 ‘이수만’으로 ‘씨’를 빼고 부른다는 것이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든다). 나에게 있어 이수만은 ‘눈이 작은’ 남자로 기억된다. 나는 그의 ‘작은 눈’이 부러웠던 적이 있다. 김세린은 눈이 커서 어릴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으므로 ‘눈이 크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부끄러웠었다. 그래서 눈 큰 남자보다는 눈 작은 남자에게 눈길이 더 갔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눈이 작아서, 눈을 뜨고 있어도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가고, 특히 웃을 때면 눈이 없어져 버리는 이수만은 김세린에겐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호 호. 그래서 오늘 그의 소식을 들으니 우선은 좀 반가웠다. 그의 안부는 ‘청바지를 즐겨 입던 눈이 큰 소녀’였던 ‘나’를 회상케 한다.
이제사 들어보는 이수만의 소식은 그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에터테이너임을 알겠다. 이수만은 지금은 가수라기 보다는 SM 엔터테인먼트 ‘회장’이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고, 게다가 큰 부자란다, 말하자면 작년 2010년에는 연예인 주식부자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눈 작은 사나이, "대학가요제'에서 사회를 맡았던 이수만 그가 그동안 한국에서 크게 성공했고 나아가 아시아 대륙을 나부끼는 ‘한류바람’을 키운 것 같다. 한류열풍으로 한국이 아시아 제국에서 인기있는 나라가 되는데 그가 기여하였다면, 그건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아시아권에 머물던 '한류(韓流)'가 유럽이라는 신대륙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고 한다. 작금에 프랑스 정복을 목표하는 ‘한류’의 중심인물이 이수만인 것이다.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가 10·11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의 공연장 '르 제니스 드 파리'(7000여석 규모)에서 콘서트 'SM타운 라이브'를 여는 게 시발점이다. 이 공연 티켓은 온라인 예매를 시작한 지 10여 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지난 5월 1일에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1회로 예정된 이 공연을 2회로 늘려 달라며 프랑스 팬 수백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는 것. 이에 이수만은 이렇게 말한다,
"루브르 박물관 앞 시위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우리 공연에 무슨 문제가 있어 저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좋은 일로 데모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웃음) 우리는 축제 분위기였다. 세계화를 목표로 물 밑에서 10여년간 진행했던 계획이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한 듯하다." 한국 대중가수의 사상 첫 유럽 대규모 공연으로 기록될 10·11일(현지시각) 파리 'SM 타운 라이브' 공연에는 동방신기·소녀시대·슈퍼주니어·샤이니·F(X) 등 인기아이돌 그룹 5팀이 참가한단다.
10년간 공들여 노력해온 SM의 유럽 공략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 이수만(59)은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겸 대표 프로듀서이다. 그는, 앞서 언급대로,유럽진출에 자신감과 야심을 드러낸다, "칭기즈칸도 프랑스까지는 못 갔다. 우리는 칭기즈칸도 못한 역사적 일을 하고 있다" 그는 한국대중음악의 세계화의 꿈을 가지고 있으며 유럽·미국 등 작곡가 300여명과 함께 일하면서 현지 정서를 음악에 담아내려고 한다. 그의 최종 목표는 세계 최대 시장이 될 중국 정복이란다. 미국은 이수만의 야심의 큰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단다.
"미국 시장에서 인정받는 건 더 큰 그림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나는 중국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곧 중국에 할리우드를 능가하는 엄청난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우리는 일본 시장에서 성공했고 미국과 유럽을 공략하고 있지만 최종 목표는 중국의 할리우드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단언컨대 앞으로 5년 내에 아시아 1등이 세계 1등이 될 날이 온다. 김세린은 이수만씨의 꿈과 야심 그리고 거대한 목표에 접근하는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가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을 정복 대상으로 삼은 목표에도 동의를 하는 바이다. 중국 대륙을 정복한다는 것은 인구면에서 볼 때 세계의 인구를 거의 1/5을 점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얼마나 원대한 야심인가.
김세린의 시각으로는 한국의 엔터테인멐트들이 인도에의 진출도 고려하면 좋을 것 같다. 거기는 영어권인데다 인구 역시 많으니 좀 유리하고도 유익할 것 같다. 이수만씨의 야심과 열정에 박수하면서도 김세린이 한두가지 '걱정'을 표현하자면, 유럽에서 4-5명의 스파이스걸이나 노엔젤등 여성보컬그룹만 보아온 나로서는 지금 저기 '소녀시대' 멤버의 10명은 하나의 '큰' 군단같이 보인다.
저렇게 많은 숫자의 여자애들의 보컬그룹은 인구 많은 아시아에서는 보편할지 몰라도 인구가 적은 유럽에서도 통할지 의문이다. 그리고 소녀시대등 여자가수들이 저토록 짧은 미니를 입고 있는데,자유의 대륙 '유럽'에서, 자유가 넘치는 대학에서도, 자유 베를린 도심의 거리에서, 김세린은 '팬티'만한 '앙증맞은'(?) '하의실종'의 짧은 미니치마, 미니팬츠를 본 적이 없다. 대학에서도, 거리에서도, tv에서도...오직 한국적 '별난' '짧은' 현상이다.
김세린은 한국의 '젊은' 혹은 '어린' 여성 연예인들이 일본을 위시한 독일등 유럽과, 부유한 국가들에서 엉덩이만 겨우 가린 '극도로' 짧은 치마와, 골반 돌리기 같은 천박한 '선정성'으로' 한류'를 흘리기를 원치 않는다. 정말로 연예인다운 멋진 노래와 그에 걸맞는 멋진 춤으로 세계무대에서 승부하기를 원한다, 한마디로 '한국여성들이 섹시하되 천박하지 말 것이다'. 한류로 성공하기 어려운 줄은 알지만, 그래도 한국 연예인들이 '천박한 코리아'의 사절단이 되면 곤란하다.
매력과 품위의 우리 나라 여성들의 해외 원정을 보고싶다.
[Naver 블로그에서]
SM이수만회장 과거 가수시절 - 행복
우리나라 연예인 3대기획사 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3대기획사가 어디 인지 왠만한 사람이면 다 알것이다. 그만큼 유명해졌고, 걸출한 스타들이 많이 배출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죽 했으면, 요즘 어린친구들은 부모님 생일은 몰라도 3대기획사 소속가수가 누군지 안다는 소리가 나올까?
3대기획사라고 하면 연예인 기획사중에 가장큰 3개의 기획사로 SM,YG,JYP 입니다. 각 회사는 회사의 수장의이름과 관련한 약자로 회사이름을 세웠죠 이 3대기확사의 수장들은 현재 성공한 사업가로 지금 나오는 아이돌을 좋아 하는 어린친구들에게는 사업가로만 알려져 있지 한때는 잘 나갔던 가수였던걸 아는 어린친구들은 없을 것 입니다. JYP의 수장인 박진영씨는 지금도 왕성하게 가수로 또는 배우로도 활동하시니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SM의 이수만씨나 YG의 양현석씨가 과거 가수로 활동 했었다는 아십니까?
오늘부터 그 3대기획사 수장들의 과거 가수였던 시절에 모습에 대하여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로 SM의 이수만씨의 과거 가수였던 시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실 박진영씨나 양현석씨는 저에게 있어 추억의 가수가 되긴 하지만, 이수만씨가 가수로 활동 하던 시절은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은 없습니다. 저희 어머니 세대쯤이면 알까? 하지만 열심이 인터넷을 돌아 다니다가 레어 사진과 동영상을 찾아 냈습니다.
사실 이수만씨는 가수보다는 MC로 유명한 사람이죠 그러나 데뷔를 가수로 했었기에 가수 출신이라고 하는데 맞죠, 70년대 통기타 가수로 데뷔한 이수만씨는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대학생 가수중 한명이였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건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였다고 합니다. 이수만씨는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사회자를 보게 되었고, 그 가요제에서 당시 서울대농대 밴드인 "샌드테이블스"가 " 나 어떡해 " 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서울대출신이자 한때는 샌드테이블스에 몸 담고 있었던 이수만씨는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죠, 원래 대상 수상사는 산울림이였다고 하지만, 산울림의 맏형인 김창완이 대학을 졸업했기에 댄드테이블스가 대상을 수상 하였다고 하죠, 진실은 먼지 모르겠지만 아이러니 하게 " 나 어떡해 "는 산울림의 둘때 김창훈씨의 곡이죠.
이후 대학가요제의 단골 MC로 등장하게 되는 이수만씨는 MC로서 활동영역을 넓히게 됩니다. 1981년 이수만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고 1985년 귀국한 후로는 가수로서의 활동보다는 MC로서 활약을 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달기게 됩니다. 당시 이수만씨는 " 별이 빛나는 밤에 " DJ였던 이문세씨와 대학가요제 대상 출신인 유열씨와 함께 " 마삼트리오 " 로 불리우며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MC로 활약하는 중 앨범을 몇장 더 발표 하며 가수로서 활동도 하게 되죠 93년 당시에는 " 이야기 쇼 만남 " 이라는 프로그램 MC를 맡으면서 당시 회당 300만원이라는 엄청난 조건의 대우를 받기고 하였다고 합니다.
MC로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이수만씨는 현진영씨를 가수로 데뷔 시켰으나, 마약혐의로 실패를 맛보았고, 95년 HOT를 성공적으로 데뷔 시키며, SM기획사를 설립, 음반기확자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아시다시피 SES, 신화, 보아, 플라이 투더 스카이 등을 연이 배출 하면서 명실상부한 아이돌 시대를 열였죠 지금 현재 SM은 신동엽, 강호동씨 등을 영입에 성공에 그 위세가 더 위풍당당 하게 변했죠.
이수만씨는 가수로서 많은 음반을 내고 활동을 하였지만, 수많은 곡중에서 익숙한건 " 행복 "이라는 곡 밖에 없다고 하네요 물론 명MC로서 기억 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지금도 왕성하게 MC로서 활동중인 이경규씨를 만든 프로그램인 일요일일요일밤에 라는 프로그램도 93년에 사회자로 프로그램을 맡았었죠.
지금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수만씨를 단순히 사업가 정도로만 생각 하지만 그 성공 뒤에는 수많은 노력 있었다는 것이 보이죠 우리나라 가요계에 새로운 역사를 쓴 이수만씨 이렇게 알아 보니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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