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03.
바벨론, 혼돈의 도시
https://youtu.be/VH6iw8_G8f8?feature=shared
성경에는 이미지가 많습니다. 그 이미지들은 어떤 주제를 성경 전반에 걸쳐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각각의 이미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전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주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앞부분을 보면 비극적인 일이 그 이야기의 시작 부분부터 일어납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이었는데 그 둘이 다투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땅속에 감추었습니다. 가인은 그 일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나가야 했으며 그가 살던 곳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어떤 본능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창세기 4장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도시를 건설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뼛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은 무릇 인간이란 공동체를 건설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머지않아 악몽으로 바뀝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따라 우리가 읽다 보면, 인간의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문화가 꽃피고 인간은 다양한 일을 성취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이르면 인간은 마침내 바벨탑을 세웁니다. 거기서 인간은 오만함으로 하늘에 닿을 탑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가인이 꿈꾸던 인간 사회였고 가인의 꿈이 논리적으로 확장된 결과물입니다. 가인은 살인자였으며 자기중심적으로 살았던 인물인데 그런 삶의 방식이 자라서 이런 사람들 가운데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세상으로 나가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세상 구석구석을 번성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세계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언어가 하나였으며 그렇게 흩어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바는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개입이 시작됩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은 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 탑이 하늘에 닿게 할 심산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탑은 조그맣게 쌓은 건물일뿐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말하는 대목이 성경에 나옵니다. 시편 2편 보면, 민족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려다보시며 그들을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보다 더 나은 꾀가 내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혼돈에 빠지게 하시고 그들의 언어를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더 이상 그 일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오만한 계획이 중단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대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사실 바벨탑은 인간의 오만함을 뽐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문화입니다. 즉 우리 가족, 우리 민족이 중요하며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셨는데 그는 나중에 아브라함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는 유목민이었습니다. 이것은 은총이 필요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는 인간이 공동체를 통해서 하려는 것보다 더 나은 계획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그것이 어떻게 되는지…” 이 두 가지 대조는 성경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져서 구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며 신약성경에도 이런 대조가 반복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장하여 한 나라가 되었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씨름했던 현실은, 그들이 작은 나라로서 주변의 강대한 나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가 있었고 북쪽에는 시리아(아람)가 있었고 바벨론은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바벨론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은 바벨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벨에서 바벨론이 유래했습니다. 이사야 13장과 14장을 보면, 예언자 이사야가 바벨론을 쳐서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벨론이 바벨탑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교만하며 마귀적이며 사탄을 추종합니다. 바벨론이 애쓰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고 다른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바벨론식의 삶을 따르면 인간은 결국 오만하게 되고 폭력적으로 모든 종류의 악한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 성경 이야기에 소개됩니다. 이사야 39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반드시 죽을 병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그 후에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 방문단은 바벨론 왕이 보낸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너무 기뻤습니다. ‘이 위대한 왕이 오다니요!’ 히스기야는 시리아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사절단이 찾아온 것입니다. 바벨론은 좀 더 멀리서 시리아와 마주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바벨론이 자기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히스기야는 생각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의 방문을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 사절단에게 왕궁을 구석구석 보여주고 왕국의 보물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예언자 이사야가 그에게 왔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지 못한다면 당신은 바벨론을 의지하여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바벨론 식의 삶은 모든 사람이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재위 중일 때는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바벨론 왕이 자기 군대를 보내서 이 나라의 모든 보물을 휩쓸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왕궁에 있던 성전에 있든지 가리지 않고 그것을 바벨론 자기 나라로 가져갈 것입니다.” 이 대목은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서 가장 기막힌 장면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벨론의 삶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돌봐주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리면 그러면 우리가 실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인간이 오만하게 지은 바로 그 시스템입니다. 바로 그 시스템은 바벨탑을 쌓아 모든 시대(시간)와 모든 지역(장소)에 세우려 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인데 그 비극은 유대 민족이 겪은 일입니다. 그때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우리는 슬피 울었도다!” 이것은 시편 137 편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우리가 시온을 생각할 때 우리를 포로로 끌고 온 자들이 늘상 우리를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노래를 불러보아라. 우리가 들으니 너희는 좋은 음악이 있어서 너희 나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렀다던데… 우리를 위하여 시온에서 부르던 노래를 불러보라!” “우리가 어떻게 야훼께 드린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낯선 땅에서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회상하면서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예루살렘에 내가 속하였도다! 바벨론은 아니로다!” 이 두 가지 대조를 보면 바벨론은 어떤 곳인가 하면 인간의 오만과 악덕과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며 그곳에서 오만한 자들이 인간의 제국을 건설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과 대비됩니다. 예루살렘은 기쁨과 평화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어떤 곳이라고 생각했는가 하면,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자신이 자유를 얻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을 묶고 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를 읽어보면, 예레미야가 쓴 슬픈 노래가 애도하는 것은 끔찍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이 망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바벨론이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그 패러디는 진짜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얻으려고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도 않고 그 분을 신실하게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나 자신을 위해서 얻고자 애쓰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패러디는 신약성경에서도 반복됩니다. 바벨론은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분명 로마를 상징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로마는 당시의 강대국이었으며 주후 1세기에도 그렇고 그 후 몇 세기 동안 이어졌습니다. 바벨론이라는 단어는 로마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 베드로가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은어를 사용하여 교회가 바벨론에 있다고 말합니다(베드로전서 5:13). 물론 그 말의 의미는 로마 있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상징하는 것은 로마 그 자체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이해해야만 인간 사회가 어떻게 악화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입니다. 여기서 바벨론은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을 상징합니다. 바벨론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긁어모으려고 하고 모든 물건과 모든 비단과 금과 은은 물론 모든 노예들과 세상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끌어모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로마로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소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백성이며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은 이런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그곳의 대문은 밤낮으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땅의 왕들이 자신들의 보물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쁨과 평화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곳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그곳에서 나무들은 생명수의 강가에서 자라나는데 요한계시록 21 장과 22장에 있는 바와 같이 그 나무의 잎사귀는 세상을 치료하는 약재가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그림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알게 되는 것은 기독교회가 은연중에 비판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오만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오만 함은 어떤 제도를 만들고 실제 건축물을 세우기도 하고 정치-사회적인 구조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충족을 확보하고자 하며 원하는 모든 것을 확보하려고 하며 그 누구도 개의치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을 하나님의 세계 가운데서 돌아볼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경향을 포착하는 것이며 특별히 우리가 간파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자, 종교라고 부르는 이런 것이나 영성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은 한쪽으로 물러나서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를 운영하며 우리가 국가나 문화를 건설합니다. 이런 일에 종교나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벨탑 건축자들의 욕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짜를 모방한 것일 뿐입니다.
진짜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며 그것은 인간을 만개하고 번영하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라는 처음의 계획을 이루게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루살렘은 그것을 상징합니다. 바벨탑이 상징하는 것은 제국을 세운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우리가 단순히 어떤 것을 보고 왠지 제국을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악마화하여 거기에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바벨론의 유혹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국가가 자기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형태의 정부든지 방임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깨닫는 바는, 기독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비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권세를 독점하려 할 때입니다. 그리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고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할 때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면서 이렇게 말할 때도 포함됩니다: “교회는 교회 안에만 있어야 해. 그것은 우리 공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어!” 아니면 사람들이 계속 교회를 손에 넣으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기독교회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우리에게 유익이 되며 나아지게 해 보자!”라고 말할 때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어려운 주제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유익을 얻으려면 그런 사람들이 없다고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점은 창세기 11장과 12장에 나오는 위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포로생활과 회복으로 나타났는가를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세우는 도시가 그것이 문자적인 것이든 은유적인 것이든 하나의 모델이 되어 다가올 예루살렘을 보여줄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곳은 평화가 넘치고 희망이 넘치고 생명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