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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제대로 읽기(1): 1-4
(1) 레위기, 수면제인가 영양제인가
신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산, 예배와 삶의 기준 제시하다
유대인 자녀 성경교육의 출발점 … 선택된 백성이 지켜야 할 제사와 율법 담아
레위기는 흔히 구약의 수면제라 부른다. 다양한 제사들과 복잡한 제사의 절차, 용어들, 그리고 아무런 구체적인 의미와 교훈이 설명되지 않은 여러 가지 따분한 법들과 규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로인해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레위기는 마치 넘기 어려운 높은 담이나 거대한 산과 같이 느껴진다. 필자는 오늘부터 20회에 걸쳐 여러분과 레위기라는 높은 산을 오를 예정이다. 여러분은 이 등반 과정에서 레위기의 산은 기막힌 장관을 연출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산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레위기는 독자 여러분에게 수면제가 아닌 시원한 청량제이자 영혼을 강건케 하는 영양제로 다가갈 것이다.
레위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다섯 살 즈음 자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오경(토라)의 첫 번째 책이다.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가 아닌 레위기로 자녀의 성경 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은 레위기의 중요성을 잘 말해준다. 실제로 레위기는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그리고 예배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교육하는 교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는 오래도록 교회로부터 홀대를 받아왔고 혹은 잘못된 풍유적 해석으로 설교되고 교육되어왔다. 레위기는 이제 재평가되고 본래의 위상을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레위기는 그야말로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으며, 설교의 보물창고이자 마르지 않는 신학적 샘물이다. 특히 신약을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국내에 좋은 레위기 주석들이 있지만 레위기 전공자인 필자는 마침 지난 5월 말에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플러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지면을 통해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많은 내용들과 다양한 도표와 도식, 그리고 그림들이 사용된 상세한 주해는 그 책을 참고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가 기록된 정황과 목적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봐이크라’(wayyiqra ar”q.YIw:)로 뜻은 “그가 부르셨다”이다. 이것은 레위기의 첫 번째 단어인데, 히브리어 성경의 각 책들은 첫 번째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다. 그래서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레위기 말씀을 주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레 1:1). 여기서 “회막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레위기 앞의 책인 출애굽기는 성막(회막) 완성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마무리된다(출 40:33~38). 이때 성막에는 여호와의 구름 기둥이 강림하고 성막 전체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찬다. 하나님의 구름은 그 전에는 시내산 꼭대기에 내려와 있었다. 이것은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예배의 장소, 곧 성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시내산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암시는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시내산에 백성들이 모일 때, 삼중으로 배치된다(출 24장): 산 정상 가까이(모세); 산중턱(백성의 대표); 산기슭(백성들). 이것은 성막의 삼중 배치와 동일하다: 지성소(대제사장); 내성소(제사장); 마당(백성들). 그 시내산 성전 위에 임한 구름이 이제 회막으로 이동해 왔다. 쉽게 말해 성막이 완성된 후, 여호와께서는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고자 이동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신탁의 장소가 바뀌었다. 이제 시내산 정상이 아닌 “회막에서” 모세를 통해 백성들에게 선포될 레위기의 율법이 주어진다.
요컨대,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완성되었다(출 25~40장).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제 성막의 운용에 대한 문제와 성막을 중심한 생활 규칙이 주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것은 성막에서의 제사 규범과 진영 (그리고 땅)에서의 생활 규범이다. 그 내용들을 담은 책이 바로 레위기다. 시내산 아래에서 예배와 삶에 대한 규범을 전수받은 후, 백성들은 이제 인구 조사와 더불어 진영을 재정비한 뒤 민수기 10장 11절에서 비로소 시내산을 떠난다. 민수기는 그 후의 광야에서의 기록이다.
앞서 말한대로 레위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봐이크라’인데, 영어 제목 ‘Leviticus’와 이를 따른 우리 말 성경 ‘레위기’는 이 책의 내용에 걸 맞는 제목이 아니다. 헬라어 구약성경(70인경)이 이 책의 제목으로 레위띠꼰(leuitikon Leuitikon)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레위기에는 레위인과 관련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으므로(레 25:32~34) 다소 엉뚱한 제목이다.
레위기는 제사장들을 위한 지침들로 가득 차 있으
며 사실은 제사장들보다는 평민을 위해 쓰인 책이다. 이 책은 곳곳에서 모든 법들이 제사장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숙지해야할 중대한 법들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상세한 제의적 절차와 거룩한 삶의 기준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레위기 법의 준수를 통해 세상 민족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구현해야할 사명을 안고 선택되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제사법 및 율법을 공부해야 하는가?
예수님 이후 신약 시대에 제사는 폐지되어 더 이상 드리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으로 모든 희생 제사가 단번에 영원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히 9:11~12). 그렇다면, 왜 우리는 레위기, 특히 제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레위기의 제사법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의미의 핵심이 담겨 있고, 또한 예배의 본질이 담겨 있다. 구약의 율법은 형식과 틀 속에 본질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형식과 틀 자체도 어떤 중요한 신학적 영적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고 말씀하셨다(마 5:17). 혹자는 이것을 오해하여 구약 율법이 폐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예수님의 이 말은 율법의 형식(껍데기)은 폐기되고 율법의 본질(알맹이)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율법의 완성적 폐지라 할 수 있다. 율법의 형식인 제사와 제의, 음식법, 정결법, 제사장 제도, 성전 제도, 이 모든 것들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제사의 본질인 ‘헌신과 예배,’ 음식법의 본질인 ‘거룩한 구별,’ 정결법의 본질인 ‘도덕적 순결,’ 제사장과 성전의 본질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요컨대, 신약과 구약의 관계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다. 형식과 껍데기는 철폐되었기에 신약과 불연속적이고, 그 정신과 본질은 신약에서 완성되어 이어지므로 연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율법의 완성적 폐지, 즉 형식의 폐기와 본질의 성취는 구약 율법 전체에 적용될 수 있다.
깔끔히 정돈해야 할 제사 용어들
레위기 독서를 어렵게 하는 것은 많은 전문적인 용어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제사와 의식들, 그리고 법들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다. 특히 제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제사 용어들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제사의 종류: 5대 제사
레위기는 먼저 1~7장에서 다섯 가지 제사를 규정한다. 이것을 소위 ‘오대 제사’라 한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 번제: 전체를 태워 모두 바치는 수직적 헌신의 제사다.
b. 소제: 유일한 곡식의 제사로 주로 감사의 제사다.
c. 화목제: 기본적으로 감사와 찬양, 수평적 나눔을 위한 제사다.
d. 속죄제: 도덕적 죄와 신체적 부정결을 해결하기 위한 제사다.
e. 속건제: 재산상의 피해를 준 죄를 위한 배상의 제사다.
제사법을 다루는 레위기 1~7장은 내용과 주제에 의해 대략 1~5장과 6~7장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각각의 다섯 가지 제사의 절차와 방법에 대한 규정이고, 후자는 그 다섯 가지 제사의 추가 규정들로 각 제물들을 태운 뒤의 후속조치, 곧, 재와 잔존물의 처리, 그리고 남은 고기의 분배 및 먹는 방법 등을 상세히 설명한다.
2) 제사의 방식
한편, 제사의 방식이나 제물을 바치는 동작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들이 나타난다. 거제, 요제, 그리고 전제(관제)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제사 종류가 아닌 제사 방식에 대한 용어들이다. 거제와 요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a. 거제: 히브리어로 테루마(teruma hm’WrT.)이다. 이것은 흔히 들어 올리는 제사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단순히 여호와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제물”(contribution)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5장에서 백성들이 “자원하여 가져온 것”의 히브리어가 ‘테루마’다(출 25:2). 엄밀히 이것은 제사 드리는 방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기존 용어 ‘거제’를 그대로 사용한다.
b. 요제: 히브리어 테누파(tenupa hp’WnT.)에 해당된다. 흔히 이것은 흔들어 바치는 제사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동사 ‘누프’는 “흔들다”는 의미를 포함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이것은 단순히 제단 앞에서 제물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제사장들을 위임할 때 일단 그들의 손에 많은 제물들을 들어 올린 동작을 한 뒤, 그것들을 제단에 바친다(레 8장). 이때 그 제물의 막대한 양을 고려해 볼 때 손에 쌓은 뒤 흔들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단순히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여러 학자들이 오히려 이것을 ‘거제’(heave offering)로 번역하는데 우리는 혼동을 피하고자 전통적 번역 그대로 ‘요제’(wave offering)를 따른다.
c. 전제(관제): 히브리어로 네세크(neseq %s,n<)라 칭한다. 이것은 ‘붓는 제사’로서 주로 포도주나 독주(아마 맥주), 혹은 기름을 제단에 붓는다(창 35:14; 출 29:40; 레 23:13; 민 28:7 “독주의 전제”). 전제는 구약에서 60여 차례 나타나지만, 어떤 방식으로 제단에 부었는지는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3) 기타 제사 용어
a. 예물(고르반): 짐승의 제물들은 모두 ‘예물’로 불린다(레 1:2). ‘예물’의 히브리어는 코르반(qorban !B’r.q’)으로 ‘가져온 것, 바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단에 올리는 희생 제물들 외에도(레 1-7장) 제단에 올리지는 않으나 성전에 바치는 모든 예물(레 27장)은 고르반이라 부른다.
b. 화제: 히브리어로 이쉐(isshe hV,ai)인데, 흔히 불로 태우는 제사로 이해된다(레 1:9; 2:2). 이 단어가 ‘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쉬(esh vae)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불과 상관없는 제사 용어로서 ‘봉헌물, 음식 예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원으로 따지면 이쉐의 어원은 ‘불’이 아닌 ‘선물, 공물’을 의미하는 우가릿어나 ‘소유물’을 의미하는 아랍어 일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문맥에서 “화제”가 어울리지 않은 사례들이 많다. 특히 태우지 않는 제물도 이쉐(isshe hV,ai)라 칭하는데(레 2:10; 6:17) 예를 들어 결코 태우지 않는 진설병 상에 놓은 떡도 이쉐라 칭한다(레 24:6~7, 9). 심지어 붓는 술의 전제도 이쉐로 칭한다(민 15:10). 따라서 이쉐는 ‘화제’라기 보다는 ‘음식 봉헌물’(food offering) 혹은 ‘헌물’(gift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통적 견해를 따라 그대로 ‘화제’를 사용할 것이다
(2)중앙에 놓인 성막과 거룩의 개념을 생각, 제사를 위한 공간
삼중구분된 성막은 ‘속죄 메커니즘’ 이해의 중요 요소
레위기는 성막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삶에 대한 지침
레위기의 첫 문장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회막에서 부르시고”(레 1:1)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때 회막은 성막을 가리킨다. 이 성막(회막)은 직전의 출애굽기에서 갓 완성된 광야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예배당이다. 성막은 공간적 측면에서 이스라엘 진영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데, 이스라엘의 삶의 측면에서도 그들의 중심에 놓여있다.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의 예배를 통해 거룩을 회복하고, 성막을 중심에 둔 일상 속에서 그 거룩을 유지하며 산다. 다시 말해,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실패한 사람은 다시 성막에 올라가 제의를 통해 거룩을 회복한 뒤, 삶에서 다시 거룩의 사명을 감당했다. 그들의 삶은 모든 것이 성막과 결부되어 있으며 모든 율법은 성막(성전)이라는 심장과 연결된 이스라엘의 혈관과도 같다.
성막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레위기는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삶에 대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에 ‘성막’은 땅 중앙에 건축된 ‘성전’으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성막(성전)에 대한 이해는 레위기 말씀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성막은 천막으로 지어진 성전인 셈인데, 따라서 성막, 회막, 성전은 같은 건물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성막을 자주 성전이라 칭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성막은 아래의 세 구역으로 나뉘며, 각 구역에 중요한 비품들을 비치해 놓았다: 1) 지성소:법궤; 2) 내성소:향단, 떡상, 촛대; 3) 마당:번제단, 물두멍
거룩의 세 등급
성전을 이해하고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속죄 신학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약에 나타나는 만물의 제의적 구분과 등급, 곧 ‘성-속’과 ‘정-부정’의 구분과 더불어 ‘거룩의 등급’을 알아야 한다. 레위기 10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다시 말해, 제사장의 핵심 직무는 ‘성-속’ 그리고 ‘정-부정’을 분별하고 또한 백성들이 그런 분별된 삶을 살도록 잘 지도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카다쉬(qadash) 혹은 카도쉬(qadosh)라 불리는 히브리어의 기원을 여기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성경적 개념의 거룩은 한마디로 ‘분리성’과 ‘완전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이 둘을 ‘거룩’이라는 개념으로 묶어서 설명하자면, ‘거룩’은 저 너머에 분리되어 있는 지극히 고결한 상태, 즉 ‘절대적 정결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세속에 적용될 수 없는 신적 영역의 정결이다. 따라서 거룩은 세속과 분리된 신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 인간과 근원적 간격을 두고 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의 본질이다. 그것은 불완전하고 흠결이 있는 세속의 영역과 달리 완전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거룩은 ‘분리’(동떨어짐), ‘완전함,’ 혹은 ‘온전함,’ ‘무흠’의 개념과 더불어 도덕적 고상함의 개념을 포함한다.
이 거룩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한 속성이다. 하나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다(삼상 2:2; 계 15:4).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도 스스로 또는 내재적으로 거룩한 속성을 가질 수 없다. 또한 피조물은 자신의 능력으로 거룩해질 수 없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약의 ‘거룩’의 개념은 두 가지 면에서 이웃들과 현격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구약은 이 세계의 피조물에 신성, 즉 거룩을 부여하지 않았다. 고대에는 이스라엘과 인접한 국가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해와 달, 별, 바다와 높은 산, 그리고 큰 나무와 같은 다양한 피조물을 내재적으로 신성하게 여기고 그들을 신격화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모든 만물을 단순한 피조물로 선포한다. 둘째, 고대 중동에서 거룩이란 윤리성과 무관한 개념으로 쓰인 데 반해 이스라엘에서는 이 단어에 강한 윤리적 성격을 포함시켰다.
사람들은 흔하게 하나님의 ‘거룩’(카도쉬)과 하나님의 ‘영광’(카보드)을 혼동한다. 둘은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의 속성에 속하고,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이 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의 외적 현시다. ‘영광’의 히브리어 카보드(kabod)는 본시 ‘무겁다’는 뜻을 지닌다. 하나님의 거룩은 피조 세계 저 너머에 계신 그분의 절대적 권능을 의미하며, 그분이 현현할 때 자연 속에서 엄청난 격동이 일어난다. 우리말 영광(榮光)은 ‘영화로운 빛’을 뜻하는데 하나님의 카보드(kabod), 즉 그분의 무거움과 장엄하심은 신적인 광채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현시된다. 영광은 구름, 불과 영롱한 광채, 바람, 우레와 번개, 진동, 그리고 나팔 소리와 같은 초자연적·물리적 현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법궤 자체가 그 분의 영광에 대한 표현이기도 했다(삼상 4:21-22). 더불어 비상한 사건, 곧 그분의 위대한 업적과 기적 역시 그 영광의 현시였다. 예컨대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빠뜨리시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출 14:18). 또한 출애굽기 16:7에서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주시는 기적으로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에서 가장 충만히 드러났다. 성막에서는 삼중으로 구분된 영역에서, 특히 거룩의 근원지인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표현되었다. 또한 갖가지 보석과 최고급 재료가 사용된 비품과 시설물들도 그분의 영광을 발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엄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임재로 인해 성막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다(출 40:34~35).
모든 피조물은 거룩하지 않다. 거룩한 속성을 내재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스스로 거룩을 창출해낼 수도 없다.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을 부여하실 때에만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런데 만물의 네 가지 요소인 시공간 및 인간과 동물의 거룩함은 각각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뉜다.
1) 인간의 등급: 모든 민족/이스라엘/제사장
2) 동물의 등급: 모든 동물/정결한 동물/거룩한 동물
3) 공간의 등급: 온땅(광야)/가나안땅(진영)/성전(성막)
4) 시간의 등급: 평일/안식일과 축일/속죄일
유대 랍비 학자 밀그롬(J. Milgrom)은 이것을 <표>와 같은 그림으로 도식화했다. 마지막 시간의 등급은 거룩의 삼등급을 시간에 적용해본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거룩은 원의 중심에서 밖으로 방사된다. 그러나 거룩의 영역은 이스라엘 땅과 백성, 정결한 짐승과 안식일/절기에 국한된다. 그 너머 온 인류와 모든 땅은 하나님의 지배하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거룩과는 무관하다. 참고로 약속의 땅이었던 가나안은 종종 거룩한 땅으로 불리기도 했다(시 78:54; 슥 2:12).
대제사장이 일 년 중 단 하루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속죄일이 다른 날보다 더 거룩했으며, 나아가 가장 거룩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장 거룩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은 ‘가장 거룩한’ 날일 것이다. 더구나 그날은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 전체가 전면적으로 새로워지는 날이었다.
거룩의 동심원의 의미
거룩의 동심원과 거룩의 화살표의 방향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앞서 말한 대로 거룩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지실 수 있는 속성이다. 거룩의 진원지는 하나님께서 자리하고 계신 동심원의 정중앙이다. 즉 거룩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거룩은 오직 홀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삼상 2:2; 계 15:4). 그분과 가까울수록 거룩의 등급은 더 높고, 하나님께서 방사하시는 거룩은 주변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거룩의 영역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속한 공간으로 제한된다. 인간이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뿐이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속성을 부여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한다.
이 동심원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이해시킨다. 구원이란 일종의 영역이동이다. 즉 세속의 영역에서 거룩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그 경계선을 넘을 수 없는 인간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안에서 누군가가 끌어 당겨주어야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천한 노예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거룩의 영역으로 안착시켜주심으로써 그들은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 신약의 택한 백성인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종교는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 오랜 명상을 통해 경계선 너머에 있는 거룩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즉 인간은 자력으로 진보하며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처럼 다른 종교에서는 거룩을 인간의 노력의 산물로 보기에 수행 종교이자 행위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거룩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거룩은 홀로 거룩하신 그분이 인간에게 입혀주시는 것이다.
또한 거룩의 동심원은 인간이건 사물이건 거룩의 근원인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 거룩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 그리고 대제사장, 모두가 거룩한 존재였으나 하나님과의 거리에 따라 일반백성보다는 제사장이, 제사장보다는 대제사장이 더욱 거룩했다.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은 전염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순간 어느 곳이건 그 순간 거룩한 곳이 된다. 거룩의 이 같은 역동성은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거룩에는 정적인 측면과 동적인 측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성화에는 정적인 성화와 동적인 성화가 있다. 거룩을 입은 현재 상태와 거룩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상태를 각각 정적인 성화, 동적인 성화라 일컬을 수 있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확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이해라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한다(시 73:28). 이것은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통하는 원리라 볼 수 있다. 이미 구원받고 성화된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늘에 계신 온전한 분과 같이 우리 역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더욱 온전해지기 위한 성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삼중구분된 성막과 그 의미
우주의 공간이 온 땅, 이스라엘 땅, 성전(성막)으로 삼중구분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성전 또한 삼중 구분되어 있는 거룩한 공간이다: 지성소; 내성소; 마당. 성막은 100규빗×50규빗, 오늘날의 단위로 표시하면 50미터×25미터의 크기였다. 엄밀히 말해 제국의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신전들에 비하면 사막의 작고 초라한 천막 건물이었다. 이 작은 공간에 우주의 창조자가 영광으로 충만히 임재했다는 사실은 교회의 크기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삼중 구분은 레위기의 속죄 메커니즘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특히 각 영역에 놓인 주요 기물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법궤(위의 속죄소); 향단; 번제단. 이것들은 모두 성막을 대표하는 거룩한 기물들이다. 특히 제단이 성막을 대표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속죄 신학의 이해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3)텅 빈 법궤 앞에서 바친 제사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 격차를 인식해야 한다
여전히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신 하나님의 광채 앞에서 두려워 해야
여호와 앞에서의 제사 잠시 광야의 성막에 번제물을 들고 들어가는 어떤 제사자를 상상해보자. 그는 번제를 드리기로 하나님 앞에 결심한 뒤, 자신의 가축 떼에서 흠 없는 짐승을 정성스럽게 골라 성막에 끌고 온다. 모든 제사자는 성막의 ‘여호와 앞에서,’ 곧 마당의 제단에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 먼저 제사자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도살을 한다. 짐승의 피를 받아서 제사장에게 건네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뿌린다. 제사자는 가죽을 벗긴 뒤 몸통은 각을 뜨고 복부의 기름덩이를 도려낸 뒤 내장을 깨끗이 씻는다. 각을 뜬 몸통과 내장과 기름덩이가 모두 제단 위에 놓여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간다. 이 모든 절차가 ‘여호와 앞에서’ 진행된다.
레위기는 번제를 비롯한 제사들이 ‘여호와 앞에서’ 드려진다는 표현을 쓴다(레 1:5외 총 64회). 이때 여호와는 어디에 계시는가? 바로 지성소 안의 ‘법궤 위에’ 강림하시어 앉아계신다. 성막은 일종의 왕궁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고 좌정하신 장소다. 거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데 그것이 법궤다. 왕을 알연하기 위해서 신하와 백성들은 왕궁으로 가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뵙기 위해 신하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궁인 성막으로 ‘예물’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
짝퉁 법궤들과 참된 법궤
여호와는 성막의 ‘법궤 위에’ 앉아 백성들을 통치하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신다. ‘법궤 위’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속죄소라 불리는 법궤의 뚜껑 부분이다. 사각형 상자의 법궤 위의 놓인 물건으로서 엄연히 법궤와는 별개의 기물이라 할 수 있는데(출 30:6) 히브리어로 카포레트(kaporet)라 불린다. 이것은 엄밀히 장소를 연상시키는 속죄소보다는 뚜껑의 의미가 부여된 ‘속죄판’이 더 나은 번역이다. 카포레트가 ‘속죄판’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속죄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kapar)에서 기원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학자들은 동사 카파르에 ‘속죄하다’와 ‘씻어내다’는 의미는 있으나 ‘덮다’라는 의미는 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구약의 약간의 증거들에서 ‘덮다’는 의미를 전혀 배제하기는 어려운 이유로 NIV를 따라 뚜껑의 뉘앙스를 내포한 ‘속죄판’(atonement cover)이 좋은 번역으로 보인다. 다른 영어 성경들은 흔히 이것을 ‘시은좌/시은소’(mercy seat)로 번역한다(ESV; RSV; KJV). ‘속죄판’은 그것이 ‘속죄’가 이루어지는 기물임을 의미한다.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판 위에 속죄제 짐승들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가장 중요한 속죄를 만들었다.
황금으로 제작된 속죄판에는 두 그룹들(케루빔, kerubim)이 세워져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셨다(삼하 6:2). 그런데 신의 보좌를 상징한 궤의 그룹들(케루빔, kerubim)은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방 민족들도 궤와 비슷한 각자 자신들의 기물들이 있었고 그 위에 그룹들에 해당되는 수호천사들이 존재했으며 각종 귀중한 물품들을 궤 안에 보관했다. 그들은 그 그룹들 사이에 자신들의 대장 신의 형상을 올려놓거나 왕 자신이 신성시 되어 거기에 앉았다. 그림은 이집트의 유적에서 발견된 부조로서 왕 파라오가 승리의 행차를 하는 장면이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메고 행진하는 모습은 마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법궤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관찰해야할 부분은 보좌 좌우편에 날개를 드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룹들(kerubim)과 비슷한 일종의 수호천사들이 분명하다.
법궤도 이와 매우 흡사한 모습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오직 이스라엘의 법궤만은 거기에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떠한 식으로든 형상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고대 중동의 동일한 문화권의 비슷한 보좌 모델을 차용하셨지만 무엇이 하늘의 참된 보좌 모델인지를 보여주셨다. 이로써 땅의 보좌 모델들은 모두 거짓됨이 드러났다. 하늘 왕이신 그분은 법궤의 속죄판에 보이지 않게 좌정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자체로 이미 여호와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방 종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경은 보이지 않게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궁전인 성막 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해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다고 증언한다(민 9:15-17). 이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의 합체된 기둥이다(출 14:24; 40:38; 민 9:16). 흔히 알려진 대로 각각 낮과 밤을 위해 별도로 나타난 두 개의 다른 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불-구름(fire-cloud), 혹은 구름에 둘러싸인 내부의 강한 화염의 빛이 발산되는 발광성 구름이다. 그것은 출애굽기 40:38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다시 말해, 저녁이 되면 구름기둥에서 불기둥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의 하나님의 불이 벌겋게 구름을 뚫고 나와 구름기둥이 불기둥으로 보인다. 물론 때로는 신적 화염은 특별한 이유로 강력해질 때는 때로 낮에도 구름을 뚫고 나와 맹렬한 불처럼 보였고(출 24:17), 이러한 불-구름 기둥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군대 사이를 가로 막기도 했다(출 14:19-20). 하나님은 불-구름 기둥으로 강림하시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도착하셨다. 하나님의 강림과 더불어 시내산 꼭대기에는 짙은 구름이 두텁게 산을 가렸고 여호와의 영광은 그 구름 속에 맹렬한 불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그 빽빽한 구름 속으로 모세를 올라오라 하셨다(출 24:15-18). 바로 그 구름이 성막이 건축된 후에는 성막 위, 구체적으로는 법궤 위로 이동해 왔다(출 20:34-35). 이로써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와 레위기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시내산에서 성막으로 바뀐 것이다(레 1:1).
여호와께서는 산 사면에 경계를 그어 산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시고 백성들이 오르지 못하게 하셨다(출 19:23). 시내산은 거룩한 성전인 셈이다. 멀리 산 기슭에 백성들이 머물러야 했던 것처럼, 일반 백성들은 성막 내의 마당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막의 내성소 출입은 절대 금지되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론과 칠십 장로의 구역이었던 산 중턱에 올라가면 안되었다. 역시 그 경계선을 넘으면 백성은 죽을 것이다. 시내산 꼭대기에는 모세만이 입장이 허용되었다. 한번은 여호수아가 장차 모세의 후계자의 자격으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모세와 동반하기도 했지만(출 24:13), 그는 여전히 접근성에 제한을 받았다.
구름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구름’과 그 구름의 기능이다. 그 구름은 자연적인 물리적 구름이 아닌 하나님의 현현의 수단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난 초자연적 구름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그 꼭대기에 구름이 겹겹이 둘러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그 신적인 구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면서 백성을 인도하고, 동시에 광야에서 성막 위에 임할 때는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여 백성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민 10:3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구름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의 현시를 차단하고 가리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출 16:10). 다시 말해 구름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조물과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는 수단이었다. 빛이신 하나님은 시내산 위에 강림하시어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발현인 광채와 강력한 화염을 발하신다(출 20:18). 만일 인간이 그 빛과 화염에 맞닥트리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 자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다(출 33:20). 인간은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빛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단 10:7-10; 사 10:16-18). 바울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다’고 묘사한다(딤전 6:16).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물 앞에서 빽빽한 짙은 구름으로 자신의 화염과 광채를 감추셔야 했다(출 19:9). 그 구름이 ‘흑암’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출 20:21), 히브리어의 원뜻은 오히려 ‘먹구름’이다. 만일 이렇게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이중 삼중으로 가리지 않으면, 이것을 견뎌낼 사람이나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조물의 멸절을 의미했다(출 19:21).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6장에서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 지성소에 들어올 때, 다음과 같은 안전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셨다.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레 16:13). 여기서 ‘향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난(anan)인데 ‘구름’(cloud)라는 뜻이다. 실제로 대다수 영어 성경들이 이것을 구름으로 번역한다(ESV; RSV; KJV; 그러나 NIV는 ‘smoke’[연기]). 이 구름은 바로 시내산 정상에 나타난 ‘구름’과 동일한 단어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구름’(anan)이 산을 가렸다(출 24:15). 빽빽한 구름이 둘러쳐진 시내산 정상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간 것처럼, 아론은 짙은 구름을 피우고 지성소 안의 법궤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 면전에 들어가야 했다. 비록 이 구름은 사람 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모로 한계가 있고 미약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지성소에 입장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렇게 해야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덧붙여 열왕기상 8장의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서도 동일한 구름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왕상 8:10-11). 신약에서도 ‘빛난 구름’이 나타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7; 참조. 마 17:5), 예수님께서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고(행 1:9), 천상에서 구름 위에 앉아계신다는 말씀(계 14:14-16)과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신다는 말씀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마 24:30). 따라서 주께서 구름을 타는 이미지는 동화나 손오공 이야기 따위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려 인간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조치였다. 구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차단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하나님과 아론 사이를 나누셨다.
결국 지성소의 휘장 또한 바로 그런 차단막 기능을 했으며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가린 수건 또한 일종의 구름과 같은 차단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 수건은 거두어졌으며 지성소의 휘장은 찢겼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물리적 차단막인 구름은 사라져 담대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피조물은 저 너머에 홀로 거룩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와 근본적 격차를 인식해야 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분은 여전히 가까이가지 못할 ‘빛’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광채 앞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구약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랬던 것처럼 두렵고 떨린 겸비한 마음으로, 그러나 기쁘게 받으시며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힘찬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4) 희생 제사의 열가지 특징
제사는 엄숙히 진행되었지만 침묵이 흐르지는 않았다
흠 없는 수컷 짐승을 선호 … 신분의 차이는 물론 남녀의 차별도 없어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제사를 공부할 차례다. 앞서 말한 대로 제사의 종류는 다섯 가지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중 소제는 곡식의 제사이고 나머지는 짐승의 제사다. 우리는 각 제사들을 공부하기 전에 성경의 제사의 몇 가지 특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짐승을 바치는 제사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특징을 갖는다. 당장 레위기 1:2~5의 번제 규정에 몇 가지 특징들이 확인된다.
1) 가축이어야 한다.
레위기 1장 2절는 모든 희생 제사의 서론적 진술이다. 여기서 명시되는 희생 제물의 첫 번째 원칙은 그것이 ‘가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개역의 ‘소나 양’으로에서 ‘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쫀(tson)은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를 의미하므로 가축은 소, 양, 그리고 염소를 가리킨다. 가축의 요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요행이나 불로소득으로 얻은 것보다는 제사자 본인의 땀과 정성이 깃든 소득과 생산물을 제물로 바칠 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산양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사례처럼 예외는 있지만, 원칙은 자신의 노력의 산물인 가축이었다. 소제물의 경우도 자신이 직접 재배하고 기른 농산물이 제단에 오를 자격이 있었으며 자연에서 채취한 것은 배제되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기르던 비둘기를 바쳤는데, 다만 그마저 여의치 않은 형편이라면 야생 비둘기를 잡아 드릴 수 있었다.
2) 흠 없는 짐승이어야 한다.
레위기 1장 3절은 그 가축이 ‘흠 없는’ 가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가축 중에서 가져오되 대충 골라오지 말고 흠이 없는 상품의 가축을 선별해서 가져오라는 명령이다. 짐승의 흠들의 목록은 레위기 22:19~25에 제시되는데, 몸에 문제가 있거나 병이 있는 가축은 배제되었다. 아마도 겉으론 흠이 없다 해도 너무 마른 짐승은 속병이 의심되어 제외되었을 것이다. 애써 키운 가축이라는 조건과 그것이 흠이 없어야 한다는 요구는 모두 정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짐승을 키우는 사람들은 평소에 이미 어떤 녀석이 최상품의 물건인지 이미 다 알고 있다. 바로 그것을 아깝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이 최고의 제사일 것이다. 흠 없는 짐승이 요구된 이유는 거룩하고 완전무결하신 하나님께 걸맞은 짐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수컷이 선호된다.
레위기 1장 3절은 번제물에만 해당되는데 ‘흠 없는 수컷’이라고 명시한다. 다시 말해 번제물은 모두 수컷이 요구된다. 다만 비둘기의 경우 암수 구분이 불필요했다. 아마 너무 작은 짐승이라 암수 판별이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번제 외 다른 제사들에서도 수컷 우월성은 확인된다. 속죄제의 경우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수소,’ 족장은 ‘숫염소’를 바치고, 평민은 족장보다 낮은 등급인 ‘암명소나 암양’을 드린다. 속건제에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죄인이 ‘숫양’을 바친다. 수컷 우월성은 특히 속죄제에서 평민은 암염소, 족장은 숫염소를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다만 대부분의 고기를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던 잔치의 제사인 화목제의 경우 암수의 구별 없이 원하는 대로 바칠 수 있었다(레 3:1). 그렇다면 수컷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당시 수컷이 더 비쌌다거나(Wenham), 수컷이 종자 가축으로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가 빈약하다. 종자 가축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예나 지금이나 가축의 시장 가격은 수컷보다 암컷이 훨씬 비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물로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는 제사에서는 시장 가치가 아닌 제의적 가치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수컷 선호는 수컷의 존재론적 가치와 대표성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이스라엘은 가부장적 중동 문화의 영향권에 속했다. 하나님께서는 문화적·역사적·지리적 한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약의 율법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제의 체계에서는 시장 가치가 아닌 율법에서 정한 제의적 가치에 따라 수컷이 우월하게 여겨졌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본질과 정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수컷은 본질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틀에 불과하다. 본질은 더 나은 것, 최고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현대적 관점에서 수컷이 제물로서 우월했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하여 구약의 성차별적 경향을 따지고 들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4) 짐승의 등급이 나뉘었다.
짐승은 크기에 따라 소,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세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의 신분과 조건에 따라 짐승의 등급과 서열이 결정되었다. 번제나 화목제의 경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짐승의 크기가 달라졌을 것이며, 속죄제의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가 기준이 되었다.
5)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다.
레위기 1장 4절은 ‘그는 번제물에 안수할지니’라고 명령한다. 이후 모든 희생 짐승들에 이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서 ‘그’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자를 의미한다. 제사자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레위기 1~5장의 제사 규정에 ‘손’(히. yad)이 단수로 쓰였다는 점을 들어 이를 한 손으로 간주하면서 아사셀 염소 위에 시행된 두 손(레 16:21)과 구별 짓는다. 그들에 의하면 한 손으로 안수하느냐 두 손으로 안수하느냐에 따라 안수의 내재적 기능은 물론 그 효과도 달라진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한 손이든 두 손이든 안수의 목적에 따라 안수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우리는 나중에 안수 문제를 다시 살펴볼 것이다. 특히 속죄제/속건제에서는 안수의 기능이 중요한 쟁점이다.
6) 피는 제단에 처리한다.
레위기 1장 5절은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그’는 안수와 마찬가지로 제사를 바치는 사람, 즉 제사자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도살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제사장은 자신의 제사와 더불어 공적 제사에서 안수와 도살을 직접 집행할 뿐이다. 제사장은 양푼에 받은 짐승의 피를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안수와 도살 모두 제사자가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만일 제사자가 심약하거나 신체적 문제로 도살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제 삼자가 대신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제단에서 피를 처리하는 방식은 네 가지가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속죄제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7) 제물에서 나온 모든 기름은 하나님께 바쳤다.
피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하고 ‘모든 기름은 야웨의 것’(레 3:16)이기에 인간은 피와 기름 중 어느 것 하나 먹을 수 없었다(레 3:16~17). 따라서 희생 짐승의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드렸다. 번제에서는 모든 것을 태워 하나님께 바쳤지만, 속죄제/속건제와 화목제에서는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모든 제사에서 동물의 내장의 기름 부위는 반드시 제단에 바쳐야 했다. 내장의 기름 부위란 내장을 덮고 있거나 내장에 붙어 있는 기름 덩어리, 간엽 및 콩팥을 말하며(레 3:9~10; 4:8~9), 양의 경우 기름진 꼬리를 포함했다(레 3:9). 제의 법안에서는 종종 이것들이 통틀어 ‘기름’이라 표현된다(레 4:19, 26, 31, 35). 기름은 왜 항상 하나님께 바쳐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화목제를 다룰 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8) 고기의 처리방식은 매우 다양했다.
번제의 경우 모든 고기를 제단에 태웠다. 그러나 속죄제/속건제, 그리고 화목제에서는 기름과 일부 내장만을 제단에 바치고 살코기는 인간이 먹었다. 속죄제의 경우 중대한 제사에서는 기름을 제외한 부위를 진 밖에서 태웠으나(태우는 속죄제),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제사에서는 제사장이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먹는 속죄제). 속건제를 드릴 때는 숫양을 바쳤는데 이때도 기름을 제외한 고기는 언제나 제사장에게 돌아갔다. 반면 화목제의 짐승은 제사장에게 일부를 할당하고 거의 대부분은 제사자가 가져가 가족과 친족,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9) 제사 중에는 침묵하지 않았다.
제사는 엄숙히 진행되었지만 그러나 침묵이 흐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출산과 병으로부터 회복되었을 때는 감사의 고백과 찬양이, 죄나 부정결의 문제로 제사를 드릴 때는 죄의 고백과 자신의 부정함에 대한 설명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제사를 다 마친 뒤에는 제사장의 축복의 선언과 죄사함이나 정결함의 선언이 뒤따랐을 것이다.
10) 제사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었다.
모든 제사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녀의 차별도 없었다. 남녀평등의 원칙을 따라 여성도 언제든 제사를 바칠 수 있었다. 다만 가정에서 바치는 번제나 화목제, 또한 절기에 의무적으로 성전에 올라와 바쳐야 하는 제사들은 가장인 남자가 주도했을 것이다. 한나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자라 해도 개인적인 감사와 헌신을 위해 번제나 화목제를 바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 죄인의 여성이라면 당연히 그녀가 제물을 들고 올라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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