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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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코스
화양주차장-화양2교-운영담-금사당, 암서제-첨성대-도명산 정상-학소대-학소대교-와룡암-능운대-화양3교-암서재-금사담-읍궁암-화양주차장(도명산 산행은 B팀보다 3시간 이상 추가 소요됩니다.)
화양계곡
◈ 화양계곡
도명산은 6km 화양구곡의 절경을 낀 계곡미가 일품이다. 도명산을 끼고 발달한 화양천의 화양계곡은 "화양구곡(華陽九曲)" 또는 "화양동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화양구곡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동의 9계곡에 이름을 붙여 생긴 이름이다.
제1곡 경천벽은 깎아지른 층암절벽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으며, 화양2교 옆의 2곡 운영담은 구름이 비치 는 담 주변에 넓은 모래사장이 있다. 3곡은 우암이 새벽에 올라 효종의 승하를 통곡했다는 읍궁암으로 민박집과 식당이 많다. 서원철폐의 빌미가 된 화양서원을 거쳐 하마소와 채운사 등의 명소가 있다.
제일 수려한 4곡 금사담은 금모래가 반짝이며 넓은 암반 위에 우암의 암서재가 노송 사이에 있다. 화양3교 직전 바른쪽 낙영산 정상의 기암절벽인 5곡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던 곳이다. 더 가면 심곡에 큰 2층 바위인 6곡 능운대가 나오며 7곡 와룡암, 8곡 학소대, 9곡 파천이 있다. 달천(達川)의 지류인 화양천은 박대천(薄待川)과 만나 청천면의 중앙을 남서에 서북동쪽으로 가로지르며 좁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자연의 신비라고나 할까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경천벽이라 한다. 이 바위에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
경천벽에서 약 400m 북쪽의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巖)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글넓적한 바위가 있으니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암 옆에는 친명 반 청주의자였던 송시열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해준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가 있다.
♠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라고 한다.읍궁암 동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골 짜기를 건너면 바로 금사담으로서 화양구곡의 중심이며 가족단위의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대를 이루었으니 제5곡이다.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한다.
♠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巖)
첨성대에서 동남쪽으로 1km 지나면 이 바위가 있다.궁석이 시내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하고,그 길이가 열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 지나면 학소대이다.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 채 여기 저기 서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하였다.
♠ 화양 제9곡 파천(巴串)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누 구나 이 반석 위를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학소대 북쪽으로 조금 지나면 이 반석이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어 많은 세월을 새기고 있다.
◈ 도명산(해발 643m)
충청북도 괴산군의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하고 있다. 인접한 낙영산(746m), 조봉산(687m), 갈미봉(561m) 등과 함께 소백산 줄기를 이루며,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천혜의 계곡 화양동을 안고 있는 명산이다. 괴산군의 명산 35곳 중의 하나이다.낙영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화양천에 그 맥을 가라앉히기 전 바위로 불끈 일으켜 세운 산으로 이름처럼 삼체불 부근에서 도를 닦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성을 드리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정상까지는 통나무 계단과 철사다리 등 안전시설이 잘 되 어있어 쉽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 다섯 개가 하나를 이뤄 정상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에 제일 높고 큰 바위에 올라 앉아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 정상주변에는 분재처럼 잘 자란 소나무 몇 그루가 인생의 무상한 세월을 느끼게 한다.
송시열(宋時烈,)
송시열(宋時烈, 1607년 12월 30일(음력 11월 12일) ~ 1689년 7월 19일(음력 6월 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1]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주요 이론가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조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다.[2]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첫댓글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산행일에 비거 올거라는 예보인데 묘안은 없으신가요?
좋은 의견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비가 와도 평지를 걷는 계곡산행이라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점심을 먹을 때는 약간 문제가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