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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몇 번에 걸쳐서 설명한 내용을 종합해서 로마의 성장원인과 예수님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로 아래의 목차에 따라서 따로 정리를 해 보았는데 로마법 대전 전까지 정리한 자료를 우선을 올립니다. 로마 연구에 하나님의 역할을 반드시 최우선으로 넣어야 과거의 로마를 올바로 보고 또 그로 부터 발생한 수많은 현재의 유럽의 나라들을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남에 기도와 함께 시간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심에 깊이 감사를 드리고 읽는 분이 계심이 제게 큰 힘이 되고 있음을 말씀을 드리고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 꼭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꼭 사진, 도표가 많고 제 자료도 있지만 인용된 자료가 많으니 사용에 주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성장의 요인과 예수님 당시의 로마
목차
제 1 부 성경적인 입장에서 본 로마 성장의 요인
제 1 장 하나님의 계획과 실현
1. 예언의 존재와 실현: 다니엘서의 철의 나라의 등장을 통한 예언의 실현
2. 왕의 세움과 폐함과 강하게 하심을 통한 역사(다니엘서의 설명)
3. 한국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본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4.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활약
제 2 장 인간적인 요소와 지리적 요인
1. 실질적인 로마 성장의 모습
1) 영토의 변화
2) 정치제도의 변화: 왕정-공화정-전제정(황제제도)
3) 인구의 변화: 시민, 속주인, 노예들
4) 경제력과 군사력의 변화
5) 문화적인 측면
6) 주요도시들의 변화
7) 도로망, 수로의 정비
2. 인간적인 측면에서 로마 성장의 요인
1) 영웅적인 정치 지도자와 군사전략가의 등장
2) 정치제도의 우수성: 공화정과 로마법 대전
3) 로마의 군대와 경제력의 성장
4) 문화적 요인: 그리스 문화의 수용과 자체 문화의 조화
5) 실용성을 중요시한 로마인들의 기풍
6) 지중해의 지리적 특성
7) 수많은 노예의 희생
제 2 부 예수님 당시의 로마의 모습(바울 당시의 로마의 모습)
제 1 장 로마의 모습
1. 기원후 초대황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네로시대까지의 모습
제 2 장 로마의 속주로서 이스라엘의 모습
할렐루야!!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오천만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로마의 성장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히게 해 주심에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너무나 재미있는 로마의 성장 배경을 공부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수많은 제 또래 세대가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까 연구하고, 배움보다는 다른 즐거움을 찾아서 분주한 때에 로마라는 당대의 강대국이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영향을 후대에 끼쳤는지 여러 자료를 통해서 알아보는 것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나를 올바로 알고 내가 사는 이 세상과 사람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인간의 삶을 잘 살펴보아야 하는데 어떻게 어디서 시작을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바울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로마를 이해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또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참으로 다니엘서의 기록대로 하나님께서 로마를 성장시키시고 세계의 선교의 토대로 삼으셨음을 믿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로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와 관련된 영화도 많고 로마에 관련된 서적도 다양하며 이를 많은 분들이 보고 배우고 있으며 많은 연구도 있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많은 한국에 계신 분들이 로마에 직접 가서 로마의 유적과 유물을 보고 또 사진도 찍어서 올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베푸신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분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며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고 이 민족의 운명과 이 시대 강대국의 흥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김정은 이도 하나님의 도구가 됨을 알게 되면 우리의 지금의 국가적인 선택이나 사회적인 선택이나 기업적인 선택이나 개인적인 선택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와 너무나 달라지게 되고 또 바르게 되리라 믿습니다. 부디 이 민족이 겸손히 하나님의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샬롬!! 제 강의가 제1강 바울, 로마, 로마서, 로마교회인데 길게 바울을 설명하고 로마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수님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아주 열심히 자료를 찾아보면서 많은 분들이 기원전 3세기에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로마가 약 300백 년이 지나자 지중해를 호수로 하는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로 변모한 원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로마 연구도 온 세계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저는 로마서를 강의를 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 로마에 대해서 알아볼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예수님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예수님과 바울은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며 예수님께서 로마의 속국이던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바울을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원후 30 년경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며 죽으시고 그 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바울은 이런 예수님을 믿는 동족을 잡으려 다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 이름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당시 아시아와 그리스에 약 20여 년간을 전하다가 A, D 57년에 그리스 고린도에서 당시 로마에 있던 교회의 성도들에게 로마서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로마의 성장을 우선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로마라는 나라를 당시 최고의 강대국으로 만드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간의 모든 연구를 통해서 나타난 로마의 공화정의 우수성, 로마 군대의 강력함, 그리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를 비롯한 카르타고와 그리스와 이집트 등과 싸워서 이긴 영웅들의 존재와 실용성이 돋보이는 로마법, 건축술, 로마의 전 지역을 관통하는 도로를 건설한 토목 기술, 그리고 항해기술과 선단, 그리고 로마의 노예의 존재와 그리스의 페르시아와 주변국의 정복과 그의 문화 등이 작은 로마를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전을 시켰던 요인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놓치고 있는 유대인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데 이 유대인들이 로마가 당시에 세계적인 제국이 되는데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택한 선민으로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로마의 성장 원인은 첫째가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이요 둘째가 유대인의 존재와 역할이 되겠고 마지막으로 후대에 수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주장된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그 부수적인 원인이 될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로마의 성장 원인에 대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 기존의 책이나 자료를 읽는 분들이 아무리 연구를 하고 책을 보아도 로마의 갑작스러운 제국으로의 성장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가장 중요한 성장 요인인 하나님과 유대인을 제처 두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거대하고 방대한 로마의 영토가 너무나 크고 그 정치구조나 군대 조직이나 경제체계가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을 짧은 시간 내에 연구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리고 너무나 다양한 로마 성장에 대한 주장들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그렇게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어간 연구라 하면 그 연구를 읽는 우리가 어느 정도는 로마의 성장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함은 위의 두 로마의 강대국이 된 핵심 요인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 그리고 유대인의 존재와 역할이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빼놓고 연구를 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노력과 모든 인간의 지성이 투입이 되어도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해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약 30여 년 전에 강대국의 흥망이란 책을 쓰신 프린스턴대학교수였던 폴 케네디 박사님도 군사력과 경제력이란 두 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그 변수를 중심으로 강대국의 흥망을 연구한 결과로서 당시 최고 국가였던 일본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최강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셨는데 일본보다는 중국이 더 강대국이 되었고 일본이 세계의 최 강대국이 될 조짐은 그의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 분도 역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자로서 우선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로마의 성장 원인을 전도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예수님 당시의 로마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봄이 오는 삼월에 따뜻한 날씨 처럼 이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따뚯하게 솟아나기를 기도합니다.
제 1 부 성경적인 입장에서 본 로마 성장의 요인
제 1 장 하나님의 계획과 실현
1. 예언의 존재와 실현: 다니엘서의 철의 나라의 등장을 통한 예언의 실현
작은 반도 국가에 지나지 않았던 로마가 300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에 순식간에 당시 세계 최고, 최강의 제국이 된 이유(로마 영토의 비교 지도)
1) 로마의 영토의 변화
우선 아래 지도를 보면서 로마제국의 초기(B.C 338)의 모습과 A.D 117년 당시 로마제국 최대의 영토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B.C 338년 라틴 전쟁 직 후
포에니 전쟁 전의 영토와 로마제국의 최대 영토(A.D 117 년경과 B.C 264 년경의 영토 비교
두 지도를 보면 지금의 로마시의 주변을 영토를 가진(위의 지도 빨간 부분) 로마가 B.C 264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그의 전역을 국토로 하고 이로부터 약 300여 년이 지난 A.D 117년에는 지중해를 호수로 하는 대 제국이 됩니다. 이 부분을 다른 지도로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위의 두 지도 중 위 지도는 B.C 264 년, B.C 133 년, B.C 44년, 그리고 아래 지도는 A.D 14년과 A.D 117년 당시의 로마의 영토를 나타내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로마의 영토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이 영토의 변화와 관련된 사건은 첫 번째는 카르타고와의 약 100년(B.C 264-146)에 걸친 전투가 있고 그 다음은 유쿠르타 전쟁(누미디아)과 세르토리우스 전쟁 (BC 122~105)이 있고 그리고 유명한 카이사르의 정복(B.C 100-44)과 그다음은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복(B.C 27~A.D14), 마지막으론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황제의 정복으로 로마의 최대의 영토를 아래 지도와 같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면적: 5,000,000㎢ 동서길이 4.000km, 남북 800km 지중해 포함 1000만㎢ 인구: 56,800,000 명 (CE 117) 당시 세계 최고의 인구 국가//당시 유대인 600-700만
지중해의 작은 반도 국가였던 로마가 위의 사건들을 거치며 위의 지도와 같이 약 370년 만에 이렇게 거대한 국가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 로마를 통해서 이후의 많은 나라들이 유럽과 지중해를 통치했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마의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기에 로마의 연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로마가 이렇게 성장한 이유를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로 이루어졌음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유랑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일반연구가들이 주장하는 요인들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로마의 여러 모습들을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2)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 다니엘서의 예언과 실행
성경에 로마의 성장에 대한 예언이 구약성경 다니엘서 2장에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 2장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개역 개정과 NIV 성경)
다니엘 제2장
[느부갓네살의 꿈]
1.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2. 왕이 그의 꿈을 자기에게 알려 주도록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를 부르라 말하매 그들이 들어가서 왕의 앞에 선지라 3.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고 그 꿈을 알고자 하여 마음이 번민하도다 하니 4. 갈대아 술사들이 아람 말로 왕에게 말하되 왕이여 만수무강하옵소서 왕께서 그 꿈을 종들에게 이르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는지라 5. 왕이 갈대아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 더미로 만들 것이요 6.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하니 7. 그들이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꿈을 종들에게 이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해석하여 드리겠나이다 하니 8.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분명히 아노라 너희가 나의 명령이 내렸음을 보았으므로 시간을 지연하려 함이로다 9.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하더라 10. 갈대아인들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으로 박수에게나 술객에게나 갈대아인들에게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11.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12. 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 13. 왕의 명령이 내리매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다니엘에게 은밀한 것을 보이시다]
14. 그때에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러 나가매 다니엘이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 15. 왕의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물어 이르되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냐 하니 아리옥이 그 일을 다니엘에게 알리매 16. 다니엘이 들어가서 왕께 구하기를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 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22.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다니엘은 왕이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라 명령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지혜자들을 죽이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라 하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다]
2: 25. 이에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 앞에 들어가서 아뢰되 내가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아내었나이다 그가 그 해석을 왕께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26.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꾼 꿈과 그 해석을 네가 능히 내게 알게 하겠느냐 하니 27.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물으신 바 은밀한 것은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머릿속으로 받은 환상은 이러하니이다 29. 왕이여 왕이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하실 때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사오며 30. 내게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쇠요 그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35. 그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아뢰리이다
37. 왕이여 왕은 여러 왕들 중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38. 사람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넘기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39. 왕을 뒤이어 왕보다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셋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며
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쇠 같은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서질 만할 것이며 43.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 함이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44.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 하니이다 하니
[왕이 다니엘을 높이다]
46.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49.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NIV]
Chapter2
1. In the second year of his reign, Nebuchadnezzar had dreams; his mind was troubled and he could not sleep.
2. So the king summoned the magicians, enchanters, sorcerers and astrologers to tell him what he had dreamed. When they came in and stood before the king,
3. he said to them, "I have had a dream that troubles me and I want to know what it means."
4. Then the astrologers answered the king in Aramaic, "O king, live forever! Tell your servants the dream, and we will interpret it."
5. The king replied to the astrologers, "This is what I have firmly decided: If you do not tell me what my dream was and interpret it, I will have you cut into pieces and your houses turned into piles of rubble.
6. But if you tell me the dream and explain it, you will receive from me gifts and rewards and great honor. So tell me the dream and interpret it for me."
7. Once more they replied, "Let the king tell his servants the dream, and we will interpret it."
8. Then the king answered, "I am certain that you are trying to gain time, because you realize that this is what I have firmly decided:
9. If you do not tell me the dream, there is just one penalty for you. You have conspired to tell me misleading and wicked things, hoping the situation will change. So then, tell me the dream, and I will know that you can interpret it for me."
10. The astrologers answered the king, "There is not a man on earth who can do what the king asks! No king, however great and mighty, has ever asked such a thing of any magician or enchanter or astrologer.
11. What the king asks is too difficult. No one can reveal it to the king except the gods, and they do not live among men."
12. This made the king so angry and furious that he ordered the execution of all the wise men of Babylon.
13. So the decree was issued to put the wise men to death, and men were sent to look for Daniel and his friends to put them to death.
14. When Arioch, the commander of the king's guard, had gone out to put to death the wise men of Babylon, Daniel spoke to him with wisdom and tact.
15. He asked the king's officer, "Why did the king issue such a harsh decree?" Arioch then explained the matter to Daniel.
16. At this, Daniel went in to the king and asked for time, so that he might interpret the dream for him.
17. Then Daniel returned to his house and explained the matter to his friends Hananiah, Mishael and Azariah.
18. He urged them to plead for mercy from the God of heaven concerning this mystery, so that he and his friends might not be executed with the rest of the wise men of Babylon.
19. During the night the mystery was revealed to Daniel in a vision. Then Daniel praised the God of heaven
20. and said: "Praise be to the name of God for ever and ever; wisdom and power are his.
21. He changes times and seasons; he sets up kings and deposes them. He gives wisdom to the wise and knowledge to the discerning.
22. He reveals deep and hidden things; he knows what lies in darkness, and light dwells with him.
23. I thank and praise you, O God of my fathers: You have given me wisdom and power, you have made known to me what we asked of you, you have made known to us the dream of the king."
24. Then Daniel went to Arioch, whom the king had appointed to execute the wise men of Babylon, and said to him, "Do not execute the wise men of Babylon. Take me to the king, and I will interpret his dream for him."
25. Arioch took Daniel to the king at once and said, "I have found a man among the exiles from Judah who can tell the king what his dream means."
26. The king asked Daniel (also called Belteshazzar), "Are you able to tell me what I saw in my dream and interpret it?"
27. Daniel replied, "No wise man, enchanter, magician or diviner can explain to the king the mystery he has asked about,
28. but there is a God in heaven who reveals mysteries. He has shown King Nebuchadnezzar what will happen in days to come. Your dream and the visions that passed through your mind as you lay on your bed are these:
29. "As you were lying there, O king, your mind turned to things to come, and the revealer of mysteries showed you what is going to happen.
30. As for me, this mystery has been revealed to me, not because I have greater wisdom than other living men, but so that you, O king, may know the interpretation and that you may understand what went through your mind.
31. "You looked, O king, and there before you stood a large statue -- an enormous, dazzling statue, awesome in appearance.
32. The head of the statue was made of pure gold, its chest and arms of silver, its belly and thighs of bronze,
33. its legs of iron, its feet partly of iron and partly of baked clay.
34. While you were watching, a rock was cut out, but not by human hands. It struck the statue on its feet of iron and clay and smashed them.
35. Then the iron, the clay, the bronze, the silver and the gold were broken to pieces at the same time and became like chaff on a threshing floor in the summer. The wind swept them away without leaving a trace. But the rock that struck the statue became a huge mountain and filled the whole earth.
36. "This was the dream, and now we will interpret it to the king.
37. You, O king, are the king of kings. The God of heaven has given you dominion and power and might and glory;
38. in your hands he has placed mankind and the beasts of the field and the birds of the air. Wherever they live, he has made you ruler over them all. You are that head of gold.
39. "After you, another kingdom will rise, inferior to yours. Next, a third kingdom, one of bronze, will rule over the whole earth.
40. Finally, there will be a fourth kingdom, strong as iron -- for iron breaks and smashes everything -- and as iron breaks things to pieces, so it will crush and break all the others.
41. Just as you saw that the feet and toes were partly of baked clay and partly of iron, so this will be a divided kingdom; yet it will have some of the strength of iron in it, even as you saw iron mixed with clay.
42. As the toes were partly iron and partly clay, so this kingdom will be partly strong and partly brittle.
43. And just as you saw the iron mixed with baked clay, so the people will be a mixture and will not remain united, any more than iron mixes with clay.
44. "In the time of those kings, the God of heaven will set up a kingdom that will never be destroyed, nor will it be left to another people. It will crush all those kingdoms and bring them to an end, but it will itself endure forever.
45. This is the meaning of the vision of the rock cut out of a mountain, but not by human hands -- a rock that broke the iron, the bronze, the clay, the silver and the gold to pieces. "The great God has shown the king what will take place in the future. The dream is true and the interpretation is trustworthy."
46. Then King Nebuchadnezzar fell prostrate before Daniel and paid him honor and ordered that an offering and incense be presented to him.
47. The king said to Daniel, "Surely your God is the God of gods and the Lord of kings and a revealer of mysteries, for you were able to reveal this mystery."
48. Then the king placed Daniel in a high position and lavished many gifts on him. He made him ruler over the entire province of Babylon and placed him in charge of all its wise men.
49. Moreover, at Daniel's request the king appointed 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administrators over the province of Babylon, while Daniel himself remained at the royal court.
구약성경 다니엘서를 기록한 다니엘은 바벨론이 남 유다를 침공했을 때 포로로 잡혀온 사람으로서 B.C 605-536년에 활동한 선지자로서 바벨론과 페르시아에서 고위공직자로 근무를 했는데 이 장면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 꿈을 당시의 예언가, 점성가. 지혜로운 바벨론 전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꿈의 내용에 대해선 이야기를 하지 않고 꿈의 내용도 알아맞히고 그 꿈의 해석도 하라고 하자 당시 바벨론 제국의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 사람의 마음속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하자 분해서 모든 지혜로운 사람은 죽이라 합니다. 그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지혜로운 집단에 뽑혀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바벨론 왕 근위대장 아리옥에게 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는 말미를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알려주시자 다니엘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왕을 만나서 왕의 꿈의 내용과 그 해석을 하자 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자 천지의 창조가 되시며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다니엘을 모든 관리위에 높여 주심과 동시에 다니엘의 부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바벨론의 수많은 지혜자 들의 생명을 살려줍니다.
다니엘의 위대함은 그의 지혜로 이런 놀라운 일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셔서 알게 되었음을 겸손히 고백함과 그와 경쟁의 상대가 되었던 적국의 모든 지혜자의 생명을 귀해 여기고 불쌍히 여겨서 모두 살게 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겸손함과 생명을 귀해 여기는 마음이 그들을 감동시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인재가 모든 시기와 경쟁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국가 바벨론과 그 뒤를 잇는 페르시아에서 왕의 다음에 가는 공직자로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꿈의 내용은 도표로 보여드리면 먼저 앞선 강의에서 설명을 했는데 다시 보여드립니다.
성 경: [단 2:36-43]
주제 1: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해석]
느부갓네살의 꿈의 내용(31-35절)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37-45)이 묘사되어 있다. 본문은 세계 역사의 변천 과정과 종말론적 완성을 보여준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을 만났을 때가 B.C 604-3년경이었는데 금으로 된 부분은 바벨론이며 그 이후 나라들은 메데와 바사(페르시아)이며 세 번째 나라가 그리스이고 그다음에 철로 된 다리를 가진 강대국이 바로 모든 나라를 쳐부수는 나라가 될 것인데 이 나라가 바로 로마제국인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이후에 로마로부터 여러 나라 분열되어 일어나는데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예언은 다니엘이 살았을 때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일어나는 것까지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페르시아는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하고 마침내 로마가 위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제국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이루어지는 과정은 우리가 현실을 보면서 다양하게 해석을 합니다만 그 근본 요인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성경을 통해서 봅니다. 우리는 앞에서 로마서 강의 2장에서 공부할 내용을 작년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미리 공부를 했는데 예수님의 예언과 성취의 기록과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심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이 성경의 기록대로 왕의 꿈의 내용도 일러줌 없이 이루어졌기에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진 바벨론 왕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포로인 다니엘이 당시 총리에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라 믿습니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다니엘 이후 세계제국의 흥망을 보면서 다니엘 예언의 정확성과 성경의 정확성을 다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다니엘서의 예언을 통해서 그리고 그 내용의 실현됨을 통해서 로마의 성장이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우신 나라인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시작으로 바울의 선교로 그리스와 아시아로 확장이 되고 드디어 로마에 상륙하여 많은 박해를 견디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여 중세를 거치며 지금 현재 거의 모든 세계의 국가에 교회가 설립이 되었으며 천주교, 개신교, 그리고 그리스정교의 모습으로 세계 인구의 약 1/3인 20억 명의 이상이 믿는 나라로 성장하게 되었고 한국도 천주교는 400년 전에 개신교는 약 130년 전에 들어와서 약 1300만 명 이상의 신자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세계선교와 함께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서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2. 왕의 세움과 폐함과 강하게 하심을 통한 역사(다니엘서의 설명)
느부갓네살을 왕이 7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라를 어떤 통치자에게 맡기시고 또 나라를 누구에게 주심을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심
단 4: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33.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느부갓네살 왕의 하나님 찬양]
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36. 그 때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의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찾아오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
벨사살 왕을 폐하고 그이 나라를 끝나게 하시는 하나님
단 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21.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30.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다니엘 제11장: 하나님께서 다리오를 도와서 강하게 하심
1.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도와서 그를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NIV] Chapter11
1. And in the first year of Darius the Mede, I took my stand to support and protect him.(NIV)
위의 세 가지 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시고 폐하시고, 나라를 세우시고 흥하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는 분이심과 또 강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서 로마의 성장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전에 강의를 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깨닫게 하심으로 로마의 성장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부분을 위와 같이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올립니다. 2018년 2월 16일
3. 한국의 복음전파를 통해서 본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샬롬!! 부족한 인생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전하게 됨이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심도 큰 기쁨이요, 또한 제 글로 인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고 올바른 삶에 대한 위로를 받으심도 또한 큰 기쁨이 됩니다. 제가 자료를 올렸는데 여러 가지로 이런 카페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해서 사진이 하루는 보이다 이제는 나오지 않아서 제가 가진 PPT 자료를 다 올립니다. 제가 이런 글을 어떻게 쓰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요 근래 며칠을 방에 박혀서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아내의 불만도 꽤 많습니다. 저를 위해서 늘 기도를 부탁을 드립니다. 저도 제 글을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간절히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자료.pptx
오늘은 전번에 이어서 로마의 성장원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이번에 유대인의 로마 성장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으나 전번 글에서 로마 성장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을 보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도우심이라 설명을 해놓고 나중에 고친 부분이 있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로마의 성장에 어떻게 개입을 하셨을까 생각할 때 제가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는데 그렇게 결론을 내린 부분에 대해서 글을 수정하면서 저의 성경의 예언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한민국 구원과 축복 그리고 사명"이란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서 한글본과 영어 본을 다 가지고 있는데 이도 조금씩 설명을 하려고 제 카페 코너에 이 코너를 두고 아직 자료를 올리지 지 못하고 있는데 이 제 자료 중에 한국천주교의 성장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 이 자료가 로마의 성장의 하나님의 역할 부분에 어떤 설명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오늘 글을 올립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성장의 이해에 꼭 필요하고 천주교의 역사가 한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고 이를 통해서 한국의 경제의 성장과 한국의 발전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과정의 이해를 통해서 비로소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생기기 때문에 반드시 개신교인도 참된 진리를 알고 싶다면 천주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이 자료도 이곳에 직접 올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역시 PPT로 올리겠으니 꼭 함께 보시면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런 자료를 만들 땐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지금부터 3-4년 전에 만들었는데 이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인도하이라 믿습니다. 저는 단지 즐겁게 쉽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개신교의 전래과정과 성장과정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구원과 축복 그리고 사명에서 시간이 되는 데로 설명을 할 생각이지만 오늘은 천주교의 전래과정을 보면서 천주교가 한국의 현대사에 끼친 영향과 개신교의 성장에 끼친 영향과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천주교 수백 년의 순교의 형극의 역사를 보시면서 우리는 개 교회에 역사하시는 예수님도 잘 믿어야 하지만 천주교 개신교에 공히 역사하시는 예수님도 믿어야 하고 현재의 교회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과거 한국 역사에 함께 하셨던 예수님도 알고 믿음으로 비로소 우리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열리고, 이를 통해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 천주교 전래 과정 개요: 아래의 글로 천주교의 한국 전래과정을 설명합니다. 파워포인트 첨부된 자료임
1) 천주교 전래의 역사적 배경: 16 세기의 세계는 종교개혁과 지리상의 발견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찾아 헤매다.
16세기 세계에서 두드러진 두 가지의 특징은 지리상의 발견과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과학 문명의 발달과 조선술의 발달, 그리고 행해술의 발달로 새로운 항로가 개설되고 스페인과 포르투칼 등이 신대륙과 아시아로 새로운 땅과 상품을 찾아서 바다를 항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에 선교사들도 함께 동승해서 일본과 중국에도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일본에도 천주교가 전래되어서 상당한 부흥이 있었고 박해가 있기도 했는데 임진왜란 때 스페인 선교사 쎄쓰베데스가 일본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일본군 중에서 천주교를 믿는 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렸는데 이 분께서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잘 보관이 되고 있고 이 자료를 통해서 외국인이 보는 당시 조선의 모습을 알 수가 있는데 진주 박물관에 자료가 있고 임진왜란이라는 도록에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청나라에도 천주교가 상당히 들어왔는데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마테오리치가 당시에 제가 알기론 중국의 천주교 책임자(주교?)로 들어와서 과학문명서적도 전해주고 가르쳐 주었는데 이분의 저서 천주실의가 이 수광의 지붕유설에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일본과 중국에 들어온 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반개혁으로서 료율라의 해외선교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은 조선의 오랜 유교의 전통질서를 흔들어 새로운 학문에 대한 기대를 조성하다.
16-17세기의 조선은 엄격한 양반사회였습니다. 이황과 이이 등의 성리학자의 영향으로 성리학이 발달되어 학파별로 치열하게 논쟁을 하던 시기입니다. 주기론과 주리론으로 나누어져서 주기파와 주리파가 생기고 4단 칠정론으로 발전하여 당쟁의 구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주변국인 일본과 중국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조총과 화포를 만드는 시대에 박연(1627)이나 하멜(1653) 등이 항해를 하다 파선해서 제주도 등으로 표류해서 들어오고 있는 당시에 조선은 주변국과 세계의 변화에 대해선 너무나 둔감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연구를 해야 되는 부분인데 당시 조선의 인구의 50% 이상이 노비였던 사실을 알아야 하고 노비는 사고 팔수 있었고 값이 소 한 마리 값 보다 못했다고 하며 성도 이름도 없이 여자는 4월이 5월이 남자는 칠복이 팔복이 돌쇠 마당쇠 등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군이 상륙해 한양에 들어왔을 때 경복궁의 장예원 문서를 태우려고 노비가 불을 질러 경복궁이 탔다고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깊이 연구를 해서 밝혀야 하는데 얼마나 지금과 비교할 때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였으며 인간의 평등과 가치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너무나도 어두운 시대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군 앞에 한국의 활과 창을 든 군대는 짧은 시간에 패배하고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간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전에 발발해서 이번에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에 왕자가 볼모로 북경으로 잡혀가고 청의 공주와 결혼을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포로로 잡히고 그들을 포르투칼의 상선이 사서 유럽에 다시 팔았는데 유명한 화가인 루벤스의 ‘조선옷을 입은 남자’ 초상도 이런 과정에서 노예로 팔린 조선인을 그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임란의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참혹하고 컸는데 이번에 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의 수모와 함께 수많은 젊은 처녀들이 또 청나라에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이나 앗수르의 포로 같이 왕이 수모를 당하고 백성들이 잡혀가고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큰 환란을 체험한 선비들이 비로소 기존의 유교의 질서와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게 되어 생긴 것이 모두가 잘 아는 실학사상입니다. 실학사상은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을 기치로 전통적인 유교의 사색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것과는 달리 자연과학과 실생활에서 실제로 필요한 기술과 학문을 중시하는 학자들의 가르침인데 우리가 역사책에서 너무나 잘 배운 이익,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유수원, 유형원 등인데 이들은 17-8세기 소수 양반가문과의 정권다툼에서 몰락한 양반들이었다는 것도 역사에서 잘 배웠습니다.
양란의 아픔과 피해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런 민족적인 비극은 기존의 유교적인 가르침과 그리고 당시에 있던 종교이나 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양반과 천민의 계급질서에 대해서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이냐? 과연 이것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해서 당시의 몰락한 양반 지식층들이 회의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또한 되었습니다. 개인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알고 싶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은 큰 개인적인 환란이나 아픔이나 좌절이 있을 때 시작이 되는 것과 같이 조선이 겪은 양란은 기존의 유교적인 가르침과 질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말씀이 들어오고 최초의 조선의 천주교인이 일본에서 순교를 하고 서양의 각종서적을 선교사의 번역으로 볼 수 있게 되어 유학과 다른 실학이 일어나다. 17세기
흔히 학교의 한국역사의 가르침을 통해서 실학사상과 서학사상을 설명하면서 실학자 들 사이에서 서학과 천주교 연구가 시작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복음은 전하는 전도자의 입장에서는 복음의 전파에 대해서 세상 사람이 보는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볼 수 있는데 전도자가 보는 입장은 하나님의 이 민족에 대한 역사로서 두 양란을 겪은 조선인에게 비로소 복음을 불어넣으셨는데 한편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한 편으로는 기도를 통해서 복음이 이 땅에 전파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구원과 축복 그리고 사명’ PPT에서 한국구원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고대역사로부터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역사하신 흔적을 찾아보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그 코너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이수광이 북경에 갔다가 천주교 교리서인 이 책을 읽고 그의 저서 천주실의에서 소개를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칠극의 일부를 읽어 보았는데 우리의 조상들께서 성경과 예수님을 너무나 정확하게 기술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하상의 상제전서나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신도 역시 읽어 보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설명을 해 놓으셔서 지금 사시는 신학을 하시는 분들도 그 분들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글을 쓰실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옛날 말로 너무나 정확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설명하셨습니다. 전도자의 입장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지만 말씀의 사람의 변화력은 전도의 성령의 능력과 세례와 함께 또 다른 핵심인데(제 자료 전도에 있어 잘못된 인식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감화 감동시키며 변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일본에 끌려간 분 중에서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신부님과 일본인 신자의 전도에 의해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는데 이 분들이 간절히 조선의 구원을 놓고 기도했을 것이며 믿지 않는 형제와 자매를 놓고서도 역시 간절히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은 전도자들의 기도 1 순위는 사랑하는 가족의 구원이 되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들 중 일부가 1614년에 박해를 받아서 순교를 하는데 놀라운 신앙을 보여주신 여인들도 있으며 천주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 부분을 연구하시는 분을 만나고 천주교 순교에 대한 성화를 그리신 분을 만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기도에다가 볼모로 잡혀간 왕자(소현세자 등)들과 청나라 이전의 명 말기에 중국에 간 조선의 유학자들도 당시에 명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 천주실의가 조선에 소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박연과 하멜과 같은 이들이 조선에 표류를 해서 이 땅에 살면서 조선의 여인과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기도 했는데 이들도 크리스천이었음이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이 조정에 보낸 장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실학의 발생과 말씀의 전파와 기도와 복음의 전파로 실학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믿는 이라면 한 번 잘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제 글은 2번에서는 기존 학교의 가르침에 충실했고 여기 3번에서는 전도자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저는 3번의 입장을 지지하고 조선의 실학은 양란과 복음의 전파로 인함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의 실천으로 보며 중국이나 일본의 이 민족의 침입의 이면에는 이 민족의 준비의 부족과 부패와 약함과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약소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이 숨어있지만 이런 죄악 된 인간의 야욕으로 소망을 잃은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잘못된 인간질서와 계급제도를 바로 잡으면서 지금과 같이 평등하고 자유가 넘치는 세상을 만들 초석을 다진 것입니다.
4) 새 학문 실학과 서학의 연구결과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다. 18세기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주역, 이벽 성조께서 1770년 15세 때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던 독서처(讀書處)가 있었고, 1777년부터는 여기서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과 함께 천학(天學)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원로 학자도 참석하는 천주교 교리연구 강학회(講學會)가 개최되어, 학문적 수준에 있던 천학(天學)을 종교적 신앙 차원으로 발전, 승화시켜, 천주공경 기도와 음력 주일 제정, 실천 등 천주교 신앙 실천의 도장(道場)이 있던 곳입니다. 젊은 선비들이 이벽 성조를 웃어른으로 삼고 모여들자, 이벽 성조께서는 문하생들에게 성교요지(聖敎要旨)를 지어 받아써서 배우게 하였고, 당시 젊은 선비들은 천학총림(天學叢林), 즉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 1783년에는 처음 개종한 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대표자로 이승훈 진사(進士)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1784년 봄 2월에 영세하고 오게 하였으니, 천진암은 바로 천주교 신앙운동의 국내 최초 본거지였습니다. 이렇게 젊은 선비들 중심으로 결성된 천진암의 천주교 공동체는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영세 귀국한 1784년 초여름부터 자리를 서울로 옮겨 , 수표동 이벽 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힘썼으며, 1785년 봄에는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더욱 더 천주교를 발전시켜, 1785년 을사년(乙巳年)의 국내 첫 박해를 겪으면서 1885년 말 까지 100년간에 잔혹한 박해를 이겨내면서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를 발전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움이 트고 싹이 돋은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고향이며,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이, 한국천주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천주교발상지입니다. 이 성지의 천진암 옛 터에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5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묘소가 모셔져 있고, 조선 교구 설립자 정하상, 유진길 성인의 묘소와,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가족들인 , 이부만(이벽 성조 부친), 이석(이벽 성조 동생), 경주 이씨( 이벽 성조 누님), 정지해(정약용 선생 조부), 정재원(정약용 선생 부친), 정약전( 정약용 선생 형님), 등의 묘소도 가까운 남쪽 등 너머 성역 내에 모셔져 있습니다.
또한 이 성지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과 이벽 성조를 기념하는 천진암
기념비와 함께, 天眞庵, 講學堂, 紀念標石 및 李壁 聖祖, 讀書處, 紀念標石이 세워
져 있습니다. 특히 이 성지 천진암에는 한국 천주교 발상지의 고유한 특성에 필수적인 韓國天主敎會創立史硏究院과 韓國天主敎天眞菴博物館이 있으며, 韓民族100年計劃天眞菴大聖堂이 건립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 현장에는 축성된 통돌 100톤의 天眞菴大聖堂祭臺石과, 통돌 30톤의 교황 요한바오로2세 강복문(降福文) 머릿돌이 있습니다.
두 사진은 100년 동안 짓는 성당(위)과 한국천주교회 창립성조 5위 묘소(아래 사진)
左로 부터 정약종, 이승훈, 이벽, 권일신, 권철신의 묘
위의 글은 제미니 님의 블로그 천진암 성지에서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사진도 역시 그 글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께서 퇴촌에 사시는데 천주교에서 100년 동안 성전을 건립한다고 하시며 바로 옆에 있다고 해서 늘 관심이 있었는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사진과 함께 유적을 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성전과 100년의 계획과 그리고 신앙생활을 가장 먼저 하시고 순교를 하신 분들을 잘 모시며 존경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저도 철원이나 한반도 어디에 개신교 모두가 힘을 합쳐서 민족의 성전을 건립하여 모든 신자의 대표들이 모여 교파를 초월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고 개신교의 역사와 유물과 위대한 신앙인의 업적을 기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모두가 힘을 내어 교파를 초월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뜻을 모아야겠습니다.
5) 주문모 신부의 입국으로 교회가 성립되어 부흥하고 박해가 시작되다. 1791~1873
※ 천주교의 전래와 형극의 역사
1) 천주교의 전래
천주교의 한국의 전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천주교회의 당시 사정과 유럽의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16세기는 종교개혁과 지리상의 발견을 위해 유럽각국이 세계를 항해하기 시작한 때이다. 로마 카톨릭에 대항해서 캘빈 루터 등 프로테스탄트들이 개신교의 기초를 놓고 세력이 확산되자 로마 카톨릭 내에서 반개혁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예수회가 대표적인 단체이다. 이들은 세계 선교에 앞장섰는데 이들이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일본과 중국에 들어가 선교를 시작해서 큰 부흥을 이끌어 내었다. 이들 중 특히 중국에 와 있던 마테오리치 신부의 저술은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간 왕자와 사신들이 이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을 위해 항해를 하던 서양의 사람들이 조선에 표류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와있던 선교사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들어오고 조선인 포로 중에서 일본에서 천주교를 믿고 순교하는 이가 생겨났다.
명나라 말기 조선의 유학자들이 중국을 방문해서 당시 명나라에 와 있던 선교사들을 만나고 복음과 과학 문명의 기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최초의 천주교 서적은 광해군(1608-1628)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한 것이다. 말씀이 이 땅에 오신 놀라운 사건이다. 볼모로 잡혀간 왕자들도 북경에서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기 시작했다. 박연과 하멜과 등의 무리가 믿는 이로서 이 땅에 들어와서 조선여인과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고 살기 시작했고 실학을 선도한 이익과(숙종 때 인물 1670년대) 안정복 등의 논의를 거쳐서 18세기 중반 일단의 실학자를 중심으로 한 권철신이벽, 정약전, 권상학, 이총억 등이 천진암에 모여서 천주교 서적을 보면서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그라망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고 귀국해서 대세를 주고 역관 이범우의 집에서 신앙 모임을 시작했다.
천주교 전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의 선교사의 중국을 방문한 조선 사람에게 전파, 청나라 때 선교사를 통한 전파, 그리고 말씀의(천주교 관련서적 천주실의, 칠극 등) 오심이다. 여기서 말씀의 변화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면 성경 히브리서 4장 12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사람을 변화시킨다. 천주실의 및 천학초함과 같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적은 책을 읽을 때 성령께서 사람을 감화 감동시켜 신앙을 갖게 한다. 어그스틴의 회심도 그렇고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변화를 받는 사람도 그렇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 춘권의 변화도 그렇다. 실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말씀을 통해서 변화를 받는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전도지인 사영리는 읽는 많은 사람을 영접하게 한다. 그리고 구약에서 요셉은 옥살이 2년 동안 말씀으로 단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역시 감옥에서 성경을 읽고 복음만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음을 굳게 믿고 기독교 국가의 건립을 일생의 꿈으로 삼고 살았다. 천주교 관련서적이나 성경의 요약이나 전도지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들어옴으로 배우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믿음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곧 외국인 신부를 초빙해서 전례를 행하고 신학을 배우게 하려고 학생을 보내고 교구가 형성되면서 천주교회는 크게 성장하게 되나 곧 당시 유교의 가르침과 대립을 겪게 되고 박해를 당하게 된다. 4대 박해와 많은 박해를 통해서 1만 명에 달하는 천주교인이 신앙을 지키며 순교를 했다. 천주교 전래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였다. 기독교가 전래된 초기에 너무나 많은 분들이 목숨을 버리며 신앙을 지켰다.
외국에서 선교사로 오신 신부님들도 여러분 순교하셨다. 1791년부터 1873년까지 기간 동안에 박해를 받은 자료들을 살펴보면 너무나 처참하다. 우리는 로마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을 때 사자 굴에 던져지고 화형에 처해지고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죽어가던 초기 기독교 믿음의 선진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으나 이 민족에게 일어난 순교의 기록은 역사책에서 작은 사실로 모두들 알고 있으나 로마시대 박해 이상의 박해가 이 땅에 있었음을 똑똑히 잘 알아야 한다. 천주교인을 다른 교를 믿는다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천주교를 이단으로 모는 것도 너무나 잘못된 일이다. 천주교를 제사를 지내는 종교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이다. 진실로 종교개혁 이전에는 천주교와 정교회 밖에 없었고 개신교의 교리의 대부분은 천주교 교리와 같다. 위대한 우리 조상(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신, 정하상의 상제전서 등) 신앙인의 삶과 글을 살펴보면 바울의 신앙의 삶과 옥중서신에 결코 뒤지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외국인 신부님들의 이곳에서의 삶도 선교자 바울과 같았다. 순교의 모습은 참수형, 화형, 태형, 산채로 묻어버림, 수장, 백지사형, 자리깨질 고문, 도리깨질 고문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우리의 조상들은 천주교인들에게 행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매달림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천주교인은 주님을 따라 믿음을 지키며 순교를 했고 순교자의 피가 이 강산을 물들게 하였다. 그리고 1907년 성령의 역사가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마가의 다락방에서와 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개신교의 부흥이 시작되었다. 다음에서 박해의 연도에 따라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여기까지는 제 글)
2) 박해
(1)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최초의 가톨릭교도박해사건.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한국가톨릭교회는 서학(西學)이라는 학문 활동으로 가톨릭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창설된 교회였다. 그 뒤 민중 사이에 신봉되어 왔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윤지충의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 제례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퍼지자 조정에서는 맹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를 공격하는 세력)는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를 신봉 또는 묵인하는 세력)를 공격해 정치적 문제로 확산시켰다. 유교를 숭상해야 할 사림(士林)에 속한 사람으로서 정치와 제도의 위신을 손상시켰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에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체포하고 문초하게 하였다. 결국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를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사형당하여, 한국에 가톨릭교가 전래된 이후 최초의 순교자를 냈다. 이 사건은 한국 가톨릭교 내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즉, 이를 통해 한국 가톨릭교회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이해라는 초기신앙 형태의 문화주의적 종교 신앙에서 순수한 천주신앙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으나, 다음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이어지는 10년간 끊임없는 갈등이 계속되었다.
(2)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莘酉迫害 (1801년, 순조1년)
천주교는 당시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1794년 청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에 들어오고 천주교도에 대한 정조의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詩派)를 일망타진하려고 사교(邪敎) ·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 당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이기양과 정약용, 정약전은 유배됐다. 박해는 3월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된다. 주신부는 조선에 입국해 강완숙의 집에 숨어 활동했다. 그러나 자신의 도피로 신자들이 잡히자 자수해 4월 순교했다. 전주에서도 3월부터 박해가 시작돼 유항검, 유관검, 등이 체포됐고, 9월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박해는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지방에서 희생된 신자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해박해 己亥迫害(1839년 헌종 5년)
1839년 3월~10월 계속된 박해. 이 박해로 인해 참수된 천주교 신자는 70명이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 됐다.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5월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던 박해는 일단 누그러져 평온을 되찾는 듯 했지만 7월, 천주교 신자 색출에 노력하라는 대왕대비의 전교가 있게 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있던 현석문, 조선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던 조신철, 정하상, 역관 유진길 등이 체포됐다. 이에 따라 피신해 있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를 결심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한다. 9월 21일, 이들은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고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된다. 순교자는 이호영 베드로, 정국보 프로타시오, 김아기 아가다, 박아기 안나, 이 아가다, 김업이(金業伊) 막달레나,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한(韓)아기 바르바라, 박희순(朴喜順) 루시아, 남명혁(南明赫) 다미아노,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장(張)성진 요셉, 김 바르바라, 이 바르바라, 김 로사, 김성임(金成任) 마르타, 이매임(李梅任) 데레사, 김장금(金長金) 안나, 이광렬(李光烈) 요한, 이영희(李英喜) 막달레나, 김 루시아, 원귀임(元貴任) 마리아, 박 큰아기 마리아, 권희(權喜) 바르바라, 박후재(朴厚載) 요한, 이정희(李貞喜) 바르바라, 이연희(李連熙) 마리아, 김효주(金孝珠) 아녜스,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丁夏祥) 바오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김 율리에타, 전경협(全敬俠) 아가다,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김제준(金濟焌) 이냐시오, 박봉손(朴鳳孫) 막달레나, 홍금주(洪今珠) 페르페투아, 김효임(金孝任) 골룸바, 김 루시아, 가타리나, 조(趙) 막달레나, 유(劉)대철 베드로, 조증이(趙曾伊) 바르바라, 한영이(韓榮伊) 막달레나, 현경련(_! 菩俚_) 베네딕타, (丁情惠) 엘리사벳, 고순이(高順伊) 바르바라, 이영덕(李榮德) 막달레나, 김 데레사, 이 아가다, 민(閔)극가 스테파노, 정(鄭)화경 안드레아, 허(許)임 바오로, 박종원(朴宗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손소벽(孫小碧) 막달레나, 이경이(李瓊伊) 아가다, 이인덕(李仁德) 마리아,권진이(權珍伊) 아가다,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등이다. 이들 중에는 1839년을 전후하여 이미 1838년에 순교한 이도 있고, 또 1840년과 1841년에 순교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순교자라고 할 때 이들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병오박해 丙午迫害(1846년 헌종 12년)
기해박해 후 7년이 지난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됐다. 이 박해로 형벌을 받고 순교한 사람은 성직자 1명, 평신도 8명 등 모두 9명으로 1984년 모두 시성 됐다. 순위도 등산진에서 선주와 사공 등과 함께 체포된 김신부는 9월 16일 어영청을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를 받았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일, 신앙을 굳게 지켜오던 현석문도 군문효수형을 받고 임치백, 남경문 등도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어온 신자들은 박해소문을 듣고 피신했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도 교우촌으로 피신했다. 순교자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임치백(林致百) 요셉,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이간난(李干蘭) 아가다, 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등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1873년 고종 3년)
조선조 말기인 1866년 초에 시작돼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한다.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유정률(劉正律) 베드로, 남종삼(南鍾三) 요한, 전장운(全長雲)요한, 최형(崔炯) 베드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장주기(張周基) 요셉, 황석두(黃錫斗) 루가, 손(孫)자선 토마스, 정(鄭)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르로, 손(孫)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한원익(韓元益) 요셉, 정(鄭)원지 베드로, 조윤호 요셉, 이윤일 요한 등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만이 시성 됐다.
한국 교회 103위 성인
순교자(martyr) 103위 성인 중 79명은 1925년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諡福)된 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 즈음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모두 시성(諡聖)됨으로써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한국성인의 축일은 9월 20일이고, 축일의 명칭은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103명의 성인 중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0명의 선교사(3명의 주교와 7명의 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국적이 비록 프랑스일지라도 그들은 한국의 선교사로서, 한국인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으므로 그들 역시 당연히 한국 교회에 속하는 성인들이다. 이상 10명의 선교사를 제외한 93명을 순교시기로 구별할 때 1839년 즉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가 67명, 1846년 즉 병오박해 때의 순교자가 9명, 1866년 즉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가 17명이다. 한국 성인들의 신분과 직업은 아주 다양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양반, 중인, 상민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승지(承旨)나 선공감(繕工監)과 광흥창(廣興倉)의 관리, 군인, 궁녀 등이 있는가 하면, 상업, 농업, 약국, 인쇄, 서사업(書寫業), 심지어는 짚신을 삼고 길쌈과 삯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한 사람들이 많다. 집안 형편은 거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편이었으나 최경환, 김효주, 유진길, 김제준, 정화경, 김성우, 임치백 등과 같이 부유한 편의 집안도 있었다. 한국성인 93명 중 성직자는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뿐이고 나머지 92명은 모두 평신도이다. 그러므로 한국성인의 교회활동과 순교는 그 자체가 한국 교회 평신도상이요 평신도적 영성(靈性)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103위 시성 감동·의미 되새겨 -- 발행일 : 2009-09-27
천주교 전래에 대한 제 설명과 그리고 가톨릭대사전에서 4대 박해에 대한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멜 깁슨의 영화 패션오브 크라이스트와 한국천주교 순교에 관한 영화 초대받은 사람들의 표지를 같이 올려보았습니다.
2. 개신교의 전래: 자세하게 설명 해야 함
이 부분 부터는 개신교신자들은 많이 알고 있는 부분이고 제 파워포인트 자료의 앞 부분에 간단한 설명과 함께 표와 사진이 있으니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자세한 설명은 따로 대한민국 구원과 축복 그리고 사명 부분에서 하겠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과정을 임진왜란 이전의 상황(숭실대에 가면 너무나 훌륭한 자료들이 있고 소책자도 있음, 모든 성도는 꼭 가보셔야 하는 곳)도 살펴보는 것이 옳으나 여기에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이렇게 양란을 처음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개신교는 개화파의 개국의 주장에 따라 조선이 개국하고 일본과 미국(1876/1882 운양호 사건) 이를 일본과 중국에 있던 선교사들이 본국에 알리자 제가 드린 자료와 같이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 개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 성령이 이 민족에게 마가 다락방에서와 같이 임하고 그로부터 폭발적으로 교회가 부흥하면서 지금의 부흥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천주교와 연결해서 보면 양란으로 소망이 없던 이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실학이 생기고 이를 개화파가 계승하여 개국을 주장하고 드디어 문호가 미국과 일본 등에 개방이 되자 개신교 교파가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의 부흥이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에 닥친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은 당시 강대국이던 청나라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의 야욕과 조선의 부패와 강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 민족에겐 기존의 학문이나 종교나 신분체계나 모든 것이 이 큰 환란 앞에 별 소용이 없음을 지식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때 복음은 이 민족을 다시 일으킬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약 426년이 지났습니다. 복음이 들어와서 우리 민족이 얼마나 변했는지는 두 가지 사건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조선의 왕 선조는 모든 백성의 어버이였습니다. 큰 궁궐에서 수많은 궁녀와 내시와 왕비 외에도 많은 여인을 거느리고 많은 권력을 행사하던 분이었습니다. 백성은 왕을 너무나 공경하고 섬겼습니다. 임란이 발발하고 수많은 백성이 죽고 5만 명 이상의 백성이 노예로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이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왕은 피난을 갔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종료하자 다시 돌아왔습니다. 누구도 왕의 잘못에 대해선 이야기 못하고 또 다시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평등을 주장하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이 들어오자 조선의 지도층은 약 100년 동안에 천주교인을 너무나 많이 죽였습니다. 100년의 복음과 잘못된 세상의 질서와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감옥에 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최순실 사건으로 감옥에 간 것입니다. 무엇이 세상의 400년 전과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변화를 시켰다고 믿습니까? 당대 최강국이었던 로마는 복음을 접하고 약 300년간 10대 박해를 경험하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조승우 주연의 TV 드라마 마의를 보신 분은 임진왜란 후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사실은 로마의 성장을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듯이 한국의 성장역시 하나님과 복음과 복음의 역사 천주교의 수난의 역사의 이해 없이는 이해가 불가함을 반드시 아셔야 합니다. 개신교 성도는 자신의 조상 중에 천주교 순교자가 없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김병연 김삿갓은 과거시험에서 급제를 했으나 답안을 자신의 조상을 비방하는 글을 썼음을 나중에 알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방황을 하고 살았습니다. 천주교의 비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조상을 비방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약 10년간 50만 명의 개신교인이 천주교로 왜 이동을 했는지 잘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전도편지를 가족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교회의 사랑에 대해서 열심히 멀리 있는 가족에게 전하고 있는데 당시 KBS에서 기독교 100년을 이야기 한다는 프로를 방영을 했는데 제가 보니 100년 동안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좋은 일을 한 부분은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당시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를 해서 방송을 했습니다. 저는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전하는 교회와 방송이 전하는 교회는 너무나 달라서 제가 쓰는 편지를 믿을 형제가 없겠다 생각이 들어서 한 동안 편지를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훌륭하고 좋은 부분과 수많은 세월은 묻어두고 일부의 잘못된 일을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방송을 하니 그것을 보는 이는 모든 기독교는 그렇다 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세상 사람의 이야기와 일부의 주장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고 내가 할 수 만 있으면 잘 조사를 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너무나 바쁘고 관심 분야가 아닌 부분은 외면하고 살기에 올바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외치는 소리에 속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모르면 이런 내용은 죽어도 잘 모르고살 내용들 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역사하신 일들을 올바로 자세하게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 대해서도 반드시 잘 배워야 합니다. 일제 시대에 개신교의 지도자들의 신사참배의 결의가 그리고 행함이 어떤 재앙을 불러왔는지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밝히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대형교회의 목자들이 선교를 가서 일생을 보내지 않고(사도 바울과 같이 베드로와 같이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는 반드시 땅 끝으로 가야함을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곳에서 안주하며 세상의 비방이 되는 것은 성령을 소멸했거나 애초에 받지 않고 목회를 했을 수 있음) 이곳에서 물질의 유혹에 빠져서 정신을 놓고 있음으로 앞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이 민족에게 생길지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서 기도하며 행해야 합니다.
인생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표현을 우리가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융성과 국가의 발전에 대해서는 많은 상관관계가 있음은 과거나 현재에 잘 사는 나라를 조사를 해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아시다시피 로마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기원후 50 년대에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약 300여 년 동안에 이탈리아의 반도국에서 지중해 주변이 모두 로마인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대국이 된 원인을 설명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고대 역사학자 메리 비어드 교수는 저서 "SPQR"에서 질문한다. 'Senatus Populusque Romanus(SPQR)', 즉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로 시작된 로마제국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일까? 우선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 같은 사이비 역사학자 덕분에 가지게 된 편견부터 버리자. 카이사르 같은 '위대한' 영웅들과 로마인들만의 독특한 야망과 능력 때문에 로마가 성공한 것은 절대 아니다. 2000년 전 지중해 주변엔 카이사르보다 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도 있었고, 로마보다 더 많은 능력과 야망이 넘치는 도시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로마제국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비어드 교수는 '우연'과 '확장된 시민권'이라고 주장한다. 로마가 성공해야만 했던 필연적 이유는 사실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기원전 216년 컨네 전투에서 7만 명 넘는 로마 군사를 몰살시킨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왜 바로 로마를 침략하지 않았을까? 아주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을 카르타고와 로마의 역사.
로마는 '역사'라는 도박에서 운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고대 문명의 전쟁은 단순했다. "적을 물리치고 적의 땅과 재산을 빼았는다." 정도였으며 말이다. 하지만 로마는 달랐다. 점령한 민족을 새로운 로마민으로 흡수하고, 과거의 적의 신을 자신의 새로운 신으로 받아들이는 유연성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로마 군과 싸우던 갈리아 인들의 후손은 로마의 장군이 되었고, 북아프리카 유목민의 후손은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로마인들만의 권한이었던 로마 시민권은 점차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었고, 드디어 212년 카라칼라 황제는 로마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로마'는 단순히 더 이상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닌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보편적인 제국의 영원한 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인용: 김대식 지음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pp.191-193 <2017.7.17 카톡> 로마의 시민권
이 분은 교수이시고 또 이 분야가 전공이시니깐 저보다는 연구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시민권의 확장이 로마의 성장에 큰 변수나 요인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해서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성공을 설명할 다른 어떤 요인도 또 딱히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로마의 갑작스런 성장을 이해하고자 제가 드리는 자료들을 그의 온 종일 며칠을 찾아서 읽어보았지만 이것이 로마의 성장의 핵심이다 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하지 못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 있었는데 결국 로마의 성장은 인간의 측면에서의 연구와 함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측면을 반드시 확인을 해야 설명이 가능함을 봅니다. 우선 전번 강의에서 로마가 철의 제국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은 반드시 그대로 실천이 되어야 하는 당위가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다니엘이 그런데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미래의 사실을 미리 예언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예언대로 되도록 역사를 하시 것인지는 분별해서 보아야 하는 측면이 있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부분은 저도 잘 알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성장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증명을 해야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많이 연구하신 분들은 저보다 더 잘 설명하시는 부분이 있겠지만 저의 연구는 이 정도입니다. 다만 인간의 생과 사, 화와 복이 하나님 손에 달렸고 왕의 세움과 폐함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라는 성경의 표현은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와 같은 황제의 세움에 하나님의 뜻이 개입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설명한 천주교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던 청과 일본이 동시에 조선을 공격한 것, 그리고 소망이 없어진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들 개신교의 전래와 민족의 부흥을 보면서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을 이해함으로써 로마의 성장에 하나님의 복음전파를 위한 준비가 있었음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로마의 성장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강의가 주변을 많이 헤매고 있습니다. 강의를 읽으시면서 많은 부분 부족하니 꼭 기도를 해 주시기를 또 부탁을 드립니다. 저도 정말 열심히 읽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 자료를 보시면서 많은 영감을 받으시고 부족한 부분들을 힘을 내셔서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이렇게 올린 글 이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앞의 글 왕의 세움과 폐함과 나라의 세움과 누구에게 주는 것을 알게 되고 담대하게 위의 내용을 기술함 북한의 존재를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회개와 분발과 올바르게 사는 것의 당위를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됨 반드시 나를 포함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회개해야 됨
2018년 2월 16일
4.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의 활약과 천대에 복을 받을 유대인의 위인과 신앙
할렐루야! 오늘은 로마의 성장원인 중에서 앞에서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선민 이스라엘의 로마 성장에 대한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분야에 대해선 앞으론 많은 연구가 진행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데 대부분의 로마 연구가 들이 놓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너무나도 중요한 로마 성장의 요인임을 믿습니다. 도표와 함께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데 도표의 그림이 칸마다 원본 문서에는 색이 들어가 있는데 선으로만 나와서 보시기에 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따로 아래에 하나는 더 붙입니다.
1. 유대인의 활약
1. 도표를 보는 법과 도표를 통한 이스라엘과 강대국의 교류
위 그림은 이스라엘 민족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은 우선 이스라엘은 이집트 다음에 있는데 도표는 100년 단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800-1500년의 기원전 400년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표현하고 초록색이 이스라엘인데 이집트에 한 칸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파란색 4칸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400년 압제를 말해 줍니다. 그렇게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보시는 당시의 강대국과 이스라엘의 포로를 알 수가 있고 이집트는 파란색, 앗수르는 진청색, 바벨론은 신상의 머리 부분이 금이니 노란색, 그리고 페르시아는 은색, 헬라는 놋이니깐 고동색, 그리고 로마는 철의 색깔로 진고동색으로 표시를 했는데 이집트와 같이 파란색이 강대국의 전성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가 그 나라에 있음을 이야기 하고 이스라엘에 강대국의 색이 연도에 따라서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 나라의 속국이거나 피지배국이라는 뜻이며 이스라엘이 기원전 약 100년경에 독립을 이룬 적이 있기에 이 부분은 역시 파란색으로 한 칸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번영의 연대 이전의 부분은 연 초록색과 연 고동색으로 표시를 해 놓았는데 이 부분은 노아 홍수 이 후의 인간의 이동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연도는 100년 단위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연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이 이들 강대국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이 이 표의 작성이유가 되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금의 정확한 작성이 더 필요함을 밝혀 둡니다.
이 표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기원전에 이 민족과의 포로의 삶이나 노예의 삶을 통해서 문화를 교류하고 지식을 나누며 그리고 자신들의 앞선 지식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그 나라의 번영에 기여를 했으며 이스라엘이 떠났거나 이스라엘로 인해 한 제국이 망하는 것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2. 한 민족의 이동이 타 민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한국 민족을 통한 단적인 예
백제의 유민의 일본에 유입을 통한 일본의 문화의 변화와 임진왜란 때 도공을 잡아가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실과 구한말에 일제의 압제와 가난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살다가 러일 전쟁의 발발과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옮긴 우리 민족이 그곳에 살던 유목민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 우선 음식문화를 바꾸어 놓았는데 개고기를 먹는 관습을 그곳의 사람들에게 심어주어 개고기를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즐겨먹게 되고 술과 고기만 먹든 그들이 풀과 같이 그곳에 자생하는 시금치를 먹게 되었고 김치와 다양한 국과 음식을 먹는 민족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가는 곳 마다 빈 땅이 있으면 개간을 해서 각종 곡식을 심어서 수확해서 양식으로 쓰는 한 민족의 농경문화를 본 받아서 목축을 하며 이리 저리로 옮겨다는 유목민의 삶에서 정착을 하고 농지를 일구며 음식을 채식도 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약 최근의 100년 사이에 한 민족이 정착해서 사는 곳의 중앙아시아 인들의 삶이 변하게 되었으니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인류 최초의 사람을 조상으로 모시며 혈통을 이어오면서 하나님을 섬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는 곳은 가는 곳 마다 번영이 생기게 되었으니 예수님 오신 이후의 이스라엘인의 이동과 그들이 가는 곳의 국가가 발전한 관계를 조사를 해 보아야 할 것이나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강한 미국의 유대인의 영향력과 소련의 유대인의 영향력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독일이나 유럽의 유대인의 조사와 그들의 영향력을 또한 조사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유대인이 세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모든 민족에 우월해서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민족과 강대국의 흥망의 관계에 대해서
기원전 1800년 말에 이집트에 들어간 사람은 불과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가족을 모두 합쳐서 72명이었는데 400년이 흐르는 동안에 수백만 명으로 늘어 났습니다. 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의 조상 중에 에녹과 노아와 같은 너무나 훌륭한 신앙의 삶을 보인 조상이 있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요셉을 옥에서 단련시킨 말씀이 있었으며 그리고 그 수백만의 노동은 이집트 번성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서 1/5 토지세의 규범을 세웠는데 이는 모든 국가의 재정의 근간이 되는 법입니다. 피라미드 등도 유대인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조사 요함).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악을 행하자 그들이 하나님께 압제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짓고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드디어 출애굽하게 되는데 당시 이집트는 지상 최강의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장자가 죽고 다른 재앙을 겪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떠날 때 은과 금을 주며 떠나게 하였고 그들이 멀어지자 도저히 노동력의 손실을 보전할 길이 없는 바로의 추격이 있었으니 홍해바다에서 그들의 말과 전차와 정병이 다 잠겨서 죽게 되었으니 수백만의 노동력의 손실과 당시 모든 장자의 죽음과 그리고 병거와 군사의 죽음은 다시는 이집트가 당시에 누리던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인간이 사는데 가장 훌륭한 모세 5경을 받고 40년간 광야에서 하나님께 직접 배우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당대 최고의 부를 축척하며 성전을 건축하고 성정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범죄로 앗수르와 바벨론과 그 뒤를 잇는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의 포로가 되고 속국이 되어 나라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남 유다 히스기야와 당대 최고의 국가 아수르의 싸움에서 앗수르 군이 하룻밤에 18만 5천명이 몰사하는 사건이 생기고 그 일로 인하여 앗수르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도움심을 통해서 가는 곳 마다 그 나라의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그 나라 번성의 핵심적이 역할을 하였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총리를 지냈고 왕비도 나왔으며 수많은 학자와 정치지도자가 그 나라에서 배출되며 그 나라의 번영을 도왔습니다. 이스라엘 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한 사람이 출세를 하면 반드시 동족 이스라엘 사람 두세 명을 동시에 품고 같이 성공을 한다는 점인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본이 후대에도 지속이 되어 이런 서로 이끌어 주는 전통이 적국에 살면서도 그리고 이방인이 되어 살면서도 그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하나님을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잘 섬기는 사람이 있는 곳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따라다니게 되어있으니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강대국의 장점을 이어 받아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고 당시에 지중해 주변에 흩어져 살던 로마 인구의 약 1/10에 해당하는 700만 명 정도의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다른 민족보다도 로마의 번성에 기여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현재에도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하는 미국의 유대인과 유럽의 유대인의 조사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리라 믿습니다.(유대인에 대한 부정적인 역할과 연구도 있음, 유대인에 관한 책들이 있음)
4.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잘 설명을 하는 글 한 편 보기
글
홍 익희 집필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1차 이산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목차
예레미야의 예언
1차 바빌론 유배
2차 바빌론 유배
기나긴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예레미야의(B.C627-580) 예언
솔로몬 왕 시절부터 만연된 우상숭배와 타락은 그 도를 더해 갔다. 이렇게 죄로 물들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두 번이나 신의 뜻에 따라 이산(離散)을 당한다. 첫 번째 이산부터 살펴보자.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진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거듭 경고했다. 그는 머지않아 큰 재앙이 내려 북방 민족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되며 예루살렘도 붕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 궁극적인 살길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고했다. 그 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기억하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망찬 미래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는 신이 옛날 모세 시대에 맺은 계약을 새 계약으로 대체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날이 오면 신은 율법을 돌 판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직접 알게 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구약》에서 ‘메시아’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새 계약’ 예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염원을 품게 만들었다. 이는 《구약》은 물론 《신약》 시대에도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예언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말한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라는 말씀의 배경이 된다.
1차 바빌론 유배
과거의 찬란했던 바빌로니아 왕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기원전 605년 이집트 군을 대파하고 기세를 몰아 블레셋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기원전 597년 이들은 아시아에서 이집트인을 몰아낸 후 시리아까지 손에 넣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기세에 놀란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은 전통적 우방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도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집트는 신흥 강국 신바빌로니아로부터 유다 왕국을 보호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약해졌다. 오히려 이러한 지원 요청은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침략 명분을 주어 결국 기원전 601년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유대민족은 항상 이민족에게 지배받고 노예로 전락했을 때 자신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고 뼈저리게 뉘우쳤다. 이러한 어려움이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기회가 된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가 강요될수록 나름대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원전 600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려 파병된 군대가 오히려 전멸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연합군을 진두지휘해 다시 공격해 왔다. 유대인들은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이 싸움에서 타격을 입었다. 결국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의 최후의 날, 예레미야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다. ‘저항해보았자 소용없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대의 사악함을 벌하기 위해 보내진 하느님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다시 항거할 만한 8천 명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왕과 상류층과 함께 은장이, 대장장이들을 바빌론에 포로로 데려갔다. 이것이 1차 바빌론 유배다.
2차 바빌론 유배
그래도 그는 유다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지 않고 허수아비 왕을 앉혀 놓고 속국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새롭게 즉위한 유다 왕이 예상외로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유다는 이집트와 동맹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네부카드네자르는 다시 군대를 동원해 결국 기원전 587년에 2차 침공이 일어났다. 이집트는 몇 주일 만에 항복했지만 유대인은 1년 6개월을 싸웠다.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바빌로니아 군은 기원전 586년에 성벽을 격파했다. 세 차례에 걸친 대제국과의 전쟁으로 유다 왕국은 정말 어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2차 바빌론 유배다.
기나긴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유다 왕국도 이렇게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으며 사는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적 갈등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더욱 참기 어려워했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배워 대부분이 일찍이 글을 깨우친 민족임에 반해 오히려 정복민족은 대부분 문맹으로 현격한 수준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진압군에 대항해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채 3년 5개월을 버텼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해 기원전 582년에 처참하게 패하며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 왕국도 아예 멸망하게 된다. 전쟁의 참화로 예루살렘 성전은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이때 언약궤에 안치되어 있던 모세의 십계명 석판마저 없어졌다. 유다 국토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당시 유대인 상류층은 모조리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다.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4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바빌론의 유수의 전모다.
바빌로니아에 잡혀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성 밖으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때 지중해 권역의 페니키아 식민지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이산’이다. 이때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약 2천 5백 년간을 ‘유대인 방랑시대’라 부른다.
그리스의 속국이 된 유대
목차
알렉산더, 유다 왕국을 점령하다
유대인, 헬레니즘 문화에 빠지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준 70인 역 《성경》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최고 업적, 70인 역 《성경》
시련의 시작, 실패한 반란이 화를 부르다
유대교 말살정책
역사상 첫 종교전쟁, 마카비 반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하시딤이 양분되다
알렉산드라 여왕, 최초의 의무교육 실시
알렉산더, 유다 왕국을 점령하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한다. 유다 왕국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위협과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충절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해 환대를 받았다. 이로써 에스라와 느헤미야 체제가 이끌었던 유다 왕국은 이 일대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로 들어갔다. 당시 유다 왕국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토라》를 완성해 유대교의 보존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이때부터 유대는 그리스의 속국이 된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 최고 집권자인 대사제가 알렉산더 대왕을 예루살렘 성문에서 만났다고 한다. 대사제는 어느 나라 편에 가담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꿈을 꾸고 난 뒤 대왕을 맞이하러 나갔던 것이다. 대사제를 만난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를 출발하기 전에 꿈속에 나타나 동방을 정복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준 인물이 대사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전승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누렸던 인기를 잘 보여주는 것인데, 그는 성전에 제물을 바쳤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7년마다 오는 안식년에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돕도록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데려갔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이 많았던 이유다.
이렇게 유다 왕국과 바빌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제국 내 각 도시로 옮겨 갔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지중해 연안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침입 당시 길을 닦아 놓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주변으로도 많이 진출했다. 실크로드는 사실 중국 한 무제 이전에 알렉산더가 닦아 놓은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을 가장 잘 이용한 민족이 유대 상인들이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이 유대인의 활동 반경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 곳곳의 유대인 커뮤니티들이 실크로드를 이용해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
이후 지중해 연안의 유대인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해상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해상무역으로 알렉산드리아가 번성하자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대거 몰려들었고 알렉산드리아는 당시에 가장 큰 상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구 1백만 명 가운데 4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헬레니즘 문화에 빠지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왕국 정복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 정복지역인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으로 간직한 《성경》 덕분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왕국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안겼다.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 쇼크다.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헬레니즘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우수한 헬레니즘 문화에 푹 빠져 벌써 헬라인이 다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히브리어는 이미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성경》을 못 읽는 유대인들이 많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지 이미 3백 년이 훨씬 지난 때로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들로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고달픈 삶을 살고 있던 시기였다. 이산 유대인은 생업 때문에 그리스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유대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읽을 수가 없어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준 70인 역 《성경》
이러한 위기를 맞아 당시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로 하고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역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 왕조의 창건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인들을 제국 내에 산재해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처에 안주시켰으며, 정착 후 경제적, 문화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3세 역시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로 된 책들만 70만 권 이상이 있었다. 이 서적들이야말로 세계를 정복한 그리스 문화 홍보대사들이었다. 고대 유럽의 학문과 예술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헬레니즘 문화의 사상적 체계도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계속 무역 중심의 상업도시로 발전했고, 상업에 종사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살고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 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 지금의 뉴욕 격이었다. 이들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왕은 유대인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왕은 사신을 보내 유대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여섯 명의 현자들을 선출해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다. 직접 이들의 지혜를 시험한 뒤 만족한 왕은 파로스 섬에 건물을 짓고 일흔두 칸의 방에 이들을 각자 들여보내 《토라》를 번역하라고 명한다. 약속한 72일이 지나 이들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72개의 번역본이 놀랍게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로써 신의 손길이 미친 것임을 입증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준 《구약》에 얽힌 이야기다.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구약성경》을 ‘70인 역’이라 부른다. 최초의 번역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원래 정확히는 72인 역이지만 편의상 70인 역이라 부른다. 그런데 70인 역은 ‘사분법’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따라 《구약》의 순서도 재배치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순서는 70인 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최고 업적, 70인 역 《성경》
그리스어로 출간된 ‘70인 역’ 《성경》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평상시에 유대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던 이교도들까지 흡수한 것이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이교도들에게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이교도 개종자가 나와 유대교인이 되었다.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지지 세력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훗날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주력 세력이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인용한 《성경》은 바로 70인 역 《성경》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역시 히브리어 ‘마쉬아흐’(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70인 역 《성경》에 나오는 단어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다닐 때 바울은 청중들에게 아주 생소한 교리를 설파한 게 아니었다. 이미 청중들은 70인 역 《구약성경》에 익숙해 있는 지지 세력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70인 역 《성경》은 기독교 역사상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생각은 히브리어에 능통한 율법학자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에도 능통하고 헬라어와 라틴어에도 능숙했으리라고 믿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동족에겐 히브리리어로 헬라인에겐 헬라어로 그리고 로마시민권자로서 라틴어에도 능숙했으리라 믿는다.
시련의 시작, 실패한 반란이 화를 부르다
그 뒤 기원전 200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 왕국이 유다를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 유대인들 사이에 더 널리 퍼졌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천거한 대제사장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유대 제사장 야손은 이스라엘 이름인 ‘여호수아’를 헬라식 이름 ‘야손’으로 바꾼 사람으로 친헬라파 인사 가운데 비둘기파에 속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파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그리스화에 협력했다. 성전을 개방해 이교도 의식을 진행토록 했고 지성소에 그리스인 동상을 세웠다. 유대 제사장들은 그리스 의상을 입고 숭배의식을 그리스 방식으로 치렀다.
그러자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두 파로 나눠졌다. ‘헬라파’와 ‘정통파’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제사장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되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경건자 그룹의 하시디안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그리스화를 부르짖는 공직자와 제사장들을 성전의 담장 위에서 떨어뜨려 처벌했다.
기원전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 그를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실패하고 이집트에서 퇴각했다.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코스가 전쟁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이때가 멍에를 벗어던질 좋은 기회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소문은 잘못된 것이었다. 반란 소식을 들은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주민 1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 시리아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는 배타적인 유대민족의 종교를 타도하기로 했다. 여러 종족을 통일해 광대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통일이 중요했다. 안티오코스 황제는 스스로를 제우스의 지상현신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
시리아 왕국의 유다 정복
유대교 말살정책
안티오코스 4세는 먼저 유대교 종교의식을 금지시켰다. 그 뒤 새로운 동상들이 성전에 세워지고 이교도를 예루살렘에 이주시켜 유대인과 피를 섞게 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그는 유대교 말살을 위한 칙령을 선포했다. 내용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종교적 공휴일 그리고 할례를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와 같은 그리스 신의 우상을 들이는가 하면 유대인이 제일 혐오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유대교 율법이 금하는 동물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자 유대인의 거센 저항이 다시 폭발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신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가르쳐 왔다. 신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세상에 입증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였다. 이스라엘의 임무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올바른 인간사회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서 유대교를 빼앗으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역사상 첫 종교전쟁, 마카비 반란
기원전 166년에 안티오코스 4세는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만방에 그의 힘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군과 4만 6천 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천 5백 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 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이때 다시 반란이 시작된 것을 통해, 놀라운 유대인 투쟁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모딘이란 마을의 ‘마타디아’란 늙은 제사장이 유다 마카비 등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제우스 신상을 파괴했다. 이것이 역사상 첫 종교전쟁인 ‘마카비 반란’이다.
마카비 형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민족의 저항은 게릴라전을 통해 몇 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왕의 토벌군을 유다 마카비는 간단히 물리쳤다. 그러자 왕은 이번에는 군사령관 세론을 직접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카비의 용맹에 밀려 퇴각했다. 왕은 이제 마카비 형제들의 힘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 형제들을 나뒀다가는 제국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작은 반란군 무리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체면이 설 수 없었다. 그래서 형제들의 군대를 괴멸시키기 위한 군대를 편성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가나안 땅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압군은 보병 5천 명에 정예 기병 1천 명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마카비 다섯 형제의 병력은 3천 명에 불과했다. 기병도 없었다. 또 진압군은 갑옷 등 무장이 완벽했다. 게다가 병사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었다. 하지만 마카비 형제들의 병사들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갑옷과 칼 등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두 군대가 부딪힌 곳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엠마오 평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예상을 깨고 영웅적으로 싸운 마카비 군대가 이겼다.
그러나 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섬멸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정예 보병 6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동원했다. 1년 전보다 열 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이에 마카비 형제들은 보병 1만 명으로 맞섰다. 하지만 용병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목숨 바쳐 싸우는 유대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 소유가 아닌 관념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경이롭게 여겼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2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기원전 164년 12월 25일 반란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되찾는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해 자치령이 되었다.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그래서 탄생된 것이 하스모니안 왕조다. 마카비 가문의 조상 하스몬의 이름을 따 지은 왕조 이름이다. 이후 예루살렘은 1백 년간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들은 제우스 신상 설치 이후 3년 반 만인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정화하고 희생 제사를 부활시켰다. 이때 성전 반환을 기념해 하루 분량의 올리브기름으로 예루살렘 신전에 불을 켰는데 그 불이 8일 동안 계속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느님의 응답으로 여기고 ‘성전봉헌일’이라는 명절을 만들어 매년 이 기간에 가정에서 8일 밤 동안 촛불을 밝힌다. 이 축제는 ‘봉헌절’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라 부른다.
유대인들이 성스러운 성물로 여기는 유대인 고유의 일곱 가지 촛대 메노라(menorah)가 바로 ‘하누카 촛대’다. 하누카는 봉헌(dedication)이라는 뜻이다. 황금의 메노라는 고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중요한 도구였다. 그 후로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유대 유물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성전 반환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하누카는 12월 하순이어서 기독교인들은 하누카를 유대인들의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 유대인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 하누카 때는 부모들과 조부모들로부터 8일 동안 매일 선물을 하나씩 받는다.
하시딤이 양분되다
독립전쟁에 승리한 하스모니안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기원전 152년에 요나단이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대제사장직은 대대로 그간 사두개파의 직분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 그룹 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새파를 만들었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를 보수주의로 간주했고 에세네파를 광신자로 보았으며 자신들은 진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헬레니즘을 반대하며 종교는 진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구전 율법을 존중했다. 이들은 유대교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곤경에서 유대교를 살아남게 한다.
알렉산드라 여왕, 최초의 의무교육 실시
기원전 76년 얀네우스 왕이 죽자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의 집권기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최고 황금기로 꼽힌다. 통치 기간은 9년으로 비록 짧았지만 폭넓은 사회개혁이 단행되었다. 로마가 그리스와 다투던 시절만 해도, 로마는 유대인의 동맹이었다. 로마인은 약소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 독립성을 인정했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이두메인을 비롯해 자국 내 이방인은 물론 주변 국가의 많은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킨 바도 있었다. 따라서 1세기 로마제국 내에서 유대교를 표방하고 있는 7백만 명 중에 4백만 명이 가계로 보아 진정한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개종한 이교도 또는 그들의 후손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렇듯 유다 왕국이 영토 확장 야심을 지닌 데다 이웃 여러 민족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로마 원로원이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유대 국가가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런 점을 눈치챈 살로메는 내부 단결을 도모했다. 당시 반대파로서 대중적 세력을 넓혀가던 바리새인들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산헤드린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구전 율법도 나라의 법제 안으로 수용했다. 이를 통해 나라의 안정적 통일을 시도했다.
특히 여왕은 종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통일하려 했다. 그녀는 유대교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가정예배를 이끄는 남자들이 먼저 글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왕은 전국에 학교를 짓고 노소 구분 없이 남자들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교사 양성소도 설치했다.
이후 유대인 사회에서 최소한 가장들 사이에서는 문맹이 사라졌다. 거의 모두가 문맹이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가던 뛰어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쓰고 계산에 능한 유대인들은 어딜 가도 쉽게 자리 잡았다. 또한 그들 간의 서신 연락에 의한 정보 교류는 곧 상업과 무역으로 연결되어 유대인들이 부를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 뒤 유대인들은 세 살이 되면 히브리어를 배운다.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열세 살 때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선 《모세오경》 중 한 편을 모두 암기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를 토대로 직접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으로 연결되었다.
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
목차
유다 왕국, 로마의 속주로
유대인 종파들
로마제국 곳곳에 유대인 커뮤니티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갈등 폭발
알렉산드리아의 폭동
유다 왕국, 로마의 속주로
로마가 그리스를 누르고 득세했다. 기원전 64년 로마는 시리아 왕국마저 멸망시켰다. 다음 차례는 유다 왕국이었다. 그 무렵 하스모니안 왕조는 로마에 대항하기보다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을 구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원전 63년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화평을 요청했다. 유대는 로마의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지중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페니키아, 그리스, 유대 왕국은 모두 차례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대인 역사에 있어 ‘로마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바로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접수한 때부터 7세기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까지 약 7백 년간 계속되었다.
유대인 종파들
당시 유대에는 여러 종류의 당파가 있었다. 최고 정점에 친로마파인 헤롯당과 사두개파들이 있었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지지들이며 사두개파들은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직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받들어 대사제직을 맡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반면 민중에 대한 지도력을 갖고 있었던 계층은 바리새파들이었다. 당시 6천 명 정도였다. 이들은 《성경》과 구전 율법을 다 지켰다. 율법학자의 다수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반로마적이었지만 무력사용에는 반대했다. 반면 유대인의 독립을 무력에 호소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 속세를 버리고 황야와 사해 부근 쿰란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사악한 제사장들 바람에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해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두개파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신생활을 했다.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한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였다.
로마제국 곳곳에 유대인 커뮤니티
헤롯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수는 약 2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무렵 예루살렘 일대의 인구는 거의 1백만 명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도시였다. 이 무렵 지중해 일대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조사된 총 유대인 수는 694만 4천 명이었다. 이는 로마제국 인구 7천만 명의 10퍼센트에 달하는 큰 민족이었다. 이 수치는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실시한 인구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로마제국 내 유대인들은 상업과 해상무역은 물론 베 짜기, 염색, 유리 제조, 금세공, 주물 및 제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수공품 생산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밖에도 유대인들은 직업군인, 기사, 황제 측근의 고위관료, 원로원 의원, 변호사와 의사와 같은 상류 계층에도 진입했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교도들 틈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과 융합하기를 거절했다. 이것은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반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삶은 힘든 편이었다. 밭농사, 수공업, 소매업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벌었다. 해안과 갈릴리 호수에서는 고기잡이를 했고, 일부 평야에서 농업이 이루어졌으며 요르단 골짜기에서는 올리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키웠다. 수공업자들 곧 직조공, 피혁공, 재단사, 대장장이, 필사공, 도공들 역시 그리 형편이 낫지 않았는데, 특히 직업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례로 피혁공은 늘 동물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부정한 자로 여겨졌고, 세리는 이교 지배자에게 충성하기에 무시당해야 했다. 이외에도 율법의 정결규정에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다.
《성경》에서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적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가난과 구걸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돈 벌 기회가 있다면 어디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 가정은 대개 창문이 없는 단칸방에서 살았다. 가족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잤고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율법을 가르쳐야 했다. 혼인은 하느님의 계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독신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는 대개 스무 살 전후에 결혼을 했고, 여자는 열세 살을 넘기지 않았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아버지 사이에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종의 중매였다.
당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여자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설 수 없었고, 예배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으며, 성전에서도 여자들이 갈 수 있는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회당 예배에서는 방청만이 가능했고, 율법의 금지사항을 준수해야 했지만 율법을 공부할 의무는 없었다.
노예들 역시 율법의 금령들만을 지킬 뿐, 율법을 배우고 지킬 의무는 없었다. 유대인 노예들은 7년간 노예생활을 한 후 마지막 해에는 풀려났다. 이렇게 유대인 노예들은 율법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이방인 노예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동족들이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노예들은 당시 율법과는 거리가 있는 자들로 여겨졌다. 예수가 주위에 모여든 여자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갈등 폭발
로마제국은 기원전 37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 통치를 허락했다. 이때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영아 대 박해를 저지른 헤롯이다. 헤롯 왕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즉위하자 피의 숙청을 단행해 최고 대법원격인 산헤드린의 사제들 45명을 도륙했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굴하지 않는 유대인 율법학자들은 모두 죽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인과 친자식들도 죽였다. 혈육을 죽였을 정도니 가히 그 잔악성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인간이었다.
헤롯이 죽고 얼마 지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치 통치에서 로마제국의 직접 통치로 바뀌었다. 서기 6년에 로마는 헤롯 왕의 아들 아켈라우스를 파직시키고, 이스라엘 땅을 ‘유대(Judaea)’라는 이름의 속주로 삼았다.
66~73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쟁 직전 유대인 인구는 대략 8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로마제국 통치 밖에 있었던 파르티아 왕국(바빌론)에 1백만 명가량이 살았으며, 나머지 7백만 명은 로마제국 내의 유대인이었다. 로마 황제조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에 주둔했던 로마 군단은 네 개 군단이었다. 한 군단이 6천 명이었으니 약 2만 4천 명인 셈이다. 외세에 의한 직접 통치는 유대민족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자연히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 밖의 상업도시에서도 경쟁 관계인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갈등이 커져 갔다. 복합인종으로 구성된 그리스인에게 유대인은 별종으로 보였다. 자신들을 남들로부터 유난히 구별하는 유대인은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리스인은 그들 문명이 지배하는 세계를 보편적이라는 뜻의 ‘오이쿠메네(oecumene)’라고 불렀다. 보편 그 저편에 펼쳐져 있는 ‘카오스’ 곧 혼돈의 세계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보편적 세계는 많은 인종과 많은 국가로 구성되는 세계 시민사회로 인식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인류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사회는 자신의 문화를 표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스 신들이 ‘부정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절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모욕이었다. 그로부터 최초의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몰래 인신 공양 제사를 드린다는 루머도 나돌았다. 그리스인들은 소문만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동
당시 이집트 최대의 상업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많이 살았는데 상업적 경쟁 관계인 두 민족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기 38년 스스로를 신이라고 선언한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제물을 바치며 쾌유를 빌었지만 그를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유대인들을 모함할 좋은 기회였다. 다신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 가운데 황제라는 신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곧바로 유대인들이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백만 명의 대도시였는데 4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이 해상무역과 상권을 장악하자 이것이 기존 세력인 그리스인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차이도 심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유대인이 점점 이해하기 힘들고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이들은 아무도 볼 수 없는 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보기에는 제우스 신 등 보이는 신도 믿기 어려운 판국에 보이지 않는 신을 이해하기는 더 힘들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는데 이제는 다른 민족들이 유대인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한 문화적 차이도 컸다. 그리스인들은 ‘세계는 하나다’라는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헬레니즘 문화인 반면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근거한 차별성을 갖는 문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부딪혔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제 반유대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수 세력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유대민족은 미움, 질시, 핍박, 박해 더 나아가 학살의 위험에 처해졌다.
칼리굴라 황제를 핑계 삼아 그리스인들은 반 유대 폭동을 일으켰다. 해상무역 경쟁자인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항구에 정박해 있던 유대인의 배를 모조리 불태웠다. 유대인 거주 지역의 집들도 방화와 약탈로 쑥밭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세운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해 약 49만 질의 귀중한 자료들이 불타 버렸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치안을 맡고 있었던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인들 편에 서서 폭동을 방관했다. 그 뒤에도 계속되는 유대인과 그리스 · 로마인 간의 갈등은 반란의 도화선이 된다.
(이상 홍익희 교수의 글)
2. 천대의 복을 받을 아브라함의 존재와 그의 자손 위대한 다윗 왕을 조상으로 둔 유대인
1)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에 대한 성경말씀
[개역개정] 제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제15장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다]
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출애굽기 13장
열째 재앙 : 처음 난 것들의 죽음]
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34.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
인간은 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각의 소유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존재와 자손을 통한 영원한 이 세상의 삶을 소망해서 자신의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 파라오와 진시황과 다른 모든 왕들과 같이 무덤을 만들었지만 그 모든 시도는 왕국의 멸망으로 좌절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와 영원이 함께 연결이 되어 이 나라의 백성은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를 살고 현재를 살면서도 미래를 살며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을 삽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현 우리의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진다. 진실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바라고 이에 취해서 내 짧은 인생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영원한 삶 속에서 나의 존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르침은 영원은 없고 현세와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도록 가르침입니다. 권력을 가진 개인의 숭배도 그러하고 종교를 가장한 개인의 숭배도 그러하고 하나님이 없는 진화론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모든 세상의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영원의 개념과 영속성의 개념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왕이신 예수님과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천국에서 반드시 살아서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를 위해서 주와 함께 기도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분들의 믿음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보존하면서 우리의 후손인 믿음의 후배를 위해서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자신을 이 땅의 순례자로 여기며 그리고 종으로 여기며 늘 순종하는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다]
37.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2)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신 다윗을 조상으로 가진 유대인
역대상 제22장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성전 건축 준비]
2.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3.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4.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6.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7.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11.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12.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13. 그 때에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하니라
17. ○다윗이 또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명령하여 그의 아들 솔로몬을 도우라 하여 이르되
18.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시느냐 사면으로 너희에게 평온함을 주지 아니하셨느냐 이 땅 주민을 내 손에 넘기사 이 땅으로 여호와와 그의 백성 앞에 복종하게 하셨나니
19.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하나님 성전의 기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성전에 들이게 하라 하였더라
이렇게 다윗을 통하여 준비된 인력과 재력을 가지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드디어 성전을 완공했으니 아래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선 다윗이 준비한 금과 은을 현재의 단위로 환산해 보면 금 1 달란트는 현재의 무게로 약 34kg에 해당합니다. 34x100.000= 3,400,000kg 이니 약 3,400t에 해당하고 은은 약 34,000t에 해당합니다. 이와 함께 준비된 놋과 철과 백향목을 위의 성전을 건립하는데 모두 사용하였다 합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1달란트가 약 20억이라고 했으니 20억x100,000을 하면 200조가 되고 은도 1달란트가 금 1달란트의 약 1/15의 가치가 있다고 하니 역시 150조가 되니 금, 은 가격만 해도 350조가 되는 금액입니다. 이런 재물을 투입해서 약 기원전 900년 경에 성전을 지었으니 전 지구상에서 가장 멋있고 가장 화려하고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건축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 때 이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한 민족입니다. 이를 이어서 로마가 기독국가가 되자 역시 베드로 대성전과 같이 화려하고 멋진 성전을 지었고 이는 모든 기독교 유럽의 국가의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100년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백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성전을 멋있게 짓겠다는 구상을 하고 실제로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이 역사적인 물질의 축복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시대를 잠시 살고 갑니다. 참으로 무엇을 해야 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성전이 무엇이 필요하냐 말씀이 중요하지 하면서 성전을 짓는데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금으로 안과 밖을 지은 성전이 솔로몬의 범죄로 민족이 분열되고 종국에는 범죄로 나라가 망하고 성전의 금과 은이 약탈당한 것을 예를 들면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만큼 구약의 말씀을 잘 보존한 민족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성전은 하나님의 명에 의해서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지었으며 사람이 모이고 예배를 드리는 데는 반드시 성전이 있어야 하며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에 자신의 집보다는 더 멋있게 지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입니다. 성전은 낡아서 비가 새는데 자신의 집은 수 십 억을 드려서 은과 금과 온갖 외국의 가구로 도배를 하고 성전은 좁아서 예배를 드리기도 힘든데 자신의 넓은 땅들은 잡초가 무성하게 비싼 땅값이 나날이 올라가고 있는데도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자신의 집 보다고 못하고 자신이 가진 땅보다도 좁은 성전에 가서 무슨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수백 수천 번 읽었다고 하면서 성전이 가진 의미도 모든 채 헛소리로 일생을 보내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은 자기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대를 이어 영원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신앙을 후손에 물려주는 것은 말씀의 연구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가 모일 성전이 필요합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불교의 가르침이 옳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나 2000년 가까이 이 땅에서 지속하는 것은 산에 있는 절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본도 받지 말아라라고 하셨는데 모이려면 반드시 장소가 필요하고 장소는 반드시 정성과 예배와 교회의 사명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처음에 개척을 하시는 분들이 좋은 예배당을 가지지 못해서 천막을 치고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으나 재정이 커지면 반드시 합당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지금까지 성전 중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일 년에 반드시 3번은 하나님 전에 낯을 보여야 하기에 수많은 이스라엘 인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들이 나라가 없어지고 포로로 살 때에도 회당이 있어서 회당 중심의 생활을 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목사가 성전을 짓고자 하고 성전에 목마른 성도가 건축 헌금을 하면서 성전을 아름답게 멋있게 짓고자 하는 것을 온갖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자신이 사용하고 싶은데 물질을 다 쓰면서 하나님의 전을 짓는데 물질을 드리는 것에 인색하여 반대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는 자신이 과연 성경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사는 지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도 모르고 성전도 모르면서 자신의 욕심에는 밝고 자신을 위해서 돈을 쓰는 데는 빠른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재물을 합당한 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겁도 없이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위해서 쓰고 있다면 이런 자는 과거에 어떠했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과는 현재에는 이미 관계가 없는 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가는 곳 마다 복을 받고 세계 최고의 민족으로 사는 것을 유대인의 교육에서 찾는데 이는 너무나 적게 아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과 성전과 이런 멋진 믿음의 조상과 그들의 삶이 그리고 말씀 연구와 더불어 약속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구약을 통한 약속을 지킴으로 현대까지 그들에게 복이 이어져오는 것을 알고 믿고 우리도 우리와 후손과 민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 2 장 인간적인 요소와 지리적인 요인
1. 실질적인 로마의 성장의 모습
1) 영토의 변화
B.C 338년 라틴 전쟁 직후의 영토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와 주변을 영토로 지니고 출발한 로마는 주변 도시국가와 싸움을 통해서 B.C338년에 첫 번째 지도와 같은 영토를 가지게 됩니다. 로마의 건국의 연도를 약 750년으로 잡으면 약 400년간 왕정시대에 라틴도시국가 연맹과의 싸움, 켈트족과의 싸움, 삼니움 전투, 에트루니아와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며 영토 넓혀서 B.C 264년에는 마침내 두 번째 지도 진회색의 긴 장화 모습의 로마 전역을 통일(마치 고구려, 신라, 백제의 통일과 같이)하고 이후 약 100여년에 걸친 카르타고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싸운 전투에서 승리하여 두 번째 지도 연초록색 부분까지 영토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케이사르에 의해 두 번째 지도의 노란색 부분까지 영토를 확장하는데 지중해 주변의 대부분의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걸린 시간은 약 300년 밖에 걸리지 않았고 전쟁이 쉬지 않고 지속되어 부분적으로 패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승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등장해서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세 번째 지도의 연두색 부분을 추가하고 그 이후의 몇 명의 황제를 거쳐서 트라이안 시대에 까지 녹색의 부분이 추가가 되어 기원후 117년에 지중해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이집트와 영국, 갈리아,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지역을 다스리는 대 제국이 되었으니 이는 성경 다니엘서의 예언의 (단 2:40.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단 6:7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 모습대로 그대로 된 것으로서 다른 다양한 영토 확장에 대한 의견이 등장하지만 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2)정치 제도의 변화: 왕정, 공화정, 전제정(황제제도)
로마는 처음에는 왕정으로 시작하였으나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이 되어 성장기를 맞았으며,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등장 이후 사실상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 체제로 변모하게 됩니다.
A) 왕정의 성립과 붕괴
로마의 성립부터 7명의 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고고학적인 발굴로도 왕정을 뒷받침 하는데 왕정 후기에 에트루니아 족이 왕으로 되었다가 기원전 500년쯤에 왕정이 붕괴하고 귀족에 의한 공동 동치가 이루어지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평야지대가 아니고 산지와 분지로 이루어져 있고 인종이 단일 인종이 아닌 수많은 인종(단 2:43 왕께서 쇠와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민족과 서로 섞일 것이나 그들이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은 쇠와 진흙이 합하지 아니함과 같으리이다.)으로 이루어져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대표하는 귀족의 통치로 바뀌게 됩니다.
B) 공화정의 수립
로마의 공화정은 B.C 500년경에 시작되어 카이사르의 때 B.C 44년까지 지속이 되는데 원로원, 민회로 구성이 되어 독재관(Dictator), 집정관(Consul), 호민관(Tribunus Plebis) 감찰관(Censor: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는 권한, 제명하는 권한, 품행이 좋지 않은 시민의 시민권을 5년 간 박탈 권한 보유), 법무관(Praetor), 안찰관(Aedilis: 조영관이라고도 한다. 서민과 귀족에서 각각 2명씩 선출), 재무관(Quaestor: 군대나 당국의 회계일)의 정무관의 관직이 있었습니다. 공화정 당시 로마는 귀족과 평민으로 구성이 되어서 왕정이 무너진 후 2 명의 집정관을 뽑아서 통치를 맡기다 전쟁이 발발하면 독재관을 선출해서 통일된 지휘체계를 맡겼습니다. 연임의 가능과 뛰어난 집정관의 권력이 강해지자 왕정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한 귀족과 시민이 이에 대한 견제로 감찰관의 역할로서 귀족의 원로원으로의 진입을 통제하게 하였습니다.
민회는 호민관을 선출해서 평민의 지위를 보장하고자 했고 12표법 등을 만들었으며 평민과 귀족의 투쟁을 통해서 평민의 권리를 늘려나갔으며 크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이러한 평민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개혁이었습니다.
C) 제정의 수립
카이사르의 삼두정치와 갈리아와 브리튼 정복 전쟁에서 승리와 내전에서 승리 등으로 입지가 굳어지자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를 시작하면서 사회와 정치를 개혁하고 자신을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어서 등장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티움 전쟁에서 승리(단4: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단 5:21.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하고) 하여 이집트를 통해 확보한 재정으로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원로원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았으나 양부(케이사르)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독재권을 행사하지 않고 40여연 년 간 제위에 있으면서 권력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이후의 제정의 기틀을 다지고 팍스로마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이상의 정치제도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체적으로 로마의 정치 분위기를 전하는 아래의 글을 보면서 당시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그 밖의 나라와 섬들도 모두 멸망시키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벗들이나 자기들에게 의지하는 이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멀고 가까운 곳의 임금들을 정복하니, 그들의 이름을 듣는 이는 누구나 그들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이 도와서 임금으로 만들려고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임금이 되었고, 그들이 작정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들의 위세가 드높았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은 아무도 왕관을 쓰지 않고, 위엄 있게 보이려고 자주색 천을 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원로원을 세워, 삼백이십 명의 의원들이 날마다 백성의 문제를 끊임없이 논의하여 잘 다스리게 하였다. 또 해마다 한 사람을 뽑아[21] 백성을 다스리고 온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다. 백성은 모두 그 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들 가운데에는 시기나 질투가 없었다.]
성경 외경 마카베오기 상권 8장 11~16절
3) 인구의 변화: 시민, 속주민, 노예들과 도시화
로마인들은 건국 이후 전투종족이라 싸움에는 강했던지 조금씩 주변 작은 마을들을 점령한 뒤 이들을 로마에 강제 이주 시키는 방식으로 인구를 불리게 됩니다. 그 결과 기원전 600년 즈음엔 인구가 3만 명 정도로 증가하게 되며 기원후 1세기경에는 인구가 약 영토의 확장과 함께 약 6천만 명(일부에서는 로마인 2천만, 속주민 4천만, 노예도 이와 동수 해서 1억 2천만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전쟁을 통한 정복으로 영토가 넓어지고 그 영토들을 속주화 하고 그리고 때로는 노예화함을 통해서 증가하게 되는데 특히 지중해를 제패하면서 로마는 당시 서양과 중동을 아우르는 수도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세계 전체의 지식인, 부유층, 출세한 해방 노예, 새로 해방되는 무수한 노예들이 로마로 상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리품을 얻은 로마 정부는 도시를 세계 수도에 걸 맞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공사를 벌였고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유입되는 노동자들도 상당하였습니다. 이로써 로마 시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였고 때문에 로마는 백만의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가 되어 지중해의 중심지가 됩니다. 당시에 유대인의 숫자는 로마전역에 약 7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전체 로마 인구의 약 1/10이 가장 세상에서 올바르고 고도의 지식을 지닌 사람들로 채워진 것입니다.
4) 경제력과 군사력의 변화
(1) 당시의 경제력을 농업, 수산업, 상업, 제조업, 무역, 건축업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A) 당시의 농업과 목축업
인류는 창조와 동시에 동산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낙원 에덴에서 추방을 당한 후에 남자는 땀을 흘리며 땅을 개간하거나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벨과 가인은 목축업과 농업에 종사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렵과 채집의 삶이 아니라 농업과 목축이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축은 처음부터 가축으로 만들어졌기에 길을 들일 필요가 없이 길렀습니다. 로마 제국의 농업은 다양한 농산물을 전 영토로부터 재배를 했을 것입니다. 밀과 보리도 재배하고 포도도 재배를 해서 빵과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다양한 채소와 허브식물도 사용을 했을 것입니다. 목축도 지역에 따라서 널리 행해져서 소나 말이나 양이나 돼지나 닭 등 우리가 지금 보는 가축을 거의 다 키웠을 것입니다. 우유와 치즈를 동물로부터 얻어서 먹고 마셨습니다. 농업을 하나 자세히 보면 농기구가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않아서 가축과 사람의 노동과 간단한 농기구로 농사를 지었는데 정복지를 귀족이 사유화 하면서 대 농장(라티푼디움)을 지닌 귀족이 등장하게 되고 이를 노예들을 투입해서 경작을 하였으며 자영농들은 산간이나 벽지로 쫓겨났다고 합니다.
수산업도 항해와 조선술의 발달로 근해 어업에서 원거리 어업도 가능하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베드로 등의 어부의 기록을 신약에서 보면 배와 낚시와 그물을 사용해서 지금과 같이 잡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물 반, 고기 반의 바다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류와 패류 등을 생산했으리라 믿습니다.
B) 상업
로마의 상업은 빵가게, 이발소, 책방, 고깃간, 생선가게, 야채 과일 가게, 음식점, 가구점, 올리브유 가게, 향수 제조업, 술집, 구두 가게 및 고리대금업 등등 다양했고 동전을 화폐로 사용했음이 발굴되는 다양한 금화 은화 등의 동전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C) 로마의 무역
로마제국은 무역선을 소유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해양의 자유와 이 전통적인 해양 민족 그리고 그들의 선박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로마의 해양 정책을 택해서 소득을 취했다. 그들은 새 항구들을 건설하고 기존 항구를 업그레이드 하고, 새 운하를 열고 등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선들을 특히 해적들로부터 보호하였다. 제정 로마 시대에 해상무역은 주로 그리스인, 유태인 그리고 시리아(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 행해졌을 것 같습니다.
[출처] 제정 로마 시대 유대인의 무역과 무역선 선주 |작성자 saranmul
중국의 한서에 로마와의 교류의 기록이 있고 화폐와 황제에 대해서 설명이 있는 것을 보아서 로마와 중국과의 무역도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로마와 중국의 가운데 있는 국가와도 모든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가 있습니다.
D) 로마의 제조업
로마는 유리 제조에 있어서 뛰어났는데 유리로 된 유물이 신라 시대의 유적지에서 발굴이 되고 있고 유리잔으로 귀족들은 포도주를 마셨을 것인데 포도주 제조 기술도 일반화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구제작, 의복의 제작,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무기의 제작, 그리고 동전의 제작 등 제조업도 발달하였습니다. 유리로 만든 잔과 물건이 우리의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굴이 되는데 로마의 유리가 우리나라에 까지 들어 왔으니 삼국시대에 복음이 들어왔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불상과 다른 유물에서 십자가와 마리아의 모습이 보인다는 연구의 결과 있습니다.
(사진은 윗 사진 미국의 박물관의 고대 로마 유리 유물과 아래 신라시대 황남 대총 유물)
F) 로마의 건축 및 토목: 도로와 수로망의 정비: 블로거의 글을 올립니다.
20세기 최강국의 지위에 오른 미국이 미국제일주의를 표방했듯이 당시 로마도 로마제일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리스가 파르테논신전이나 제우스 신전과 같은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하는 건물들을 지은데 반해서, 로마는 아름다움 보다는 규모의 웅장함으로 좌중을 압도하면서도 매우 실용적인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콜로세움(원형경기장), 수천 명이 동시에 사용한 카라칼라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공공욕장, 개선문,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궁전, 타구스 강 다리 같은 것들이 있지요. 로마는 한편 도로와 수로 같은 토목공사에도 뛰어난 업적을 이뤘는데요. 오늘날에도 유럽의 시골을 가보면 로마시대에 만든 도로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보는데요, 그만큼 로마인들은 견고하고 효율적인 도로건설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래, 석회, 규사, 돌 등으로 일종의 콘크리트를 만들어냈는데요. 현대의 고속도로는 히틀러가 전격전을 벌이기 위한 준비로 닦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고대의 하이웨이는 바로 로마의 작품이었습니다. 로마의 도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고 돌로 포장한 전천후 도로로 폭이 3~8미터 정도 됩니다. 오늘날 남부 프랑스에 남아 있는 가르 교는 가르 강의 물을 니므시로 끌어오는 역할을 하는 수로교인데요. 3층의 아치구조인 이 다리길이는 297미터에 이르고 높이도 47미터에 이릅니다.
출처: http://woww0w.tistory.com/109 [그대와 춤을]
기원전 5세기에서 6세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에트루리칸(Etrurcan)과 초기 그리스(Arcaic)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음. 이때는 그리스가 로마의 식민지에 속하기 전으로 로마에는 대도시가 발전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세련된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미술을 바탕으로 헬레니즘 건축 양식의의 도리아 식 신전이 건설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로마 고유의 건축 양식이 생기게 되었다. 엄격한 좌우대칭과 신전의 높은 계단, 코린트식 기둥머리와 내부공간이 중요시 되었으며, 이외에도 아아취(arch)를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시켰고 도움(dome)을 사용하는데 능숙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 사이부터 큰 건축물 대량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부(富)와 사치에 묻혀 있던 귀족들은 대중들의 정치적 불을 무마시키기 위해 대중용 오락장과 전당 등의 대중적인 건물을 세웠다. 바실리(Basilica)당 및 콜로세움 (Colosseum)과 같은 원형 극장이 건축된 것도 그 일환이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그리스의 건축법을 이용하여 원주나 들보 또는 받침대를 사용하여 아치 건축에 쐐기형의 돌을 방사상으로 축조하는 특유한 공사법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들은 건축 자재로 콘크리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외관상 볼품이 없고 뒷처리는 부적당하지만 이 위에 대리석판이나 설화석 혹은 벽돌로 덧씌우거나 스타코로 칠을 하여 외관을 미화할 수도 있었으며 그 자체가 벽을 보호하는 중요한 건축 재료가 되었다.
(2) 군사력의 변화/ 로마군의 편제, 전투 대형, 전투 복장 무기, 전술
A) 로마군의 편제: 블로거의 글을 그대로 올립니다.
로마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바로 우수한 군대에 있었다. 로마군은 전쟁사에서 모범으로 꼽힐 정도로 용맹한 병사들, 우수한 장비들, 뛰어난 장군들을 자랑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25만 명의 군대가 있었고 셉티무스 세베루스(AD 197-211) 황제 때에는 무려 44만 명에 달하였다. 로마 군대는 네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정규군 레기온(Legion) 정복지역에서 차출된 외인부대(Auxillaries), 말(horse)의 라틴어 에쿠스(equus)에 유래된 에퀴테스(Equites)기병대, 그리고 황제 호위의 최정예 친위대(Praetorian Guard)가 있었다.
로마군은 16세에서 45세까지 복무하였고 강제 징집은 아니었지만 시민권과 좋은 혜택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입대하였다. 로마 군은 공화정 시대에 시민권자 중심이었으나 황제 시대에는 외인 용병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비시민권 외인인 경우에는 25년을 근무하고 청동 판에 새겨진 로마 시민권 증서를 받고서 '베테랑(veteran)' 즉 퇴역병사가 되었다. 군 복무 중에는 결혼이 금지되었으며 또 결혼한 군인들은 가족을 데리고 다닐 수 없었다.
군인들은 평화 시에 도로와 건물 건설에도 동원되었다. 탈영이나 반란은 무조건 처형이었고 그 가족까지 몰살하였다. 또한 갈리아 출신 병사들은 영국 브리튼 지역에, 브리튼 출신 병사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배치하는 등 복무지역을 고향에서 먼 곳으로 배정하여 탈영을 봉쇄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좋은 급여와 권리 때문에 이탈은 심하지 않았고 군율도 잘 유지되었다.
시민권은 원래 로마 시 인근의 라틴 평원 사람들만 소유했으나 로마에 협조하거나 공을 세운 외인들도 군사령관들과 황제로부터 시민권을 수여받았다. 또한 고가에 구입도 가능했다. 로마 시민권은 여러 특권을 누렸는데 우선 시민권자들만이 무려 6미터나 되는 권위의 토가를 걸칠 수 있었다. 또한 관리에 임명되거나 투표할 권리가 주어졌고 상업도 제약이 없었다. 시민권자와 결혼할 자유도 누렸고 고문이나 구금을 함부로 당하지 아니했고 고소와 항소 등 재판의 권리도 있었으며 많은 종류의 노역과 세금에서도 면제되었다. 시민들이 가장 좋아했던 권리는 오락 행사와 서커스를 무료로 관람하고 빵도 공짜로 배급 받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St. Paul)은 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시민권자들과 달리 위세를 드러내는데 사용하지 않았고 시민권의 상징인 토가도 걸치지 않았다.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려고 사람들이 애쓰는 것에 빗대어 바울은 하늘의 시민권을 사모하라고 권했다. 인간은 땅에서 유래된 저급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의 왕국에 돌아갈 존재라는 것이다. 영원한 왕국은 고통과 배고픔이 없으며 억울하게 항소해야 하는 일도 없는 사랑의 나라라고 가르쳤다. 또한 바울은 로마의 군대를 비유로 들며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불렀다. 하늘나라를 위해 일하는 병사들로서 탈영이나 불평이 없이 신실한 마음으로 섬기며 때로는 먼 곳에도 파견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무엇보다 고된 영적인 병역 뒤에는 하늘의 시민권이 부상으로 주어지는 것도 가르쳤다.
[너는 영원한 친구야 블로거에서 옮김]
B) 전투대형: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로마는 종래의 전법을 따라, 최전선에는 경장보병 그리고 그 뒤로는 중앙에 열을 더 많이 세움으로써 강화한 중장보병을 배치했고 전 집정관인 세르빌리우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좌익과 우익의 기병대는 각각 바로와 파울루스가 담당했으며, 전략의 골조는 중앙에 집중한 강병으로 적을 분쇄하고 흩어진 양군을 각각 포위해 섬멸하는 것이었다.
[출처] 초인 시리즈 1-1편 - 로마의 악몽|작성자 kakaruta
C) 전투복장, 무기: 블로거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군단을 중심으로 전략전술 및 무기체계를 선진화한 로마군은 당대최고의 전투력을 구비할 수 있었다. 이는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는데 핵심적 수단이 되었다. 글라디우스, 필룸, 스큐돔으로 무장한 로마군은 지속적으로 전법을 창안하고 이를 고된 훈련으로 숙달하였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럽고 애국심에 넘치는 로마의 시민군대가 있었기에
로마군단은 무적을 자랑할 수 있었다.
[출처] 게르만족 용병|작성자 가을창문]
D) 전투전략: 백과사전의 내용을 옮겼습니다.
진군하는 군대는 적으로부터의 기습을 피하기 위해서 척후병들을 선두에 내세웠으며 하루에 25킬로미터씩 행진하였다. 휴식 중에도 군단병사들은 쉬지 않고 경사면과 해자를 건립하여 성채를 에워쌈으로써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야영지를 축성해야 했다. 이러한 야영지의 중앙에는 집정관의 천막이 위치하고 있었다.
로마군의 전투대형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로 3열 배치로 편성되었다. 제1열에는 가장 약한 창병들이 포진하였고, 제2열에는 주력병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칼로 싸우는 백병전으로 들어서기 직전에 투창을 던졌다. 제3열은 창으로 무장하고 전략적으로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만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래서 제3열의 병사들은 전투경험이 많은 고참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방에는 경장보병들을 배치하고, 양옆에는 동맹국 시민들로 구성된 병사들과 기병들을 배치하였다.
5) 로마의 도시들
(ㄱ) 로마의 도시계획
로마는 그리스의 도시계획법에 근간을 두어 발전하였다. 대개 그리스인은 도로건설에 있어 미(美)와 방어와 항만 및 비옥한 토양에 관심을 기울였고, 로마인은 도로의 포장, 물의 공급, 하수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스의 도시에는 없으나 로마의 도시가 가지는 구성 요소로는 Thermae라고 부르는 궁중목욕탕과 insula가 있다. 각 insula는 로마사회에 특권이 적은 한 계급의 일단의 거주 단위였다. insula는 높이가 수층이나 되었고 건물이 초라했으며 불에 약한 목조건물로서 인화하기 쉬웠다. 로마인은 가로의 배치를 강조하는 동시에 주가로와 부가로라는 관념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직각으로 교차하는 두 대로로써 카르도(cardo)와 테쿠마누스(decumanus)라 일컬어지고, 시가를 네 부분으로 분할하였다. 이 도시설계의 처계는 단순하기는 해도 거리의 많은 건물들에 의해서 잘 조직되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극장, 투기장 그리고 시장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와 같이 고도로 조직된 체계에서 가로에 대하여 대칭으로 배치되지는 않고 있으며 공공건조물도 기념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Forum은 그리스 도시의 Agora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건물집단의 성격으로서보다는 부속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Forum에서는 새로운 왕이 출현할 때마다 광장을 중심으로 한 건물 군을 건설하여 지배자의 영광과 신격화를 나타내기에 애썼으므로 Forum에서의 건축적 내지는 도시계획적 그 기능성보다는 기념비성에 더욱 눈을 돌렸을 것이다.
(ㄴ) 로마
로마는 BC 27년부터 AD324 년까지의 기간 중 세계의 중심으로 전성기인 AD 3세기경에 는 45,000이 넘는 아파트와 약 2,000개의 개인주택이 건설되었다. AD 1세기경에 아우구스투르 황제에 의하여 높이제한(21m)이 시행되기 이전에 이미 8층 건물이 건립되었다.
로마제국의 힘과 부가 커짐에 따라 로마의 인구는 크게 증가(100만의 도시)하여 전성기의 로마(AD 4세기)의 면적은 12㎢(성외 8㎢)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이와 같은 성장과 더불어 심각한 주택난과 수송문제가 야기되었다. 로마는 또한 불충분한 상수공급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신선한 물을 끌어오기 우해 거대한 상하도관 건설을 하였다.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로마황제와 통치자는 제국과 그들 자신을 위해 거대한 기념물을 건설할 수 있었는데 그 종류에는 Forum Civil과 Forum Venalia의 두 종류가 있다.
Forum Civil의 주변에는 의사당, 법원, 신전, 기타 공공건물이 들어서서 도시의 행정과 시민생활의 중심지로 이용되었고, Forum Venalia는 주로 상업상의 시장광장을 뜻한다. 그러나 로마 이외의 중심도시에는 그 구분이 확실하지 않았다. AD 315년경의 로마의 성벽 내에는 8개의 교량, 11개의 공중목욕탕, 각각 2개의 circuse, 원형극장, 3개의 극장, 28개의 도서관, 4개의 검사(劍士)학교, 36개의 대리석arch, 37개의 문, 290개의 창고, 254개의 공중제과점,17910개의 궁전, 46,602개의 insula, 500개의 분수가 있었다. 이러한 거대도시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대형차에 의한 대량수송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로마를 중심으로 폭이 넓고 잘 포장된 도로가 전영토로 뻗어 되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직교상의 규칙적 도로망을 가지고 특히 동서남북을 잇는 2개의 직선 가로는 도시 전체에 있어 대칭성이 강조되어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ㄷ) 로마의 지방도시
① 식민도시(colonia)
새로 정복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한 근거지로서 건설한 도시이다.
로마 콜로니아: 군사적 요새에 로마의 시민을 이주시켜 만든 도시.
라틴 콜로니아: 로마시민과 라틴 인민이 연합하여 만든 도시.
형태: 격자형(格子形) 가로(街路) 체계.
특징: 주로 통치상의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도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② 병영도시
형태: 변경지대에 수비병의 주둔지에 설치한 도시.
특징; 어느 곳에나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③ 상업도시
교통상의 요지에 주로 건설된 도시로서 현존하는 유럽도시의 기원이 된다.
순수한 상업도시라기 보다는 식민도시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상 서평택 아름다운 사람들 님의 글에서 옮김]
지금의 이탈리아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당시에 가장 잘 정비가 되어 있었지만 속주의 대표적인 도시도 돌로 된 건축물과 도로와 수로가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대서양 주변국의 주요 도시에서 당시의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고 당시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으니 역사상 로마와 같은 나라는 전무후무하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이러한 대제국 로마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 했을 것이고 당시의 로마제국의 위용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것이고 그리고 로마의 부귀와 영화에 대해서도 잘 알았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이 보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복음의 전파에만 매달려서 일생을 살았으니 인간이 누리는 부귀와 영화보다도 복음의 가치의 더 귀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았으며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당시의 로마인, 야만인, 노예들 그리고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나 큰 사랑을 가지고 모든 박해와 고난을 극복하며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2. 로마의 성장의 원인: 일반적인 요인을 설명함
1) 영웅적인 정치 지도자와 군사전략가의 등장: 포에니 전투에서, 악티움 전투에서 케이사르와
아우구스티누스 트라야누스 등의 활약
(1) 중요전투와 장수, 영웅적인 지도자, 왕들
여기에서는 중요전투로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포에니 전투와 전제왕권의 수립을 가능케 한 악티움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성경과 직접 관계가 있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티누스, 티베리우스, 그리고 네로 황제 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A) 포에니 전투
1- 3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카르타고의 멸망: 기원전 3세기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정복한 로마는 지중해로 진출해 카르타고 제국과 충돌했다. 1차 전쟁은 기원전 264년 전략 요충지였던 코르시카 섬과 시칠리아 섬의 통제권 때문에 일어났다. 결국 카르타고는 항복하고, 시칠리아와 아이올리아 제도를 로마에 넘겨주었다. 2차 전쟁은 7년에 걸쳐 길에 이어졌는데, 한니발의 선전으로 중반까지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 로마의 스키피오 등에게 패하고 지중해에 있는 섬들과 스페인을 로마에 넘겨주었다. 두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사실상 힘을 잃었다. 로마는 마지막으로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파괴함으로써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해 세계 제국으로 발전했다.(백과사전)
B) 악티움 전투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로마의 제2차 삼두 정부가 붕괴된 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에 벌어진 전투(BC 31. 9. 2).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아카르나니아 북쪽 갑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로마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배 500척과 보병 7만 명을 거느린 안토니우스는 악티움에 진을 쳤다. 400척의 배와 8만 명의 보병을 거느린 옥타비아누스는 북쪽에서 악티움에 도착하여, 안토니우스가 펠로폰네소스 해협을 통해 남쪽의 이집트와 연락하는 것을 차단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맹세력의 일부가 전쟁터에서 빠져나가고 보급품도 모자랐기 때문에 작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육지에서 맛본 패배를 바다에서 설욕하고 싶어서였는지, 그저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는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충고를 받아들여 함대를 동원했다. 그는 배들을 이끌고 서쪽을 향해 만을 빠져나갔고, 클레오파트라의 소함대는 그를 뒤따랐다. 이어서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다. 양쪽 함대는 서로 측면으로 돌아가 적을 포위하려고 애썼다. 이윽고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 갤리선을 이끌고 달아났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몇 척의 배만 클레오파트라를 뒤따랐다. 나머지 함대는 사기를 잃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으며, 안토니우스의 육군도 1주일 뒤에 항복했다. (백과사전)
C) 카이사르: 가이사(마22:21)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틴어: Gaius Iulius Caesar, 영어: Gaius Julius Caesar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 기원전 100년 7월 12일 ~ 기원전 44년 3월 15일)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 장군, 작가이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카이사르의 시대(100-44) 갈리아를 정복했으며(BC 58~50), BC 49~46년의 내전에서 승리해 딕타토르(독재관)가 된 뒤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도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백과사전)
이 카이사르가 예수님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와서 세금을 로마에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 물을 때 동전을 가져 오라고 해서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물었을 때 그들이 대답한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마22:15-22)의 바로 그 가이사가 카이사르입니다. 그 때의 동전을 보겠습니다.
D) 아우구스티누스: 가이사 아구스도(눅2:1)
아우구스투스(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7년 ~ 서기 14년)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계속되는 변방에서의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의 내전(기원후 69년)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 업적록》로 불리며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서기 14년 그가 죽은 직후, 원로원과 민회는 아우구스투스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의 숭배를 받았다.[5]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이 그의 황제명인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를 이름으로 썼다.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그의 황위는 의붓아들이자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백과 사전)
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 누가복음 2장 1절의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의 아구스도 입니다. 동전을 통해서 2천년 전의 아구스도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E) 티베리우스 황제: (디베료 눅3:1)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기원전 42년 11월 16일 ~ 37년 3월 16일)는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아구구스투스의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였던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아들이다.(백과사전)
티베리우스 황제는 성경 눅가 복음 3장 1절에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에서 디베료에 해당합니다.
F) 클라우디우스: (사도행전 18장 1-2절)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기원전 10년 8월 1일 - 54년 10월 13일)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칼리굴라 황제의 친삼촌이기도 하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속한다. 클라우디우스 1세(41~54 재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튼을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제도를 개혁했다. [아굴라, 브리스 길라 행18:2 유대인 로마 추방 명령: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아굴라)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가매)] 성경 사도행전 18장 1-2절에 글라우디우스의 내용이 위와 같이 있습니다. 이 황제는 기원후 41년에서 54년까지 재위에 있었는데 로마의 시민권자인 바울은 이 시대에 직접 살았던 분으로서 로마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G) 네로 황제
네로(Nero)는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 재위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 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 조카가 된다.
흔히 네로 황제라고 하면 정신 이상자나 폭군을 연상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문화는 융성하였다. 네로는 자신을 예술가의 지도자로 생각하여 시, 노래, 건축 등 예술을 지원했는데, 지금도 네로 시대 당시 지어진 화려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가 폭군으로 낙인찍힌 것은 로마 대화재 당시 민심 수습책으로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기독교도를 대학살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원한을 산 이유가 크다.(위키 백과사전)
네로의 모습도 동전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목이 두텁고 볼에 살이 많아 보입니다.
네로 황제는 재위 기간이 기원후 54-68년 동안입니다. 바울사도께서 로마서를 보낼 때가 약 57년경 이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네로 황제가 재위 3년이 되는 해이고 또 64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보다는 약 7년이 앞서는 해 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공부할 로마서는 네로황제가 통치할 때 당시 로마에 있던 크리스천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따라서 네로와 당시의 로마를 연구하는 것이 당시의 로마에 있던 성도의 삶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이는 로마서의 이해를 도울 줄로 믿습니다. 아울러 바울의 로마서를 읽으면서 또 사도 바울이 로마에 직접 가셔서 복음을 전하며 성도들을 격려하며 자신도 순교를 당했다고 하니 이 시대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곧 로마서의 연구로 직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바울사도와 같이 당시의 로마로 돌아가서 고난을 받는 성도를 사랑하면서 편지를 쓰신 바울 사도의 마음을 가지고 로마와 로마서를 보아야 하고 이와 함께 이 시대에 로마의 박해와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동족 북한의 갇힌 형제를 품고서 그들의 석방과 자유로운 신앙생활의 확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또 지금의 위정자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의 삶도 늘 그들을 생각하면서 절제를 해야 될 것입니다. 아래 지도는 로마제국의 여행에 걸리는 시간과 당시의 대도시와 인구 분포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시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줍니다.
F) 트라야누스: 재위 98년 1월 27일–117년 8월 8일
트라이아누스(Traianus)는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7일)이다. 오현제 중 한 사람이며, 속주 출신자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에 올랐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황제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 히스파니아[1]의 이탈리카 태생이다. 대(對) 게르만족 최전선인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을 맡고 있었던 그는 97년에 네르바 황제의 양아들이 되어, 98년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네르바 황제가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입양한 이유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으로, 유능한 트라야누스가 제국을 경영하도록 하는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트라야누스 치세의 교회사를 미주한인크리스천신문에 기고한 한평우 목사에 따르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네르바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으로, 탁월한 황제로 인정을 받았다(위키 백과사전) 박해와 관련된 황제
이상에서 로마의 성장에 큰 영향을 키친 사람과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로마의 황제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도표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백과사전 참고해서 편성함
2) 정치제도의 우수성: 공화정과 로마법 대전
(1) 공화정과 민주정의 도입
공화(共和)라는 말은 중국 주나라 려왕이 폭군이어서 제후들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폭군이 축출되자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여러 제후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다스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공화정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귀족정치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로마 공화정은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고 실행되었다. 원로원 출신 중 집정관 2명을 대표로 선출했으며 임기는 1년으로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야 선출이 가능했다. 원로원은 지금의 국회와 비슷하지만 국회의원처럼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게 아니라 원로원들의 지지를 받아야 선출되었고, 초기에는 귀족만이 원로원이 될 수 있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평민도 원로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다음 백과사전)
로마 원로원(senate) (다음 백과사전)
공화정의 성립
로마는 기원전 8세기 중엽에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하였다. 왕정 후기에는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전 6세기 초에 로마 귀족들이 에트루리아의 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시작하였다.
로마의 공화정은 원로원과 집정관, 민회가 정치를 운영하는 체제였다. 공화정 초기에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에 불만을 가진 평민들이 성산으로 철수하면서 로마 사회는 내분에 직면하였다. 평민들의 계속된 ‘신분 투쟁’으로 귀족들은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 12표법, 리키니우스 법, 호르텐시우스 법 등이 제정되었다. 결국 기원전 3세기에 평민들은 형식상 귀족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로마는 공화정이 발전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기원전3세기 중엽 로마가 지중해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자 서부 지중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와 충돌하였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포에니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또한 동부 지중해에서도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지중해 세계의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 로마 공화정의 운영 체제
호민관
로마 공화정 시대 평민의 권리를 옹호하던 관직이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되어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정무관이나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다. 임기는 1년이고 합의제로 운영되었으며 그 신체와 생명은 불가침이었다. 호민관의 권한과 기능은 평민 세력의 신장과 더불어 강화되었다.
12표법
기원전 450년에 제정된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당시 중장 보병으로 참여한 평민들의 발언권 신장과 관련하여 평민의 권리를 법률로 보호하는 것이 12표법이다. 이 법은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된 시민법으로, 그 뒤 로마의 팽창에 따라 속주민에게도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발전하였다.
호르텐시우스 법
기원전 287년, 호민관인 호르텐시우스가 제안하여 통과시킨 고대 로마의 법률이다. 이전까지 로마에는 전체 시민의 민회와 귀족만을 위한 민회가 있었고, 일반 시민은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 호르텐시우스 법에 따라 평민 회의의 결정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모든 시민에 대하여 구속력을 가졌다. 이 법으로 공화정 시기에 계속 대립해 온 귀족과 평민 사이의 신분 투쟁이 법제상으로 종결되었다.
* 포에니 전쟁(로마-카르타고 전쟁, 기원전 264~기원전 146) : 지중해의 해상권을 둘러싸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켰다.(다음 백과사전)
국가의 형태는 주권 즉 국가의 최고의 통치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군주국가와 공화국가로 나누고 통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독재정체와 민주정체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사사만 있던 시절에 백성이 왕을 요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통치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제사장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던 통치조직을 갖추고 있었는데 백성이 왕의 통치를 요구하며 왕을 세우게 해 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를 반대하시며 왕을 세우면 왕이 독재를 해서 백성에게 지우는 각종 부역과 의무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며 왕을 세우지 못하도록 권유를 했으나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는 것을 눈에 보이는 왕으로 싸우게 하자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끝까지 왕을 요구하게 되고 바울을 왕으로 세움을 필두로 선왕 다윗의 통치가 끝나자 그의 아들 솔로몬 대를 거쳐서 왕국이 분열이 되고 악한 왕들이 많이 등장하자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만류에도 순종하지 않고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치가 독재이고 또 주권이 인간에게 있는 통치제도입니다. 현대의 모든 나라는 민주정과 공화정을 표방을 합니다. 그래서 독재가 없는 것 같지만 법은 헌법과 각종 법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이 법위에 독재자가 있는 경우에는 독재 국가가 됩니다. 그러한 나라는 인간의 존엄이 말살되고 개인의 욕망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기에 악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고 이런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약 200년의 왕정의 시대가 끝나고 공화정을 도입했고 절차적으로 민주적인 절차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황제권이 완전히 확립되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까지엔 왕이라도 비교적 검소하고 독재권의 행사가 많이 제한이 되었고 왕도 통치를 독단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역사적으로 봅니다. 이러한 통치조직과 방법은 당시의 군주제도의 하에서 참으로 보기가 어려운 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살펴보아도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까지 왕이 있었고 세습이 되었으며 각종 법이 있었지만 지금과 비교를 해 볼 때 왕의 권력은 참으로 컸고 왕이 횡포를 행하면 국가는 파탄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해 보아야 하는데 당시에 살던 모든 사람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꼭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약 100년 전까지 양반이 존재 했고 노비가 있었으며 사람의 신분이 양반, 평민, 천민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을 알아야 하며 평민과 천민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 노비의 난이나 천민의 난리 일어났고 삶이 어려우면 나라를 떠나서 국경주변의 연변이나 블라디 보스톡을 이주를 해서 살았던 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인간의 생명에 대한 귀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참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면 저 같은 무지하고 출세하고 싶었던 인간은 죽을 때 까지도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죽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죄로 물든 인간이고 이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는 결코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와 조직이 개인과 조직의 이기심에 따라서 다스려지기에 때로는 심한 불평등을 가져오고 또 갈등을 야기 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믿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나라로서 섬기는 자가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바울의 이 나라를 잘 알아서 천국에서 높아지고자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종이 되어 이 나라를 세상에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도 포기하고 특권도 포기하고 부귀와 영화도 포기하고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우월성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고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집단이 있는데 역사를 잘 살펴보시면 이런 조직과 나라와 통치자는 반드시 벌을 받았습니다. 믿는 이는 이 땅에 속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이 땅의 나라의 법과 의무를 준수하면서 또 이 이상으로 이 땅의 이웃을 품고서 사랑하며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려고 온갖 어려움을 참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법에도 저축됨이 없고 이 법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법도 잘 준수해서 세상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약한 자를 사랑으로 보호하며 또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사람들이 속한 세상의 나라를 축복하셔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 나라가 부강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로마는 당시의 어느 나라보다도 인권의 보호가 앞선 나라였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제도도 황제권이 확립되고 독재로 많은 국민과 많은 노예의 삶이 어렵게 되고 또 기독교인을 지속적으로 박해하면서 망해가게 되었습니다.
현 한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하의 부의 불균형과 이로 인한 많은 사람이 집도 없이 직장도 잘 가지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보면 너무나 잘못된 현실입니다. 그리고 삶이 어려워 하루에 40명이 자살하는 것은 참으로 이 민족이 복을 받기에 어렵게 되어 있고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선을 행하며 본을 보여야 하는 목자가 세상에서 욕을 먹으면서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이 나라의 운명이 참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반드시 작은 나라 많은 인구가 사는 우리나라에서 집을 너무나 크게 가지고 땅을 홀로 너무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적당한 집과 땅을 가지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부자들에게 과거에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대로 너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하실 것입니다. 부에 대해서는 과거에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재산이 10억이면 이미 세계적인 부자입니다. 100억이면 한 달에 400만원씩 500년을 벌어야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큰 재산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10억이 넘는 곳이 너무나 많고 믿는 이도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다 세계적인 부자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가난한 사람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더 벌고자 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습니다. 가난한 교우를 배려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부자는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데 제 말이 아니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믿는 우리의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의 성장과 멸망에 대해서 너무나 세부적으로 많은 책의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설명을 하지만 멸망과 융성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렸고 하나님의 뜻에 합하면 융성이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멸망입니다. 개인도 국가도 집단도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 같아도 죄가 많아지면 틀림없이 멸망하게 되어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안위와 행복과 번영을 진실로 원한다면 내 자신이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자신과 집단과 국가의 왕으로 인정하고 살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우선 여기까지 올리고 다음 시간에 로마법 대전으로 부터 시작해서 남은 부분을 설명하겟습니다. 고시공부를 했다고 했으나 천지의 창조자 이시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몰랐다면 저는 여전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다 고 하면서도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여전히 저는 제 머리로 학문을 하고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복음을 전할 마음도 별로 없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셔서 깨달음을 넉넉히 넘치게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이런 글을 올리고 있으니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받는 복이니 저를 사랑하는 목자와 모든 교우의 기도와 사랑 덕분임을 고백하며 여전히 저는 평범한 그리고 모든 면에서 보통 사람보다 못한 삶을 사는 인간임을 고백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교회와 저를 도우고 기도해 주시는 분들과 좋은 모든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제 부족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고 이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에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긴 글을 어렵게 읽으시는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히 임하길 기도드리며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잠깐 만이라도 기도해 주시길 또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2) 로마법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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