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슬퍼하고, 울고 싶으면 울어라.”
누군가 미운 사람도 사랑하라는데 잘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미우면 미워하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 미워하지는 말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렇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액면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지성소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셨습니다. 먼 곳에서부터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 찾아온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필요한 짐승, 나무,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성전인지 시장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단히 분노하셨습니다. 즉시 돈을 바꿔주고 있던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팔고 있던 사람들의 의자를 엎어 버리셨습니다. 장사하는 모든 사람을 성전 밖으로 쫓아버리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까지 만들어 휘두르셨습니다. 양과 소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붙이셨습니다.
환전을 위해서 쌓아두었던 돈은 땅에 쏟아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한 돈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성전의 상업화,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를 중단시키셨습니다. 사실 성전에서 제사에 사용되는 용품을 사고파는 행위는 제사장들이 도입했습니다. 상인들에게는 막대한 임대료를 받고 장사할 자리를 나눠주었습니다. 상인들의 거의 대다수는 서로 믿고 이익을 나눌 수 있는 직계 가족이나 친인척들로 구성했습니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상행위의 규모는 그들의 권장과 묵인하에 하루가 다르게 커졌습니다.
특히 명절은 천문학적인 물질을 확보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이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었던 유월절은 대목 중에서도 대목이었습니다. 유명한 유대 역사 학자Flavius 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65년경에는 무려 약 30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의 수용 능력과 도시 규모를 고려할 때 평소보다 서너 배 정도에 해당하는 이삼십 만 명 정도가 몰려들었다는 현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아무튼 엄청난 순례자의 방문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과 주변의 언덕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동시에, 제물의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환전 수수료 역시 터무니없이 올랐습니다. 온갖 이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었던 종교 장사치들은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산해진미로 가득 찬 잔치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벌여도 줄어든 티가 전혀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능을 잃어버린 성전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천문학적인 자금줄을 잃어버리게 된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이 당신의 행위를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절대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으면서도,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엄청난 고난으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으면서도 감추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한 자기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장사꾼들이 득실거리는 더러운 소굴로 변질시켜 버린 탐욕스럽고 불신앙적이며 우상 숭배적인 행위에 대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터뜨리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서 냄새가 나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적인 신앙에 분노하셨습니다. 행위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던 탐욕과 권력을 추구하기에 바쁜 종교 권력에 대하여 분노를 터뜨리셨습니다. 사람을 위한 선한 일을 위해 제정된 거룩한 안식일을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날 정도로 변질시킨 종교 권력의 완악함πωρώσει에 분노하셨습니다. 주일은 단순히 지키기 위한 날이 아닙니다. 빠지면 안 되는 날이 아닙니다. 힘에 지나도록 희생만 하고, 봉사만 하고, 헌신만 하는 날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 없는 나는 존재 의미가 없다고 인정하는 날입니다. 무無, 공空, 허무虛無에 불과해 보이는 나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줄 수 없는 위로와 격려를 받는 날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고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온갖 종류의 고난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살아내고 마침내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힘으로 무장하는 날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교회가 주지 못하는 은혜를 만끽해야 하는 날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역시 힘겨운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내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와 힘을 주어야 함에도 무거운 짐만 어깨에 지워주는 것은 물론 심지어 도움을 주어야 할 취약 계층에 대한 착취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교회 권력에 대하여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간과하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눅23:32a)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노를 터뜨리신 목적은 단순히 미운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와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병든 영혼들을 돌이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노를 거룩한 반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장 찾아갈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이틀이나 지체하셨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울고 있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잠시 후에 나사로를 살리실 것임에도 먼저 그들의 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함께 우셨습니다.
결국 괜찮아질 테니까 울지 말라고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슬픈 일 앞에서는 우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씀이라도 하시려는 듯 같이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라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사방에서 조여오는 슬픔이 완전히 에워싸이셨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압도되셨습니다. 생명, 자아, 존재 전체, 가장 깊은 내면 등을 상징하는 영혼이 완벽하게 짓눌리셨습니다. 제아무리 몸부림을 친다고 할지라도 빠져나갈 틈을 찾을 수 없으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다.”(마26:38a)”라고 고백하셨습니다.
“내 영혼이 죽을 만큼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존재 전체가 견디기 힘든 고통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생명이 완전히 꺼져가는 수준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극도의 영적 짓눌림을 받고 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인류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는 고통, 하나님 진노의 잔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고통,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 가장 거룩한 존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죄의 무게를 마주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얼마나 힘겨운지 흐르는 땀이 핏방울처럼 변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울 때는 두려워하셨습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워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는 누구보다 크게 절규하셨습니다. 아플 때는 아파하셨습니다. 슬플 때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격하게 울기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숨겨 두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비록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당신의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서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다만, 견디기 힘든 순간에도 아주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만큼은 절대로 잃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역시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롬12:15b)라고 외쳤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당장 슬픔을 교정하려고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가당치도 않은 말을 꺼내지도 말고,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도 말고, 강해지라고 권면하지도 말고, 먼저 함께 슬퍼하라고 외쳤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라고 외쳤습니다. 아직 기댈 데가 남아 있기 때문에 희망을 품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아프면 아파해도 됩니다. 슬프면 슬퍼해도 됩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어도 됩니다. 얼마든지 그래도 됩니다. 다만,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오래 머물러 있지는 말아야 합니다. 슬퍼하되 아주 절망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괴로워하되 완전히 버려졌다고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절규하되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견디기 힘든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희망만큼은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힘들어도 웃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슬퍼하면 약하다고 말합니다. 아프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의심을 말해도 그렇습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우주의 기운을 끌어들일 수 있고, 묶여 있는 매듭을 풀 수 있고, 모든 일이 다 잘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감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립니다. 괜찮아 보이던 사람들이, 아니 괜찮은 척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속절없이 무너져 버리는 이유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한편, 성경은 강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으로부터 일어나는 울음, 분노, 억울함, 외로움, 절망, 의심, 질문, 거절 등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털어놓고 해결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시인דָּוִד(다비드)은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여! 언제까지 나를 잊고 계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숨어 계실 것입니까? 언제까지 내가 걱정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가 날마다 슬퍼해야 됩니까? 언제까지 원수가 나를 보고 우쭐대게 하실 것입니까?”(시13:1-2)라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마치 불신앙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있는 사람만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따질 수 있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힘들 때 괜찮은 척할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좋은 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솔직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고 칭찬까지 해주는 멋진 말이 아니라 진짜 속내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소유 전부를 잃어버린 그אִיּוֹב(이요브)는 “내가 태어났던 그날이 없었더라면, 아들을 가졌다고 말하던 그 밤이 없었더라면! 어둠과 그늘이 그날을 삼켜 버리고, 구름이 그날을 덮어 버리고, 흑암이 그날을 덮쳤더라면, 그날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며, 일 년 중 그날이 없었더라면, 어느 달에도 그날이 없었더라면. 그 밤의 새벽별이 빛나지 않았더라면, 바라던 빛도 없고, 새벽 햇살도 보이지 않았더라면, 나를 낳던 어머니 자궁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머니 배에서 죽어 나왔더라면, 나오자마자 죽었더라면”(욥3:3, 5-6, 9-10a, 11)이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하셨던 사람이 쏟아냈다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은 외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도 우울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지칠 수 있습니다.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저주처럼 들리는 말을 쏟아놓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도 공감해 주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렇다고 정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공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너무나 쉽게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 보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릅니다. “제 눈에서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릅니다. 제 눈물이 그치지 않고 쉼 없이 흐릅니다.”(애3:48b-49)라는 증거에 따르면, 선지자יִרְמְיָהוּ(예레미야후)는 미리 본 나라와 민족의 멸망 앞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울었습니다. 눈이 짓무를 정도로 울었습니다. 선지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슬픔을 마음에 담아두거나 억누르지 않고 계속 울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여호와께 따져 물은 사람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사람을,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또 울었던 사람을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따라야 할 믿음의 조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다.”(사42:3)라는 증거대로, 여호와께서는 상한 갈대같이 연약한 당신 백성을 아주 꺾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 같은 당신 백성을 아주 꺼버리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연약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느냐며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아주 꺾이지 않도록 붙들어주십니다. 아주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노심초사하며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 앞에서만큼은 제발 안 그런 척하지 말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도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따져 묻더라도, 생일을 저주하더라도, 울고 또 울더라도 당신을 떠나지는 말라고 다독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지치면 지쳤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오히려 붙들어주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