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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좋은 환경과 조건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 당장은 조금 불편하고 어려울 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선택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선택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백화점 세일 기간에 쇼핑을 나선 한 부부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쏙 드는 옷 두 벌을 골랐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 그들은 서로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좋다고 말하다 옥신각신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들은 결국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끝없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선택은 어떤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 때문에 하나를 버리지 못한 채 망설인다면 결국 모두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중 하나만을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버릴 줄 아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과 관계된 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다른 모든 우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웨인 코데이로(W. Cordeiro)는 "성공을 끌어당기는 자세들"이라는 책을 통해 "당신이 저주를 찾고 있다면 저주가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시109:17절은 "저가 저주(詛呪)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그것이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손에 쥔 채 무엇을 버릴 것인지 결정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바르고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는 본문은 바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는 세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논리를 발전시켜 나가셨습니다. ① 먼저 생명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죽어 썩지 않고서는 결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② 또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전제 조건인 동시에 반드시 따라야할 제자도 이었습니다. ③ 또한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며 제자들의 선생이신 주님 역시 생명을 얻고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 법칙과 제자도의 법칙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따라야할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마음 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주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27a절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여기서 "민망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랏소"(taras'so)는 "자극하다, 선동하다, 불안하게 하다, 휘젓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완료 수동 직설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큰 불안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이때 매우 격렬해졌다는 말입니다. 임박한 죽음의 공포가 전에 없이 크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 새 번역은 본문을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라고 해석합니다. 주님은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로 인해 심히 괴로우셨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종잡을 수 없으셨습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절박한 현실과 맞닥뜨리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셨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앞으로 당하게 될 육신의 고통 때문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이 반역할 것 때문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줄곧 성령으로 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있으면 그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하실 것입니다. 아들의 어깨 위에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우실 것입니다. 당신의 공의에 따라 그야말로 철저히 저주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죽음의 깊은 절망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사실 순교자들은 무서운 고통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아버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견딜 수 없어 하시는 고통은 바로 이것, 아버지와의 단절입니다.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의 자신의 형편을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b-4)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던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처참한 고통에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 역시 보통 일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 관계에 실패한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에게도 아버지 하나님의 외면과 단절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요, 상처요, 슬픔이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철저한 단절로 인한 충격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의 시선은 절박한 현실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모를 만큼 견디기 어려웠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십니다. 27b-28a절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표준 새 번역은 이를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프레드 크레독은 "아니, 저는 예외라고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이 잔을 마시고야 말겠어요."라고 주석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단절된 채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담당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단절된 채 죽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바로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공관 복음과는 사뭇 다른 주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 내용을 마태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42)라고, 마가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라고, 또 누가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盞)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묘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상당한 심리적인 갈등을 겪으신 후 십자가를 지기로 결정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은 그런 갈등을 전혀 묘사하지 않은 채, 오히려 적극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 아버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주님은, 그것을 통해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죽음의 절망에서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충분히 알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 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적극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평안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관복음의 묘사가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끔찍한 죽음을 앞두고 어느 정도 고민하셨으리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공관복음의 내용을 언급한 것은 그것의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소원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 구원이라는 대의를 위해 스스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렵고 힘든 순간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어떤 선택을 하십니까? 왜,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선택하고 있습니까? 그 선택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입니까? 한 알의 밀 알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입니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일지라도, 죽음까지 생각해야할 정도로 어려운 순간일지라도 절대 하나님을 향한 시선만큼은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몸부림치십시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돌아보십시오.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아버지의 영광에 집중하는 아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28b-29절입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아들이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과 말씀에 기름 부으심으로 스스로 영광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께만 집중하시는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당신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역사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기름 부어주심으로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신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저하거나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별력 없고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는 우리의 모든 행위에 기름 부어 주심으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여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엉뚱한 길로 들어서 있다할 지라도, 그것까지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위대한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레 소리 같다고, 다른 사람들은 천사의 소리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두운 심령을 가진 영혼은 결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난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30-3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롬5:18-19절은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임한 것처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온 인류가 죄에서 용서받고 죽음과 저주와 심판에서 구원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중에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예수께로 이끌림 받은 모든 영혼들은 각종 질병과 불안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원인인 세상 임금, 곧 사단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분연히 죽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그 죽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 장차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게 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죽음과 무관한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는 말씀을 통해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만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메시아가 죽어야 하느냐고, 인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34절입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여기서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스토스"(khristos')는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에 대하여 시110:4절은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班次)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祭司長)이라 하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제사장으로 세우시되 단지 오랫동안 제사장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은 전무후무합니다. 또 사9: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政事)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奇妙者)라, 모사(謀士)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永存)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아는 기묘한 모사(Wonderful counsellor)이십니다.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실 참된 지혜이십니다.
또 무엇이든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요,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안을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의 어깨에만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정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단7:13-14절은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人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인 동시에 사람 이상의 존재인 인자, 곧 메시아께 당신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시도록 위임하셨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에 계시된 바로 그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을 고통과 슬픔과 절망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로 믿고 따랐던 예수께서, 자기들의 모든 희망을 걸었던 예수께서 자신은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들은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부풀어올랐던 모든 희망과 기대가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어떤 공황상태가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속된 말로 눈이 뒤집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왜 메시아인 인자가 죽어야 하느냐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자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려지려고 하는, 곧 죽으려고 하는 당신은 누구냐고 외쳤던 것입니다. 35-36a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메시아이고, 사람의 아들인 인자는 "하늘 위에 계신 분, 영원하신 분,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아"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서 전체에 82번, 요한 복음에는 12번이 나오고 있는 그 말은 요12:34절을 제외하고는 예수께서 자신을 소개하실 때만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b)고 소개하셨습니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이시되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빛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본문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빛 자체이신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를 놓치지 말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참 빛이요, 인자이신 예수께서 유일하게 육신을 입고 계실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이 그들을 덮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고 두 번씩이나 역설(力說)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믿으라고, 믿어야 한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제까지 말씀하신 대로 며칠 지나면 자신이 한 알의 밀 알로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요, 인자가 담당해야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는 것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해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말았고, 그것을 인해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빛 자체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시고 영원히 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윤동주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서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길이 옳은 길이라고 한다면, 그 길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자신은 그 길을 반드시 걸어가고야 말겠다는 고백입니다. 지난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주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독일 나치와 사단 음악을 숭배하는 반 기독교 단체 트렌치코트 마피아에 속한 두 남학생 총기를 난사하여 12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캐시 버넬은 그들에 의해 무고히 죽임을 당한 학생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날 도서관에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던 캐시는 밖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책상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도서관으로 들어온 두 남학생은 입구 쪽에 있던 캐시를 발견하고 다가섰습니다. 그리곤 그녀의 머리에 총을 겨누며 대뜸 "너 하나님 믿지?"라고 물었습니다. 남학생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캐시는 당당히 "yes, I believe in God"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총성이 울렸고 캐시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캐시가 숨진 후 어머니가 쓴 "She said Yes"라는 책에 의하면, 캐시는 본래 문제아였습니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던 반항아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캐시를 억지로 컬럼바인 고등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거기서도 여러 가지 말썽을 피우던 캐시는 수련회에 참석해 큰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자신은 달라졌으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캐시 버넬은,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총부리 앞에서 잠시 믿음을 접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이생에서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결코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약 2천 5백 여명 십대 청소년들은 "yes, I believe in God"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 입고 플로리다 주의 한 도시로 모여 "yes!, I believe in God"을 외쳤고, 그것을 통해 마약에 찌들어있던 수많은 십대 청소년들의 양심을 깨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캐시는 믿음은 목숨걸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자신의 장래 사이에서 고민했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장래를 선택함으로 영원히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15:43절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고 말씀합니다.
당시로서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이 유대인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주님의 장례를 담당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까지 장례행렬에 끼어 듭니다. 바른 믿음의 선택이 곧 선한 영향력이 되어 현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른 믿음의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바른 선택의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따라야할 모범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일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마십시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위해 힘쓰십시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믿음의 선택을 하십시오. 그 선택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주셔서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기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 한 분께만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11: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