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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재앙 :
종기 (schechin,셔힌 שחין)
많은 분들이 영성이란게 뭐냐? 이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성경을 도대체 영성적으로 읽는다는게 무엇이냐?
영성이란 것은 영어로 spirituality 으로 , 이것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있다면은 영성적인 것의 반대말은 육적인 것이다. 라고 하고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건데, 육적인 것은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이란 것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육적인 것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또 그 안에 무언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영성을 생각하는 그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눈으로 볼수 있는 문자는 육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내 안에 생기는 울림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하나의 훈련, discipline(훈련, 수련) 인데, 그런식의 훈련을 하는 것을 영성 수련에 기본적인 틀이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만져보고, 맛볼 수 있는 것을 맛보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내가 인식하려는 것, 받아들이려는 것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보자! 이것이 영성 수련의 높은 목표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합니다.
특히 올려다 보면서,
영성 수련이 갖고 있는 마지막 목표지점인 나의 위치가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 예수님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할 때 신자들의 자리에서 위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가 된다면은 십자가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위에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성찰해 보는 것,
그것이 어떤 영성 수련에 마지막 생각할 수 있는,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가 되서 그 하느님과의 하나됨 안에서 세상과 나를 성찰해 보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아는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부님께서 강의 시간에서 처럼 말씀인 텍스트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것을 신학적인 접근이라고 합니다.
논리 우리가 갖고 있는 이성을 가지고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관해서 대답을 찾아보는 이것이 신학적을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의 체험이라던지 아니면 어떤 나눔 안에서던지 아니면 생활 안에서라던지 피정에 체험이라던지 이건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느낌으로 아는 것을 직관을 통해서 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insight,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나누고 있는 그와 같은 자녀들에 대한 사랑,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하. 지. 만. 알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구나! 나를 귀하게 생각하는 구나! 나에게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구나! 라는 것들을 우리가 느낌으로 서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이 언제나 옳을 까요? 틀릴까요? 옳을 때도 틀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직관만으로 의존한다면 그것도 역시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관, 신앙들과 반대의 성향인 신학, 논리적을 좀 따져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지 한번 점검해 보는 거랑 그 두가지는 균형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두 가지입니다.
하지만 누가 신학만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앙, 느낌, 직관 이런것은 믿을 수 없는 거야!' 라고 얘기한다면 그것도 역시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논리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친구와 우정을 나눌때, 배우자를 만날 때 아니면 어떤 가정안에서, 또는 교회안에서 사랑을 나눌때는 어떤 논리를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데,
어떤 과학자가 "사랑하는 것은 단지 몸 속에서 나오는 도파민의 작용에 불과해!" 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반대로 논리도 중요합니다. 보신분들도 있을텐데 "뷰티풀 마인드" 라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에요.
1950년대에 아주 중요한 게임 이론과 관련해 논문을 발표했는데, 결국 30~40 년 후에 노벨상을 받게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환영같은 보는 정신분열증을 앓게 됩니다. 그래서 존 내쉬에게는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다고 하니 정말 답답해 하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결국 이를 논리로 극복합니다.
그 영화를 보시게되면 40년 동안 나타나는 환영중에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늙지를 않는 것을 알고 자신은 그것을 분명히 보고 있지만은 그 아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논리로 극복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어떤 것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면서 직관,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지 논리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라는 사람들도 있고
예를 들면 루카 복음서에서 나오는
토마스 사도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말씀이 너무 잘못되게 해석이 되는 경우의 예입니다.
반대로 논리적을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지 그외의 다른 것은 믿지 않겠다. 라는 것도 역시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신부님과 함께 텍스트를 한줄 한줄 뜯어 읽어 가면서 이게 다, 전부라고 생각하시면은 그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텍스트를 이해하고 나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또 그것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 내 삶안에서 어떻게 체험되는지,
바로 그 궁극적인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을 향해서 내 자신을 열어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꼭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것이 신부님과 함께 일년 정도 함께 하시면 자동적으로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자체가 하나의 은총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을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깨어 기다리는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과 그 순간이 언제 될지 모르기에 깨어기다려야 한다고....
영성이라고 말하는 바로 궁극적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어 기다리는 태도", 영어로는 "Awareness" 그 깨어 있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깨어있음입니다.
그게 절대로 잠자지 마라!는 불면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어라!" 는 하느님께 집중하고 그런 하느님에 눈으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면서 성찰하는 그와 같은 삶의 태도일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깨. 어. 있. 는. 태. 도. 로...여섯째 재앙인
탈출 9,8-12 종기 (shechin, שחין 셔힌)
이야기를 읽어 보자고 하셨습니다.
한절 한절 읽어 가면서 깊이 있게 문장을 관찰하고 음미해 갑니다.
8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마에 있는 그을음을 두 손 가득히 쥐어라.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공중으로 뿌려라.
“ 가마의 그을음/화덕의 검댕”
(פיח כבשן)
그 앞에 있는 넷째, 다섯째 재앙일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미리 파라오에게 경고하는 의미에서 보냈습니다.
여섯째 재앙에는 그게 없었습니다. (표참조하시면, 3번째, 6번째, 9번째 재앙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1번째, 4번째, 7번째 재앙과 2번째, 5번째, 8번째 재앙은 같은 틀안에서
이것은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로 표현되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본래의 틀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면 모세가 아론에게 얘기하고, 아론이 그것을 파라오에게 전하는 틀인데,
여기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아론이 조금 승격한 모습입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뒤집히게 됩니다.
오경 전체에서 따져보더라도 야훼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탈출기에서 세 번, 민수기에서 두 번정도 등장할 뿐입니다.
야훼는 이렇게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8절 후반부에서 정작 야훼의 명령에 따라 재앙을 일으키는 주체로는 모세만 언급됩니다.( 모세가 그것을 파라오 앞에서 공중으로 뿌려라.)
아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조금은 섭섭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첫째 재앙와 셋째 재앙에서 모세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실제로 앞에선 모세가 명령을 내리고 실제론 아론이 지팡이를 들거나, 손을 뻗쳐서 했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었다는 사실과 여기서는 조금 대조됩니다. 정작 그것을 하는 것은 모세입니다. (어떻게 하냐면? 가마의 그을음, 즉 화덕의 검댕을 집어서 공중으로 뿌려라, 직역하면 하늘 방향으로 뿌려라)
하늘을 향해(השמימה)
9 그리하여 그것이 먼지가 되어 이집트 온 땅에 퍼져 나가, 이집트 온 땅에 있는 사람과 짐승에게 궤양을 일으키게 하는 종기가 되게 하여라."
여기서 야훼의 말씀은 모세에 의해서 뿌려진 그을음, 그 검댕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것이 잘 살아나 있지 않지만, 성경을 번역하는 관계 안에서 신자들이 읽기 편안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반대로 본문을 보면은 조금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이 먼지가 되어 이집트 온 땅에 퍼져 나가 이집트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궤양을 일으키는 종기가 되게 하여라. 라는 문장인데, 그것이 퍼져 나가서 땅위에 떨어지면 먼지가 되고(לאבק)
사람과 짐승 위에(על 알)떨어지면
종기를 일으켜라.(לשחין פדח אבעבעת) 는 뜻입니다.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작용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땅 위에서는 먼지가 될 것이고, 사람과 짐승 위에서는 궤양을 일으키는 종기가 될 것이다.
부종, 수포, 궤양 이러한 것들 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약간의 언어의 유희가 있습니다.
11 요술사들과 모든 이집트인에게 종기가 생겨, 요술사들도 종기 때문에 모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본래의 탈출 7,11.22; 8,3.14.15에 ( 탈출기I 내용참조)서 등장했던 그 요술사(החטמים,하르툼밈)들,
이집트 편에서 모세와 아론의 어떤 이적, 표징을 보여주면 같은 것을 하였는데( 물이→ 피로 변하고, 지팡이→뱀, 개구리떼 등장 들을 따라 하면서 이집트에 해로운 일들을 일어나게 하는데 따라하는 행동을 함)
같이 종기를 만들지도 못할 뿐더러 그 종기에 피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 이후부터는 요술사들이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요술사들에 대한 더이상의 언급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것과 비슷한 예수님께 "당신이 구원자라면 당신 자신이나 구해 보라지....", " 의사여, 너의 병이나 고쳐봐라."
약간은 능력에 관한 문제점을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는 있지만 , 자기 자신에게는 할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정작 은총의 수혜자가 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의사들 중에서 피부과 전문의인데, 자신도 피부병에 걸리는 경우,
사제들은 스스로를 고해 성사를 볼 수 없습니다.( 교회법의 경우: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두 명의 신부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두분이 공범으로 은행을 털었을 때, 둘이 서로 마주보면서 한 사람씩 고해 성사를 하여 사해주는 것은 안 됩니다.)
12 그러나 주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다.
탈출기에서 등장하는 세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직역으로 표현하자면,
1) 파라오의 심장을(את לב פרעה, 에트 레브 파라오(흐??))강하게 했다
2) 파라오의 심장을 무겁게 했다
3) 파라오의 심장을 단단하게 했다
그런데 우리 말 표현에서는 "강하게(חזק, 하자끄)했다"를 완고하게 했다로
"무겁게 했다" 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완강하게 했다로
아직은 단단하게 했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것은 흔히,
일반적으로 무겁고, 강하고, 단단한 것은 좋은 의미를 표현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좋지 않는 의미로서 하나의 역설적인 표현 방법입니다.
본래는 좋았던 것이 하나의 문맥 안에 와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아니면 의미가 바뀔때로
예전의 고교시절 신부님이 영어 공부하면서 영화를 보는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계속해서 "terrific!" 라고 합니다. 끔직하다, 겁나게 하다의 뜻인데 뜻이 한번 더 뒤바뀌는 의미인, '그거 겁나게 좋아!!~~' 로 쓰였습니다.
이 또한 언어의 유희적 의미도 포함됩니다. 본래는 단단하다, 강하다, 무겁다( 영광스럽다. 라는 의미도 있음).라고 하는 것이 여기 본문에서는 파라오가 야훼에게 대적하는,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 쓰이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생각해 볼 것들을 되짚어 본다면은,
종기를 의미하는 히브리말 단어는 shechin(셔힌)은 뜨겁다, 또는 열이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기/ 부스럼
º 레위 13장
피부병을 앓는 부정함에 대한 법적 판단을 내리는 13장에서 거의 매절 등장합니다.
º 신명 28장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에 대한 28,27에서
이집트의 종기(שחין מצרים, 셔힌 미츠라임)가 나오고
º 욥 2장
종기 때문에 고생했던 '욥'이 걸렸던 병은 아마도 "한센병"이 아닐까? 라고 하셨습니다.
º 이사 38장
이사 38장에서 보면은 히즈키야가 죽을 위험에 처한 질병에 걸리게 되는데 그것도 역시 종기와 관련된으로 추측해 볼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얘기하는 '종기'라는 것은 단순히 가려운 부스럼 정도가 아니라, 까닭 잘못하면은 죽을 수도 있는 두려운,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한 병명 중에 '탄저병'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탄저병이 여섯번 째 재앙과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주석학자들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탄저병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잘 안옮겨진다고 하는데, 울이나 가죽이나 털 제품 같은 경우를 통해서 인간에게 가장 쉽게 간염된다고 합니다.
동물 보호하시는 분들이 가죽 제품이나, 밍크 등을 입지말자고 하는데, 그에 합당한 과학적인 근거도 이렇게 있는 것 같습니다.
탄저병에 걸리면 처음에는 벌레에 물린것처럼 가려움 같은 것을 느끼고, 한 1~3cm 정도 가운데가 까만 염증같은게 생기는데, 그러면서 점점 주위에 부종이 생기고 치료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사망률이 20% 정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11절에서 요술사들이 모세앞에 서 있을 수가 없다는 표현에서,
탄저에 생기는 부종이 주로 무릎같은 곳에 많아서, 무릎이나 정강이에 생긴 부종으로 서 있을 수 없다고 얘기한 것으로 짐작하는 주석학자들도 있습니다.(신부님은 이 부분은 조금 오바했다고 생각하신다는 견해)
이집트에는 치료와 치유를 담당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치료와 치유의 신
º 세라피스(serapis)
º 임호텦(imhotep)
º 톹(toth)
이 신들이 있는데, 이 재앙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은 듯 합니다.
다신적 신관에서 본다면 야훼가 이 신들을 이겼다! 그 신들의 능력을 넘어 섰다!! 라는 이야기로 종기 이야기를 딱 하나로 떼어 놓고 본다면은
종기 이야기에 신학적 메시지를 알아 들을 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번 째 이야기로 우박이 등장합니다
탈출 9,13-35 : 우박(ברד, 바라드)
13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서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그에게 말하여라
"내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일곱번 째 재앙이니까 첫번 째와 네번 째, 일곱번 째가 같은 사이클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조금 다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라고 얘기하고 첫번 째와 네번 째에 나왔던 어떤 것이 빠져있습니다. "물가로" 가라는 얘기가 빠져있습니다.
왜? 없을까요?
다른 주석서들을 스무 권정도 찾아보셨는데, "물가로"라는 말이 빠진것에 대해서 왜? 라는 주석서는 한 권도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강의를 준비하시다가 새벽에 갑자기 드신 생각은....?
열가지 재앙은 크게 내용적으로 세 가지 틀로 나뉘어 집니다.
물에 관한 재앙, 땅에 관한 재앙, 하늘에 관한 재앙(공기에 관한)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앞선 여섯 재앙을 통해서 물에 관한 재앙은 끝나버렸습니다.(물이 피로 변하고, 그래서 개구리들이 올라오고) 따라서 물가로 가는 부분도 관심밖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라는 굉장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셔서 불현듯 드는 생각이셨다고....
14 이번에는 내가 온갖 재앙을 너 자신과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려,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이 없음을 네가 알게 하겠다.
이 구절부터 시작되는 야훼의 말씀은, 아홉 재앙 전체에 대해서 제일 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19절까지 계속됩니다. 따라서 야훼의 말씀이 깁니다.
또한 야훼의 말씀은 흑사병과 앞서 나온 가축병과 종기라는 극단적인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멸망하지 않은 신학적인 해설과 함께,
왜? 야훼가 이제부터 우박이라는 재앙을 선택했고, 또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야훼가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이제부터 19절까지 이어서 천천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온갖 재앙을" 이라고 얘기했는데 직역하자면, "모든 나의 재앙들을(את כל מגפתי)
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재밌는 것은 여기서 등장하는 "재앙(מגפת)이라는 히브리말 단어는 탈출기에서 이 부분에서 딱 한번 나옵니다.
다른 경우에는 표징, 기적, 이와 같은 단어들은 나오는데 재앙이라는 단어는 딱 여기 한번만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탈출기 이외의, 민수기에서는 9번 정도, 역사서와 예언문학에서도 간간히 사용지만, 그리고 이 재앙이라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와 같은 재앙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훼가 얘기한 "모든 재앙" 이라는 것은 첫번 째부터 마지막 열번 째까지를 다 이야기 할까요? 아니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일곱, 여덟, 아홉, 열번째 재앙을 얘기할까요?
그렇게 이 부분을 가지고 학자들의 의견이 나뉩니다.
그런데 다수의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모든 재앙"이라는 것이 열가지 재앙을 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 여덟, 아홉, 열번 째 재앙을 얘기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4절의 출발무렵의 말에
이번에는(בפעם הזאת)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그 네 재앙만을 지칭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습니다.
야훼는 이 재앙들을 14절; 너 자신과 너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내려,를 직역한다면,
너(파라오)의 심장에(אל לבך),
너희 신하들 안에, 백성들 안에 보낼 터인데, 조금 이상한게 하느님이 재앙을 보내면서 너의 심장에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자신"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땅에 야훼같은 이가 없음을 파라오가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재앙을 보내겠다..
파라오가 야훼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재앙의 목적은 이집트를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라오와 이집트가 야훼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땅에(בכל הארץ)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온 세상"이라고 그 부분을 번역을 했는데,
신부님도 이 부분은 그냥 단지 온 세상이라고 봐야될지 아니면은 온 이집트 땅이라고 보아야 할지에 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온 이집트"를 통틀어 이집트에 여러 신들이 있지만은 그 이집트의 어떤 신들 중에서 야훼같은 신은 없다는 것으로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설명하셨습니다.
15 진작 나는 손을 내뻗어 너와 너의 백성을 흑사병으로 쳐서,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버릴 수도 있었다.
16 그렇지만 나는 까닭이 있어 너를 살려 두었다. 너에게 내 능력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도 또 한번 "온 세상" 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15, 16절에서 야훼는 자신을 큰 권능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이 아직까지 파라오의 이집트를 멸절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합니다.
당장 손을 뻗어 흑사병으로 파라오와 그의 백성을 쳐서 그 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만, 하지만 파라오에게 자신의 힘을 보게 하고 그리고 모든 땅에, 아마도 온 이집트 땅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야훼의 논거이다.
그런데 흑사병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미 가축병에서 흑사병(דבר 데베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흑사병에 대해서 언급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없었던 것처럼 따라서 네번 째 재앙 이야기를 모르는 것 처럼 서술되어 있다.라는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네번 째 재앙은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열가지 재앙이야기들은 본래부터 다 함께 조직적으로 쓰여진게 아닌 듯 합니다.
그 사이사이에 보면은 문학적인 긴장과 균열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안해야 하고, 또 우리가 다양한 옛 전승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7 그런데 너는 계속 내 백성을 거만하게 대하면서, 그들을 내보내려 하지 않는다
여기서 "거만하게 대한다(מסתולל 미스톨렐)라는 것은 히브리말 동사를 둘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 본래의 뜻은 '세우다" 또는 '드높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자신을 세우고, 드높이고 거만하게 처신하는 뜻으로 해석한다.
반대로 이것을 실제적으로 자신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어딘가로 이집트를 나가려는 것을 막아서는 그와 같은 하나에 그림같은, 회화적인 표현으로도 거만하게 대한다. 라는 동사에 숨어있는 다른 의미를 알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18 그러므로 나는 내일 이 시간에, 이집트가 생긴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엄청난 우박을 쏟아붓겠다.
계속해서 내일, 내일,이 앞에서도 등장했고 지금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내일" 조금더 구체적인 내일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
내일 이 시간 즈음( כעת מחר)이 뭔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엄청난 우박을, 여기서 또 언어의 유희로 "엄청난 우박을" 인데 직역하면,
"매우 무거운 우박을(ברד כבד מאד)입니다. 이것은,
파라오의 심장이 무겁다. 라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우박은 이집트라는 국가가 수립된 날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첫번 째 표현입니다) ,
다음 재앙에서 이 표현이 이집트 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또 그 다음 재앙으로 넘어가면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던, 이런식의 표현으로 점점점 시간적으로 틀이 확장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집트가 생긴 이래로......이집트 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던, 으로의 확장
19 그러니 이제 사람을 보내어 너의 집짐승과 들에 있는
너의 모든 것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라.
미처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들에 남은 사람이나 짐승은, 모두 우박에 맞아 죽을 것이다.' "
이상한게 재앙을 확실히 주시는게 아니라, 야훼의 어떤 배려와 자비가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흐름에서 본다면 조금 생소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목이 15절, 16절에 나타난, 야훼의 진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야훼가 뜻하는 것은 이집트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이름이 알려 지고, 그리고 이집트가 야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이렇게 모세를 향한 야훼의 말씀은 마무리되고, 이제 이 말씀을 모세는 파라오에게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20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한 자들은
제 종들과 집짐승들을 재빨리 집 안으로 피신시켰다.
이상하죠? 모세가 파라오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과정하는 것입니다.(모세가 파라오에게 그 말씀을 전했다고 하자....그리고)
그것을 전하는데 신하들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떻게 한. 것. 이.죠???
( to be continued......!) 히브리어는 늘 최승정신부님 탈출기I 책에서 참조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