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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학교 졸업한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2년 만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질풍노도 같은 사춘기를 온갖 막일을 하며 힘겹게 보내야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된 첫 번째 직장생활은 지극히 평범했습니다. 신학을 졸업하고 개척한 교회는 불과 2년 만에 이천 명씩이나 모였습니다. 이후, 특별한 것 하나 없이 평범했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혜성같이 나타난 차세대 지도자라는 호평과 팬클럽이 생길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온갖 재능을 가진 인재들과 재력가들이 대거 합류했습니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기고만장했습니다. 마음에 욕심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전센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는 자기도취에 빠졌습니다.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오만방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멋진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교회 표어를 “와서 하나님을 즐기라Come and Enjoy God!”라고 정할 정도였습니다. 성공에 대한 야망을 이세들을 위한 교회라는 그럴듯한 비전으로 포장했습니다. 오직 복음이라는 그럴 듯한 표어 아래 감췄습니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 하나만 증거 하는 참된 목회자, 영적인 차원이 다른 목회자로 포장했습니다. 과시했습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무수히 많은 집회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한국 대형 교회들의 요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인교단 총회장의 총애를 받으며, 양아들까지 되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와 목회를 배우기 위해서 몰려드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운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때, 지역 근교의 동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즉시, 치유센터Healing center로 개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성도들에게 쉼과 함께 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면에서 볼 때는 지극히 선하게 보였습니다. 이면에는 치유 센터 운영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도 있겠다는 탐욕이 감춰져 있었습니다. 임대하는 과정에서 무리했습니다. 실수도 있었습니다. 땅주인과 법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최대, 최악의 금융 위기로 불리는 경제 위기Subprime Mortgage Crisis가 닥쳤습니다. 그때까지 이미 200만 불(현재 시세로 26억600만원) 이상을 지불한 상태였습니다. 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잡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금리의 은행 융자를 받아둔 상태였습니다. 관리비로만 매달 2만 불이 넘게 나왔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치유 센터는 은행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부도 처리와 함께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졸지에 완벽한 실패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까이 하던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하나둘 돌아섰습니다. 급기야 그로부터 아주 떠나버렸습니다.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사랑하던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습니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아니 상상할 이유가 없었던 오히려 절대로 자신의 몫은 아니라고 확신했었던 아픔과 상처와 비애가 마치 밀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다행히, 그는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었다는 너무나 소중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죄송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만 말고 끝까지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현재는 YWAM의 강사로서 자신의 실패를 자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불리는 모세Moses의 경우는 그와 달랐습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波瀾萬丈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완전히 실패한 상태에서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대대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포기하기가 너무나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에 은밀하게 숨겨진 상태에서 양육을 받았었지만, 결국 나일 강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목욕하던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최고의 교사들로부터 천문, 지리, 수학, 군사, 정치 등과 관련된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유모로 들어온 어머니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생활하면서도 히브리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포로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동족의 해방과 자유를 꿈꿨습니다.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동족을 돌아보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이집트 군사 하나가 동족을 마치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학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보다 젊은 혈기로 충만한 자신의 감정을 더 앞세웠습니다. 당장은 하나님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동족을 더 도와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직은 그 정도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더 망설이지 않고 이집트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모래 속 깊숙이 숨겼습니다. 다음날 또 거리로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동족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즉시 싸움에 개입했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동족을 왜 치는 것이냐고 나무랐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즉시 반발했습니다.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레 속에 은밀하게 숨겨놓더니 오늘은 자신까지도 쳐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살인자 주제에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재판장 노릇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냐고 따졌습니다. 그를 고발할 수도 있다는 속내까지 드러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실제로, 소식은 곧 바로에게 알려졌습니다. 사실, 바로는 그동안 그를 눈엣가시 같이 여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견고하게 쌓아올리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 곧 정적政敵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호시탐탐 제거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살인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범죄였습니다. 거기다 그가 죽인 사람은 용도가 다하게 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적인 문제로 불똥이 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어떤 쪽으로 기우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에게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경솔한 행동을 했었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였습니다. 바로는 소식을 들은 즉시 당장 그를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집트 구석구석을 이를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잡아서 끌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더 이상 이집트 땅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대로 무작정 달렸습니다. 미디안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신세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었던, 부족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명령만 내리면 필요가 완벽하게 채워지던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궁중의 생활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칠고, 메마르며, 황폐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4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 살아내야 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먼저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던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내야 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많이 후회했을까요? 얼마나 많이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날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까요? 새털같이 많은 날들을 경솔한 자신을 얼마나 많이 자책하며 지냈을까요?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고개를 쳐들고 올라오지는 않았을까요?
물론, 성경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히11:24-25)라고 증거 합니다. 이집트 사람에게 학대받고 있던 동족을 돕기 위해서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만천하에 드러냈다고 증거 합니다.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로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용도가 다하게 되면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도구 정도로 대우를 받고 있었던 동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겼다고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라고 이어지는 말씀에 따르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가 완전히 다른 시대에 당신을 세상에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모를 당했다고 증거 합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이는 “누구를 대신 파견하거나 천사를 보내지 않고 당신이 친히 오셔서 그들을 구하셨다...그들을 사랑하시고 가엾게 여기셨다. 건져내셨다.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그들을...안아주셨다.”(사63:9)라는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시대를 초월해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늘 동행하십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이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당연히 성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당하고 있었던 힘겨운 고난 속에도 함께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사도 역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라고 외쳤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성민 이스라엘이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나온 물을 마셨다고 외쳤습니다.
신령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족의 구원을 위한 모세의 자기 선언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이었습니다. 동족의 구원을 위한 모세의 자기 포기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포기였었습니다. 동족의 구원을 위한 모세의 고난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언제나, 늘, 항상 함께하십니다. 미숙한 감정과 판단과 행동까지도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이상은 어디까지나 그의 삶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는 저와 여러분 입장에서의 해석입니다. 어떤 의미나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완전히 폭삭 망해 버린 삶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의미도 있고, 가치도 있는 삶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모세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놀라운 은혜가 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완전한 판단 실수와 섣부른 행동을 통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힘겨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거칠게 불어오는 광야의 모래 바람과 몸을 아주 태워버릴 것 같이 뜨거운 태양과 살을 에이 다 못해서 칼로 긁는 것 같은 혹독한 추위와 이런 일들이 쉬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거친 음식을 먹으며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늘 허전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꿈꾸고 있었고 또 은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삶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제까지 힘들게 살아왔던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다시 한 번 더 반복되면서 흐르는 동안 지극히 무기력해졌습니다.
화려한 수사를 거침없이 쏟아놓을 정도로 달변가였지만, 이제는 마음에 떠오르는 작은 생각조차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어눌해졌습니다. 동족을 바로의 손으로부터 얼마든지 구원해 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었던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동족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 특별히 기록해 두어야할 내용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두루 배웠던 당대 최고의 지식은 물론 경솔했던 자아까지도 완벽하게 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고난을 기꺼이 자초하면서까지 간절하게 사모했었던 바로 그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동족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지도자로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철저하게 비워질 때까지 기다리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기까지는 얼마 동안의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절대 권세를 가진 바로에게 갈 수 있으며, 성민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꾸짖을 때도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보낼만한 자가 따로 있을 테니까 그를 찾아서 보내라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출4:14a)라는 증거에 따르면, 심지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실 때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셨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킵니다. 멸망을 당해도 마땅한 자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진노라기보다는 성민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려는 당신의 뜻을 헤아려보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거절부터 하는 모세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가리킵니다.
어떻게든 받아들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당신이 그가 자신을 완벽하게 비울 때까지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저와 여러분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하나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순간, 모세는 성민 이스라엘은 물론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당신의 전부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기꺼이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온 마음, 한 마음 곧 전심全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다.”(민12:3)라고 증거 합니다. “온유한ענו(아나우)”은 “괴로운, 가난한, 겸손한” 등의 뜻입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품이라기보다는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을 견디고 또 견디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시는 후천적인 성품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눈물을 곱씹으며 견뎌내야만 했었던 40년이라는 긴 세월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성격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40년의 세월을 그를 온유한 사람으로 다듬는 풀무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자아를 완전히 지우고, 온유한 현재의 자아로 거듭나기까지는 40년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온유한 성품을 갖기까지는 얼마동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거의 인생 후반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과연 가질 수 있는 성품이기는 할까요? 아무튼, 힘겨운 과정을 거쳐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로 거듭난 그는 이후 쉬지 않고 비방하고 도전하고 반역하며 대적하고 돌까지 던지는 백성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불완전한 감정은 철저히 내려놓았습니다. 특히, 행동하기 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허락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면 조금도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 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에게 사명으로 맡겨진 성민 이스라엘을 묵묵히 이끌었습니다. 온유함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위대한 삶을 살아냈습니다.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최적의 장소였던 느보산 곧 비스가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동서남북의 경계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비스가 산 정상에서 단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164km나 되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볼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에게 보여주셨다고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보여줄 수도 있고, 환상으로 보여줄 수도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나안 전경을 한 눈에 둘러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라.”(신34:4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600년 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되려는 순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신34:b)라고 이어집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요? 도대체 그는 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을까요? 아니 하나님께서 그의 가나안 땅 입성을 허락하실 수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원래부터 입성을 허락하지 않을 계획이었다면, 차라리 가나안 전경을 보여주지나 말지 굳이 볼 수 있도록 역사 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는 내내 수시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습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습관처럼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대적했습니다. 죽이려고 돌까지 던졌습니다. 반면, 모세는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잘 인도하게 위해서 전심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전심으로 충성했습니다. 누구를 들여보내야 할지 고민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결과는 보통 상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였습니다. 모세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이유를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두 가지로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는 율법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입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는 아예 상관없는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깨달아 알게 해주는 역할 만으로도 충분히 선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수고와 노력을 하거나 어떤 자격을 갖춘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거룩한 희생 안에서 선물로 허락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하나님께 “부디 저도 건너가게 해주십시오. 요단강 건너서 저 아름다운 땅, 저 풍요한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해주십시오.”(신3:25)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냉정하셨습니다. “너는...또다시 이 일로 나에게 간청하지 마라.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서쪽과 북쪽과 남쪽과 동쪽을 네 눈으로 둘러보아라(둘러보기만 해라). 너는 요단강을 건너가지는 못하리라.”(신3:26b-27)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이때 이후,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온전히 충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비한 능력으로 가나안 땅 동서남북을 모두 보여주시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곧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주어진 사명에 온전히 충성했습니다. 사명을 다 마친 다음에는, 허무할 정도로 조용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과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께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충성했습니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때 그의 나이 백이십 세였습니다. 눈이 흐리지도 않았습니다. 기력이 쇠하지도 않았습니다. 급사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사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처럼 보입니다.
죽기 직전까지 소름끼칠 정도로 지긋지긋한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뼛골이 빠졌는데,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마치 배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버리고 죽도록 순종했는데,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것 같은 백성들은 빠짐없이 들어갔는데, 정작 유일하게 자격을 갖춘 것 같은 그만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상황만을 근거로 쓰임이 다하자 얻은 것도 하나 없이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주장해도 달리 변명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성공보다 훨씬 멋진 실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실제로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참 선지자이며, 유일한 대제사장이며, 영원한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께서...산으로 올라가...기도하시는 동안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대화를 나눴다.”(눅9:28b-30)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던 산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림자인 자신을 통해서 선포되었던 율법이 본질本質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벽하게 성취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호흡이 있을 때만 지극히 제한적으로 누릴 수 있는 부와 명예와 권세와 자랑의 정도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여부를 결정하는 세상적인 척도에 따르면 완벽하게 실패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시적인 세계 전부를 통째로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아니 세상 성공은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진짜 성공적인 삶을 살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서도,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구차하게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조롱과 채찍질과 결박은 물론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였으며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였으며 (견디기 힘든)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던”(히11:35b-38) 수많은 무명의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 이후,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순교한 사도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마치 함께 모여 충분히 의논한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철저히 비웠습니다. 철저히 내려놓았습니다.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인생에서 실패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천문학적인 재물을 쌓아둔 교회에서는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세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며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공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공보다 훨씬 더 멋진 실패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런 교회를, 이런 목회자를, 이런 성도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할 이유도, 목적도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실패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패가 정답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부활의 여부에 대한 결정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긴 채 죽음을 자처하신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패 가운데 가장 두렵고 떨리는 실패를 자처하신, 실패를 당신에게 주어졌던 인생의 종착점으로 삼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공보다 훨씬 더 멋지고 위대한 실패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장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달픕니다.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때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Howard Kelly는 세계적인 의사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흠이 없는 거룩한 도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나 자신과 나의 시간과 나의 능력과 나의 열정 등 나의 모든 것을...드립니다. 제가 당신께 가까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세상의 어떤 성공도...허락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남아메리카 동북부의 한 지역The Guianas을 섬기기로 작정한 그Von Welz는 지위와 많은 재산을 포기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말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종에게는 귀족의 지위나 많은 재산이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겉치레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 바친 다음 떠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보다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 하나님 영광, 하나님 백성,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어두운 시대의 교회들에게 맡겨주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성공이라기보다는 완벽한 실패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거친 삶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복된 삶,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고는 절대로 살아낼 수 없는 삶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은 물론 세상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복된 삶,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질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울리는 복된 삶,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복된 삶, 무엇보다 그들을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복인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