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13) 율법에 내포된 사랑과 자유 (야고보서 1장 25절)
< 법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은 ‘온전한 율법과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이 부분을 보면 마음에 쏙 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묘한 뜻이 내포된 말씀이고,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법’ 하면 속박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법은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신호등을 볼 때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사회인이요, 진짜 성도입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신호등의 지시에 따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교통문화가 얼마나 자유롭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호등을 볼 때 답답함을 연상하고 속박을 연상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물론 억지로라도 신호등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틈만 나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위반하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사실상 모든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10계명을 듣고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신행일치의 삶! 아무리 가르쳐도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면 그러한 삶이 비교적 쉬워집니다. “법은 즐거운 것이다.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법을 속박으로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법이 싫다.”고 합니다. 그 말은 “빛이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달빛이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 좋은 만월을 보고 제 영업을 방해한다고 눈을 흘기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법을 속박으로 느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에 치이고 눌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법으로 명예를 높였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법을 차버렸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발견하고 있습니까?
계룡산에 성황이라고 자처하는 양모 교주가 있습니다. 너무 신기한 삶을 살아서 제가 그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그는 성결교 목사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겠다고 스스로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자가 되어도 자기의 삶에 새로운 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율법주의의 반사작용!”이라고 지칭하고 싶습니다. 가끔 보면 법을 속박을 주는 것으로 알고 지키려다가 한계를 느끼고 법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은 후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이단 사상이 기생하는 최상의 온실이 됩니다.
요새 몇 단계 회개를 전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을 얻었다, 잃었다 합니다. 그래서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무서워서라도 그들의 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견디다 못해서 그것도 버리고 결국 하나님도 버리게 됩니다.
그런 결과가 생기는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실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율법주의의 해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헌신을 강요합니다. 법으로 얽어맵니다. 율법주의로 사람을 속박하다가 단물 다 빨아먹고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합니다.
< 참된 법은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
참된 법은 사람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법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율법은 원래 의미는 자유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자유의 기쁨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지 괴로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20년 전 도둑질한 것이 수시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회개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회개는 좋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도둑질한 것을 수시로 회개하는 모습은 신앙건강과 정신건강이 심히 염려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라고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무엇입니까? 잘못했을 때 괴로운 것이 양심의 역할입니다. 거짓말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양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양심이란 내가 선한 일 했을 때 내 마음이 기쁜 것이라고 말입니다. 착한 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는 법을 모두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우리의 속박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법을 나를 행복하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 법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
법은 다른 말로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는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질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질서는 결국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만 혼란은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과 명령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기에 그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누가 우리를 억울하게 죽이려고 할 때 그의 귀에 이 소리가 들립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 소리로 인해 사람을 소중하게 보게 됩니다. 그처럼 법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남의 순결을 짓밟는 입장에서는 속박이겠으나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율법이 사악한 사람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고마운 법입니까? 그 법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딸들에 대해 염려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길을 지나가다가 한 여학생의 지갑을 주웠습니다. OOO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대생의 지갑이었습니다. 그 지갑 안에는 돈이 일만 구천 원 들었고, 카드가 몇 개 들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저는 그때 믿을만한 대학 당국자에게 주인을 찾아주라고 신신당부하고 그 지갑을 주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속일 때 남이 속으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속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것입니다. 이런 인격의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 및 명령을 대할 때 순간적으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그 안에서 사랑은 연상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십니까?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을 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정말 행복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런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