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김광섭(金珖燮)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는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 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핵심 정리]
지은이 : 김광섭(金珖燮, 1905-1977) 시인. 호 이산(怡山). 함북 경성 출생. 초기에는 고독과 불안이라는 허무 의식을 노래하였고, 이후 생활적인 소재를 인간애로 노래하였다. 대표작으로 ‘동경’, ‘마음’, ‘성북동 비둘기’ 등이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심상 :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구성 :
1-3연 산의 다정다감함
4-6연 산은 포근하기도 하고 사람을 다스리기도 한다
7-8연 울적하기도 성낼 줄도 아는 산
9연 조화롭게 안아 주는 산의 친근성
제재 : 산
주제 :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사람과 자연의 일체감
출전 : <반응(反應)>(1971)
▶ 작품 해설
이 시는 산의 여러 모습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산은 낮이면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밤이면 거두어 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의 양지바른 쪽에 무덤을 만들고 높은 곳에는 사당(祠堂)을 지으며, 촌락을 만들면서 점차 산기슭을 점령해 간다.
시인은 이러한 비유를 한 단계 끌어올려, ‘산’의 묘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철학을 보여 주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시인이 보기에 산은 사람보다 휠씬 거대하면서도, 사람에게 친근한 존재이다. 아울러 봉우리를 만들고 계곡을 이루며 충실한 자기 조화를 이루어 가는 존재이며, 한 기슭에 두 계절을 품고 살 만큼 크고 포용력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도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 고산도 되고 명산도 된다.ꡓ라고 하여 세상을 평온하게 관조하는 것만으로는 ‘고산’도 ‘명산’도 될 수 없으며, 진솔하게 삶에 부대껴 보아야만 산이건 사람이건 큰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산을 통하여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을 설명한 시로,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