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 사신 성공, 외교 난제를 해결하고 돌아온 이방원
하얗게 밤을 새운 방원은 고려촌에서 따뜻한 환송을 받고 갈 길을 재촉했다. 연교보와 파리보(巴里堡)를 지나 드디어 연경(燕京, 북경의 별칭)에 입성했다.
압록강에서 2,030리 39일만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가 통치하고 있는 곳이다. 방원으로서는 처음 밟아보는 연경 땅이었다.
연경에서 연왕(燕王)을 알현했다.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왔다. 시위하는 군사도 물리치고 독대했다. 사신이지만 조선의 왕자에게 친밀감을 표시한 것이다. 방원의 눈에 비친 연왕은 첫눈에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사 눈을 닮은 눈동자에서 광채가 빛났다. 두툼한 입술에 야망을 품고 있었다.
연왕 역시 이방원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읽었다.
지금은 나이어린 막내 동생에게 세자의 자리를 내주고 야인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수가 선수를 알아 본 것이다.
훗날, 이방원은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연왕은 조카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묘호도 똑같이 태종(太宗)이다.
때를 기다리는 잠룡들, 서로를 알아 보다
태종으로 등극한 이방원에게 이때의 만남이 큰 자산이 되었다. 이방원이 연왕을 황제로 처음 만났다면 과감한 대명외교를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관계란 첫 만남이 중요하다. 어떠한 지위에서 어떠한 사람을 만났느냐가 관건이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으면 제자가 교수가 되어도 스승은 선생님이다.
하위와 상위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하위가 상위가 되어도 그 관계의 저변에는 첫 만남의 흔적이 흐르고 있다. 이렇게 좋은 첫 만남도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하위가 동등내지 상위가 되었을 때 그 위를 인정해 주지 않고 첫 만남의 연속 선상에서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관계의 모순이다.
연경에서 연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사신 일행은 연경을 떠나 남행을 계속했다. 연경에서 보낸 시간을 보충하기 위하여 잰걸음으로 남행을 계속할 무렵, 한 떼의 군마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비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왕의 행차이니 길을 비키라는 것이다. 연왕이 아버지 주원장의 부름을 받고 금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중국인들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길을 터주었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도 말에서 내려 길섶에 몸을 세웠다. 지나던 연왕이 방원을 비롯한 조선사신을 알아보고 타고 가던 수레를 멈추고 휘장을 걷었다.
조선 사신 방원을 알아본 연왕이 중국말로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 금릉에 가는 길이니 천천히 뒤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융숭한 대접으로 조선 사신을 어리둥절하게 한 명나라 조정
금릉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니 흡족한 마음으로 따듯이 맞이해 주었다. 조정의 대신들도 조선의 왕자가 왔다고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황제 주원장은 이방원을 여러 차례 만나 주었다. 외교 관례상 보기 드문 이례적인 대우였다.
명나라가 아들을 보낸 이성계를 신뢰하고 이방원을 신임한다는 메시지였다.
이방원의 명나라 방문은 대 성공이었다.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1년 3사 외교도 복원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외교 난제를 해결한 것이다.
이방원은 방문 목적을 성공리에 마쳤다. 방원을 비롯한 사신 일행도 놀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방원의 외교능력이 탁월해서 라기 보다도 분위기가 성공을 이끌어 내었다.
"배를 타고 빠른 길로 귀국하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뱃길을 이용하여 이 기쁜 소식을 고국에 빨리 알리자고 수행원들이 성화를 냈다. 좋은 소식은 빨리 전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방원은 뱃길이 두려웠다. 지난번 사신 길에 뱃길을 이용하다 배가 뒤집혀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이다.
"뱃길은 아니 될 말이오.“
왔던 길을 되짚어 귀국길에 올랐다. 방문 성과를 임금에게 알리는 사신을 지름길을 통하여 먼저 귀국시키고 느긋한 마음으로 귀국했다. 심양과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넜다. 의주목사가 환한 모습으로 영접했다. 압록강을 건너갈 때의 노파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찾아 볼 수 없었다.
평양을 거쳐 예성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개경에 도착하니 송악산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보마" 하고 다짐했던 송악산을 다시 본 것이다. 개경을 떠난 지 5개월 12일만이다. 감개가 무량했다. 눈에 보이는 산이 신령스러운 산 송악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추동 사저에 도착하니 부인 민씨가 아들을 낳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복자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아이다. 방원은 기뻤다.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이 아이가 훗날 애증이 교차했던 양녕대군 이제(李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