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반대하며
<교과서 없는 학교>를 제안합니다
2011년 6월 29일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는 "스마트교육 추진 전략"을 확정하고, 2015년까지 전국 초중고에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 교과서'로 대체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용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스마트 기기-2011년 말 스마트 기기 사용자 2000만 명 예측-를 교육에 적극 활용하여, 개인 특성에 맞는 차별화되고 창의적인 학습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계획입니다. 이는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디지털읽기소양평가(DRA)에서 OECD 국가 중 한국 학생들이 1위를 한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 즉 이 세대가 앞으로의 디지털 사회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새로운 리더로 도약할 수 있도록 교과서를 그에 맞추어 디지털 형태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내어놓은 '교육전략'이 '디지털 교과서로의 전면교체'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는데 도무지 그 어디에 이 나라의 백년을 내다보는 교육철학과 안목이 있으며, 이 사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의 방향성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국가경쟁력을 위해 '스마트 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능인'을 기르자는 것은 교육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입니다.
21세기 지식정보화, 글로벌 시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이라면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단편적이고 성급한 답을 내어놓기에 앞서, 우리는 이제라도 교육의 근본 가치를 따져보고 우리 교육의 풍토를 철저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교육은 어떤 성취를 중시하기보다 한 사람이 탄생하여 독립적으로 평생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유아기의 '교육과 학습'은 어린 아이가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므로 이미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로 교사의 수업을 통해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졸업 이후의 성인교육은 직장과 지역사회 등에서 평생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의 개념을 보통 지적 교육으로 한정시키거나, 교과학습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아기 자녀에게 문자와 영어, 수학 따위의 조기 교육을 시키고, 취학하면 바로 선행학습을 시작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해 교과서에 나오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성적에 따라 철저히 서열화됩니다.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는 본인의 소질, 성향이나 재능보다는 취업이 쉬운 길을 선택하거나 단순히 성적에 맞추어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대학에 진학하고서는 다시 취업시험을 위한 '맞춤식 공부'와 '스펙 쌓기'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취업 후에야, 국내 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일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편향된 지적교육만으로는 길러질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교육 풍토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제자리걸음이고, 더욱 고질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국가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교육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국내는 물론 세계무대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해나가려면, 각 분야에서 새로운 발상을 내어 실현시키는 진정한 인재로서 성장해야합니다.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성 그리고 우수한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현대 사회에서는 경쟁이 아닌 협력의 능력, 즉 타인에 공감하고 다양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각각의 활동 분야의 전문성과 더불어 뛰어난 사회성과 높은 윤리 ․ 도덕적 의식을 갖춘 사람이라야 상생의 원리를 실천하며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교육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 물음은 다시 '배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페스탈로치는 진정한 ‘배움’의 과정은 머리, 가슴, 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머리와 가슴 손으로 습득한 교육내용은 단순한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실행 능력으로 변형됩니다. 아이들이 배운 내용을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교사는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의 전달자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학생과 내적으로 만나며, 학급과 학생의 개성에 맞는 예술적이고 생동감 있는 수업을 해야 합니다.
정해진 교과서의 형태는 오히려 교사와 학생들이 예술적이며 살아있는 수업을 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에는 아예 교과서가 없습니다. [발도르프 학교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적 인간발달론을 바탕으로 아이의 연령에 맞는 교육방법과 내용을 가르치며, 몸과 영혼, 정신이 건강한 세계시민을 기른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학교입니다. 191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첫 학교가 세워진 이래 2011년 현재, 1천 개가 넘는 발도르프 학교가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는 정해진 교과서가 없는 대신 학생이 배운 수업 내용을 자신의 공책에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정리합니다. 다시 말하면 학생들이 각자 자기만의“노트-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들은 학생 스스로가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므로 '앎'의 단계를 넘어서 삶의 자양분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학습되고 축적된 내용들은 훗날 학생들이 자기 삶의 여러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유용한 살아있는 지식과 능력이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수 있는 저력이 됩니다.
부모들이 헌신적으로 투자한 사교육의 결실, 철저한 선행학습의 덕분에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 매번 상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 방법과 질적 평가는 전혀 세계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모순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육선진국가들이 지향하고 있는“자유를 향한 교육, 창의성과 의지를 높이는 교육”의 차원은 다른 상위권 국가들과 비교하여 (예:스웨덴 핀란드 등) 열악하다는 것이 나라 밖에서의 냉정한 평가입니다. 나라 안에서는 현행 교육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제도권 안에서 소위‘혁신교육’의 실천을 시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육 문제에 깨어있는 학부모들은 차세대를 위해 새로운 교육의 길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부모와,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국가는 새로운 시대의 창의적이고 실행력 있는 리더, 세계시민으로 인류에 공헌할 바른 생각을 가진 인재로 아이가 성장하기를 같은 마음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부모와 국가는 함께 이 시대의 교육을 고민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교육을 위하여 디지털 교과서 보다 차라리 '교과서 없는 학교'를 제안합니다. 교과서의 지식을 잘 암기하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교과서를 만드는 아이로 우리의 자녀를 키우길 제안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자기의 개성을 존중받으며, 능력과 취향에 따라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는, 스스로 배움의 주체가 되는 아이들을 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할 일입니다.
(사)한국루돌프슈타이너인지학연구센터 대표 이정희
독일 마르부르크대학교 독어독문학박사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도르프학교교육 사범대학 졸업
(사)한국루돌프슈타이너인지학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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