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 생에 접붙이라 /요한복음 15:4, 로마서 11:17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삶과 거짓된 삶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거짓된 삶을 버리고 진정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동양의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신선이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결국 자기중심적인 연구에 그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깨달음만을 중요시하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만 남겼을 뿐,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결국 식물처럼 썩어 없어질 물질적 존재라는 것을 모른 채 자신만을 믿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인간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생명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거짓된 생명을 참된 생명에 접붙여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돌감람나무였던 우리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면, 그 뿌리가 거룩하므로 가지 또한 거룩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원래의 나무에서 영양분을 받아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접붙이는 삶을 의미합니다. 접붙여진 삶이 곧 진정한 삶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떠올려보십시오. 그 부자는 자신의 삶이 진정한 것이라고 믿었고, 목사나 전도사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의 행적대로 지옥에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자신이 주장하고 믿었던 모든 것이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죄가 되어 큰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요.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최소한 집에 남아있는 다섯 형제만이라도 구원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 헛된 삶을 살지 말고, 복음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여 이곳에 오지 않도록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 번 깨달은 뒤에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결국 거짓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접붙인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의식에 순종하고, 성만찬에 참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에 접붙인 후에 벌레가 생기면 잡아주고 소독하여 병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 중에 시험에 빠지기 쉬우므로, 항상 주의하여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