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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주식 매수 위한 전량매도>의 줄거리:
상식적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은 주식투자로 비유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관계하는 여러 대상에게 마음을 분할 투자합니다. 마음은 그 속성상 전체이든지 부분이든지 그 속이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투자한 분만큼 반드시 그 빈속을 채우고자 이익을 추구합니다. 만족과 기쁨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관계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기존의 여러 대상에 분할하여 투자한 마음을 전량 매도하여야만 비로소 '하나님' 주식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주식 매수 위한 전량매도
(시편 63:1~11)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주식 매수 위한 전량매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주식 매수 위한 전량매도
하나님 주식을 매수하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주식을 전량 매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주식투자를 해본 적이 없지만 상식적인 선에서 주식투자를 비유적으로 차용해서 본문 말씀을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교인들 중에서 주식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심은 오직 주식에 매여 있습니다. 천만 원이든 삼천만 원이든 정해진 돈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몰입하는 분들이 있고, 정말 어마어마한 주식을 사들였다가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어버린 분도 봤습니다. 그런데 잊고 살던 그 주식이 몇 년 만에 살아나서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식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입니다.
주식투자에 있어서 한 곳에 모든 투자액 전체를 쏟아 붓기에는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졸지에 주식은 휴지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분산투자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도 이와 꼭 같습니다. 마음의 분할투자를 통해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돈을 쓰고 물을 쓰고 시간을 써서 살아가듯이 마음을 써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마음 씀에 있어서 삶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정해진 항목들이 있습니다. 배우자 자녀 직장 부모님 건강문제 인간관계 취미생활 등 어떤 때에는 비중이 컸다가 작아지기도 합니다. 언제나 마음은 주식처럼 이러한 항목들에 분할 투자되고 또한 수익창출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 수익은 만족과 기쁨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속성 상 필연적이기 때문에 본능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전체 마음이 100이라고 치면 그 중에서 30을 떼어서 남편에게 투자를 했습니다. 하루 동안 쓸 수 있는 마음이 100인데 그 중에서 30만큼을 남편에게 쓴다면 그 부분만큼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남편을 통해 채워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70에서 자녀에게 30을 썼습니다. 그러면 또 자녀라는 주식으로부터 30이상의 만족과 기쁨의 이익이 창출되기를 기대합니다. 취미생활에 10의 마음을 투자했습니다. 그러면 또 10만큼의 마음은 비게 되고, 그 만큼의 만족과 기쁨을 취미 생활에서 얻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삶이 진행되어 가기에 주식투자와 똑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루 동안 마음을 써서 살아갑니다. 마음을 쓰기 때문에 실제로 돈도 사용하는 것이고 시간도 사용합니다. 모든 행동에는 마음이 우선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분할하여 살아가는데 투자된 곳곳에서 이익에 해당하는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는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내 것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마음이 여러 주식에 투자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관계할 때에는 이미 분할 투자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주식의 값이 변동되는 것처럼 마음의 분할 상태는 유동적으로 매일 매일 변해갑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고정 항목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고정 항목들에 분할 투자된 상태를 유지하며 하나님과 관계하려 한다면 자투리 마음을 모아 관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하에 교회 생활을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 마음 100중에 분할되어 있는 것 중에서, 자투리들 10정도나마 만들어 하나님께 투자하면서 이것을 신앙생활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자투리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다른 투자처에서 기대하는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보조적 역할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른 주식을 향상시킬 전문가로서 고용하는 셈이고 혹은 다른 주식을 사기 위한 수수료로 지불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라는 주식을 사들이려고 마음 30을 투자하였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30만큼 비게 되고 투자한 이상의 만족과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투자한 주식에 대해 증권사의 상담사에게 수수료를 내고 상담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수수료를 내고 상담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투자했는데 이 투자가 극대화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과 관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식을 사들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날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 주식을 매수하기 위해서 기존의 보유하던 주식 전량을 매도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유다 광야에 피신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무엘하 15장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행보는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우선 남쪽의 유다 광야로 피신합니다. 그랬다가 17장을 보면 다시 요단 동편 마하나임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이때에 지은 시가 61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피신생활 전반부를 남쪽의 유다 광야에 머물던 시기입니다.
이 시의 첫 구절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견 이 구절은 성경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간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입니다. 마실 물 한 모금이 나오지 않는 광야로 피신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함께 피신했던 신하들이 식량과 물을 공급했을 것이고 거주민들의 도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물과 식량이 궁핍한 환경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는 고백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피신은 상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위와 왕궁을 잃고 명예를 잃고 나라를 잃고 아내들을 잃고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것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며 마음을 분할하여 투자하고 있는 주식들입니다. 다윗에게는 후궁이 많았으니 그들에게 마음을 나누어 줄 때에는 당연히 그로부터 나올 이익으로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됩니다. 또한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투자하는 마음만큼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분할하여 투자하던 모든 것들이 상실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상실의 위기에서 오히려 스스로 버립니다. 오직 하나님 주식을 매수하기 위하여 분할되었던 모든 마음을 매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에서 나올 수 있는 기도는 기껏해야 ‘이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왕위를 지켜주세요’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투자한 돈을 잃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하든지 이 투자금을 회수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건강이 위험하면 건강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할 것이고, 명예가 실추되면 실추한 명예를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러한 갈망이 없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갈망해야 마땅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젖혀둔 채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갈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이 말씀에서처럼 내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내 것은 곧 마음을 분할하여 할당받는 것들입니다. 돈에 마음이 가고, 자녀에게 마음이 가고, 배우자에게도 마음이 갑니다. 법적으로는 내 것이지만 마음을 전혀 주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투자 받지 못한 소유물들은 폐품이고 쓰레기가 됩니다.
3절을 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목숨을 기반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가족 관계는 육체가 있음으로 인해 이루어집니다. 돈도 육체가 있음으로 인해서 관계합니다. 이렇게 육체를 통해 관계 맺는 모든 것들이 주식 투자입니다. 그로부터 만족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낫다’라는 말은 이 육체로 맺는 모든 관계를 다 모아도 하나님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만족과 기쁨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던 다윗은 광야로 쫓겨나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 그동안 마음을 투자했던 모든 것들을 매도해야만 합니다.
다시 정리해봅니다. 첫째, 하나님이 주실 만족과 기쁨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만족과 기쁨보다 크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 외에는 내 것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의 신앙을 통하여 한 가지 꼭 기억해 두시면 좋을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구절로 신약이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인물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가능하게 해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구절에는 이러한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어서 등장하는 45~46절의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는 비유도 이와 같습니다. 정말로 값진 것을 발견하자 기존에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었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천국을 사들이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이 비유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위와 재산과 백성 등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실될 위기에 처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매도해버립니다. 광야로 피신하는 동안 오직 하나님 주식 하나에 모든 마음을 몰입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라고 하나님 주식 매수를 맛있는 것을 먹는 것에 비유합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겠다는 의미입니다. 3절부터 반복되던 찬양과 송축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기쁨과 만족을 믿고 기대하고 느끼면서 부르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1절 하반부에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마음이 아니고 육체가 앙망한다는 것일까요? 이를 2절 하반부의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말하자면 십자가 생활화와 같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성소에서 번제단을 통해 마음을 분할 투자하게 하는 육체의 체질을 죽였습니다.
육체를 통해 만나는 것들을 통해 마음의 공백을 채우려 하는 것은 인간의 원죄적 본능입니다. 이 본능을 번제단에서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과 함께 죽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번제단과 십자가의 죽음은 동일하게 내 마음이 투자하던 육체의 관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즉 내 마음을 회수하는 것이고, 하나님 주식을 사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주식을 매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다 드려졌기에 육체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게 마음의 30을 분할 투자하고 그만큼의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아내에 대해 죽고 마음을 회수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한 마음에서는 아내를 내 것으로 여길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아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아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적용하여 하나님의 뜻과 판단과 계획이 강력하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재산과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에 대해서 마음의 50을 분할 투자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사업으로 얻을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는 분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업에 마음을 분할투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사업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업에 드렸던 마음을 회수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그럴 때에 내 것이었던 사업에 대해서는 망하든 흥하든 소원을 갖지 않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바라든지 노골적으로 바라든지 가지고 있던 모든 바람이 죽는 것입니다. 다만 이 사업에는 하나님의 소유권이 강력하게 적용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다윗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라와 왕권이 흔들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을 섬기려합니다. 이때에 나라와 왕위와 왕권과 백성들과 재산과 아내를 비롯한 모든 소유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소유권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로 만나는 것들 중에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한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가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 등의 모든 내 것들에 대해 죽음으로서만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피난길에서 상실의 위기에 놓인 소유들에 대해 죽고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갈망했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 한 분께 마음 전체를 드릴 각오로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갖게 된 하나님께서는 내 육신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강력한 주권과 소유권을 수행해 나가실 것이고 복지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이 세상의 모든 내 것에 대해 죽고 마음을 회수하여 마음 전량을 하나님 주식에 투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