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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1-11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 및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결국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믿었는가? 그 사건을 직접 목격한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적대적인 감정에서 돌아서서 호의적인 감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믿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반드시 죽어야 할 인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가야바의 말로 인해 더욱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떤 명령까지 하느냐? 11장 마지막 절에 보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나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눅11:54). 그리고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로 오셨는데,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 쯤 되는 곳입니다(눅11:17). 유월절이 가까워 올 때 사람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명절에 올라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를 놓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잡고자 신고할 것을 명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아시고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입니다.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이런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다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요한복음의 내용으로만 하면 우리는 당연히 나사로 집안에서 잔치를 열었을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 가정이 그만큼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부은 사건을 기록합니다(마26:6-13, 막14:3-9).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잔치를 연 사람이 시몬이라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는데,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마26:2, 막14:1). 반면 오늘 본문은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의 사건과 다른 복음서의 사건이 다르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두 번 일어난 것이라고 봅니다. 일단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데, 향유를 부은 시기에 관련해서는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지만 거기서 4일을 머무시고 난 뒤 유월절 이틀 전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해석합니다. 반면 매튜 헨리의 경우는 향유를 부은 시기를 그대로 볼 뿐만 아니라, 마르다가 자기 집이 아닌 곳에서 집안일을 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사건으로 봅니다.
마태복음 설교 때 언급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칼빈이나 매튜 풀 주석의 내용을 따라 두 번이 아니라 한번 일어난 것으로 보는데, 왜냐하면 날짜 및 향유를 부은 곳 외에는 전체적인 내용이 같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차이에 대해서는 말씀을 드렸고, 향유를 부은 곳과 관련해서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의 경우 머리에 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발에 부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머리부터 부어 발까지 적시거나, 아니면 머리에 붓고 또 발에도 부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머리에 부었지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2) 머리에 부었지만 내 몸에 부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머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발까지 부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향유를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냄새가 온 집에 가득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이해를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기록한 내용을 보자면, 지금 이 잔치는 나병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 초청되었는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그리고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외 여러 사람이 초청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요한복음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위한 잔치였습니다. 나병환자였던 자가 언제 고침을 받았는지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나병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베다니 지역에서 죽었던 나사로까지 살리셨습니다. 받은 바 그 은혜를 예수님을 위한 잔치로 열었던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나사로를 비롯하여 마르다, 마리아까지 초청되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마르다는 일을 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초청이 되었다면 앉아 있어야 하지만 그 집안일을 할 정도면 매우 가까운 사이였지 않을까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또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초청된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마리아가 예수님께 나아와 향유를 붓게 됩니다. 3절을 보시면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리고 이것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마태복음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또한 오늘 본문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관련된 내용이란 것입니다. 어떻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을 알았는가?
요한복음 11장은 어떤 면에서 마르다를 중심으로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마르다가 먼저 예수님을 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사용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도록 이끄셨습니다(요11:27). 반면 마리아와 관련해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마리아에게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요11:32, 44).
지난 시간에 이적에 용도가 무엇인가 할 때 두 가지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큰 능력을 수여받은 이의 말에 귀를 기울도록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적을 통한 믿음은 결코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롬10:17),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적은 말씀을 향하도록 합니다. 말씀을 향하도록 하지 않는 이적은 결코 참된 믿음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이미 믿은 자들의 믿음을 확증해 주고 견고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르다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로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대접한 내용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를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으로 이끄셨습니다. 당연히 마리아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으로 하자면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말씀에 더 열심이었다는 것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나타난 모습은 마르다와 동일한 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전혀 다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기에 나사로의 이적을 통해 더욱 분명한 믿음을 가지도록, 언니인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과 동일한 고백을 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러한 믿음을 주셨는가? 성령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근거하자면, 그리고 마태복음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을 염두 해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까지 그로 하여금 알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나 깊은 내용까지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요1:29), 그의 희생을 통해 영원한 속죄를 이룬다는 것을(히9:12) 알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이요, 그 일로 인하여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는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다가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를 살리신 그 베다니로 다시금 드러내셨습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종교지도자들이 예수 있는 곳을 신고하도록 한 그런 상황에서 숨어 계시다가 이제 나타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 자체로만 보자면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나타나셨고, 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생각을 가지고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뜻은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많은 사람이 유익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서 알려진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목적으로 죽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진리와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명분상으로는 예수라는 한 사람을 죽여서 유다 사회가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리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우상을 두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고자 할 뿐입니다. 명분은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악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지금 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란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그분에게로 인도해야 할 자들이란 것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반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할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접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들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죽이려고 합니다. 악한 마음, 악한 계획에 따라 죽이려고 할 뿐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죽이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은 왜 그가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알아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모르고, 모를 수 있는 마리아는 알더란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만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과도 비교해 봅시다. 맨 처음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항변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그래서 어떤 말을 듣습니까?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그런데 이런 책망에 앞서 어떤 내용이 있느냐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마16:16). 참된 신앙 고백을 했지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이란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세 번이나 알리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마태복음 17장, 마태복음 20장, 이렇게 세 번이나 알리셨습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부활까지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활에 확실성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믿음은 이 마리아에게 주신 내용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음에 앞서 다 도망갔고, 죽으신 이후 부활에 앞서도 부활에 대한 믿음을 전혀 가지지 못한 것처럼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그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 중 한 사람이 가룟 유다가 불평하게 됩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로 표현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제자 중 몇 사람에 돌리고 있고, 또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 전체에게 돌립니다. 이로 보건대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해서 몇몇 제자들이 동조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제자들 전체에게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한 사람의 불평으로 시작된 것이 제자들 전체에게 미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죄성을 보게 되는데, 선에 있어서는 좋은 영향을 받기가 쉽지 않은 반면 악에 있어서는 얼마나 쉽게 그 영향을 받는지 모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해야 하는데(롬16:19), 그 반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룟 유다의 불평이 정당하려면 왜 그렇게 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따져 묻지도 않습니다. 단지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만 가지고 섣불리 판단하여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겁니다. 경솔한 판단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특히 5절에서 왜 자신이 불평을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매우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향유의 값어치를 삼백 데나리온으로 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계산됩니다. 그러면 300일 일한 값어치 정도가 된다는 것이고, 대략 1년 연봉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 다시 말해 허비했다, 낭비했다는 것이 지금 가룟 유다의 불평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가 여기에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까지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기록하는데, 6절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내세운 것은 가난한 자들이지만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을 내세운 것입니다. 철저히 자신의 탐욕에 이끌려 그렇게 말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탐욕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팔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탐욕을 사용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이바지 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악함을 사용하시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도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택하신 백성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악인도 사용하십니다. 사람만 사용하시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환경도 사용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있다고 할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바는 기록된 말씀 안에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밖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조차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를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되는 자로 있다고 해서, 마치 그렇게 사용되는 자로 정해져 있다고 해서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보면 가룟 유다를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작정된 대로 간다고 할 때 하나님의 작정에는 가룟 유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신 속성에 따라 그분의 작정도 불변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억지로 판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자발적으로 판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그가 받습니다. 억지로 하게 해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면 억울할 수 있지만, 정죄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룟 유다의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먼저 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의 반응은 마리아로 하여금 괴롭게 만드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은 분명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여 이 일을 한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이요, 죽으실 것을 알기에 그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미리 값비싼 향유를 주께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발에도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그렇게 섬겼던 것입니다. 아니 종도 하지 않던 행동까지 하면서 자신을 낮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귀함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 부활 사건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알리셨습니다. 비록 향유를 부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위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라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죽으실 것이지만 반드시 부활하실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향유를 부은 것은 바로 이 모든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겠지만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가 친히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 하셨고, 그 사실을 죽은 나사로의 부활로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부었을 때 그 향이 그 집에 가득하게 되는데, 그 집에만 가득한 뿐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그 향기가 가득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그 일을 좋은 일, 선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8절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이 아니라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서도 넌지시 알리십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있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마28:20). 이때 함께 계신다는 것은 단순히 신성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너희와 함께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성과 분리할 수 없는 인성은 더 이상 이 땅에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 마리아를 통해 향유를 부은 사건은 특별한 것이요, 계속해서 있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어서 그들을 구제하는 일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너희가 늘 할 수 있고, 또 늘 해야 될 일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그를 기억하라고 하기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증거 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이후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증거 되는 경우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증거 될 때 마리아가 증거 되는가?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초점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아가 행한 일입니다. 그는 무슨 일을 행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앞두고 그에게 향유를 부었습니다. 미리 장례할 날을 위하여 행한 것입니다. 그럼 죽음만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또한 그 사실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확고하게 증거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는 부활까지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향기로운 생명과 구원이 퍼져나갈 것임을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 전까지는 전혀 깨닫지 못한 자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복된 내용을 마리아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서 그 은혜를 드러내게 하셨던 겁니다. 주의 죽으심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서 나타내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 이하 11절은 이런 마리아와 비교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정작 믿어야 할 자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할 자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 일로 말미암습니다. 하늘로부터가 아니라면 이런 표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부활한 이상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참된 믿음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적을 통해 믿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말씀 쪽으로 더 나아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었다고 할 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호의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종교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더욱 자신들의 악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 악이 어디까지 나타나고 있는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나사로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다시 말해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은 향유의 향기가 온 집을 가득 채운 것처럼 복음의 향기는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하여 향기로 있는 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향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의 이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벧전2:7-8)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합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 동일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그 복음이 보배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그 복음이 보배가 아니라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동일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향기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향기가 아니라 악취로 있을 뿐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악취로 맡고 있는 자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살리고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할 자들이 도리어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난 것이 분명한데도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까지 폐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그에 비해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다보는 자로 있었습니다. 죽음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심도 보았습니다. 그 향기가 집을 가득 매우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 가득하게 될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결과물들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되었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함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복음이 향기가 아니라 악취로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향기로 있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소망, 그리고 생명에 대한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미 복음 안에서 부활에 대한 소망을,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복음의 향기를 맡은 자는 복음의 향기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향기를 낸다고 해서 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로 있지 그리스도를 감추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부활이 없는 것처럼, 그의 생명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 그러하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자, 그런 자로 세상 앞에 서야 합니다.
수요일 6계명을 살피면서 언급된 말씀이지만(마5:39-42)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댈 수 있는 이유,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 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줄 수 있는 이유, 누구든지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십 리를 동행할 수 있는 이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에 대한 소망과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실 때 우리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결코 세상의 것이 모든 것이 되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 여기고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마리아가 그런 자가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향유를 예수님의 죽음을 위하여 기꺼이 드릴 때 가룟 유다와 같은 비교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죽으심을 위하여, 그리고 그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그 소망 안에서 영생까지 내다보고 기꺼이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라면 우리 역시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